갈 2:1,2
내가 바니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게시를 인하여 올라가 - 이것은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갔던 것을 가리킨다(행 15:2,4). 그가 거기에 간 이유는 "계시"(啓示)를 받은 까닭이었다. 그는 그곳에 가서 자기의 전한느 복음의 내용을 원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제출하여 그것이 그들의 복음과 일치한 사실을 이해시켰을 뿐이고 그들의 인가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다만 그의 사역이 효과적으로 나타나게 하려고 그의 사역(使役)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필요하게 여긴 것이다.
유명한 자들 - 이들은 예루살렘 원사도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사용하는 말을 풍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의 풍자의 대상은 유대주의자들이고 원사도들이 아니다.
제출하되...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이 자기의 깨달은 복음에 대한 원사도들의 비판을 원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통
고하는 것 뿐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확실히 합치할 것을 기대한 처사이다. 그들이 바
울의 복음을 지지하는 때에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실패할 것이다. 그때에는 바울의
현재와 과거의 달음질(전도)이 헛되지 않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갈 2:3-5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3절하반) -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데리고 간
헬라인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서도 디도에게 할
례를 행치 않았으니, 그것은 그가 깨달은 복음이 유대주의자들 앞에서도 흔들릴 수 없
는 진리인 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
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4 절)."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는 그리스도
시자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행15:1,24).
그들의 교훈은 그리스도 신앙으로 정죄에서 해방된 신자의 자율르 빼앗는 그릇된 것이
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 하였으니(5 절상반) - 바울은 자기와 함께 있는 헬라
인 디도도 할레를 받게 하지 아니함으로 복음 진리의 자유를 파수아였다. 유대주의자
들은 예루살렘 원사도들(베드로, 요한)의 이름을 이용하고 또한 배경으로 하여 바울의
전도를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갈 2:6
예루살렘 원사도들은 바울이 제출한 복음에 대하여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고, 도리
어 그들이 바울의 복음을 옳게 여겨 교제의 악수를 하고 이방 전도의 사명이 바울에게
있음을 시인하였다.
유명하다는 이들 - 이 문구의 헬라 원어(* )를 알기쉽게 번
역하면, "유명한 여김을 받는 자들"이다. 곧, 유대주의 기독교 신자들로 말미암아 유
명히 여김을 받는 자들(베드로,요한,야고보 등 예루살렘 원사도들)을 말한다. 이 명칭
은 유대주의 기독 신자들이 사용하였던 것인데 바울은 그것을 인용한 것 뿐이다.그가
이런 명칭을 인용한 것은 직접 예루살렘 원사도들에게 대하여 풍자(諷刺)하는 뜻을 가
짐이 아니다(Lightfoot). 풍자가 있었다면 그들의 이름을 빙자하여 바울의 권위를 깍
으려 했던 유대주의 기독 신자들에게 대하여 있었을 뿐이다.
본래 어떤 이들인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 이 말은 앞에 기록한 "유명하다는 이들"
이란 말에 대한 설명구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원제자들인 고로 저 유대주의자들은 그
들은 유명히 여겼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직이 그들에게 종속(從屬)하지는 않는다. 하
나님이 직접 바울에게 주신 사도직의 독립적 의의(意義)는 상실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지 아니하시나니 - 곧, 사람들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다
느 베드로나 여한의 명성과 같은 외부적 사항에 따라 하나님은 어떤 가치를 더해주시
지 아니하신다는 뜻이다. 여기 "외모"란 말(* )은 본질적인 것과 대
조되는 외부적인 형파를 가리키낟(Greijdanus, galaten,1936,p.147). 롬 2:11 참조
갈 2:7-10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것을
보고(7절) - 원사도들은 도리어 바울의 사도직의 독립성을 승인하고 상호간 이해와 조
화(調和)와 존중히 여김이 있어야 될 줄 알았다. 그들은 바울이 "무할례자(이방인)에
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유대인)을 위하여 믿음과 같은 것임을
깨달았고, 바울의 독립적 사도적을 존중시하는 의미에서 동역(同役)을 맹세하는 악수
례(握手禮)를 행하였다(9절). 그리고 저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은, 흉년으로 인하여
빈핍(貧乏)해진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하여 이방 교회에서 연조(捐助)를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10절).
갈 2:11,12
이 부분에서 바울은 베드로의 어떤 처신에 대하여 반대한 일이 있음을 말하여, 그
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원사도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성을 지니고 있음으 마다시
역설(力說)한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잇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게
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이방인과 함께 먹다가...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
나 물러가매 - "책망할 일이 있기로"란 문구의 헬라 원어(*
)는 "그가 스스로 판단되었었기 때문에"라고 번역된다. 곧, 다른 사람이
게바(베드로)를 정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정죄되었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주의 기독신자들이 올 때에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
에서 물러간 것은 그의 행동상 모순이었으니, 그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을 정죄한 셈이
다. 그는 일찌기 복음이 민족이나 율법의 의식(儀式)에 매이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10:28-29,11:1-18). 그가 이 사실을 알고도 든든히 서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면책하였노라." 이 말의 헬라 원어(*
)는 "바로 대면하여 그를 반대하였다"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반대"란 말
의 뜻은 반드시 책망이 아니다. 여기 "바로 대면하여"란 말은 역설체이다. 바울은 진
리대로 행동하지 못한 베드로의 처신을 반대한 것이다.
튜빙겐(T bingen)학파의 바워(F.C.Bauer)는 바울이 베드로를 반대하였다는 이 귀
절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그릇된 학설을 주장하였다. 곧,"초대 기독교에 바울파와
베드로파가 있어서 서로 충돌이 계속되다가 2세기 말에 이르러 그 두 파가 화합하여
기독교가 통일되었다"하였고, 또 "신약 성경의 문헌들 가운데 파쟁(派爭)의 기미가 있
는 것은 2세기 말 경의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헤겔(Hegel)의 변
증 철학(辨證哲學)을 색안경으로 하고 성경을 잘못 본 의견이다. 바울이 베드로를 반
대한 일 때문에 그와 베드로 사이에 복음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
갈 2:15-21은 명백히 베드로의 전하는 복음과 바울의 전하는 복음이 일치한 것임을 증
명한다.
갈 2: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 "외식한다"함은 자기가 믿는 복음 진리
대로 행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여 다른 행동을 취한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에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한 것이 복음 진리레 어긋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
런데도 그들은 "할례자들"(할례주의를 가진 유대인들)이 들어올 때에 베드로를 따라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것은 외식이다.
비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 루터는 여기서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오
실수한 일이 있었음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추론하였다. 그는
말하기를,"욥과 예레미야는 생일을 저주하였고(욥 3:1-12;렘 20:14),엘리야와 요나는
죽기를 원할 정도로 낙심한 일이 있었고(왕상19:14; 욘4:3,8),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심히 다투고 나위었다(행 15:39)"고 한다(Commentary on St.Paul's Epistle to the
Galations,1930,15:30). 루터의 이 말은 신자들이 혹시 실수로 인하여 낙심하는 경우
에 참고할 만한 재료라고 할 수 있다. 그 신앙 위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귀
한 생활을 더욱 본받음이 합당하다.
갈 2:14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
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 곧, 베드로는 이미 그의 믿는 복음대로 이방인과
기탄 없이 교제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제 할례자들의 눈을 두려워
하여 다시 그런 의식적 율법(儀式的律法)을 지키는 듯이 태도를 변함으로 함께 있던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시자들에게 유혹을 받게 하였다. 바울은 베드로의 이런 모순
된 행위를 지적한 것이다.
갈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 이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모두 "유
대인"이라고 교함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과거의 신분을 회고하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그렇게 신분을 회고하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로를 믿
기 전에는 그렇게 교만하였다는 말이다. 그들이 유대인된 자세를 하루 아침에 버리고,
이방인과 한자리에서 신앙으로 교제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 본절의 의미이
다. 그들이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유는 다음 귀절이 설명한다.
갈 2:16
의롭게 되는 것 - 이 말(* )은 "의롭게 여김이 되는 것"이라고
번역함이 적합하다. 독일 하자 키텔(Kittel)은 말하기를,"이것은 신자에게 으로우 다
성질을 넣어 주어 의롭게 만들어 줌을 의미하지 않고, 그도 불의(不義)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의)(義)로운 자라고 선언함이다"라고 하였다(nicht...das Einfl ssen
sitllicher Qualit t ..sondern die Gerechtsprechung des Gottlosen).이 말은 법정
(法廷)술어로서 '정죄'(* )란 말과 정반대이다. 이 밀이 법정 술어
인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둘 것이 있다. 곧, 의롭게 여기는 칭위선언(稱義宣言)은 공
법적(公法的)선언이므로 그것은 하나의 사적(私的)혹은 인정적인 것이 아니고 부가항
적(不可抗的)인 확고부동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칭의 선언을 받은 자로서야
어찌 감사와 기쁨이 없겠는가? 이 점에 대하여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익파이 의(義)
를 소유하지 못한 자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우주(宇宙)의 이법(理法)에 맞는가 하
는 문제이다. 우주의 법칙들은 보상적 원리(報償的原理)에서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우주를 지배하는 인과 법칙(因果法則)도 보상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상서 벌악(賞
善罰惡)의 법률 원치과 양심률(良心律)도 역시 보상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 우주 안에
는 그것과 다른 또 한 가지 법칙이 있으니, 마치 흐르는 강 가운데 묻힌 바위가 물 위
로 가물거리는 것처럼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법칙이다. 우주도 성립시
켰고 공의도 성립시키신 이가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다(요일 4:8).인간이 범죄하매 그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벌을 받았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벌을 받았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나타나셨
고 또 희생되셨다. 그것은 알파( )였으며 또 오메가( )이다. 그것은 완전히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우주의 오메가( )의 자리를 취하고
야 만 것이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
은 사랑이라"(고전 13:1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 여기 "말미암는"이란 말 디아
(* )는 '통하여'혹은 '경유하여'란 뜻을 가지고서 방편(方便)을 표시하는 것 뿐
이다. 그러면,믿음 그것도 구원의 근원이 아니며 공로(功勞)도 아니다. 믿음은 다만
구원 받게 하는 근원과 고로에 관계하는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에게 있는 그 무엇이든지 ,심지어는 믿음까지도 구원의 공로가 되지 못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 것은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 여기 "우리도"(* )란 말은 강
세(强勢)를 보이는 어법(語法)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이방인 뿐아니라 "우리"(유대인
들)도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강력히 지적하려는 것이다. 유대인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
나니"란 말(* )은 예
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주신 구원자로 받고 그에게 나자신을 맡기면서 그 안에 안식
(安息)하는 행위를 가리킨다(Greijdanus).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육체"는 헬라 원어로 파
사 삵스(* )라고 하는데 '모든 육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육체"에
속한 자는 누구나 다 이 명칭 가운데 포함된다. "육체"는 부패해지고 연약해진 인간성
이다. 롬 8:7에 말하기를,"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느가 하나님의 가
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가진 자
는 누구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롬8:3),의인이 될 수 없다. 시143:2 참조. 오
직 밖에서 오는 의 곧, 하나님의 의(義)이신 그리스도께서만 우리를 구원하신다(고후
5:21)
갈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이 귀절에 대하여 두가지 해석이 있
다.(1)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의인인 줄 알았느데 그리스도를 믿고 죄인인 줄 깨닫는다
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분이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바울과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으려다가 중도에 변심하고 다시 율법으로 말미
암아 의를 얻으려고 한다면(베드로가 안디옥에서 한 것처럼), 그것은 시작했던 일이
실패된 셈이며, 한 때 의식적 율법을 버렸던 자로서 율법 앞에 더 죄인이 되는 셈이
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실패케 하시고 죄를 짓게 하시는 불완전
하신 구주가 아니시니, 그는 시작하신 것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실패한다면,그 실패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책임 지실 바 아니다. 이 해석이
문맥(文脈)에 적합하다.
갈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 이 본
문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모든 의식적(儀式的)율법은
신자를 구속(救贖) 할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헐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다시 세운다면 바울은 그때까지 헐었던 사실에 대하여 죄책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2)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죄악을 파괴하는
일이었는데(요일 3:8),이제 유대주의자들과 같이 복음을 버리고 율법주의를 전한다면,
그 헐었던 죄악을 다시 세워 주는 것이 되므로 바울은 범법(犯法)한 죄인이 된다는 것
이다. 위의 첫째 해석이 문맥에 적합하다.
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햐여 살려 함이
니라 - 이 귀절은 앞절의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이 있을 수없는 이유를 설명한
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함은 기독 신자가 율법의 요구 앞에서
그 한가지도 이루지 못할 것과 자신의 무가내하(無可奈何)를 알고 돌아서서 그리스도
만 의지함으로 율법과의 관계가 끊긴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
라." 이것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자가 이제부터 하나님과 자기 사이
에 아무런 장벽이 없이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영생
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곧,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그사건에 나느이 죽음이 포함된 것을 의미한다. 내가 받을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으셨다.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이것은 신앙 그서이 나의 영적 생활(하나님을 향한 생
활)의 유일한 방편(方便)임을 가리킨다. 신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구주로 모시고 있는 것만큼 성령을 받은 그의 영은 그리스도의 의(義)로 인하여 영생하게 된다(롬 8:10).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를 얻는 복음을 믿다가 중도에 의식적 율법으로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바울은 이런 어리석은 일을 잠시라도 할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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