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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8:1
  그러므로 - 이것은, 위의 말씀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곧, 인간이 제힘으로는 도저
히 죄를 이길 수 없으니(7:24).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 함은,  바울
의 신앙 사상에 흔히 나오는데, 그 연원(淵源)은 예수님의  말씀(요  15:1-7,  17:21,
14:20)에 벌써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여 일체
(一體)가 된다.  따라서 그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 값인 죽음을 대신하고, 그의 부활은
성립시킨다.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타크리마인데, 법정 용어(法廷用語)로서 유죄 판결을 가리키다.   인
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정죄는, 그 인간의 사망을 의미한다(7:24).  다만 그리스도  예
수와 연합한 신자들은 이것을 면한다.

 

 롬 8:2

  이는 - 헬라 원어로 가르(*         )인데, 위의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한 말씀에
설명을 가하려고 나온 접속사(接續詞)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
이라 -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오시게 된 보혜사 성령님의  지배
하는 힘("법"이란 말의 意義)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에 따라서, 성령님은 급하고 빠른 바람처럼(행 2;2)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영생 주시는 역사를 하시고 계시다(요 16:7, 14, 14:16).  이 축복을
받은 자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놓임을 받아서 영원히  하
나님의 아들(그리스도)과 같이 하늘 아버지의 집에 거할 자가 된 것이다(요 8:34-36).  
그러므로 이런 은혜를 받은 자들은, 정죄에서 놓였으니 만큼, 그 놓이기 전에 있던 우
울, 공포, 번민을 내버리고 늘 감사해야 된다.

 

 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  헬라  원문에는  가르        
(*         )라는 이유 접속사가 있어서, 이 귀절이 윗절의 설명문임을 밝힌다.  윗말
에 말하기를, 우리가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렇다.  인간이 율법으로 말미암아서는 정죄를 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부패한 인
간성("육신"이란 뜻)은 율법을 실행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의(義)에 대한 원수는 "육
신"이다(7-8).
   죄를 인하여 - 이것은,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하여"란 뜻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죄를 취급하기 위하여"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
게 크심을 표시한다.  "자기 아들"이란 어귀의 "자기"(*               = 헤아우트)는
어순상(語順上)으로 강세(强勢)를 취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을 위하여  누
구보다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 있는 육신의  모
양"이란 말은, 예수님에게 죄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예수님의  취하
신 인성(人性)이, 범죄 전 아담의 영광스러운 인성이 아니고 범죄 후 아담의 영광  잃
은 인성이란 뜻이다(Greijdanus).  땅 위에 오셨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미천(微賤)해지셨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미천한
인성을 취하셨지만, 죄는 없으시다는 사실이다(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신성(神性_과 인성을 구비하셨다는 교리라는 성경의 교훈이요,  교회
가 굳게 지켜온 교리이다. 이레네오(Irenaeus)는 그리스도께서 참 사랑이요 참 하나님
(Vere  homo  vere  deus)이심을   주장하였고,   터툴리안(Tertullian)과   어거스틴
(Augustine)도 그렇게 가르쳤으며, 개혁 교회는 이 교리를 기독교의 중심 교리들의 하
나로 가지고 내려왔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성품의 결합은, 어떤 방법에 의한 것인가?  
그것은, 품성은 둘이지만 위(位)는 하나로 하는 방법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성을 가지시면서도 위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위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위
(位)에 있어서 인간이었다면, 그에게 있어서의 신성과 인성과의 결합이란 것은,  그와
하나님과의 교통만이 가능할 정도이었겠고, 인류의 대표로서의 중보(仲保)자격을 가질
수  없었겠다(H.  Bavinck).   하르낙(Harnack)은,  그  "기독교의  본질"이란   강의
(1899-1900 겨울, 베를린)에서, 신성과 인간성과의 결합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하나
님과 사람의 대등적 교제(對等的交際)를 의미하는 정도의 것인 것처럼 논술했으나, 그
것은 성경의 교훈과 부합하지 않는다.  에수님은, 위(位)에 있어서 하나님이신고로 인
간 이상의 역할과 공효(攻效)를 세우셧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신성(神性)으로  받으
신 고난을 가리켜 말한다.  그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 받으신 것이다.  오랫동안 예언적 표지(標識)로서 양을 속죄 제물로 하던  것이,
이제는 그 실물(實物)의 성취로서 인류의 대표격을 가지신 이의 육신으로  하게  되었
다.  이 속죄 제물이야 말로 완전 무결하여 영원토록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여호와 자신)이 아니고는 할 자 없다.   사람
은, 다 같이 죄인이니 어떻게 남을 구원할 수 있으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
시고 고난 받으신 것만이,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도 남는다.  하나님의 아들
이 인성을 취하시지 않았으면, 그가 (1) 율법 아래 계실 수 없고, (2) 우리를 체휼(體
恤)하실 수 없고, (3) 우리와 연합할 수 없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 - 이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성격을  말
함이니,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성화(聖化)의  도상에
있는 자들이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 - 곧, 그리스도께서 믿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 육신에 정죄를 받은 결과(3절 참고).  그들이 객관적으로는 공로 없이  칭의(稱義)
를 받는다.

 

 롬 8:5

   육신 - 7:5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생각하나니 -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프로네오(*               )니, 지적으로만  아
니라, 감정과 의지로써 사모하여 추구함을 의미한다(Greijdanus).

 

 롬 8:6

  사망...생명과 평안 - 육신의 생각은 곧 죄악이니만큼,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
나님을 떠나도록 만들어준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사망이다.  그리고 영(성령)에  속
한 생각은 하나님을 찾아 모신다.  그것은 진정한 생명과 평안을 가져온다.  이  세상
이 사망 세상이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참신자만은 영생의 공급을 받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계 장치에 의하여 공기의 공급을 받고 깊은 물 속에 들어가서  오래  동안
일하고 있음을 본다.  깊은 바다나 강 위에 다리를 놓을 때에, 공사하는 공인(工人)들
이 그렇게 한다.  사망의 골짜기인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성령의 은혜의 줄만을  게속
적으로 붙잡고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이 영생의 생활을 지금부터 누릴 수 있으며, 하나
님의 일도 할 수 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곧, 사람이 마땅히 위할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함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이다.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에게 대하여 적성(敵性) 행위를  취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주 부패하여 악의 근성이 된 까닭이다.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도, 이와 같은
부패의 잔재(殘滓)가 있으나, 그것의 지배는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도 자기에게
대하여 방심(放心)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가 방심하면,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을 적대
하는 죄의 유혹을 받는다.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육신에 있다함은, 몸  안
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부패한 인간성(혹은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 인간성)의  지배
를 받는다는 뜻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여기 이른 바  "하나님
의 영"이란 말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아랫말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과 같다.  "너희
속"이란  문구는,  교회라는  단체  뿐  아니라  각  개인  신자의   속을   가리킨다
(Greijdanus).  여기 이 문구가 개인 신자도 의미한다고 할 이유는, "누구든지"란  말
이 알려준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신자)을  의미한
다.

 

 롬 8:10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
석이 세 가지 있다.  곧, (1) "몸"(*           = 쏘마)이란 말은 생리적 신체(生理的
身體)를 의미하지 않고 부패의 총체(總體)를 의미함인데, 그것은, 죄  때문에  그렇게
죽은 상태에 있다.  그러나 "영"(곧, 거듭나게 하는 성령)은 그 부패한  사람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하시고 계신다(Calvin).  (2) "몸"은 죽음의  몸(7:24)을  가리키는데,
단지 생리적 신체만 아니라 죄악의 지배를 받는 인간적 요소 전부를 총칭한다.   그것
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은 신자의 심령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의(義)때문
에 생명을 얻는다.  여기 "의"란 것은, 그리스도의 칭의(稱義)의  의와  성화(聖化)의
운동을 말함이다(Greijdanus).  (3) 신자의 "몸"은 그의 죄로 인하여 갈보리 산  위에
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었고, 영(하나님의 성령)은 살려  주시는  생명력으로서
지금 그 신자의 속에 계시다.  여기 "의"란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
다(H.N. Ridderbos).

 

 롬 8:11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신자들을
부활시키실 이는 성령이시니, (1)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성령이시고,
(2)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이시다(고전 6:14; 고후 4:10; 빌 3;21).  그러므로 우리의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장차 있을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인(印)친  표이다(엡
1:13; 고후 1:22).

 

 롬 8:12

  우리가 빚진 자로되 - 이것은, 신자는 선을 행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다.  그 책임감의 원천은, 위(9-11)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
령이다.

 

 롬 8:13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여기 "영"이란 말은 성령을 의미한다.  "몸
의 행실"이란 말은 단지 신체의 생리적 활동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죄악에 지배
된, 모든  구체적  활동을  말함이다.   "행실"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프락사이스             
(*                 )인데, 여기서 악한 행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
람"이, 악행을 떠나면 떠날수록 하나님과 더욱 가까와지나니, 그것이 진정한 삶이다.

 

 롬 8: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여기  "인도"한다
함은 강제로 함이 아니고, 내적(內的)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며 또 감화시켜 악행을  버
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욱더욱 가까이 나오도록 하심이다(요 6:45).  성령의  인
도에 대한 신자의 순응에 관하여, 루터(Luth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그것
은 감심으로 옛사람을 버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라도 유쾌하게 거부함이다.  그것은 죽음, 혹은  죽음에  소속된
것들 앞에서도 놀라지 않음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땅에 속한 기쁨이나  보배까지
도 경히 여김이다.  그것은, 보배를 자발적으로 내어버리며 재앙을 환영하며 포옹함이
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신자의 속에 계신 성령의 역사
로 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Das ist nicht das Werk der Natur, sondern des Geistes
Gottes in uns, - 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 270).

 

 롬 8:15

  이 귀절은, 위에 말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대하여 해설한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 이것은, 요 8:34-36의 "죄를 범하는 자마
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
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
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라 함을 가리켜 말한다.  죄 있는 자가 이렇게 율법의 속
박을 받아 종처럼 되는 사실에 대하여는, 갈 4:7, 24, 5:1도 밝히 말한다.  그런데 예
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이런 속박에서 풀어주는 것이고 다시 더 속박하려는 것
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시로 의식적(意識的)으로 혹은  무의식적으
로 복음을 제 2의 율법, 혹은 개정된 율법으로 잘못 보는 과오를 범하는 때가 종종 있
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양자"란 말은 헬라 원어로
휘오데시아(*                   )인데, "아들로 둔다"함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 "양
자"란 사상이 로마와 헬라의 법률 제도에서, 혹은 헬라 신비 종교의 예식에서  유래되
었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J.   L.   de   Villiers,   Die   betekenis   van                 
*                   in die briewe van Paulus, p. 48. W. Bousset,  Die  Schriften
des N. T., p. 57).  그러나 이런 의견은 옳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양자로 채납하신 구약 사상에서 유래되었다(9:4).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의 양자됨은,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죄하여 주셔서 법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대
우를 받게 하셨다.  (2) 그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내적 인연(內的因
緣)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곧,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중생의 생
명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새롭게 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
혼을 새롭게 하심을 가리킨다(벧전 1:23-25).  물론 이와 같은 내적  인연은,  그것의
법적 성립, 곧,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속죄 사실 위에서 성립된다.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지 않으셨으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아바"(*           )란 말은 아람말로 "아버지"란 뜻이오, "아버지"란  말은  헬라어
파텔(*             )의 번역이다.  이렇게 두 나라 말로 글 뜻을 거듭 말한  목적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부르짖음의 열성과 강력(强力)을 나타내려는 것이다(Greijdanus,
De verhaling geeft grooter intensiteit en innigheid. - Romeinen 1-8, p. 370).
   "부르짖느니라"란 말은 헬라 원어로 크라조-(*             )니, 큰 소리로 부르짖
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부르짖음은 신뢰심을 가진 것이어서, (1) 그 부르짖는  자
가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조금도 없는 것이고, (2)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을 확실
히 느끼는 것이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카
이퍼(A. Kuyper)는, 사람의 중생한 내막에 대하여 얼마 동안 자타(自他)가 모르는  수
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인  사실이  증명된
다.  그 증거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신앙심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물론 윗절(15절)의 내용이 뒷받침 한다.  위절 끝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사
실을 말한 뒤에, 이 귀절은 그 사실(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실)의  이유를  해설한
다.  곧, 그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격에 대한 성령의 증거라는 것이다.   칼빈(Calvin)
은 위의 해석과 같은 의미로 말하기를,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여
주심과 함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신앙심) 담력이 생긴다"고  하
였다(Commentary upo the Epistle to the Romans, p.  313).   그  뿐  아니라,  루터
(Luther)도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가 우리의 신앙심이라는 의미에서  다음
과 같이 말한다.  곧, "우리는 믿는대로 무엇이나 소유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확실히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
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Denn wer  in  festem  Glauben
und Hoffen vertraut, dass er ein Kind Gottes ist, der ist ein Kind  Gottes,  was
ohne den Geist niemand vermag.- 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 274).

 

 롬 8:17

  자녀이면...후사 - 현세에 있어서 누구를 하나님의 자녀라 함은, 벌써 그가 장래에
받을 영광의 어떠한 것을 암시한다.  그 영광은, 장래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을  바
기업이다.  여기 "후사"란 말은 기업(基業)을 받을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 "하나님의 후사"라 함은,  그  기업의
극히 영광스러운 사실을 지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함은 기업의 극히  안
전함을 알려 준다(벧전 1:4).  이 기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벌써 받으신 것
이니,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을 받을 처지에 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이  귀절
은, 우리가 현세에서 고난을 받은 값으로 장래에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
스도와 우리가 일체임으로 동고동락하게 되는 사실을 가리킨다.
   버틀러(Butler)는 말하기를, "우리의 이 세상 생활이 캄캄할수록, 여생은 더욱  명
랑해진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성
령의 위로와 감화의 역사가 더욱 강하다.  그런데 여기 "그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함
은, 부활의 영광을 가리키지만 죽은 후의 천국 생활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사도는,
자기가 별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영광으로 알았기 때문이다(고후 5:8).

 

 롬 8:18

  생각건대 - 이 말의 헬라 원어(*                       = 로기조마이)는  상상(想
像)이 아니고 구체화(具體化)한 확신을 말함이다.  이것은, 여기서, 이 세상 고난보다
내세의 영광이 말할 수 없이 큰 사실을 확실성 있게 여긴다.  칼빈(Calvin)은  별세하
면서 이 귀절 말씀을 거듭 외우다가 운명하였다고 한다 .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피조물"이란  말의
헬라 원어 크티시스(*               )는,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천사
까지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계(被造物界)를 가리킨다고 하는 학설이 있다.  그러나  여
기서는 이것이 천사까지 포함하지 않은 세계의 만물(인간을 제외한)들을 가리켜  말한
다(Hodge).      "고대한다"는     말의     헬라     원어는         아포카라도키아                          
(*                            )인데,  "머리를  쳐들고  기다림"을  뜻한다.   루터
(Luther)는, 여기서 바울의 사고 방식이 일반 철학자(一般哲學者)들과 다른 점을 지적
하였다.  곧, 철학자들은 만물의 실체(Wesen) 곧, 그 근본을 사색해 보려고 하나,  바
울은 만물의 있는 그대로의 헛됨을 보고 그것의 지금 지니고 있지 않는  장래의  것을
찾아 보았다는 것이다(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p. 276-277).  바울은 이렇게
만물의 모습을 보고 그 지향(指向)한 목표를 내다보았다.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 우주 만물이 허무해진 것(쇠
하며 부패함)은 그것들이 자원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이 완성될 때에 그것들도 영광에 이른
다.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
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여기 "피조물"이란 말에 대하여는, 앞의 19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이 귀절은, 피조물의 소망의 근거를 보여 준다.  그것들
의 소망 근거는, 인간의 소망 실현에 달렸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저주
받을 때에 그것들도 따라서 저주를 받았고(창 3:17-18).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대
종말(大終末)에 부활의 영광을 얻을 때에 그것들도 새로워진다(계  21:5).   그러므로
그것들도 무언 중 그때를 기다린다.  피조물이 기다린다는 것은 인격화(人格化)의  표
현이다.  "이르는 것"이란 말은 입참(入參)한다는 뜻이다.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  "함께"
란 말은 "만물이 다 함께"란 뜻을 가진다.  이것은, 그것들이 무의식 중에라도 종말관
적 소망을 사모하여 탄식함을 의미한다(고후 5:2, 4).  피조물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
는 모든 고통 때문에 나타내는 비참한 현상은, 일종의 탄식이다.  칼빈(Calvin)은  이
귀절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피조물들도 유구한 세월 동안에 계속하여 고통하는데, 우
리는 짧은 일생 동안에도 환란 때문에 검약해진다면 어떻게 용서 받을까?"라고 하였다
(Commentary upon the Epistle to the Romans, p. 219).

 

 롬 8:23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 "처음 익은 열매"는, 우리가 현세에서  받은
성령을 가리켜 말한다.  왜 성령이 우리에게 "처음 익은 열매"와 같은가?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을 받은 생활은, 천국을 완전히 누리기 전에 벌써 천국의 첫 맛을 보는 것
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구속 - 이것은, 위에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받을 부활의 영광
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내세의 영광은, 질적으로 보아서 허물한 것에 정반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서 저자가 말한 바 이 세상의 무상성(無常性),  변전성(變轉性)
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위의 귀절들이 말한 바와 같이, 우주가 그 허무성의 치료제
로서 이 영광을 고대하나니, 허무성의 치료제가 어찌 다시 허무성을  가진  것이리요?  
이것은 우주 안에서 생기는 개량이 아니요 우주 밖에서 오는 완전한 갱신이다.

 

 롬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 이 귀절은 가르(*         )라는 이유  접속사
("왜 그런고 하면")로 시작하면서, 위에 있는 "기다리느니라"란  말을  설명해  준다.  
우리가 현세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양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로서 받을 기업은  아
직까지 받지 못한 미래의 것이다.  그것은 소망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서 필요한 것은 기다리는 인내이다.

 

 롬 8:26

  이와 같이 - 내세의 영광에 대하여는, 피조물과 및 하나님의 자녀된자들이  탄원할
뿐 아니라, 성령님도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대신 기도하신다.
   연약 - 이것은, 영적 무지로 인하여 기구(祈求)할 바를 모름이다.  우리  신자들은
기도할 줄 모른다.  우리의 도덕도 부패하였지만, 기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기도로
써 선을 행함보다 혹시는 가증스러운 일을 많이 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성령님
의 대신 기도가 절대 필요하다.
   말할 수 없는 탄식 - 이것은,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 없는 탄식이다.   성령님께서
이렇게 깊은 탄식을 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의 부패가 어떻게 크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 1:6).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성령님께서 우리를 감동시켜 기도하게 하시는 일도 있지만,
친히 기도하시는 일도 있다.  하늘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시
고(히 7:25), 땅에서는 우리의 심령 안에서 성령님이 대신  기도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접근하사 그 십자가의 공로를 가지시고 그리하시며, 성령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시는 현장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리하신다.  그런데 성령님의  이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을 구히신다고 하니(27절), 연약한 자들의 구원은 영원히  성취
된다.  요일 2:1-2; 롬 8:34 참조.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
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여기 이른바, "마음"은 신자들의 마음을 가리킨다.  성
령은 신자들의 마음에 계시어 그들의 구속(球贖)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신다(5:5;  갈
4:6).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나니, 신자들의 구속 완성을  위한  그의
기도가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장래 구속이 확실한 근거 중 하나
이다.  바울은, 벌써 17절에서도 신자의 받을 구속의 확실성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확
증한 바 있다.

 

 롬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 이 "사랑"은, 그 질로써 헤아림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다
시 말하면 그 사랑은 순결해야 된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말하기
를,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참되이 사랑하려면 깨끗하게 사랑해야 된다.  곧,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세상
에 속한 유익을 위할 것도 아니며, 심지어 마음에 위안을 얻으려 할 것도 아니고,  혹
은 영원한 보상을 위할 것도 아니고, 다만 그의 무한하신 선과 존귀를 위해서 해야 된
다"라고 하였다.  택함을 입은 자(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의  양(羊)
이 된 자들만이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를 신뢰함과 순종함이다(요 14:23).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어떤 사본들(A.B)에는 이 문구에 "하나님께
서"(*              )란 말을 지니고 있다.  그 말을 붙여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동시켜 선을 이루시느리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란 말이 있건  없
건, 그 뜻은 같은 것이다.  범사가 협력하여 성도의 구원에 유익되게 하시는 이는  오
직 하나님이시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성도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능하
신 통치에 의하여 그의 구원에 도움이 될지언정 해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잠 16:4).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이 성도에게 유익되도록 하시지만, 그들이 그 모든 일의 진행  도
중에 참아 견디지 못하므로 그만 그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다.

 

 롬 8:29

   미리 아신 자들로...미리 정하셨으니 - 이 귀절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예정은 예지(그 사람이 장차 어떻게 행할  것
을 미리 아심)에 따라서 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예정이 아니고  사람
이 행한 그대로 되게 해 주심이다.  성경은 그런 예정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기  "미
리 아심"이란 말은, 미리부터 사랑하여 돌아보심을 의미한다(시  1:6;  호  13:5;  암
3:2; 마 7:23 참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 우리가 영원 전에 예정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성
결과 영광에 있어서)을 이룸에 있다(고후 3:18).  그러므로 현세에 있어서, 우리가 우
리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에정에 들었는지 아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가는가 더듬어 보아 알 수 있다.  그
리스도의 형상의 최소 한도는,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일이다.   그러
므로 버틀러(Butler)는 말하기를, "내가 택하심을 받았는지 알려면, 내가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택하는가 알아 보라고"고 하였다.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 - 예수님이 신자들을 가리켜 "형제"들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부활하신 후 선포하신 것이다(요 20:17).  그러므로 예수님과 그 신자들과의  형
제 관계는, 부활과 관련을 가진 것임이 분명하다.  에수님은 선두의  부활자이시고(계
1:5),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서 부활할 처지에 있다.  그러므로 이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은 맏형이요, 신자들은 동생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워필드(Warfield)는, 이 귀절 내용을 가리켜
"황금 사슬"(Golden chain)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정 교리의 내용을 명확히
보여준다.  택함 받은 자들은 끝까지 구원 받고야 만다.  내세에  "영화롭게"될  자들
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미리 정하신 그들"뿐이다.  "부르심"은, 복음을 믿도록 불러
내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됨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
시므로 되는 것이다.  "의롭다"하심은, 죄만 있고 의(義)는 없는 자를 그리스도의  공
로로 거저 의롭다고 간주해 주심이다.  "영화롭게"하심은, 신자를 부활시켜 주님의 영
광에 참여케 하심이다.
   이 귀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자초지종(自初至終) 그 예정하신 사람들을 구원하
여 주신다.  그러니 만큼,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장
래의 구원도 확신할 수 있다.  특히 여기 모든 동사(動詞)들이 과거사로 되었으니, 그
것도 택함 받은 자의 장래 구원이 확실할 것을 보여주는  예언적  확신(豫言的確信)의
표시이다.

 

 롬 8:31,32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 사도 바울은, 윗 귀절에서 구원 게획에 대
하여 말한 후 여기서부터는 그 효과를 선언한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리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앞으로 우리에게 주시지  못하실  것이
무엇이랴?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택한 사람이란 말에 대하여, 골 3:12; 딤후 2:10; 딛 1:1; 고전 1:27; 엡 1:4을  참조
하여라.  신자들이 정죄 받을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을 의롭다고 하신 이가  하
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에 있어서는 의롭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고 간주해 주셨다.

 

 롬 8:34

  이 귀절은, 그리스도의 지극히 큰 권세와 사랑의 보호 아래 있는 성도들을  그리스
도에게서 분리시킬 아무 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권세만 있고 사랑이  없어도  영원히
우리를 보호하지 아니하실 것이고, 사랑만 있고 권세가 없어도 역시  못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1) 우리를 사랑하사 죽으실 뿐 아니라, (2) 사망을 이기는  권세
도 가지사 다시 살아나시고, (3)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구주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지게 될  이유는
영원히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롬 8:35-37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이 말씀은, 이 세
상에 있는 최대 한도의 환란과 고통을 들어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참된  성도
를 끊을 환란은 전연 없다는 것이, 여기서 강조된다.  "환란"이란 말은, 이 아래 나오
는 모든 어려움을 총칭하는 것이다.  "곤고"는 피할 수 없이 되어진 역경을 말함인데,
성도는 그런 때에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다(시 4:1).  "핍박"은 도리어  성도에
게 복이 된다(마 5:10-11).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 이 말씀은 시 44:22에서  인용되었는
데, 그 뜻은, 신자가 수난함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도리어 상칙(常則)에 속한다는  것
이다.  "종일"이란 말은 "항상"이란 뜻과 같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이것
은, 우리 신자들의 유족한 승리가 우리 자신의 힘에 달렸다는것을 전연 부정한다.  이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유족한 승리가 달렸다는 것이다.  이것
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보장한 우리의 구원의 안전성을 찬송하는 말씀이다.

 

 롬 8:38,39

  바울은, 위의 37절에 이어서 다시 택함을 받은 신자의 구원의 영원한 안전성을  역
설(力說)한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지금 땅 위의 성도들에 비교하여 더욱  행복되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들(땅 위의 성도들)보다 더욱 견고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늘 위에 있는 성도나 땅위에 있는 참 신자나, 그 영원한 구원을 받음에 있어
서 확고하고 안전하기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구원의 견고성(확고성)은,  우리의
어떠한 행실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그리스도)의 사랑에만  달려  있다(35,  39).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영원한 사랑은, 성도들이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그의 존재와 같이 불변동의 것이다.  성도라도  불행하게 일시적으로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실수로 말미암아,  그의  택함 받은 사실(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실)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참으로  택함 받은 성도라면, 언제든지 사람이 아는 중에나 모르는 중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일시 타락하였던 다윗도 돌아왔고, 베드로도 돌아왔다.   비유컨대, 신자는 산으로 올라가는 한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산  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가는 중 혹시 돌에나 나무에 걸려서 넘어질 수 있다.  그는,  넘어지므로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서 그 목표하였던 산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런즉 성도에게 어떤 일시적인 불행한 비행(非行)이 있다 하여, 우리는 글 즉시 멸망 받을 자라고 정죄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의 비행을 지적하여 경계할 뿐이다.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의미에서  권징까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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