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사도행전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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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 "부형들"이란  문
구(*                                    )를 분석하면 형제들과 아버지들이란  뜻이
다. "아버지"란 것은 그 무리를 존경하는 말이고, "형제들"이란 것은 즈안(Zahn)에 의
하면 동포란 뜻과 종교적 신앙이 같다는 의미라고 하나(Zahn:Als seine Bruder,  d.h.
als seine Volkgenossen, c.2,14.22.29.37, aber auch als Manner gleichen Glaubens,
c.1,16;15,7.13.-Apostelgeschichte II, 1927,p.750), 단순히 동포라는 뜻이다.  바울
은 이 때에 자기를 죽이려는 군중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그들을 향하여 "부형들아"라고
불렀다. 그는 사나운 풍진 속에서도 사랑의 불길을 보유하고 있었다.

 

 행 22: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  유대인들
은 바울이 헬라어나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히브리어로 말함을 듣고  놀랐다.  그래서
그들은 조용하였다. 그가 히브리어를 사용한 것은 그이 변론의 상대가 로마 군인이 아
니고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자기를  이해시킴보다  유대인들의
영혼 구원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였
다.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하는 자라 - 바울이 비록 이방 "다소"에서 출생하였으니 그의 교육으로  말하면  줄곧
예루살렘에서 받았으니만큼 열심있는 유대주의자(율법주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었
다. 곧, 그는 그를 핍박하는 군중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못하지 않은  율법주의자였었
다.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며 그 청중과 자기와의 사이에 공통성이 있음을  내
세웠다.

 

 행 22:4,5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
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
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 여기 "이 도"라는 말(*                            )은 기독교를 가
리킨다. "사람을 죽이기까지"하였다는 말을 26:10의 말씀과 합하여 생각할 때에, 스데
반을 죽이던 당시 그가 가편 투표한 것을 가리킨 듯하다(7:57-58).
   "다메섹 형제들"이란 말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들과  합작
하여 다메섹의 기독자들을 잡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은 큰 죄를 범하였음
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긍휼릉 입었다(딤전 1:13-14). 이와 같은 사실은 기독교 복음이
의인(義人)을 부르지 않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은혜의 복음인 것을 확증한다.  그
러므로 바울은 고백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
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
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딤전
1:15-16). 바울이 저렇게 기독 신자들을 핍박하던 중에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된 사실은 기독교 복음이 지극히 참되다는 것을 확증한다. 그가 이  복음으로  돌아온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동정심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원수로 여
기던 복음이 진리와 사실로 드러난 때에 그는 정복을 당한 것 뿐이다. 복음에 대한 그
의 혹독한 반항 심리가 녹아질 정도로 그리스도 사건(그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은  절
대적 사실임이 그에게 밝히 드러났다.

 

 행 22:6-8

  이 귀절들에 대하여는 9:3-5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행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
라 -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 9:7에 보면, 바울과 동행하던 자들이 소리만  들었다고
하였으니, 이 두 가지 기록이 서로 모순 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헬라 원문에 의하면,
이 귀절의 표현은 그 소리의 내용을 알아 듣지 못하였다는 뜻이고, 9:7의 것은  어떤
소리를 들은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표현은 결국 같은 내용을  의미했
다.

 

 행 22: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
아라 하는 이가 - 바울은 이 말로써 그이 다메섹 도상의 개종 사건이  그들(핍박자들)
에게도 신임될 만함을 암시한다. 곧, 그의 개종 사건에는 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였던
"아나니아"도 관계하였다는 것이다. 아나니아는 율법상으로 경건하였고, 또 그의 율법
적 경건이 모든 유대인들(그 때 바울을 핍박하던 청중과 처지가  같은  유대인들)에게
인정된 자임을 증거하였다.

 

 행 22: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 아나니아는 바울이 체포하여 가두려던 핍박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 같아진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바울과 "형제"가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관계
이다. 이것이 벌써 이적이다. 이와 같은 이적 중에 바울의 눈이 "즉시" 열려 보게  된
것이 역시 주님의 은혜임을 증거한다. 9:18 참조.

 

 행 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  "조상들의
하나님." 이 성호는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주셔서  만인을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란 뜻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 약속을 이루셨고, 이제 그
약속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바울을 택하셨다. 이것이 "자기 뜻", 곧 하나님의 뜻이다.
   아나니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저 의인"(*                     ), 곧 특수한  의인
이라고 한 것은 벴겔(Bengel)에 의하면, 몇 가지 내용을 가진다. (1)그리스도  자신이
언제나 의로우시며, (2)부활 승천 후에는 그가 우리 대신 담당하셨던 죄짐도 그에게서
벗겨졌으며, (3)그가 친히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으며, 우리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
을 이루신다. 바울이 이 예수님을 본 것은 큰 은혜이다.

 

 행 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 헬라 원
문에는 이 귀절 앞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 있어서 이 귀절이
앞절의 이유임을 보여준다. 곧, 바울이 저런 큰 은혜를 받은 이유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증거 사역에는 큰 수고가 동반한다.  "모
든 사람"이란말(*                                )은 특별히 모든 이방인들을  가리
킨다. 이렇게 대중을 상대한 일이 얼마나 큰 고생이겠는가!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은
복음과 함께 수고하기 위함이다. 고후 11:23-27;살후 1:5;딤후 1:8,2:3,4:5 참조.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
더라 -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란 말씀(*                                 )은  고대
헬라어로서 "이제 돼 지체하는가?"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큰 죄인에게 위로를  준다.
과거에 신자들을 잡아 가두던 큰 죄를 범한 바울일지라도 사죄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앞에서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 죄인일지라도 그 큰 은혜 앞에서  머뭇
머뭇할 것 없다.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이 말씀은  얼런
보면 단지 세례의 의식 요소인 물이 죄를 씻을 수 있는 듯이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재 않고 "주의 이름을 불러"란 말씀이 전제되어 있어서 주님의 이름이  죄
를 씻음을 밝혔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주님의 권위와 공로)을 힘입어서만 죄  사함을
받는데 물로 씻는것처럼 깨끗이 해결된다.

 

 행 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 바울은 예
수님을 만난 사건이 있은 후 성전을 멸시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곳을 찾아가서 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아는 바(28절)와 다르다. 그들의 오해를 풀
어주는 것도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방법일 수 있다. 그가 주님을 만난 중대한  신
앙 체험을 한 뒤에 무엇보다 먼저 기도한 것(9:11)은 의미 심장하다. "쉬지 말고 기도
하라"고 가르친 그의 말씀(살전 5:17;골 4:2)과 같이 그는 기도를 그의  생활에  가장
중요하고 제일 먼저 할 일로 삼았다.

 

 행 22:18-21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거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 이 때에 나타나신 이는  예
수님이었다. 그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머물지 말고 이방에 선교사로  가라는  뜻으로
부탁하셨다. 그 때에 바울의 대답은, 기독 신자들에게 대한 그의 핍박 행위를  유대인
들이 안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복음의 원수
였던 자기가 이제는 복음을 찬성하는 만큼 그것을 보는 유대인들이 자기 말을 잘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한 것
이다. 그러나 주님은 두 차례나(18,21) 바울에게 "이방인에게로"가라는 뜻으로 강력히
말씀하셨다. 어떤 때에는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론도 주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하는 복음에 응종하지 않으리라는  것
이다(18절 하반). 바울은 주님의 이와 같은 계시를 따라서 이방의 사도로 사역하게 되
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발견한다. 그것은 전도자는 그 임지를 택함에 있
어서 어디까지나 자기의 판단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진해야 된다는
것이다.

 

 행 22:22,23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지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 이  때에
유대인들이 갑자기 발악한 이유는,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동동시 한 바울의 말  때문이
다.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고(롬 2:23)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멸시하여 왔는데, 이방인
도 메시야의 구원 축복에 참여한다는 바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1)그들이 "소리 지른" 것은 바울의 말을 중단시키려 함이고, (2)"옷을 벗어  던진"것
은 그를 돌로 치려는 준비였다. 7:58 참조.
   그 때에 그들은 극단적인 민족 차별주의자들이었고, 따라서 모든 인류를 동일시 하
는 복음(골 3:10-11)을 이해하지도 못하였다. (1)진리를 막는 데 선한 방법은 없는 만
큼 그들은 혈기와 악독으로 그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2)"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18절 하반)이 이렇게 바울의  설
교 도중에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얹든지 이루어지는 법이니, 그것은  말씀이면
서 사실과 같은 것이다.

 

 행 22:24-27

  바울은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실에 근거하여 자기를 변호하였다. 로마 가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신상에  폭력을  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Calvin). 바울이 이런 법률에 의하여 자기의 안전책을 찾은 것은 무법한 자들에게 정
의(正義)를 가르치려는 목적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는  법적으로  면할
수 있는 폭행을 일부러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기독자가 하나님의 영
광에 훼손됨이 없는 한,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다만 세상 국법과  천국  법(성
경)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닌 만큼 어떤 때에는 기독자가 국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제한을 받게 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고전 6:12). 아무리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라도 그것을 사용함이 신령한 은혜와  건덕에  손해를 준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행 22:30
   천부장이 바울의 사건을 종교 관계의 것인 줄 알고 그것에 대한  공의회의  해결을 들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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