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6:1
성도를 위하여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
렇게 하라. - 이 연보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것이니, 바울의 이방 전도 도상에서
각처에 편 것이었다(갈 2:10; 롬 15:26; 고후 8:9).
고전 16:2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
보를 하지 않게 하라. - 여기 "매 주일 첫날"이란 말은, "주일"을 이름이다. "주일"은
초대 교회부터 예배일(禮拜日)로 지켰던 사실이 여기서도 알려진다.
신약의 주일(主日)은 구약 안식일의 후신(後身)으로서 원칙상(原則上)으로 그 연속
성(連續性)의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다만 신약은 구약의 안식일을 그대로지키지 않
고, 그 성취된 형태(形態),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지킬 것을 가르친다. 골
2:16-17에 말하기를,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
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하였다. 신약의 주일(主日)이
구약 안식일의 연속성에 속한 것인 만큼, 그 날에는 예배 드리는 날인고로 이 세상의
영업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을 지키
기 때문에, 우선 안식일의 의식적 부분(意識的部分)에 있어서 날자는 구약의 안식일과
달리하였다. 날자는 칠일중 첫 날(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로 하였고, 그 날에는 일하
지 않아야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예배할 것을 원칙으로 하며) 구약 안식일과 별로 다
를 바 없다. 다만 그 날에 사세 부득이한 일과 자비(慈悲)를 행함은 허락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표준한다. 눅 13:15에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 내어 이끌고 가서 물
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셨고, 마 12:12엔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하셨고, 마 12:7에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셨다.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이 문구의 헬라 원문은 한역(韓譯)엔 빠진 말
한마디가 더 있으니, 곧, "자기에게서"(* )란 말씀이다. 이거은 중요
한말이니, 그 의미는, 각 사람이 자진(自進)하여 행하란 뜻이다.
"이를 얻은 대로"란 말(* )은, "이익을 얻은 정도대로"란 뜻이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 재물을 바치는 일에 있어서, 사도의 교훈에는 전연 율법주의
(律法主義)의 색채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연보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실행은 할망정, 책임은 지고 있다. 그 이유
는, 연보는 사도의 명령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1절).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곧,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와서 실행시키
시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뜻이다.
고전 16: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할 때에 그 연보를 예루살렘으로 전달하
되, 전달할 사신들을 통하여 하도록 함이다. 이것은, 교회가 재정을 취급함에 있어서
비평 받을 일이 없도록 만전(萬全)을 기함이다. 사도 바울은 늘 이렇게 교회로 하여금
재정 취급에 신중히 하도록 위원들을 사용케 하였다(고후 8:18-21). 공금(公金)은 혼
자 취급할 것이 아니고, 언제나 몇몇 위원들이 함께 하여야 시험되는 일이 없다.
"너희의 은혜"란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저축한 연보를 이름이다.
고전 16:4
만일 연보의 양(量)이 많으면, 바울은 그 사신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갈만하다는 뜻
이다(Lenski, Grosheide).
고전 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 고후
1:15, 16을 보면, 바울의 원안(原案)은, 그의 현재 체재하고 있는 에베소에서 직접 고
린도로 가고 거기서 마게도냐로 갔다고 고린도로 되돌아와서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가
려던 것이었다(Hodge). 그러나 그는 이제 그것을 변하여, 마게도냐를 경유하여 고린도
에 가려한다. 그가 이렇게 여정(旅程)을 변경한 때문에 원수들의 비평자거리가 된 듯
하다(고후 1:17). 그러나 작정하였던 것을 변경함이 사욕을 위함이 아닌 한(限) 언제
나 정당한 일이다(고후 1:18-24).
고전 16: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듯도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곳으로 보내어 주
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 가운데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그의 두터운 우정(友情)이
나타나 있다. 곧, 그가 그들과 함게 머물러서 은혜 끼치기를 원하는 동시에, 그가 갈
때엔 그들의 도움 받기("보내어 준다"는 말씀의 뜻)를 원함이다. 이것은, 선한 교역자
가 그 교우들과 아무런 장벽없이 잘 통하는 처지에서 발표한 소원이다.
고전 16:7
윗절에 바울이 소원한 바를 재설(再設)하면서, 그것의 실현은 주님의 허락에 달렸
다고 한다. 그는, 그의 모든 활동과 일에 주님의 인도와 허락을 기다렸다. 그가 그렇
게 한 이유는, 그의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전 16:8,9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 바울이 이 편지(고린도전서)를 쓴 시기는 유월절 조금
전이었다. 그가 오순절까지 그 곳(에베소)에 유하려고 하였으니, 이제부터 두 달 동안
은 거기 있겠다는 의미이다.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렸다"함은, 그의 복음사업이 성과(成果)있게 이룰
기회를 의미한다(행 19:19-20). 그는, 겸하여, "대적하는 자가 많음"(고전 15:32; 행
19:23)을 그의 에베소 체재(滯在)의 또 한가지 이유로 삼는다. 신자들이, 흔히 복음을
대적하는 자가 많은 때엔, 길이 막혔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렇게 보지 않
는다. 그는, 그를 대적하는 운동이 도리어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될 줄 안다. 이렇게 보
는 것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을 가능(可能)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깨
달음에서 나온다.
고전 16:10,11
이 귀절들에 있어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더러 디모데를 신임하라고 한다.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 이 때에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잘못을 교정(矯正)시키기 위하여 고린도에 가는 도중이었다(4:17). 고린도 교회
의 신임을 받기 전엔, 그가 거기서 안심하고 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고리도
교회더러 그를 염려시키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로 두려움이 없게 하라고 부탁한다. 11
절에 "저를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이 역시 이와 같은 부탁이다.
고전 16:12
"아볼로"에 대하여는, 행 18:24-28; 고전 3:4, 6, 22를 참조하라.
아볼로가 바울의 권면대로 즉시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는, 고린도에 있는 아볼로
파에게 가세(加勢)할까 두려워한 까닭인 듯하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아볼로 청빙에
응하여, 그더러(아볼로더러) 그 곳에 어서 가라고 한 것과 원만한 처사 이다. 아볼로
파가 가세(加勢)되면 바울 자신에겐 불리(不利)할지도 모르나, 그는 그런 것은 문제시
(問題視)하지 않고 오히려 타파(他派)의 소원을 이루어준다. 이것이 대 사도(大使徒)
의 편벽되지 않은 처사이다. 이것이 도리어 당파를 없애는 사랑의 처사이다. 고전
1:12-17 참조.
고전 16:13,1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
이 귀절들은, 일설에의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아볼로를 따르며 작당(作黨)하지 말고
각기 깨어 자기 할 일을 하라는 권면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귀절들은 윗절에 연락 없이 그저 고린도 교회에 주는 결론적 권면(結論的勸勉)이
다. 라버촌과 플러머(Robertson and Plunner)는, 이 가절들에 포함된 네 가지 명령이
다음 몇가지 악덕(惡德)을 경계한다고 한다. 곧, 부주의(不注意), 변덕스러움, 유치
함, 도덕적으로 무능함을 막기 위한 경계라는 것이다. 이 귀절들마은 고상한 종교윤리
(宗敎倫理)의 행동 원리들을 포함한다.
깨어. - 깨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주의"와 반대되는 "주의"요 무관심과 반대
되는 "관심"이고무지와 반대되는 각성이다. 사 56:10 참조.
믿음에 굳게 서서. -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중에도, 우리가 사단의 공격과 세상의 미혹을 받고 있는 것이 위험하다. 이것을 극
복하기 위하여는 주님을 믿어야 된다. 이 믿음은 특별히 그의 보혈을 믿음이다.
요일 5:4 하반-6에 말하기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
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였고, 마 17:20에는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사니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옳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고 하였으니, 믿음의 효과가 얼마나 큼을 알 수 있다.
남자답게. - 이것은 헬라 원어로 안드리제스데(* )니, "남자다
우라"란 명령사(命令詞)이다. 여자의 성격은 온유한 편이고, 남자의 성격은 너그럽고
용감스럽고 굳세고 쾌활한 편이다. 양측이 특장(特長)을 지니기는 하였다. 온유의 덕
도 성경에 많이 장려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남자의 덕을 장려하였다. 신앙은 너그럽
고 용감스러운 움직임이다. 꼬물꼬물하고 좀스럽고 겁약하여서는 신앙을 가지기 어렵
다. 그 이유는, 신앙은 모험(冒險)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믿을 만한 큰 증거만 있으
면, 믿어 주고 만다. 신앙은 자세한 것들을 너무 캐지 않는다. 이것이 남자다운 너그
러운 성격이다. 그리고 남자다운 신앙은 너그럽게 하나님을 위하여 회생하기도 한다.
남자다운 신앙은 모든 것을 다 팔고 주님을 따른다. 그런 신앙은 생명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바친다.
강건하여라(* ). - 이 말은 문법상으로 윗말에서 별립(別立)
시켜 생각되어야 한다. "강건"은 여기서 강력(强力)을 의미하는데 주님이 주시는 것이
다. 엡 6:10에 말하기를,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하였다. 사람이 이런 영력(靈力)을 받아야 주님을 믿는다. 믿음은 지식의 산물(産物)
이 아니고 영력의 산물이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 사랑은 승리의 비결이다. 약 2:13에 말하기를, "긍
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였다.
고전 16:15-16
스데바나의 집. - 1:16 참조.
"아가야의 첫 열매". -이는 아가야의 최초의 개종자(改宗者)라는 의미이다. 예수님
의 복음을 믿는 것이 귀하기 때문에 맨 처음에 믿었다는 사실도 귀하게 생각된다.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 이것은 스데바나의 가정이 자원하
여 성도 봉사에 투신(投身)한 내용을 가리키고, 그들을 집사직(執事職)에 선정(選定)
하였다는 것이 아니다.
고전 16:17,18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 저희가 바울에게로 오므로, 고린
도 교회의 사정을 그에게 알렸다. 저들이 그렇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대신하여 일하
여 준 셈이다.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 그들이 이렇게 바울에게 왔다가 고린
도에 돌아가므로 양측(兩側)에 기쁨과 위안이 되었다.
그 이유는 저들이 그렇게 하므로, 그 둘 사이에 막혔던 것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고전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
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 "아시아"란 말은 이 밖에 세 번 바울 서신
에 나온다(고후 1:8; 롬 16:5; 딤후 1:15). 이것은 물론 그 때의 소아시아(Asia
Minor)을 이름이다. 바울이 이 때에 에베소(이는 소아시아 땅)에 체재하였으니만큼,
소아시아의 다른 지방 교인들도 그에게 내왕하였을 것이다. 아굴라와브리스가에 대하
여는 행 18:1-4, 18, 26; 롬 16:3; 딤전 4:17 참조.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 라고도 하
는데 이 두가지 이름은 서로 융통된다. 브리스가의 이름이, 이렇게 자기 남편의 이름
과 함께 혹은 보다 먼저(행 18:18, 26)나타나는 이유는, 그 여자의 복음적 활동이 자
기 남편보다 앞선 까닭이겠다.
이들의 집이 여기 에베소에서처럼 로마에서도 교회의 회집 장소로 사용되었다
(Robertson and Plummer). 롬 16:3; 골 4:15; 몬 2 참조.
고전 16:20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롬 16:16; 고후 13:12; 살전 5:26
참조. 입맞춤은 친절, 존경, 용서 등의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고대 근동지방(近東地方)교회에 한 가지 의식(儀式)이 되어, 남자들은 남자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입맞추는 예(禮)가 있었다.
고전 16: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 바울은 서신을 쓸 때에 대필자(代筆者)
가 있었다(골 4:18; 살후 3:17). 결론을 쓸 때엔 친필로 씀은, 그의 사랑의 표적인 동시에 그의 서신의 순정성(純正性) 곧, 사도의 권위로 보내는 편지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고전 16:23
고린도 교회에 결점들이 많으나, 그리스도의 은혜가 계속하여 있는 동안 사유함을 받을 것이며 또 귀정(歸正)될 것이다.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밖에 바라볼 것이 없다. 인생은 모두 다 죄인이다.
고전 16: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 서신을 이와
같이 결말하는 것은 바울에게 쉽지 않다. 이것은 그의 애정(愛情)이 고린도 교인들과 끊임 없기를 희구(希求)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 서신에 있어서 그들의 결점들과 과오(過誤)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애정 없이 그러한 것이 아님은, 그의 이 말로써는 증명된다. 그는 언제든지 그들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란 말은, 그의 사랑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만 의존(依存)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랑은 편벽됨도 없고 변하지도 않을 것이다(Robertson and Plummer). 그가 계속적으로 고린도 교회와 연결된 사랑은, 그리스도에게서만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런 사랑의 존속(存續)을 주 안에서 희구(希求)하는 것 뿐이다.
사랑의 서신은 이렇게 사랑으로 결론된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