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로마서 14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 -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가리킨 것인가?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
다.  (1) 이것은, 구약 레위기 11장에 금한 식물(植物)을 신약 시대에도 먹지  말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기독 신자를 가리킨다는 학설도 있고, (2) 우상의 제물로  사
용되었던 고기를 기독자가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 신자를  가리킨다는  학설도
있고, (3) 기독 신자이면서 극단적 금욕주의(禁慾主義)를 가지어 채식(菜食)을 주장하
는 자라는 학설도 있다.  이 세 가지 해석 중 아마 첫째 해석이 옳은  듯하다.   이것
은, 복음 진리에 대한 지식이 박약한 자란 뜻이고, 덕(德)에 대한 실행력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받되 -  여기 "받되"라는 말의 헬라 원어는, "완전히 받아라"란 뜻이다.  
이것은,  의심하지 말고 만족한 회원(교회원)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이 문구는, "의심스러운 논쟁에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 말씀의 요점은, 아디아포라 문제(敎理化하기 어려
운 문제)에 대하여 견해의 차이를 서로 문제시하므로, 그  문제에 대한 각자의 확신을
파괴 시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는 뜻이다.

 

 롬 14:2,3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 당시 로마에 있는 교회의  유대인
기독 신자들은, 음식 문제에 있어서 의식적(意識的) 율법의 제재를 받았던  듯하다(레
11장).  그러나 그 교회에는, 역시 강한 복음 주의의 정신을 가지고 먹는 문제에 있어
서 차별을 두지 않는 신자들도 있었다.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이 채식주의가 이교(異敎)에서 유래(由來)되었다는
학자들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 "업신여긴다"함은, 자기의 진리 지식의 우수함을 인하여 형제에게 대해 우월감
(優越感)을 가짐이고, "판단"함은, 음식에 의식적 차별을 가지지 않는 자를  오해하고
범법자로 봄이다.  한편은 교만으로 인하여 포용치 않음이고, 다른  한편은  무식으로
인하여 포용치 않음이다.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이것은, 양방(兩方)이 서로 포용해야 할  이
유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복음 신앙을 인하여 그들(양편 다)을 천국  백성
으로 받으셨다.  이 사실을 아는 그들은,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하나님의  명령
이나 금령으로 제재 받지 않은 것들)로 서로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받으
신 자들을 사람이 배척하지 못한다.                                                          
       

 

 롬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 종은 그 주인의 소유니, 그 종을 세우거나 안
세우거나  하는  문제에  대하여  남들이  간섭할  수  없다.    순교자   사보나롤라
(Savonarola)를 정죄하던 자가 말하기를, "내가 너를 지상 교회(地上敎會)와 천상  교
회(天上敎會)에서 끊노라"고 하였다.  그 때에 사보나롤라(Savonarola)는 대답하기를,
"천상 교회에서는 네가 나를 끊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롬 14:5,6

  혹은 이 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 이 부분의 헬
라 원문 초두에 가르(*         )란 접속사(接續詞)를 가지 사본들(*   , A,C,D)도 있
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면"이란 뜻이다.  그러나 다른 사본들(B,D,E,F,G)에는 이것
이 없다.  산데이(Sanday)와 리츠만(Lietzman)은, "이 글자가 있는 편이 원본적인  것
같다"고 하나, 즈안(Theodore Zahn)은 이 글자가 없는 편이 신임할 만한 것이라고  하
였다.  만일 이 글자가 있는 편이 원본이라면, 그것은 설명을 위한  접속사  뿐이겠다
(Greijdanus).  여기 "이 날...저 날" 문제는, 역시 유대인 기독  신자들의  주장으로
인하여 일어난 듯하다.  그들은, 절일(節日)들에 대한 구약의 규정을  신약  시대에도
문자적으로 지켜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들이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성취되었으니 만큼,  그것들을  구약  시대의  방식으로  지킬  필요는  없다(갈
4:10-11; 골 2:16-17).
   주를 위하여 - 이 말이  6절에  세  번  나온다.   여기서는,  양심  자유의  문제
(adiaphora)에 있어서 신자들이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주님을 위한다면 당연하
다는 뜻이다.

 

 롬 14:7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는 참으로 불행한 자이다.  그 이유는, "자기"라는 것은 폭군(暴君)중의 폭군
인 까닭이다.  폭군이 무지함 같이 자기라는것도 늘 무지하다.  렘 17:9에  말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다.  폭군은 모든 일에 자기만
위하는 자인데, "자기"라는 것도 그렇다.  "자기"라는 것은, 남들이 다 죽어도 살겠다
는 자이다.  이것은 여러가지로 나타나는데, 곧, 자기를 믿음, 자기를 사랑함, 자기를
변명함, 자기 표현을 즐김과 자기의 옳지 않은 일에서도 자족함과 같은 것이다.  우리
가, 자기를 위하다가는 아무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결국 망하고 만다.  그러므로 어
떤 성도의 유명한 말이 있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죽여야 나는 성도가 된
다"고 하였다.  "자기"란 것은, 천국 가는 길에 있어서는 지푸라기에 걸려서도 넘어지
지만, 멸망 길을 가기 위해서는 높은 산이라도 기어 올라 간다.   신자는  이와  같은
'자기"를 거부(拒否)해야 된다.

 

 롬 14:8,9

  (상반)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 곧, 신자는, 죽어도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는 뜻이다.  6절 끝 참조.   옛날의  교회  정치가  키브리안
(Cyprian)은 첫번 핍박 시대에 도망 갔던 일이 있으나, 두 번째 핍박 시대에는 순교하
면서 마지막 말이,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저렇게 순교로써 하나님을 영화롭
게 할 뿐 아니라, 순교하면서도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였다.
   (하반)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
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된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까닭이다(9절).  그가  우
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그의 피로써 우리를 사신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자는, 자기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자이다.  인간은, 자
기가 죽든지 누가 대신 죽어주는 일이 있든지 해야 된다.  인생문제의 해결은 죽음 뿐
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다시
사시어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만드셨다.  그가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는 그의 소
유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을번하였다.  이제 우리 신자들은 그의 것이 되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것이 되지 못하고 우리를 구원 못할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졌다든지,  마
귀의 것이 되어졌다든지, 혹은 임자 없는 것이 되어졌다면, 우리는 영원히 망할 수 밖
에 없다.

 

 롬 14:10-12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 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사랑을 어기는 죄가 될 뿐 아
니라, 율법 자체를 비방함과 같은 큰 죄이다(약 4:11-12).  그러므로 그런 죄는  대심
판 때에 판단을 받는다.  심판을 이기는 덕은 긍휼이다(약 2:13).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 이것은 사 45:23의 인용이다.  "내가  살았노
니"란 말은, 맹세하는 의미를 가진 문구로서 그 아래 따르는 말씀의 진실성을  확보한
다.  "무릎을 꿇음"은 하나님의 엄위(嚴威)를 승복(承服)하는  행위이고,  "자백"함은
공적(公的)으로 내 놓은 고백을 말함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존전
(尊前)에서 허물을 감출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사 49:18; 빌  2:10-11;  고후
5:10 참조.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여기 "우리 각인"이란  말
은 사도 바울 자신까지도 포함한 말이고, 한 사람도 제외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자
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한 것은, 심판 때에는 누구든지 남의 일에 대하여 간
참하여 비평할 여유가 없고, 각기 자신의 일만 하나님 앞에 보고하게 된다는  뜻이다.  
현세(現世)에서는 사람들이 공연히 남의 일에 간참하여 평론한다.

 

 롬 14:13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여기서는,  무
슨 식물이든지 먹는 "강한 자"가 남들의 신앙 양심에 거리끼는 식물도 먹으므로  그들
의 양심에 혼란을 일으킴을 징계한다.  신앙 양심이 혼란케 된 자가 그 양심을 거스려
행하면, 그것은 죄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여라", 혹은 "하지 말아라"하는 하나님
의 명령에 명백성이 없는건(件)에 국한하여서만 그렇다.

 

 롬 14:14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여기 "속되다"함은,  헬라  원어로  코이논    
(*               )이니, 거룩함에 반대되는 것이므로(행 10:14-28; 계 21:27) 하나님
과 관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
좋다고 하셨으니, 그 모든 것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속된 것이 아니다.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어떤 음식물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그것
을 먹어도 무관하게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양심은 이렇게 각각 자유할 수 있다.  그
러나 이것은, 위(1절)에 나온 해석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이나 금령이 붙지  않은  건
(件)에 있어서 그러하다.

 

 롬 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 곧, 강한 신자(모든 식물을 다  먹
을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약한 신자(1절 해석 참조)앞에서 문제된  음식을  먹으므로,
그 약한 신자도 그 양심이 혼란해져서 꺼림칙한대로 그 식물을 먹음에 동참함을  의미
한다.
   형제를...망케 하지 말라 -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은 사람은  영
원히 멸망치 않는다 함이, 성경의 교훈이다.  여기 "망케"한다는 것은,  반드시  영멸
(永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 형제가 자기의 신앙 양심을 어기므로 (1) 하
나님 앞에 범죄한다는 의미요, (2) 그 사건 때문에 교회 안에 비방(誹謗)이 돌게 되면
서 피차간 영적 생명에 지장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도 말하기
를, "망케함은, 주님의 구속하신 사람들이 아주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표면
적으로 보아서 그 사건이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방해를 주어서 타락을  시작하게  함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롬 14:16,17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여기 "너희의 선한것"은, 모든 것을 먹
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양심 자유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이것은, 음식물로 인하여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지 말것을 가르친다.  누구든지 문제되는 음식물을 먹어도  심령상
거리낌이 되지 않으면 먹어도 좋다.  그러나 그가 먹으므로 인하여 교회가 건덕상  손
해를 본다면, 먹지 않음이 좋다.  먹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의(義)가  있
고 평강이 있고 희락이 있음이 중요하다.  교회 안에서 개인적 양심 자유가  맹목적으
로 사용될 때에, 거기 혼란이 생기며 따라서 의가 없고 평강도 없고 희락도 없을 것이
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성령 안에서 의"란 말은, 성령님의 구원  실
시로 말미암아 오는 신앙으로 얻어지는 칭의(稱義)와 및 성화(聖化)를 말함이다.  "평
강과 희락"은, 신자가 칭의된 결과로 누리는 것이다.

 

 롬 14:18,19

   이 귀절들은 건덕 생활(件德生活)을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생활이
곧 건덕 생활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등적(對等的)
으로 생각함이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 해야 되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원리를 말함이다.  진정한 건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합당하게 하면서 사람에게는 유익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 곧, 위의 세 가지 덕(하늘에서 온 義, 平, 康,  喜
樂)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가리켜 말한다.
   칭찬을 받느니라 - 이것은 헬라 원어로  도키모스(*                 )인데,  즈안
(Zahn)은 "시인 받는다"라고 번역하였다.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역시 "덕을 세운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오이코도메
오(*                     )인데, "집 지어 올라감"(to build up)을 의미한다.   이것
은, 신자들이 서로 세워주며 버리지 아니하므로 되어지는 일이다.

 

 롬 14:20,21

  이 귀절들의 의미에 대하여는, 위의 14-15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 만일 누가 음식물을 무엇이든지 구별할 것
없이 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하여 굳이 행하면, 그것은 신앙 양심이 약한  사
람에게 사상 혼란(思想混亂)을 주어 그로 하여금 의심하면서 먹도록 하여 범죄케 함이
다.  그것이, 20절의 말씀과 같이 형제로 하여금 거리껴 넘어지게 함이다.

 

 롬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기
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 있으니,  (1)
이 귀절에 있어서도 바울이 강한 신자에게 권고한다는 해석.  곧, 만물이 그리스도 안
에서 불결하지 않다는 양심 자유는 매우 귀하다.   그러나 그 귀하고 강한 신앙을  하
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만 은근히 가지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  노골화(露骨化)시키지
아니함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너무 주장하며 노골화 하면,  그
약한 신자들이 보고 비방하게 되며, 또 그들의 신앙 사상에 혼란이 생기게 된다.  (2)
이 귀절이 위에 말한 약한 신자를 경계한다는 해석.  곧 누구든지 어떤  식물이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된다고 확신하며, 그는 그 확신대로 준수할 것이다.  그리하면  그는 죄책(스스로 자기를 책함)을 면한다.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 - 어떤 식물에 대하여 신앙 양심으로 거리끼던 사람이, 남의  먹
는 것을 보고 끌리어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면서 먹으면 범죄함이 된다는 것이다.  이 교훈은, 양심 자유 문제에 관한 건(件)에만 적용되는 진리이다.  양심 자유에 관한 건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행동 원리에 대하여 성경이 침묵하는 경우에 있어서, 기독 신자들이 혹 이렇게, 혹 저렇게 생각하여 자유로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