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1
이 귀절은, 이스라엘을 위한 바울의 소원을 말해 준다. 곧, 그들이 구원의 길 되
는 복음을 모르므로,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알고 구원 받는데 이르기를 간원(懇願)한
다.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 - 여기 "원하는 바"란 말은, 헬라 원어
로 유도키아(* )인데 호의(好意) 혹은 기븐 뜻을 의미한다. 만일 사
도 바울이 이스라엘의 무지(無知)를 보고서 그들을 업신여겼더라면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도 의(義)가 없는 줄 알았다. 그는 다른 사
람에게 대하여 연대 책임 의식(連帶責任意識)을 가진 것 뿐이었다. 복음은, 인간은
의를 정죄함과 동시에 사람들끼리 서로 가지는 차별 의식을 어리석게 여긴다. 그러므
로 우리는, 마치 자타(自他)가 함께 무슨 큰 환란 중에 빠진 듯이 생각하고, 연대 책
임적으로 서로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롬 10:2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啓示)하신 진리대로
하나님의 의(義)를 받을 줄 모르고, 자기의 힘으로 의를 얻으려고 어리석게 행한 것이
다. 그것은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律法主義)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불신앙이다. 그리스도
께서는,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10:4). 누구든지 그
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성경 말씀은, 복음 전도를 가리켜 연회와 같
이 생각하였다(눅 14:15-24).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가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복음을 믿을 줄 아는 사람은 환
란을 당해도 기뻐하며, 주님을 위하여 죽는 일이 있을지라도 필요하면 도리어 기쁘게
당한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무엇을 받는 자의 감사 행위가 아니고, 무엇을 받지 못한
자의 염려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를 모시어 내리려는 행동이
니, 이는 벌써 오신 그리스도를 잊어버린 오착이다. 율법주의는, 기쁨이 없고 몸을
괴롭게만 한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구원에 안식함이 신앙
이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말
씀 곧, 십자가에 깨달았으며, 모든 것을 희생하고 중국에 선교사로 갔다.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곧,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복음적 의를 신
뢰하지 않고 자기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고집하였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사
람이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기는 무엇이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참된 지식이다. 그런 사람은 온순하여 반역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악수할 용의가 있
다"고 하였다(Wissen namlich, dass man nichts weiss, das ist der "Verstand", ...
Denn wer weiss, dass er nichts weiss, der ist mild und lenksam, der widerstrebt
nicht, sondern ist bereit, allen die Hand zu geben. - 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 330).
롬 10:4
그리스도는...율법의 마침 - 여기 "율법의 마침"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테로스 노
무(* )라고 한다. 우리가 이 문구에서 "율법의 끝"이라는 뜻
을 취하면 합당하다. 율법 밖에서 의를 얻는 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제 오셨으니,
사람들을 그에게(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던 율법의 사명은 끝났다. 리츠만
(Lietzmann)도 여기 "마침"이란 말을 "끝"이란 뜻으로 보았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르고 율법을 행하여 의로워 지려고 애쓴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로서 우리의 속죄자가 되실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가 되신 것이다(고전 1:30). 그가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
시기 위한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롬 10:5-7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살리라 - 이 말씀은 레 18:5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신 것
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그대로 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
는 표준이 어떠함을 보여준 것뿐이다. 인간이 이 표준 밑에서는 할 수 없으니, 결국
은 하나님을 의뢰하려는 동기를 가지게 된다. 여기 "행하는 자"란 말은 헬라 원어로
포이에사스(* )인데, "행한 자"란 뜻이다. 이것은, 율법을 지킴에 있
어서 조금도 미비함이 없이 완전히 행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5-7절 말씀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5절에 있는 "모세가 기록
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한 말씀은, 순전
히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한 것이라고 함. 곧,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율
법을 행해야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6, 7절에 있는 말씀은, 신
30:11-14의 인용인데, 복음에 대한 예언이라고 한다. 곧, 복음을 믿으므로 의를 얻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러가는 것과 같은(그리스도를 모셔 오기 위
하여)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땅에 오셨
다가 다시 사셨으니, 사람들은 그저 그를 주님으로 믿을 뿐이다. (2) 칼빈(Calvin)
은, 5절에 있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한 어귀에 대하여 신학적 해
석을 붙였다. 곧, 여기 있는 "의를 행한다"함은,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의를 행한다
는 의미가 아니고 복음을 믿는 자가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며, 또한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어지는 사실을 포함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여기 의를 행
한다는 것은, 복음적 행위(福音的行爲)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6, 7절에 있는
말씀은, 위의 첫 해석과 같이 복음적 의가 어떻게 용이하게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을 지
적한 말이라고 한다. 곧, 여기 말한대로 하늘에 오름과 음부에 내려감에 대한 말씀
은, 이스라엘에게 율법 지킴을 격려하기 위하여 사용된 말인데(신 30:11-14), 바울이
이것을 복음 신앙의 권장에 응용(應用)하였다는 것이다. 모세가 그 말을 쓸 때에도,
사람이 제 힘으로 율법 지키기가 어렵지 않다는 의미로 쓴 것이 아니겠고, 다만 하나
님을 신뢰하게 된 자가 은혜로 그것을 지키기는 용이함을 지적했을 것이다.
롬 10:8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이것은, (1) 복음은 하늘 위나 땅 아래 멀리 있
는 것이 아니고, 입과 마음처럼 내게 가까이 있다는 의미이며, (2) 또한 입과 마음으
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복음을 믿기는 쉽다는 뜻이다. 곧, 우리의 입으로 신
앙 고백을 할 수 있고, 마음으로 신앙할 수 있다. 복음 신앙은, 다만 남(그리스도)을
의뢰함이니, 이는, 실제에 있어서 일함이 아니고 안식함이다. 안식처럼 하기 쉬운 것
이 어디 있으랴? 물론 신앙 생활에는 어려운 일도 없지 아니하나, 그것도 결국 성령
님의 은혜로 쉽게 해결되는 것이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음 - "시인"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호모로게오
(* )니, 그리스도를 대외적(對外的)으로 공고백(公告白)함이다.
이것은, 그 신앙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표시(表示)이다. "주"란 말은, 예수님께서 부
활하시므로 영광의 주로서 신자와 관계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
도의 구원 역사의 총요점(總要點)인 것만큼, 여기서 그것을 간추린 신앙 신조로 말한
다. "마음"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칼디아(* )니 단지 지식성(知識性)
보다도 애정의 기관(器官)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다 함은 사랑으로 그를 신
뢰함이다. 그것이 인격적 신앙이다. 사랑 이외의 다른 심리적 작용으로만 그리스도
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생명 없는 법칙이나 이치로만 상대함이다.]
롬 10:10
이 귀절은, 이유 접속사(理由接續詞) 가르(* )로 시작하여 앞절의 내용을
해설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은
내적(內的) 또는 사적(私的) 관계의 것이고, "입"은 외적(外的) 또는 공적(公的) 관계
의 것이다. 누구든지 복음에 대하여 마음에서 진실히 믿고 입으로 증거하는 공증 인
격(公證人格)을 이룬 자는, 구원을 얻음이 확실하다. 진실되게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구증자(口證者)가 되는 것이다.
"의에 이름"과 "구원에 이름"의 차이는 이렇다. 곧, "의에 이름"은 영생을 얻는
기본적 계단이고, "구원에 이름"은 그 종말관적(終末觀的) 방면이다. 그러므로 이 둘
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받는 구원의 종류상 차이를 말함이 아니고, 누구나 구원 받는
자면 다 같이 받아지는 한 가지 영생을 양면(兩面)으로 말함이다.
롬 10:1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 하리라 - 이것은, 사 28:16의 인
용이다. "누구든지"(파스)란 말은 인종이나 민족이나 기타 어떠한 게급이든지 철폐
시키는 강한 말이다. 여기 "저를 믿는 자"란 말은, "그의 위에 신뢰하는 자"란 뜻이다.
이것은, 지식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만 아니라, 전 인격(全人格)으로 그리스도에게 의
지함을 가리킨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함"은, 실패 없이 꼭 구원 받는다는 뜻이
다.
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 이 말
씀의 초두에 헬라 원어대로는,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르(* )가
있어서 앞절 내용을 확증한다. 곧, 모든 사람의 주님은 한 분이니 만큼, 앞절이 말한
것과 같이, 누구든지 동일하신 주님의 구원 계획대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
나님도 같고 사람들도 서로 같은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사람에 따라서 다를 이유는
없다.
롬 10:14,15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
울이 이 두 귀절 말씀을 하게 된 이유는 알기 어렵다. 산데이(Sanday)나 크리소스톰
(Chrysostom)의 해석에 의하면,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의 불신앙 책임이 그들 자신의
태만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복음을 들으려면 얼마든지 들
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전도하셨다고 사도는 말한다(15절 하반;
사 52:7). 이 귀절들(14-15)을 보면, 주님을 부르짖는데 필요한 것이 믿음이고, 믿음
을 얻도록 하여 주는데 필요한 것은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 전파
는 전도자로 말미암고, 전도자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실이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이것은 사 52:7의 인용이다. 여
기 "아름답다"는 말 뜻은, 루터(Luther)에 의하면, 율법 아래 있던 사람에게 대하여
복음의 선포는 유쾌하고 만족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곧, 율법은 정죄하였으나, 복음
은 정죄에서 풀어주고 치료해 주는 것인 만큼, 우리의 사랑하며 좋아하는 것이라는 뜻
이다(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 342). 그리고 루터(Luther)는, 여기 "발"이
란 말을 영해(靈解)하여 말하기를, "선교하는 교회의 발은 음성 혹은 말씀인데, 그것
으로써 사람들(사람들의 악한 고집)을 짓밟아 분쇄시킨다"고 하였다(Also sind die
Fusse der Kirche, die da predigt, der Schall und die Worte, mit denen sie stosst
und zerstosst und "zerschmeisst die Volker". - 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
344).
롬 10:16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 이것은 사 53:1의 인
용이다. 곧, 그 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울
은, 자기 시대의 유대인들도 역시 전도를 듣고도 믿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사야의 탄식
하는 말을 여기 인용한 것이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불
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이 이 부분의 문맥을 중단시킨다는 이유로 그것이 후대의
삽입구라고 잘못 생각하였다(Glossen im Romerbrief, Theol. Lit. Zeit., 1947, pp.
197-202). 그러나 리델보스(H. N. Ridderbos)는, 불트만(Bultmann)의 잘못된 견해를
지적하였다. 그는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도가 이 귀절 말씀을 하게 된 것
은 이렇다. 곧, 바울이 그 윗절에서 이사야 시대에 된 일을 전감(前鑑)으로 삼아 말
하였다. 곧, 이사야때의 유대인들이 예언적으로 전파된 복음을 마땅히 믿었어야 할
것인데, 믿지 않았으므로 그는(이사야) 그 사실을 괴상하게 여겨 탄식하였다. 이것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사상이 이사야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바울
은, 이 사상을 위의 14, 15절을 재음미(再吟味)하는 형식으로 결론하다"고 하였다(Aan
De Romeinen, p. 242).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
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들
을 수 있도록 복음이 넓게 전파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복음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벌써 이스라엘에게 전파되었다. "그 소리가 온 땅에"란 말씀은 시 19:4의 인용이다.
그러면 신약 시대의 세계적 복음 전파가 이 시귀(詩句)로 예언되었다는 말인가? 그렇
다고까지는 할 것 없다. 시 19:4의 말씀은, 자연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든지 보편
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가르친 것 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한 의
의(意義)는, 이때에 복음이 두루 전파됨이 자연계에 하나님계시(영광 나타내심)가 어
디나 퍼져 있음과 같다는 것 뿐이겠다. 그러므로 여기 이 시편 인용은 예언 싸자취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특별 계시가 자연 계시처럼 벌써 널리 전파되어 보편
성을 띤다는 것 뿐이다(H. Ridderbos, Voor paulus is de universaliteit, waarvan
Ps, 19 spreekt, stelling dezelfde als die welk van het evangelie geldt. - Aan De
Romeinen, p. 243).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란 뜻은, 자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게시가 온땅에 퍼졌
다는 것이다.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는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이다.
롬 10:19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앞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듣지 못하였느뇨"란 문제
에 대답하고, 이 귀절에서는 "알지 못하였느뇨"란 문제에 대하여 답한다. 그 답은,
옛선지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나타난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 이것은, 신 32:21의 인용이다.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도 다른 신(神)을 좇은고로,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는 마음이 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그렇게 범죄한 것이 아니고, 알고도 그렇게
한고로 하나님의 책망을 당하게 된 것이다. 바울의 시대에 이스라엘도 역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도 순종치 않았다.
롬 10: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 이것은 사 65:1의 인용이다. "이사야
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란 말은, 그가 그때 불신앙을 고집한 유대인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담대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발언 태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성을 지적한다. 바울이 여기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 요지는 이렇다. 곧, 이
사야가 말한것을 보아도, 유대인들이 옛날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알도록 가르침이 된것
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불신앙은 무식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19절 참조), 그
들의 교만과 강퍅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곧, 여호와를 찾노라고 하면서 실상은 불신앙한 유대인들은 버림이 되고,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은 주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을 말함이다. 이 귀절 하반도
역시 같은 뜻이다.
롬 10: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 이것은 사 65:2의 인용이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알도록 가르치며 권면하였어도 그들이 순종하지 않은 사실을 탄식함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도 저렇게 교만해지고 강퍅해져서 불신앙한 일은,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다. 바울의 시대에도 그들이 그리하였다. 그들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결론된다(19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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