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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육신으로 - 이 말이 그 아래 있는 "우리 조상된"이란 말에 연결 된다고 보는 학자

가 있으나,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란 어귀를 수식한다고 함이 더욱 자연스럽다.

렇다면 그 의미는, 아브라함이 육신으로(사람의 힘으로) 의를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이

.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

서는 없느니라 - 칼빈(Calvin), 이 문장을 가리켜 에피케이레마

, 약식논법(略式論法)이라고 불렀다. 이 논법에 설명

을 보충하면, 그 뜻은 다음과 같다. , "아브라함이 그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

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랑할 것이(하나님 앞에서) 없었으

니 만큼, 그의 의가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누가 그 행위로써 자랑의 근거를 삼을 수 있으랴? 인간의 의라고 할 만한 것은 더러

운 옷과 같다고, 성경에 말하였다(64:6).

 

 

 

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15:6 참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

, 그것은 단순한 지적 승인(知的承認)만이 아니다. 신앙이란것은, 그 대상의 불가

사의(不可思議)함에도 불구하고 온 인격을 들여서 신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님의 언약 곧,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

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

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15:4-5)을 지적(知的)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지성(知性)을 초월하여 그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그의 지성은 그것

을 승복하였다. 17:17-18에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

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

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

.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비웃은 것 같다. 그러

나 그 웃음은 비웃는 웃음이 아니었고, 놀라며 기뻐하는 웃음이었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게서 칭의(稱義)를 얻은 것은, 자기 의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자기 의는

없었으되, 그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구약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다만 은혜로만 의롭다 함이 되었

. 이것을 보아도 사람이 은혜와 믿음으로만 구원 받음이 확실하다. 신앙이란 것은

행적(혹은 업적)과 반대로 생각된다. 5절 참조. 신앙으로 의를 얻는다 함은, 아무

행한 공로 없이 의를 얻는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여기신바 되었다"

(* )함은, 대리적 인정(代理的認定)의 뜻을 가진다. , 아브라함

에게 자기 의가 없으나 신앙 그것이 의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

서 주의할 것은, 그의 신앙이 의로 간주된 이유이다. 그의 신앙이 의로 간주된 이유

, 신앙의 대상되는 약속이 내표한 그리스도께서 의()이신 까닭이다. 그리고 믿음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만큼(2:8), 신자는 믿음이 있다고 자랑할 수 없고, 도리

어 남과 같은 죄인이면서 독특히 그런 선물 받은 것을 생각하여 황송한 생각과 겸손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Charles Hodge, on The Epistle to Romans, pp. 169-173).

 

 

 

4:4

 

일하는 자 - 행함으로 의롭다 함이 되기를 도모하는 자를 "일하는 자"에 비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참가하는 자를 "일 아니하는 자"(5)에 비한다. 하나님 앞에

서 무슨 선을 행하여서 그것의 보수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의 노력

은 헛되다. 천국에는 삵군 관계로 들어갈 자 없다. 천국은 오직 "일하지 않는 자",

, 제 힘으로 의를 얻으려고 헛수고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구걸하는 영적 걸

(靈的乞人)만이 들어간다. 이러한 구원을 받은 자만이 참된 선을 행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 하나님께서 보상적(

償的)으로 구원을 주시는 자가 아니신 사실을 역설(力說)하기 위하여, 우리 본문은,

"일을 아니할지라도"란 말씀에 다시 "경건치 아니한자"란 말씀을 첨부한다. 사람이

구원 받을 자격 없는 것으로 말하면, 선을 못하는 정도만이 아니고, 그보다 우심하게

"경건하지 아니한" 정도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무자격자보다도 차라리

반자격(反資格)을 상대하고 구원을 주셨으니, 이는 사랑으로 좇아 나타난 은혜이다.

그러나 이런 구원은, 하나님의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심판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

이 아니다. 이것은, 신자를 칭의(稱義)하심에 국한하여 위하신 하나님의 처사이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일군이 가지는 보

수적 기대를 일소하고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의를 구걸하는 영적 걸인의 의식(意識)

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자기의 공로로 구원 받기를 바란다면, 그는

은혜로 구원 받기를 배척하는 자이다. 믿는자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피스튜온티 에피

인데, 그것은 하나님과 및 그 말씀 위에 온 몸을 던져 업히우는 것을 가리킨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3절 하반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4:6

 

행복 - 이 말의 헬라 원문은 "복되다"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의 복됨을 가리킬 때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Euthymius Zigabebus)는 말하기를, "복되다 함은, 존귀와

영예의 최대한 상태를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마카리스몬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행복을 가리킨다.

 

 

 

4:7,8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

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 이 말씀은, 32:1-2상반인데, 70인역(LXX)대로

인용한 것이다. 히브리 원문에 의하면, 여기 있는 "불법"이란 것은 폐솨(* )

인데, 패역한 죄로서 공공연하게 내놓고 범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란 말은 카타

(* ), 하나님의 뜻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는 행위로서 연약하여 짓는

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란 말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히브리 원어로

아온(* )인데, 사곡(邪曲), 불공정을 의미하는 바 인생의 정도(正道)를 좇지

않는 윤리적 죄악이다. 위의 세 가지 죄악은 모든 죄악을 총망라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죄들의 용서됨에 대하여, 역시 각이(各異)한 동사(動詞)로 진술되었

. "사하심을 받고"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네수이(* )인데, 치워버림이

. 그리고 "가리운다"는 말은 케수이(* )인데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보이

지 않게 가리움이다. 그 다음에 나온 동사 "죄를 인정치 아니함"은 야크쇼브

(* )라고 하는데, 죄로 여기지 않고 도말함이다. 위의 세 가지 말은 사

죄 성질의 어떠함을 상세히 밝혔으니, 범죄의 흔적이나 후환이 없도록 하는 깨끗한 사

죄요,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신 하나님에게도 죄가 보이지 않게 가리워 버리는 전능하

신 처분이고, 죄가 있어도 간주되지 않는 철저한 대속(代贖)을 보이는 사죄이다.

"복이 있는자"라는 선언을 받았는가? 그는 모든 공적(功積)을 소유한 성자(聖者)

가 아니고, 회개하고 믿어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 자이다.

 

 

 

4:9

 

이 귀절부터 12절까지 보면, 믿음으로 칭의(稱義)되는 행복은, 할례받은 여부를 구

별치 않고 생긴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1) 이 행복은 순 신앙으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며(9절 하반 해석 참조). (2)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시기도 그가 할례 받기 전인 까닭이다(10).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 이 말씀은, 그 윗말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란 질의(質疑)에 대한 해답문(解答文)이다. 무할례자도 믿음으

로 칭의되는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

 

 

4:10

 

그런즉 - 헬라 원어로 운(* )이니 직역하면 "그러므로"이다. 이것은 그

윗말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의 결론을 보이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것은, 믿음으로 된 것인만큼 그의 할례 받은 사실보다 먼저 있었다.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여겨졌느냐"이다. , 아브라함의 받은 칭의가 어떤시기(時期)에 되었는가 하는 의문

이다.

무할례시니라 - 15:6에 아브라함의 칭의된 사실이 있는, 17:10이하에 그 할례

받은 사실이 있으니, 그 칭의는 그 할례보다 앞선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칭의는

할례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할례자도 칭의의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

, 여기서도 알려진다. 아브라함의 부름 받은 것은, 그가 이방인이었던 때였고,

가 아직 유대인의 족장이 아니었던 때였다.

 

 

4:11

 

할례의 표 - "할례"는 아브라함의 칭의된 표요, 그 얻는 의의 본질은 아니다.

""(* ), 그 자체에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표를 보

고 표를 위하고 또 표에 머물면, 그것은 어리석다. 표는 표로 보아져야 하고, 그 지

시하는 본체(本體)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이런 표에 불과

한 할례를 오해하여 본체로 알고 그것을 과중시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에게 표

()로서의 효과도 내지 못하고 도리어 본체를 아는 일에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를 본체시(本體視)하는데 관습이 된 그들은, 구약의 모든 예표(豫表)가 가리킨 그

리스도 예수를 모르게 되었다. 종교의 외부적 형태 중 어떤 것들은 이와 같은 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것들이 표로서 간주되지 않고 본체로 오인되는 그 때에 그 위

험성은 크다.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아브라함과 후대 기독 신자들과의 조

손 관계(祖孫關係), 물론 어떤 혈통 관계로 성립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1)

아브라함이 받은 영적 은혜에 후대의 그리스도 신자들도 꼭 같이 참여한다는 의미이

, (2) 이 영적 은혜를 받은자가 아브라함 한 사람 뿐 아니라, 그 뒤로 많이 생길 터

인데 그것은 마치, 육신의 조상 한 사람이 있은 뒤에 많은 후손이 있음과 같다는 의미

이다(17-18)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

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 이 말씀의 정확한 번

역은 다음과 같다. , "또한 할례의 조상이니 곧 할례를 받을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니라"이다(Theodore

Zahn). , 유대인들은, 그 유대인 된 것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수 없고, 그들

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도 되지만, 그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좇는 경우

에 그러하다는 말이다. 유대인 된 사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성립시키는 것은 아니

. 아브라함의 자손 자격은 오직 신앙 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는 자는,

세상에서 끊임 없이 신앙의 발자취를 좇아 가는 영적 순례자여야 할 것이다. "자취를

좇는 자들"이란 어귀의 "좇는 자들"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스토이쿠시

(* )인데, "가로", 혹은 "세로"로서 한 줄 됨을 가리킨다(In

einer Reihe neben oder hinter einander stehen. - W. Pape, Griech-Deutch

Handworterbuch). 그러므로 여기 "자취를 좇는다" 함은, 한 줄로 서서 그 앞서 가는

자가 가는대로 보조를 맞추어 따라감을 의미한다(Th. Zahn).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자는, 마땅히 신앙에 있어서 아브라함과 일렬(一列)이 되어 보조를 맞추는 자이다.

 

 

 

4:13

 

이 귀절부터 17절까지는, 아브라함이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조상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증명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율법에 의존할 것이

아니고, 순 신앙의 길에 의속(依屬)하게 된 것으로 보아서 성립된다. 이 귀절은 이유

접속사(理由接續詞) 가르(* = 왜 그런고 하면)로 시작한다.

세상의 후사 - 후사(차지하는 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

니라"고 하였다(1:28). 이 축복대로 실현되었다면, 인류는 세상을 기업으로 누리

는 자 곧 세상의 후사 노릇을 하게 되는 행복된 자리에 있을 번하였다. 그러나 인류

가 범죄함으로 만물은 인류에게 이상적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게 되었다(3:17, 19,

4:12; 8:20-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대하여는, 구속을 받으므로

되어질 "세상의 후사"를 약속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이렇다. , (1)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12:3) 하셨고, (2)

너는 열국(列國)의 아비가 되리라(17:4-5)하셨고, (3)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

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리라(22:17) 하셨고, (4) 네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

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17:8)고 하셨다. 위의 네

가지 약속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로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심, 곧 세상의 후사가 되게 하심이 그것들의 완성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12:3),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그리스도 탄생하실 것을 가리킨 것이다(3:7).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면

인류에게 영원한 축복이 임할 수 없다. 그리고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17:4) 한 것과 "네 자손이...번성하리라" 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각국에 아브

라함식의 행복(믿음으로 칭의됨)을 누리게 될 자들이 많을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

나안 땅이 영원한 기업이 된다 함은,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의 후사 될 것을 예표한 것

이다(Het ontvangen van alles, de geheele wereld, wordt er mee aangewezen, zooals

dat door Israels bezit van Kanaan werd gesymboliseerd.-Greijdanus Romeinen, 1-8,

p. 23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후사"가 되게 하는 축복이 완전히 우리에게

실시되는 때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때(21:5) , "다시 저주가

"는 그때이다(22:3).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 여기 "율법"이란 말에 관사(冠詞)가 없음을 보

, 그것이 모세의 율법만 아니고 세계의 일반적 도덕률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세상의 후사(後嗣)가 되게 됨은, 그들의 어떤 율법

준수를 조건으로 한 것이 아니다.

 

 

 

4:14

 

이 귀절은, 앞절에 말한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대한

변증이다.

믿음은 헛 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세상의 후사"가 되게 하는 약속이

율법을 지킨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누가 그 해당자가 된다고 믿어 바랄 수 있으

리요? 그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완전히 율법을 지킬 힘이 없음을 자인(自認)하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후사"가 된다면, 믿음도 있을

곳이 없고 약속도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약속과 신앙은, 오직 공로 없이 의를 얻

음과 은혜로 "후사"가 되는 제도 아래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4:15

 

이 귀절의 헬라 원어는, 앞절 말씀에 대한 이유를 보여주기 위하여 헬라 원어 가르

(* = 왜 그런고 하면)라고 하는 말로 시작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이 이치는, 7:5 이하에 더 명백히 설명되었다.

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면케 해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것을 이루

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후사"(천국을 얻음)가 될 수 있다고

함은, 되지 못한 말이다. 그런데 율법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하는

? (1) 그것은 어떤 것이 죄라고 밝혀 주는 것이니, 그것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위반하는 자에게 죄가 구성된다. (2) 그것은, 범죄자를 추종하여 그의 죄를 정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위의 율법의 두 가지 작용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면케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에 걸리게 한다. 그것은, 율법이 선하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4:16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이 귀절은 14절의 말씀에 다시 연락을 가

진다. 만일 "세상의 후사"가 되게 하는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그 약속은 성

취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자는 인류 중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후사되는 것이,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로 주시게 되었고, 인간 편에서는 신앙으로 받도록 되었

.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인간의 구원이 인간 자신의 힘

에 달렸다면, 그것은 견고치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기 때문이다(2:3).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

심에 있어서 우리에게서 아무런 조력(助力)도 받기를 예산하신 일이 없으시다. 하나

님께서는, 구원 받을 자들의 연약과 부패(腐敗) 여하를 불문하시고 불가항력적(不可抗

力的)으로 그들에게 구원을 주셨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이 어귀는

"후사"되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주는 듯이 나타난다. , 율법에 속한 자(유대인)

것으로 되는 길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하는 탓으로 되는 길이 있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말 뜻은 실상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이 귀절의 상반문과 긴밀히 연

락시켜 보면, 아무런 난제도 생기지 않는다. 상반문의 말씀은, "후사"되게 하는 것이

은혜와 믿음으로 된다고 하였는바, 하반문은 그 진리의 적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

이다. , 은혜와 믿음으로 "후사"가 되는 것은, 율법에 속한 자 곧, 유대인에게도

그러하고 이방인에게도 그러하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이 문구는, 아브라함의 믿

음을 좇는 자, 곧 이방인 기독자의 "후사권"(後嗣權)을 명확히 보이려고 부가되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 기독자에게만 조상이 될 뿐 아니라, 이방인 기독자에게도 된다.

그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조상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란 말씀 뜻은 이렇다. ,

아브라함이 우리 모든 사람(유대인 기독자나 이방인 기독자를 무론하고)의 조상이 됨

, 육신으로 그러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표준에 의하여 영적으로 그러하다는 말이다.

 

 

 

4:17

 

기록된 바 - 이것은, 앞절 끝에 있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 말씀을 구약 성경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이 인용문은 창 17:5의 말씀인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너를 많은 나라들의 조상으로 세웠다"란 뜻이다.

데오도레 즈안(Theodore Zahn), 이 말씀의 의미가 아브라함이 그 육체적 후손들의

조상(die leibliche Bachkommenschaft Abrams und Sarahs)이 될 것을 가리킨다고 한

. 그러나 이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반드시 창 18:18-1922:17-18등을 참조해야

된다. 거기서는, 이스라엘 이외의 모든 나라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 받을 것을 예언하였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영적 축복이 모든 나라에 미칠 때에, 아브라함은 그 모든 나라들의 영적(靈的)

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

니라 - 이것은, 아브라함과 모든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동일한 계통임을 지적한다.

이 귀절이 보이는대로 아브라함의 신앙의 특색은, (1)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음. 이것은, 그가 이삭을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적에 순종한 신앙이다.

11:17-19에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이 신앙은, 우리 기독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과 비슷하다. (2)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

님을 믿음.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란 말씀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신다

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으나, 그 후손이 하늘의 별들과

해변의 모래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다. 이 신앙은, 무수한

죄인들을 중생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기독 신자의 믿음과 흡사하다.

하나님을 대하여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자라고 믿

는 신앙에 대하여, 바르트(K. Barth)는 다음과 같이 주해(註解)를 붙였다. , "신앙

, 그것이 역사의 창조력인 점에서, 신화(神話)나 신비의 몽롱한 세계관을 가진 소위

신앙과는 판이하다. 신앙은, 높은 세계를 이 세상에 이끌어서 이 세상을 부요하게 하

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죽음과 비존재(非存在)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기서 신

앙은 생명과 존재를 보며, 사람들이 충만한 생명을 보는 거기서 죽음과 비존재를 본

. 아브라함은 이런 위기적 선상에 입각하였던 것이다. 이 선()을 건너 넘기 위

하여 이 쪽에 무엇을 연장시키거나 발전시키거나 건축한다 함은 헛된 수고이다. 건너

편에서 볼 때에는 그런 연장, 발전, 건축은 오직 죽음이요 비존재일 것이다"라고 하였

(Romerbrief, p. 117). 이것은 바르트(K. Barth)가 신앙을 그 위기 사색의 원리에

의하여 본 것이니, 이는 그릇된 학설이다. 그가 신앙은 순연히 모순 개념의 작용으로

본 것은 그릇된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상태

성 있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4:18

 

이 귀절 이하로 25절까지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및 그의 받은 칭의(稱義)가 기독

신자에게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대하여 밝힌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헬라 원어의 직역은 "소망을 거스려 소망 위에

믿었으니"이다. 소망을 거스린다 함은, 인간적 관측대로는 소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고, "소망 위에 믿었다"함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소망 위에 근거하고 믿었

다는 말씀이다. 리츠만(Lietzmann)도 이 문구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처음의 소망이

라는 것은 인간적 타산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 다음의 소망이란 것은 하나님 위에 의

거한 소망을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칼빈(Calvin)은 여기 "소망 위에"란 어귀

"소망"이란 말도 인간적 관측의 소망의 의미로 보고, 소망 위에 믿었다는 말 뜻을

음미하기를, "우리는, 인간적 헤아림이 낳아주는 소망에 붙어 있지 말고 그것의 위에

신앙을 올려 가져야 한다. 신앙이란 것은, 천적(天的) 날개로 날아 올라가야 육적 감

각을 멸시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 세상에 항상 고착(固着)한다. 소망

의 근거를 얻으려고, 보이는 것에 마음을 구속(拘束)시키는 것 이상 신앙에 대한 큰

()은 없다"라고 하였다(Commentary upon the Epistle to the Romans, p. 115).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 이 말씀은 창 15:5에 주신 약속이다. 아브

라함이 이 귀절 상반과 같이 인간적 헤아림을 거스려 가면서 신앙한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 그것에 있다. 약속해 주신 이가 하나님이신고로, 그는 그것

을 믿었다. , 인간의 헤아림으로 그럴듯 한고로 신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

씀이 그렇다고 하므로 신앙한 것이다. 신앙의 생명은, 차라리 인간의 헤아림을 초월

한 그것이다. 인간의 헤아림을 초월한 거기에, 신앙이 그 앉을 자리를 비로소 발견한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명심할 것은, 신앙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의 말

씀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활동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신앙이 생길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무슨 신념이 있다면, 그것은 미신(迷信)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의 근거인 동시에 신앙의 규정자이다.

 

 

4:19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우리가 신앙을 굳세게 가지는 참된 방법은, 하나님께서 약

속해 주신 그 일의 어려움을 바라봄에 있지 않고 그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신

성품을 생각함에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는 불리한 정형(情形)

처했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신앙이 약해지지 않았다. 이 어귀의 뜻은, 다음

절의 "의심치 않고"란 말과 다르다. 이것은 이지적(理智的)으로 의심하지 않음을 말

함이 아니고, 의지적(意志的)으로 동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

식이 출생할 것을 믿어야할 아브라함의 정형은, 노쇠하여 죽은 자와 비슷한 것이었다.

진정한 신앙은, 순전히 하늘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정형을 거

리끼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즐긴다. 그 이유는, 신앙의 길을 열어주는 듯이

보이는 소위 유리한 환경은, 실상 신앙의 방해물이 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치러 나서는 길에 입어본 갑옷은, 도리어 거리끼는 것이 되었으므로 벗어 버

린 것이 아니었던가? 신앙의 길을 방조(幇助)한다는 것은, 어떤 때에 인간과 하나님

과의 접촉을 막는 장벽이 된다. 이 장벽인 중간체가 없는 그 때에, 인간은 비로소 그

전체가 밑 없는 깊은 구렁에 던지운 자임을 알게 되지 않는가? 그 구렁에는 아무런

인간적 구원선(救援船)도 없고 아무런 손잡이나 발 디딤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 던지

운 자는, 오로지 인간 아닌 자, 피조물 아닌 자, 곧 창조자이신 절대자의 손만을 의뢰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앙은 언제나 소위 불리한 환경에만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소위 유리한 환경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앙

, 정체를 나타내지 못하는 잠재성을 띤다. 그런 신앙은, 아직 신랑에게 직면하지

못하고 신랑의 친구들에게 포위되어 감추인 신부와 같은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4:20

 

의심치 않고 - 의심한다는 말의 헬라 원어(* )"분리"를 의미

한다. 이것은, 마음의 생각이 양분(兩分)되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상태를

말함이다. 이것은 이지(理智)의 작용으로 생기는 심리적 현상이니, 이것은 사상의 단

순성을 특질로 하는 신앙과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유

혹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면 신앙이 도리어 힘을 얻는

.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 이 문구는, 아브라함이 그 신앙으로 인하여 신체가 강건해

진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가 있으나, 이연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한역(韓譯)

보여 주는대로, 이것은 신앙이 견고해진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노쇠하였

어도 자식을 생산하리라는 약속을 믿은것도 큰 신앙이지만, 그 독자(獨子) 이삭을 제

물로 잡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은 더 큰 신앙이다. 앞의 것은 이성(理性)이 해

석할 수 없는 일을 신앙한 것이고, 뒤의 것은 이성 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意志)

까지 거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순종한 큰 신앙이다. 신앙은, 이렇게 점점 견

고해져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20절 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함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알

(1:21) 그 앞에서 행함이다. 인간이 못할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생활은, , 신앙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여김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여길 것

,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의 권능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의 성결, 지혜, 자비 등

모든 품성에 있어서 역시 그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강하다고 해서, 그 정

도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일에 흡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아니

. 강한 신앙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그 표준에는 아직 미급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될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수 있기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 부족을 인식하는 겸

비와 합하여 나타나는 그 때에 그러하다.

 

 

 

4:21,22

 

확신하였으니 - 이것의 헬라 원어 플레로포레데이스는, 어떤 사실이 벌써 참된 것으

로 충분히 증명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신앙이 아주 확립된 것을 말함이다. 이 신

앙 계단은, 아브라함이 그 받은 하나님 말씀의 부분적 성취를 보고서 이렇게 된 것이

겠다. 바르트(K. Barth)는 말하기를, "이 확신은 어떤 종교적 경험이나 직관(直觀)

이나 어떤 소명감(召命感)에 부딪쳐 얻는 것인가? 비역사적 확신이 기어이 역사적 확

신을 수반 현상(隧伴現象)으로 나타내지 않는다고 할 것은 없겠다. 그러나 아브라함

에게 그 역사적 현상이 없었겠다 함이 더욱 이연하다. 그에게는 차라리 상실, 파쇄,

불확실, 자기와 및 자기 소유와 행위에 부정을 느낌으로써 채웠을 것이다. 위에 말

한 바와 같이 역사적 수반으로서의 확신이 없다고 해도, 이런 상실, 파쇄, 불확실감

등 기아 상태(饑餓狀態)는 그것보다 못할 것이 없다. 은혜의 부요는 역사적 소유나

상실의 저편에서 심령 빈핍의 형태로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Romerbrief, p. 121),

이것은 위기 신학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신앙의 현실적 경험의 필요성과

가치를 무시하는 그릇된 말이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 4:3의 같은 말 해석 참조.

 

 

 

4:23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칭의(稱義)된 일에 대한 성구

, 아브라함 일개인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구적 칭의 제

(稱義制度)의 보편적 실시를 예언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칭의 받을 자들의 조상으

로서 칭의된 것이다. 그의 많은 영적 후손들이 같은 원리로 칭의될 것은 확실하다.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성경적 기록은 말세에 나타날

우리까지 위한 계시(啓示)란 뜻이다. 15:4; 고전 10:11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는, 이렇게 참 되어 고금(古今)이 일반이다(딤후

1:9-10). 우리는 그 진리에 생명도 맡길 만하다.

 

 

 

4:25

 

이 귀절은 헬라 원문에서 관계 대명사 호스(* )로 시작하여 예수님을 의미하

였으니, 이것은 이 귀절이 앞절의 계속임을 보여 준다.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 3:23-26, 5:8-10; 고후 5:18-21; 3:13

벧전 2:21-25 참조. "내어줌이 된"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여러번

당하신 일이다. (1)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사 희생심으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

스도를 내어주셨고(3:16), (2) 유다는 돈을 사랑하여 탐심으로 그 선생이신 예수님

을 대제사장들에게 내어주었고(26:15-16). (3)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시기심으로

저희의 원수로 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고(27:24-26), (4) 빌라도

는 예수님을 무리에게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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