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
네는 - "하나님의 뜻을 따라"란 말(* )은 직역하면
"하나님 뜻을 통하여"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된 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할뿐 아
니고 하나님 뜻이 간섭함으로 된 일이란 의미이다(Findlay). 이것은 그의 사도직이 그
자신의 공로나 선택으로 취해진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러니 만큼, (1) 그의 사도직
은 권위있고 남들이 업신여길 수 없을 것이다. (2) 따라서 그 자신도 그 직무 시행에
있어서 자력(自力)을 믿지 말고 단순히 하나님만 의뢰하게 되어진 것이다. 고전 9:16;
갈 1:1, 15; 엡 3:2; 행 9:15 참조. "사도"란 말에 대하여는 나의 롬 1:1 주석을 참조
하여라. "소스데네". 행 18:17에 기입된 회당장이 회개하고 교회에 나왔는지 알 수 없
다. 일설(一設)에 이 사람이 본서를 대서(代書)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Grosheide).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
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여기 "하나님의 교회"란 말(*
)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되는 교회란 뜻이지만, 아마 고린도 교회의
당파적 정신을 반대하는 암시(暗示)도 가진다. 교회는 어떤 당파의 것이 아니고 하나
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홀로 교회를 세우시며 유지하신다(Grosheide, God heeft de
kerk gesticht en houdt haar in stand.-Kommentaar op Het Nieuwe Testament, Eerste
Brief aan Korinthe, p.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기독 신자들은 자력(自力)으로 거룩하여질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의 성결과 연합할 뿐이다. 그들은 이 연합 때문에 성도라는 이
름을 받은 자들이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립된다.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은 신앙 행위이다. 바울은 각처의 기
독 신자들에게 축복한다.
고전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니. -
복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요 그 복을 받도록 하여 주시는 이는 중보자(仲保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 다음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따른다. "은혜"란 말이 먼저
나오는 이유는,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은혜를 받은 뒤에야 모든 다른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Grosheide, * genade wordt eerst toegewenscht. God
moet den zondaar in de eerste plaats genadig zijn dan volgen de weldaden.-Eerste
Brief aan Korinthe p.43). "평강"은 영혼의 평안이니 그것이야말로 진저가한 평안이
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너희에게 신... 은
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까닭이다. 곧,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로 간주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
리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니 우리는 그의 지체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란 말 뜻이다.
"항상... 감사"하는 것은, 신자의 높은 덕(德)인데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일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일로 인하여서도 감사하면 감사가 많아진
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으니, 우리
는 남이 잘 되기를 원하여야 된다. 남이 잘 되는 것은, 단체 생활에 있어서 결국은 나
자신이 잘 되는 것과 같다. 나를 둘러싼 이웃 사람들이 흉악하여 불행한 자들이라면,
나는 얼마나 그 가운데서 고통을 당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이 잘 되기를 바
라야 하고, 그들이 잘 될 때에 기뻐하며 감사하여야 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
아 잘 될 때에 내가 기뻐한다면, 그만큼 내 기쁨의 이유는 많아질 것이다. 우리는, 자
아(自我)라 하는 작고 좁은 속에 갇히어 살 때에, 언제나 불만과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 같이 생각하며 그들을 사랑할 때에는 그만
큼 나의 생(生)의 무대는 넓어지고 인생의 사정(事情)을 아는 식견(識見)이 높아져서
기쁘고 유쾌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계속하게 된다. 남들을 나 자신과 같이 생각하는 생
활은 그 만큼 위대하고, 고상하고, 깊고, 넓고, 밝고, 행복되고, 유력한 것이다.
고전 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이것
은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 중 하나이니,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이 풍성함이다. 여
기 "구변"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로고스(* )이니 구변이라고 하는 것보다 전
파된 진리(the truth preached) 곧, 복음의 진리라 함이 적합하다. 그리고 "지식"(*
)은 그 전파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the truth apprehended). 크로솨이
데는 여기 "지식"이란 말에 대하여 주석 내기를, 이것은 "순연(純然)히 지식만이 아니
고 직관(直觀)과 신앙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새 사람의 지식이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계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초역(* kan het resultaat zijn van
intuitie, van mystiek aanvoelen zelfs, is in elk geval niet uitsluitend het
gevolg van onderzoek of denken, ze is een godedn kijk op de dingen; 8:1 vlg.
geven de verklaring. De daar beschreven kennis is niet van puur intellect veelen
aard, ze berust op inzicht zelfs op geloof, ze is kennis van den nieuwen mensch,
ze wordt in verband gebracht met het kennen Gods.-Eerste Brief aan Korinthe.
p.46).
고전 1: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 윗절에 말한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과 및 그것에 대한 깨달음이 풍부함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증
거"(사도의 전도)가 뿌리 깊이 박힌 증표이다.
고전 1:7-9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또 한가지 이유가 여기 진술된다. 곧, 바울이 고린도 교
회의 재림 신앙(再臨信仰)을 인하여 감사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자들(재
림 신앙을 가진 자들)을 재림날까지 지키시어 그날의 소망에 참예하도록 견고케 하여
주신다. 그렇게 생각된 이유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신자들을 그리스
도와 연합하게 하신 것을 끝까지 지키시지 않으랴?(빌 1:6).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여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란 문구는, 고린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중보 역사
(곧, 그의 수난과 그의 높아지심) 또는 그 열매를 기억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
스도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같은 말을"한다 함은, 그 발언자(發言者)가 다른 사람들에게 편당의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화성(調和性) 있게 말함이고, "같은 마음"이란 말은 사색상(思索上) 꼭 같은
분변을 이름이고, "같은 뜻"이란 말은 꼭 같은 판단 내림을 의미한다(In the same
discernment and in the same judgement. Findlay).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는, 사상과 교훈이 동일(同一)하여야 될 사실이 여기서 황금
률(黃金律)로 나타나 있다.
고전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
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 "글로에"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분쟁"은 아직 분열
(分裂)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다툼을 이름이다.
고전 1: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
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 튀빙겐 학파의 빠우르(F.C.Baur)
는, 여기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합하여 이방인 기독교요, 게바파와 그리스도파는 합아
여 유대인 기독교라 하고, 양자(兩者)의 각기 대표인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서로 투쟁
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참되지 않다. 그들 사이에 실상은 투쟁이 없었
다. 이방인들에게의 전도자로서는 실상 베드로가 바울보다 앞선다(행 10장). 그뿐 아
니라 그들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기독교를 옹호함에 있어서 같은 보조(步調)
를 취하였다. 갈라디아 2장에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은 일이 있으나 그것은 사상적으로
충돌함이 아니었고 일시적(一時的)인 충고에 불과하다.
우리 본문이 가르친 것은, 바울과 베드로의 사이에 투쟁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때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지도자를 과히 따르며
각각 파당을 이루는 의미에서 한 말이니, 거기도 잘못됨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신자들을 전연 무시하면서 자기들만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 그리스도께서 나뉘었을 수 없다. 그는 한 분이시
고 온 교회의 머리되신다. 그러니 만큼 신자들이 서로 분쟁할 수 없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속죄자(贖罪者)가 아닌 한(限), 바울에게 속한 교회 혹은
신자들이 있을 수 없다. 속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함은, 그 세례 받은 자가 그 이름에 속한다는 의미
를 가진다. 그리스도 밖에 누가 이런 권세로 우리에게 임할 수 있으랴?
고전 1:14,15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
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그
리스보와 가이오"는 바울의 전도에 의하여 기독 신앙에 돌아온 자들이다(행 18:8; 롬
16:23). 바울은 자기를 너무 위하는 자들을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너무
위할 우려성(憂廬性)있는 사람들에게 일찌기 세례 베풀 기회를 못 가진 것이 도리어
잘 된 줄 안다. 그는 그렇게 못한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면, 그들이 그(바울)을 지나치게 위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저렇게 자기의 위치를 지켰다. 곧, 그는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할 아무런 대우
도 받기를 중심으로 싫어하였다.
고전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 스데바나에 대하여 고전 16:15-17을 참조하여라.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준 여부(與否)를 모르겠다고 함이, 영감(靈感)에 의한 성경 저자
인 사도로서의 실수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기억 못하는 것을,
그대로 솔직히 기억못한다 함은 그의 진실성이다. 성경을 기록하는 영감은 인적요소
(人的要素, 이는 全知함이 아님)을 내포(內包)하지 않는 바 아니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
이라. - 이 말씀은 세례를 무시함이 아니고, 말씀 전하는 것이 그보다 더욱 그의 사명
에 적합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복음 전함에 있어선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리를 밝히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
로 그는 언사(言辭)에 지혜를 위주하지 않았다. 만일 언사의 지혜를 위주하면 그리스
도의 십자가는 가리워진다. 언사의 지혜란 것은 여기서는 이 세상 철학 사상에 의종
(依從)한 표현이다. 이 세상 철학은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는(23) 사상이니, 그것에 의
하여 십자가를 옹호하려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철학적 지혜를 자랑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인 만큼, 바울이
여기서부터 철학적 지혜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
의 능력이라. - "멸망하는 자들"이란 말은 복음을 받지 않은 불신자들의 이름이다. 그
들에겐 십자가의 도(곧, 그리스도의 속죄로 구원이 성립된다는 종교)가 어리석게 만
보이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어디까지든지 자율주의자(自律主義者)들이기 때문에 순
타율(純他律)인 속죄의 종교가 그들에게 이해(理解)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 뜻은 이렇다. 곧,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서 홀로 계시(啓示)하셨고 또 성립시켰으니 그것이 인간의 계획에서 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이 불신 인간에겐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성격으로만 보인다.
불가사의란 오직 믿음으로 받아진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은 자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룬다(롬 1:16).
고전 1:19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 이 말씀
은, LXX역(70인역)대로, 사 29:14에서 인용한 것이다. 벌써 구약에서 하나님의 지헤와
인간의 지혜가 전적으로 반대됨을 가르쳤다(Grosheide).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 29:14에 말하였다. 곧, 예루살렘이 정치인들이 애굽과 동맹하고 하나
님을 믿지 않다가 필경 실패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 있다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심이다. 욥 5:12; 시 33:10; 렘 8:9 참조.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배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
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이것은, 이 세상 표준에서 인
정 받을 지식의 사람들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최고(最高) 지혜인것 만큼, 이 최고의 지혜 앞에서는 이 세상 지혜(혹은 지식)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 세상 지혜는 인간을 구원할 힘이 전연 없다.
"선배"란 말(* )은 유대의 서기관 같은 사람을 의미하고, "변사"
란 말(* )은 헬라 철학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란 말씀의 해석에 대하여
는 19절의 해석을 참조하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의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
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인간은 자기
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 원인(原因)은 그들이 범죄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롬 3:11에 말하기를,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였다. "전도
의 미련한 것"이란 말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해 보이는 전도란 뜻이다. 18절
참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구속 사업을 하시되 이 세상 사람들이 기대할 것과 아
주 딴 방식으로 하신다는 말이다(Grosheide, Paulus wijst er op, dat het Gode be
haagt Zijn verlossings werk zoo te doen, dat het gansch anders is dan wat de
wereld verwacht. -Eerste Brief Aan Korinthe, p.74).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유대인들이 하나님 계시의 존
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병통은, 그 계시가 자기들의 욕구(慾求)대로 나타나기
를 구함이었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지혜(여기서는 철학을 의미함)를 구한다. 그러나
그 철학은 순연(純然)히 주지주의(主知主義)로서 하나님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표
적"이란 것은 하나님의 긍휼 표현이고 불신앙의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한 양허(讓許)는
아니다.
"지혜를 찾으나"란 말씀에 찾는다는 글자는, 호기심(好奇心)으로 번쇠하게 궁구(窮
求)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앙적인 계시 의존 사색(啓時依存思索)이 아니다.
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
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
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바울이 전하는 메시야(그리스도)는
이방 국가들을 몃자시키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은 메시야니 만큼
유대인들의 기대(이는 물론 잘못된 기대)에 응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믿지 않
고 넘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의 전도가 그들에게 "거리기는 것"(* )이
된 셈이다. "거리끼는 것"이란 것은, 걸쳐 넘어지게 하는 것을 이름이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함)가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그것을 미련한 것이라고 한 이유는 이렇다. 이방인들에겐
그리스도가 배척하는 자기들의 독특한 철학이 있었다. 그 철학의 편견에서 볼 때에 십
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중심의 사상은 미련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진정한 지혜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사
리(事理)의 진상(眞相)을 본다. 그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소유한다.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이것은, 사람이 보기에 미련한 것과 약한 것을 이름이다. 일례(一例)를 들면, 십짜
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인인 것 만큼
그들의 견해가 특히 종교적 사리(事理)에 있어서 하나님의 견해(見解)와 달라졌다. 그
들은, 하나님이 낮아지시어 인간들의 조짐을 져 주시며 체휼(體恤)의 덕에 의하여 인
간들을 구원하여 주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 없이 죄인의 처지에로
낮아지신 것은, 지혜와 능력으로 보이지 않는듯 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지혜와 능력이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 교회
의 성원(成員)들이 무식자들과 약자들임에 불구하고, 그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
의 능력으로 인하여 유식한 자들과 강자들이 부그러움을 당한다. 이것은 물론 교회가
타락하지 않고 정상적(正常的)인 형편으로 있을 때에 되는 일이다. 이 말씀은, 교회의
지도층 인물들이 반드시 무식하거나 무력하여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도자들에겐
지식이 있어야 되며 인격도 있어야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하여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런 것들(지식과 인격 기타)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다. 지도자
에게 이런 것들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 있으면 이 세상 사람들이 놀랄만한
큰 일을 할 수 있다.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여기 이른바 "천한 것들"이란 말(* )은 26절에 "문벌 좋
은 자"(* )란 말과 반대된다. 이는 문벌이 높지 못한 자를 의미한다. 이
는 그때에 종의 신분과 같은 것을 이름이다. "멸시 받는 것"은 역시 위의 "천한 것들"
이란 뜻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리고 "없는 것들"이란 말도 실상 위의 두 가지
표현("천한 것"과 "멸시 받는 것")과 유사(類似)한 의미를 가진다. 곧, 사람이 보기에
는 별로 존재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본절의 말씀은, (1) 하나님께서 인간을 평가(評價)하시는 방식이 인간의 그것과 판
이(判異)하여, 사람이 보기에 낮고 천한 자들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 (2) 그런 것들을
통하여 큰 일을 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낮고 천한 처지에 내어던
짐이 된 자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된 자
들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고 겸손히 자기 할 일을 할 것 뿐이다.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구원받는 길
에 있어서, 누구든지 자기의 힘을 믿거나 자랑하는 자는, 주님의 보혈을 무시하는 죄
를 범하는 자이다. 순전히 은혜로만 구원 받는 것을 전하는 참 종교(기독교)에 있어
선, 그 종교 신자로서 자기 힘을 자랑하는 것이 질색이다(롬 3:27).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 "하나님께로부터 나서"란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성립시키신 하나님을 원인(原
因)으로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란 말씀은 기독 신자와 예수님과
의 연합된 관계를 이름이니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신자(代身者)이신 관계가
그것이고 (2) 우리는 그의 몸의 한 지체와 같이 된 관계가 그것이고. (3) 우리의 의식
(意識)에 있어서,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성립되는 관계가 그것이다(Hodge,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p.26).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란 말씀은, 그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성립시키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
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런 행복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Grosheide, Wat we zijn dat hevven we van God en
door Christus-Eerste Brief Aan Korinthe p.83).
고전 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은
렘 9:23, 24의 말씀을 단축(短縮)시켜 인용한 듯하다. "주 안에서 자랑"한다 함은, 교만한 자랑이 아니고 도리어 겸손해지는 자랑이다. 곧, 자기는 죄인 뿐인 줄 알며, 자기의 바로 된 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줄 생각하여 주님께 감사하는 심리이다. 신자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이런 겸손한 심리를 가지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셨고 또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게 하셨다. 이것은 순전히 은혜로만 받아지게 한 구원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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