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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9:1,2
   양심의...증거 - "양심"이란 것은, 헬라 원어로 쉬네이데시스인데 "함께 안다"는 뜻이다.  2:15
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
하여라 - 인간의 타락된 후 양심은 어두워져서 진리의 표준은 될 수 없으나, 옳은  것
이면 행해야 된다는 명령의 역할은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허물을 반성할  때
에는, 양심의 작용이 사실 그대로를 마음 속에 고발한다.  그러므로 양심의  증거라고
하면, 그것은 진실한 증거라는 뜻이다.  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한다 함은,  그것
이 성령님의 인도와 감화 밑에서 진리를 위반함이 없이 증거함을  말함이다.   사람은
정직하게 말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순전히 정직하지는 못한 적이  많다.  
그 이유는, 사람은 육체에 속한 생각과 감정에 끌려서 그릇되이 판단하기 쉬운 까닭이
다.  그러나 중생하여 성령 안에 있는 양심은, 진리대로 판단할 수 있는 양심인  만큼
(딤전 1:19), 옳은 증거를 할 수 있다.

 

 롬 9:3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 이 말씀은, 신학상으로  이
해하기 어려운 듯이 보인다.  사도 바울이 윗장 끝에, 신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사도의 이  말은  가상
(假想)이고, 실제적 가능성을 말함이 아니다.  여기 이 본문에 "저주  받음을  가리킨
다.    랍비   문학에도,   극도로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대신     아나데마            
      
(*                 )인데, 여기서는 남을 대신하는 의미로  저주  받음을  가리킨다.  
랍비 문학에도, 극도로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대신  아나데마(*                  )가
되기 원한다는 사상이 있다(Lietzmann).  이와 같은 사상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도 있
으니, 예컨대 고후 13:7, 9등이다.  사도 바울이 남을 사랑하는 이와 같은 열정은, 예
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이다(요 15:13).  과연 이것은 모든 전도자의 모범이다.  복음
을 전한다고 함은, 벌써 남을 긍휼히 여기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루터(Luther)도
바울의 이 말에서 사랑의 진리를 발견하다.  곧, 사람은 자기 자신을 극도로 미워해야
남들을 극도로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이다(einer durch das  Zeichen  des  hochsten
Hasses wider sich  selbst  die  hochste  Lieve  zum  andern  offenbar  macht.  -
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 301).

 

 롬 9:4

  양자 - 이것은, 헬라 원어로 휘오데시아(*                   )인데, 본래  아들이
아닌 자를 법률상으로 아들이라고 정함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양자적 관계를 가졌다.  그것은, 그 민족 중 개인개인에 대한 관계
가 아니고, 신정 국가(神政國家)에 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  뿐이다(출  4:22;  신
14:1, 32:6; 사 1:2; 렘 31:9; 호 11:1; 말 1:6).  이스라엘이 신정 국가로  하나님께
양자된 것은, 신약 시대에 신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기업의 양자될  사실을
예표한 것이다.
   영광 -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사실을  상징한다  (출
16:10, 24:16; 레 9:6, 23).
   언약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 일은, 아브라함 이후에  거
듭거듭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넓으신 긍휼로써 자진하여 체결하신  것
이다(창 15:18, 17:2; 출 19:5, 31:16, 34:10).
   율법을 세우신 - 모세로 말미암은 율법은, 이스라엘 한 민족보다 온 인류에게 관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먼저 받은 것은, 큰 영광이다(신 26:18-19).
   예배 - 이것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에배하는 법이니, 그 주요 부분이  제물(祭物)이
다.  제물에 대하여는 레위기 책이 많이 말하는데, 그것은 속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다.  이 속죄 제물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의 피(생명)를 죄 값으로  내는  것이니,
만고(萬古)에 있어서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제물 드린 법은, 하나님께  향
연(饗宴)을 드리는 의미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만족시키는  윤리적인
것이다.  이런 윤리적 제사법은, 이방에 없었던 것이다.
   약속들 - 이것은, 언약과 관련되기도 하였고, 예언자들의 예언 중에도 나와  있다.
이것들은, 아브라함 이후 모든 족장들과 예언자들이 받아 기다렸던 것으로서, 예수 그
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행 26:6; 갈 3:16-21; 히 7:6).

 

 롬 9:5

  조상들 - 유대인들은, 그 족장들에게 대하여 비상한 존경을 가졌다.  바록의  계시
록이란 책을 보면, 세상이 족장들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까지  과장적으로  말하였다.  
예수님의 때에도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우리의 아버지"라 하여  자긍한
것이다(행 3:13, 7:32).  성경의 말씀도, "조상들"(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조
상들)을 위대하게 생각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특수한 총애(寵愛)를 입은  까닭이
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
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이 귀절은, 귀점(句點)이 불확실하게 된 문제로  인하여,
번역상 서로 다른 의견들이 나왔다.  (1) 위의 한역과 같은 번역이  그  하나요,  (2)
"육신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도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  세세에
찬양을 받으시리로다"라고 하는 번역도 있으니, 이것은  한역의  각주(脚註)와  같다.  
(3) "육신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고 만유의 하나님은 저희의  하나님
이시니 세세에 찬양을 받으시리로다"라고 한다.  위의 세 가지 번역 중  첫째  번역이
가장 옳은 듯하다.  바울은, 에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나신 사실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은혜 받은 이스라엘이 그때에 복음을  믿지  않음에
대하여, 그는 크게 근심하였다.

 

 롬 9:6

   이 귀절 이하 11장 끝까지에는,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까지 실
패했거나 무실(無實)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역시
복음의 영원한 경륜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에게  의외사(意外事)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복음 역사는,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스
라엘 사람들 중에도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복음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헬라 원어 데(*       )라는 말의 번역이니, 여기서 "그러나"라는 뜻을  취함
이 오히려 문맥에 적합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곧, 위에 표시된 바울의  큰  근심은,
결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무실해졌다고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일반 신자들도 어떤 문제로든지 근심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까지 비애(悲
哀)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근심은 한도가 있고, 그  위로와
해결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성의(聖意)에 그 전부를 맡기는 신앙은,  큰
근심 중에서도 다시 기쁨을 가진다.

 

 롬 9:7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가 칭하리라 - 곧, 하갈에게 난 이스마엘의  계
통에서 택한 백성이 날 수 없고, 오직 이삭의 계통에서 날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소실에게서 난 자이므로 택함이 되지 못하였다는
오해가 일어나기 쉽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 아래 11-13절에 에서와  야곱의  실례를
들었다.  그들은 꼭 같이 리브가의 아들들이었으나, 그들 중에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싶은대로 택하신 사실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일은, 전적으로  그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신 것이다.

   

 롬 9:11

  택하심을 따라 - 이 세상 나라에 이민(移民)하는 것도, 그 나라의 선택에 의한  입
국 허가를 받아야 실행된다.  그와 같이 하늘 나라에 갈 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
은 자들 뿐이다.  우리가 알기에, 인생들 중에는 천국에 가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  받
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결정하셨다면, 그들이 그렇게
될 이유가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결정을 무효로 돌아가게 하시지  않
으신다.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빼신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본문에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
요"(6절)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된다.

 

 롬 9:13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말 1:2-3참조.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
셨다"함은, 여기서 심리적인 증오(憎惡)를 말함이 아니고, 택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혹자는 택하고 혹자는 택하지 아니하신 행위는, 무자비한 듯이 느끼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심을 모르고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자
이신고로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 기쁘신 뜻에 의하여, 그를 거슬려 죄인된 인
생들 중에서 어떤 자들을 선택, 혹은 유기(遺棄)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쁘신 뜻
대로 하신 선택은, 전자(專恣)행위가 아니고 오직 그의 지혜와 사랑과 공의로 하신 것
이다.

 

 롬 9:14-17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에 관한 제일 가상 질문(第一假想
質問)이다(제 이 가상 질문은 19절에 있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곧,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고 한 말씀(출 33:19)이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자기 공로로 됨이 아니고, 다만 하
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구원 실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의적  행사(任
意的行事)라는 절대적 자율자(自律者)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을 제한하거나 규정하거
나 할 아무런 타율(他律)도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정당하다.  곧,  (1)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심은, 그가 자의(自意)대로 은혜를 주시려면 주실
수 있는 기쁘신 뜻으로 하신 일이다.  그것은, 월벌톤(Warburton)의 말과 같이,  어떤
여자가 고아원에 가서 한 아이를 자기 아들로 택하여 데리고 간 것과 같다.   우리는,
그 여자를 불공평한 자라고 할 수 없고 불의한 자라고도 할 수 없다.  (2) 죄로  말미
암아 망한 세상 사랑들을 모두 다 구원하시면, 죄의 무서운 결과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나타낼 길이 없다.  (3) 제한된 구속(球贖)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받은 구원이 별다른 은혜로만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하고, 깊은  감
사와 찬송을 세세토록 드리게 한다.

 

 롬 9:19-21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 이것은 제 2가상 질문이니, 위의 18절 끝에  나
온바 "강퍅케" 하신 사실에 관련하여 묻는 말이다.  곧,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불
택자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니, 그가 바로를 허물하실것 없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
다.  이 질문도 역시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한
답변은,
   "이 사람"이란 말로 시작하여, "너는 사람이니 사람의 척도로  하나님을  헤아리지
말아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니, 사람을 거룩하신 임의대
로 주재하실 권이 없겠는가?"하는 뜻을 표시한다.  하나님이 바로를 강퍅케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가리켜 악의 직접 책임자라고 함은 어리석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 함은, 하나님이 그를 권고하시지 않고 내버려 두시므로, 바로 자신의 악한  마
음이 제멋대로 강퍅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의 걍퍅하게 된  죄
의 책임자가 아니시다.

 

 롬 9:22

\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그
에게 자기의 형상을 주셨다.  그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
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 목적을 영원히  가지시고  인간과  관계하신다.  
그는, 사랑으로만 나타나시지 않고 필요에 의하여 공의를 드러내시려고 재앙이나 징계
를 보내신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진노의 권능을 인간에게 알게 하시려고, 악한 자들
의 제멋대로 행함을 그대로 두신다.  악한 자가 없으면,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악한 자를 급히 멸절시키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악한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심과 벌 주시는 일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그릇은 누구인가?  그것은 24절 이하에 보여준
다.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
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 여기 "예비하신"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프로에
토이마센이니, 앞절에 "준비된"이란 말과 다르다.  뒤의 것(22절의 것)은, 그 진노의
그릇이 된 자 자신이 멸망에 합당하도록 자기 자신의 행동으로 준비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귀절의 "예비하신"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광받을  그릇을  선택
하신 것을 가리킨다(Greijdanus).  이 부분 말씀에서 사도의 목적한 바는, 하나님의
에정을 말하려는 것 뿐 만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구별 행위의 주권성(主權性)을 지적
하려는 것이다.

 

 롬 9:24-26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 -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택 행
위에는 민족 차별이 없음을 역설(力說)하면서, 셩경의 예언을 근거로 인용한다.  예언
성취로 된 일이면, 그 일이 참되다.  그것에 대하여는, 우리가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
아야 된다.
   여기(25-26) 인용된 예언은, 호 1:10, 2:23의 인용이다.
   내 백성이라 - 곧, 유대인들이 포로 되어 이방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 흩어져  있
는 곳에서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서 회복되는 일이 있을 것을 에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예언은, 간접적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서 복음을 받고 천국에  들어
가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운동은, 돌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해 두셨던 이방인들을 이제 부르시어 일으키신 것 뿐이다.

 

 롬 9:27-29

  이 귀절들은 사 10:22의 인용인데, 유대인들도 오직 선택(選擇)의 원칙대로만 구원
을 받는다고 확증한다(24절 참조).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남은 자"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세아르(*         )
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징벌할 때에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부분(하나님의  택하신
부분)을 가리킨다.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완전히
이루시고야 만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가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택함을 입은 부분)을 앗수르의 멍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앗수르를  멸절
하기로 정하셨다는 말이라고 한다.
   씨를 남겨 둠 - 이것은, 앞에 있는 27절의 "남은 자"란 뜻과 같다.

 

 롬 9:30,31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 - "이방인"은 모세의 율법을 몰랐고 따라서 그것을  지켜
의인이 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믿음에서 난 의 - 곧, '복음을 믿음으로 거저 얻는 의'란 뜻이다.
   의의 법을 좇아 간 -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을 자력으로 행하여 의(義)를  얻으려
는 길을 간 것이다.

   

 롬 9:32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 -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그  때에
유대인들 중 불신자들이 많았다.  "행위에 의지함"이라고 한말은, "행위에 의지하여서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함"이라고 번역함이  적합하다.   리츠만(Lietzmann)은,  여기
"처럼"(*       )이란 말이, 이스라엘의 노력의 주관적 착오(主觀的錯誤)를  지적한다
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신 복음의 의는 받지 않고, 자행 자의(自行自意)의  허
망을 일삼았다.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 "돌"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눅  20:17-18;  벧전
2:4), 그리스도의 인격과 진리의 견실성을 가리킨다.  여기에 거스리는 자는 걸려  넘어지고, 이 돌이 사람들 위에 최종으로 떨어져 심판 행위를 할 때에는 그들이  부스러진다고 하였다(눅 20:17-18).  그리스도의 진리의 경도(硬度)를 이길 아무런 다른  돌도 없고 쇠(鐵)도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에 거스리다가 걸려 넘어진 것이다.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것은, 사 28:16, 8:14의 혼합 인용이다.  "부끄러움"이란 말은 실패를 가리킨다.  반석 같은 복음을 믿는 자는 실패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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