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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7:1-3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
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여기서 "남편"은 무엇을 비유했으며, "여인"은 누
구를 비유했을까?  이 점에 있어서 두어가지 해석이 있다.  (1) 남편은  죄를  의미하
고, 여인은 믿는 자의 영혼을 비유한다고 하며, (2) 남편은 율법을 비유하고,  여인은
믿는 자를 비유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에
게 대한 율법의 정죄 관계는 죽은 셈이다.  그러므로 나는 은혜의  집에(은혜의  제도
아래)속한 것이다.  이 사변은, 한 개의 주관적 기분이나 해석의 것이 아니고 영원 불
변의 하늘법으로서의 존재이다.  누가 이 하늘법을 파기(破棄)할 수 있으랴?   그러므
로 신자는, 이런 불변의 하늘법 아래서 안식할 수 있다.  새로운 남편 곧 은혜의 집에
가게 된 그는, 그 죽은 옛 남편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와서 그를 도로 찾을까 두려워할
것 없다.

   

 롬 7:4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  곧,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우리에게 대한 율법의 구형(求刑)
관계는 죽은 것과 같이 되어, 그 효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
려 함이니라 - 신자가 율법의 정죄를 면한 목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가려는
것이고 가만히 있으려 함이 아니다.  그가 가만히 있으면, 깨끗이 쓸고  수리한  집에
일곱 귀신이 들어오는 후환(後患)이 있을 것이다(마 12:43-45).  신자는, 그  칭의(稱
義)된 그 시각부터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에 매진(邁進)해야 된다.   "열매"를  맺힘
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행실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거이다(요
15:1-8).  신자에게 맺힐 열매의 종류에 대하여는 갈 5:22-23을 참조하여라.

 

 롬 7:5

   육신에 있을 때 - "육신"(*          = 쌀크스)이란 말은, 살과 뼈의 지체들로  조
직된 "몸"을 의미하는 쏘마(*           )란 말과 다르다.  이 말(육신이란 말)은  여
러가지 의미를 가진다.  (1) 골격과 구분된 부드러운 살을 의미하기도 함(눅  24:39).  
(2) 영혼과 구분된 몸을 의미하기도 함(롬 2:28).  (3) 하나님의  강력하심과  구분된
인간이 연약성을 의미하기도 함(사 40:6).  (4) 내부(內部)와 구분된 외부를 의미하기
도 함(고전 1:26).  (5) 성결과 구분된 죄악성(罪惡性)을  의미하기도  한다(8:6;  갈
5:19)(W.G. Kummel).  이 마지막 다섯째가 본문에서 뜻한 것인데, 곧 사람이 그리스도
를 믿지 않는 때를 말함이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 이 말씀은  일견(一見)
이상스러워 보인다.  죄의 정욕이 어찌하여 선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발작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율법은 선한 것이로되 죄성(罪性)은 그것에게  순종치  않으려는
반동성(反動性)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것이 율법에 접근하면, 더욱 난동을 일으킨다.  
이것은 이 세상 법률에 대하여 국민의 태도가 그렇다 함이 아니고, 중생하지 못한  자
가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에 대하여 그런 반동적 태도를 가진다는 뜻이다.  중생한  자
도 아직 옛성품이 남아 있는고로 어느 정도 그런 반동적 태도의 발작을  가진다.   이
귀절에 대하여 칼 바르트(K. Barth)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땅 위에서 성숙하
고 균형 있게 서 있는 사람, 파쇄(破碎)되지 못한 사람은 실존적으로 불경건하다.  율
법은, 죽음에로 가는 길을 정지시킴보다는 거기로 달아나게 한다.  종교가 인간의  정
욕을 반대하지만, 그것도 역시 죄로 칭함이 된 괄호(括弧)안에 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Romerbrief, p. 217).  그러나 이 해석은, 계시 종교(啓示宗敎)의 역사적 의의
(意義)를 무시한 말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찌하여 죄의 괄호 안에  자리
하고 있는 것인가?

 

 롬 7:6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위의 4절에 있는 같은 어
귀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 여기 "새로운
것"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이노테스(*                   )니, 이전 것의  연장으로
서의 새 것을 말함이 아니고, 전의 것과는 다른 종류로서의 새것을 가리킨다.  (1) 리
츠만(Lietzmann)은, 이 문구에서 내심(內心)과 외형과의 대조를 본다.  곧,  그리스도
신자는 이제부터 율법 시대처럼 외형적(곧, 儀式的)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곧,  心靈的)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2)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여기서 "영"(*               )이란 글자를 성령이란 영의 의미로 보
았다.  그렇다면, 이 문구가 보이는 대조는, 성령과 의문(외형적인 율법)과의  차이점
이다.  신자는 외형적인 율법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이제 새로운 법 곧 성령의  은혜
로운 지배 아래 있게 된 것이다.  (3) 루터(Luther)는 이 귀절의 의미를 더욱 밝히 드
러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문자("의문"이란  말의  헬라  원어             
 
*                    의 올바른 번역)란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비유적 의미 있는 문
서나 율법의 교훈만 아니고 복음에서나 모세의 율법에서나 선한 생활을 가르치는 교훈
전부를 가리킨다.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며 기억한다해도 그가 은혜의 영을 받지 않는
한, 공각(空殼)에 불과한 문자 뿐이고 영혼의 죽음 뿐이다"라고 하였다(so ist's doch
nur ein leerer Buchstabe und der  Tod  fur  die  Seele.  -  Vorlesung  uber  den
Romerbrief, p. 230).

 

 롬 7:7

  그럴 수 없느니라 - 이 말은 헬라 원어로 메 게노이토(*                      )니
강하게 부정하는 뜻을 가지는 말이다.  그러면, 이 귀절들(7, 8)의 의미는, 율법이 죄
는 아니고 다만 (1)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죄가 드러나게 하며,  (2)  잠복
(潛伏)했던 죄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죄성이 이렇게도 괴악하여 선한 율법
앞에서 발동한다.
   내가...내가 - 이 귀절부터 "내가"(*         )란 말이 많이 나온다.  이 말이  사
용된 성격에 대하여 몇 가지 학설이 있다.  곧, (1) 우리 조상 아담을 가리키는  성격
있는 대명사(代名詞)라고  함(Feine,  Das  Gesetzesfreie  Evangelium  des  Paulus,
1899).  (2) 바울 자신의 체험을 가리키는 대명사라 함(Deissmann, Greijdanus).  (3)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을 가리키는  성격  있는  대명사라고  함  (Hugo  de  Groot,
Stauffer).  (4) 인류의 보편적 경험을 가리키는 성격 있는 대명사라고 함(Kummel, H.
N. Ridderbos).  이 마지막 의견이 옳다고 생각된다.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  "탐낸다"는  말의  헬라  원어  에피뒤메오          
(*                   )는 "부당한 소원을 가짐"을 의미한다.  율법의  모든  금령(禁
令)은, 인간의 탐심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Augustine).  온  율법
(律法)의 총괄적 요약(總括的要約)은 십 계명이고, 십 계명의 강령(綱領)은  하나님을
사랑함과 사람을 사랑함이다.  하나님을 사랑치 못하게 하고, 다른 것을 사랑하게  하
는 부당한 소원이 탐심이다(골 3:5).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남을 사랑하지 않을 뿐더
러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도리어 해한다.  이렇게 탐심은, 온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반대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특히 그것(탐심)에 대한 금령을, 모든 율법상  금령들의
대표로 본 셈이다.

 

 롬 7:8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데(*       =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어서, 앞절과
의 연락을 다음과 같이 보여 준다.  곧, 우리가 계명(誡命)으로 말미암아서 죄를 안다
(7절).  그러나 그 죄는 계명을 의지하여 더 일어나게 된다(8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  "기회"
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폴메(*               )인데, 이것은 출발점(出發點) 혹은  활
동 기지(活動基地)란 의미도 가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란  문구
는,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계명"이  나에게
오자 나의 범죄가 많아진다는 말씀은, 이상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은, 종교적
죄악사(罪惡史)의 경험 그대로를 나타내는 진리이다.  그 경험은 몇 가지 방면이 있으
니, (1) 하나님의 율법의 부탁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시험과 방해가 틈타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원시 시대에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 마귀가 틈을 타서 시험한 것이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그런 시험을 당한다.  (2) 인간은 그 심령이 부패하여  종교적인  선을
행하라고 하면 도리어 하지 않고 반동하는 일이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율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본성에 잠재했던 죄성을 나타내도록 만들어 준 셈이다.  그러나 율법
그것이 죄를 산출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본성에 잠재했던 죄성이  율법에  접촉할
때에 터져나온 것 뿐이다.  계명이 좋은 것이로되 나에게 있는 죄성이 악하여서  선한
것도 악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선한 것을 앞에 놓고라도 그것이 나로  말미암
아 악용되기 쉬운 것을 예상(豫想)하고 조심해야 된다.
   각양 탐심 - 이 말에 대하여는, 7절에 있는 "탐내지 말라"란 어귀의 해석을 참조하
여라.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이 말씀은 알기 어려우나 몇 가지 해석이  있
다.  (1) 인류에게 죄가 있었으되 율법이 없던 시대에는 죄를 정할 수  없으니  만큼,
죄가 죽은 것 같았다는 것.  (2) 바울이 이 말을 할 적에, 아담의 경험을  생각하였다
는 것.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이 있은 후에 비로소 인류의 대표자 아담 하와
는 타락하였다는 것이다.  (3) 율법이 없으면 죄가 활동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하
면, 죄는 언제나 율법의 제어(制御)를 기회로 하여 발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의 일반적 경험을 가리킨다.  이 해석이 옳다.

 

 롬 7:9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 이 귀절의 뜻은, 바울에게 율법 의식(律
法意識)이 이르기 전에 그가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의 행세를  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감(罪感)에 포로(7:14)되기 전(특별히 어린 아이  시절)에
맛본 순진하고 무사기(無邪氣)한 생활을 가리킨 것이다.  이런 생활은 인류의  조상도
그 타락 전에 소유했었는데, 모든 인류가 원 시조에게 대표되어 체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 앞절 끝에 있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
라"고 한 말씀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나는 죽었도다 - 이것은, 죄성에게 포로되어 버린 가련한 상태(7:14-24)를  가리키
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바르트(K. Barth)는, "종교는 무저갱(無底坑)이다.  그것
은 무서움이다.  거기서 옛 원수가 접근한다.  거기서 죄가 우리를 속인다.   종교는,
시간에다가 영항(永恒)의 옷을 입히고 경건을 인간의 가능성으로 제시하여준다.  그것
은, 그 경배자에게 대하여 세계의 문제성, 종교의 문제성을 감추고 그로 하여금  기도
의 손을 들게 하고 또 오랫동안  기도하게  하고  다시  기도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Romerbrief, p. 235).  바르트(K. Barth)는, 종교 혹은 계명(그 비록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도)이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적(印跡)과  고주
告柱)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잘못 말하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계명을  받는  인간은
인간의 무가내하(無可奈何)를 발견하고, 그 가던 길을 멈추고 침묵하는  것이  옳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따라서 안전한 신인 교통(神人交通)과 전진성  있는  경건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종교 곧, 계명을 가지고 범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르트(K. Barth)는 여기서 바울의 계명관(誡命觀)을 전연 오해한 것이다.  바울은 계
명이 부족하여 인간이 범죄한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성이 극히 악하므로 그런 선한 율
법이 임하매 도리어 더욱 악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바르트(K. Barth)는  종교
무용론(宗敎無用論)으로 돌아간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종교가 실존 사색
(實存思索)의 대상으로서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두 말할 것없
이 종교인이 되자.  우리는 우리의 전력을 다하여 경외하며, 지체하며, 분망하며,  종
교 생활을 배양하며, 격려하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개혁하며  혁명하자"라고  하였다
(Romerbrief, p. 237).  물론 바르트(K. Barth)의 이 말은 실존 사색적(實存思索的)인
종교 생활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성경과 부합하지 않는 종교관(宗敎觀)이다.

 

 롬 7:10,11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
다 - 이 말을 자역(字譯)하면, "계명은 생명을 목표한 것이로되, 그것이 사망에  이르
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그것을
바로 받아 순종하면 영생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악용하므로
도리어 사망에 빠졌다.  이런 비극에 대한 책임이, 게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 위의 8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나를 속이고 - 시조 하와가 마귀에게 속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하와의  후손도,
역시 죄에 빠지려고 할 즈음에 마귀의 거짓말을 듣게 된다.  마귀는 우리가 죄를 범해
도 괜챦다고 하며, 또 혹은 도리어 잘 될 것이라고 무언의 약속을 우리의 가슴에 던진
다(고후 11:3; 딤전 2:14; 창 3:13).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 여기 "그것으로"란 말은 "그것으로 말미암아"란  뜻이
다.  그리고 "그것"이란 말은 계명을 가리킨다.  "죽였는지라"란 말에  대하여는  9절
끝에 있는 "나는 죽었도다"란 문구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롬 7:12

   이 귀절은 7절 이하의 논제 "율법이 죄냐?"에 대한 결론이다.
   이로 보건대 -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호-스테(*           )인데 "그러므로"란 뜻을
가진다.
   율법...게명 -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전체적 명칭이고 "계명"은 그  조
문(條文)들의 명칭이다.

 

 롬 7:13,14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 위의 8, 11절의 해석을 각각 참조
하여라.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 빛이 올 때에 땅 위의 만물의 모든 모양이 밝히
나타남과 같이, 죄는 하나님의 게명으로 인하여 그것의 죄성이 폭로된다.  그러면  율
법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죄인됨을 더 밝히
깨닫게 하는 것 뿐이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 이 말씀(14절)은, 앞절의 말씀에 대한 이유적
설명이다.  게명이 나에게 임한 때에 어찌하여 죄는 더 일어나는가?  그 원인은, 게명
그것에 있지 않고(계명은 거룩함) 나 자신에게 있다.  곧, 나 자신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사실이 그 원인이다.  "육신에 속하였다"함은  헬라
원어로 살키노스(*                   )인데, 죄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죄를 따라가는 성품이다.  '죄 아래 팔렸다'함은, 죄의 종이 되었다는 말과 같
으니, 죄의 주관 아래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말함이다.  죄의 종이 된 자는  제
힘으로 그 종된 자리를 벗어날 수 없고, 다른 이(대속자)의 구원해  주시는  힘으로만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종교는 오직 대속(代贖)의 종교이다.
   


 롬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 헬라 원문에서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
고 하면"이란 말(*         )로 시작되어, 앞절(14절)의 "죄 아래 팔린"상태를 증명한
다.  종은 그 주인이 시키는대로 한다.  그는 그 행동을 자기의 임의대로 할 수 없다.  
죄 아래 팔린 종의 생활이 그와 같다.  그는, 그의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은 행하게 된다(15 하반-19).  실상 행위자가 그가 아니고 그의 속에 있는  죄
(옛 사람)이다.

 

 롬 7:16,17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
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사도 바울은,  자기에
게 악을 미워하는(원치 않는)속 사람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속 사람은 율법의  선함
을 밝히 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다.   시  67:10,  36:4,
119:104 참조.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이 말은,  중생한  자아
(곧, 나)를 그 범죄 책임에서 벗겨 주는 것이 아니다.  나로 하여금 나의  원치  않는
것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내 속에 거하는 죄"지만, 그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된 책임
이 "나"에게 있다.  그 이유는,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역시 나의 죄성(罪性)이기  때
문이다.  거듭난 자의 영혼도 더러운 방면이 아직 있기 때문에 바울도 말하기를,  "육
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하였다(고후 7:1).
   (1) 칼빈주의 신앙 고백서도 거듭난 자의 영혼이 범죄한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도  게요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  13장  2조의  "성화론"
(Sanctification)에 말하기를, "신자의 성화가 온 인격(人格)에 관계되어 있으나,  현
세에서는 인격의 모든 부분(영혼도)에 부패가 남아 있으며, 따라서 계속적으로 부조화
의 전쟁, 곧 영과 육(몸이 아니고 부패한 성질)의 충동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곧,
그 인격의 각 부분도 부분적으로만 성화된다는 뜻이다.
   대 요리 문답(The Larger Catechism)의 제 78문에 대한 해답도 이와 유사하니, 곧,
"신자의 성화(聖化)가 불완전한 이유는, 그 사람(신자)의 각 부분(영혼도)에 있는  죄
악의 잔재(殘滓)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종 시험에 빠지며, 많은 죄에  떨어
지며, 영적 봉사에 지장을 받으며, 저희의 가장 선한 일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
하고 더럽다"고 하였다.
   (2) 칼빈주의의 대표적 신학자들도 거듭난 영혼이 범죄한다고 한다.  벧코프(Lewis
Berkhof)는 그의 "조직 신학"(p. 468)에 말하기를, "중생은 사람의 온 성품(영혼도 포
함됨)의 완전한 변화도 아니지만, 어떤 한 부분(영혼의 한 부분도  관설됨)의  완전한
변화도 아니다"(그것이 비록 원리적으로는 그인격의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라고
하였다.  워필드(B.B. Warfield)는, 그의  저서  "완전주의"(Perfectionism)란  책(p.
580)에, 중생된 부분을 샘물 근원으로 비유하여 말하기를, "셩경은 이 물 근원이 단번
에 완전해질 것(이 세상에서)을 약속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3) 중생한 자의 영혼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주장의 논거는, 셩경 다른 부분
에도 없다.  다음 성구들에 근거하여 중생한 자의 영혼이 범죄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은
잘못이다.  곧, 요일 3:6의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란 말씀, 요
일 3:9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란 말씀, 요일 5:18의 "하나
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고 한 말씀들이다.  위의 세
문구에 있어서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함은, 모두 현재 동사(現在動詞)로서 상습적(常
習的)인 범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범죄를 전연 아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E.M.
Blaiklock, B.F. Westcott, A.B. Brooke, A. Ross, R. Candlish, D.Smith, M.  Henry,
Huther).

 

 롬 7:18-21

  이 귀절들은, (1) 죄의 근거점을 설명함.  죄악의 근거점은 사람의 육체이다.  "육
체"란 말로 번역된 헬라 원어 쌀크스(*           )는, 생리적 신체를 의미하지  않고
인간의 영혼과 몸에 있는 부패성(腐敗性)을 의미한다.  5절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
여라.  거기는 선이 하나도 없고 오직 악이 점령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인간은 해야
할 선은 행치 못하고, 해서는 안될 악을 행하게 된다.  (2) 자력  투쟁(自力鬪爭)으로
죄를 대항함은, 언제든지 실패한다고 함.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
명의 성령의 힘으로만이 죄를 이긴다(8:2).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
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롬 7:22,23

  이 귀절들은, 위의 21절 내용을 다시 되풀이 한다.
   내 속 사람 -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새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의 영혼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것은 없다(Calvin).  17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
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 사람이 자유 의지(自由意志)로도 참된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이 부분 말씀은, 루터(Luther)의 "노예 의지"(Bondage fo Will)란 책
에 의해서도 잘 밝혀졌다.  이렇게 인간은, 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
음으로만 의(義)를 얻는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자유 의지라는 것은 실  내용
이 없는 공허한 술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곧, 인간이 자기의 구원에  관계
있는 선(善)을 택할 만한 진정한 자유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어디까지든지 죄악의 종이 된 까닭이다.  그의 자유 의지라는 것은, 그의 의지가 그의
밖에서 오는 어떤 세력으로 억압되지 않는다는 의미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부러진
날개를 가진 새가 날 수 있는 자유는 있으나 실제로 날지 못함과 같다.  인간이, 하나
님에게로 올 수 있는 자유는 가졌으나, 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연 은총(自然恩寵) 곧, 사회적인 도덕 생활이나 문화 건설에 있어서  사
람들이 어떤 종류의 선을 행하는 줄 안다.  그러나 자연 은총에 속하는 그들의 선행은
구원과 관계 없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에 있
어서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부패한 선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선이라고는 할 수 없다.  스미드(Smith)는, 자연 은총과 관련된
사람들의 선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한다.  곧, "해적(海賊)의 무리가 자기
들끼리 서로 향하여 선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서로  사랑하면서  뭉치므로
더 힘있게 국법을 반역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지체"란 것은 실체의 부분들(눈, 귀, 손, 발 같은 것, 또는 영혼에  속한  심리적
부분들)을 말함이다.  이 부분들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이 부분들의 속에 죄악의  힘
이 역사하고 있다.  이것이 곧, 우리 본문이 말하는 "다른 법"이다.  "마음의  법"은,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 말은, 우리 마음  자
체가 선하다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나를 사로잡아 온다"함은,  우리의  심령계
(心靈界)에 두 세력 곧, 죄악의 법과 하나님의 법과의 충돌을 전쟁 상태로 보고 한 말
씀이다.  우리는, 우리 심령 속에 이렇게 우연한 일이 아닌 영전(靈戰)이 있음을 생각
할 때에, 어느 한편에 가담해야 되나니, 물론 하나님의 법 편으로 가담해야 된다.  17
절 해석 참조.

 

 롬 7:24,25

  이 귀절들은 윗 말씀의 결론이다.  곧, 바울은, 자기의 힘으로는 죄악을 이길 힘이
전연 없는 줄 알고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신뢰하고 평안을 얻는다.  죄감(罪感)으로 인
한 그의 이와 같은 애탄(哀歎)은, 실상 온 인류의 공통적인 것을  표본으로  표현시킨
셈이다.  누구든지 실제에 있어서 이런 애탄을 가질 처지에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저런 아픈 죄감을 느끼며,  또  자력의  무가내하(無可奈何)를  느낀다(Machen).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윗절이  말한  인생의 고민과 애탄에 이어서, 여기서는 구원의 찬송을 말한다.  바울은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줄 알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신뢰한다.  여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란 말은, 의미 심장하다.  이것은, 단지 인간이 순간 순간 그리스도의  어떤  구조(救助)의 힘을 받아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代理的贖罪)를 통하여 구원 받음을 가리킨다.
   그런즉 내 자신이 - 여기 "내 자신"(*                    )이란 말은 그리스도(상반절)와 별도로 "내 자신"이란 것이다.  "내 자신"은 하나님과 죄에게 이중 복종할 뿐이고, 승리는 거두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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