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사도행전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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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 여기 "함께"로 번역된 헬라어(*                  )는 "같은
방법으로"라고 개역함이 옳다(De Boor, Loisy, Jacquier, Beyer). 그러면 "같은 방법"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기본 원칙을 가
리킨다. 바울 일행이 늘 지키는 이 원칙대로 이번에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  즈
안(Zahn)은 이와 동조하여 말하기를, "바울이 벌써 이 원칙을 지켰고(13:5, 14), 후에
도 지킨 것(17:2, 18:4, 19:8)을 보아서 그것은 벌써 하나의 규례가 된 것으로 주목된
다."고 하였다(darauf aufmerksam, dass sie diese Regel bisher schon, wie auch  in
der Folgezeit, 17:2, 18:4, 19:8, befolgt haben,  13:5,  14.-  Apostelgeschichte,
1927, s.459).
   "말하니"란 말(*                        )는 실상 "그렇게 말하니"라고  번역되어
야 한다. "그렇게"(*         )란  것은  그렇게  힘있게(so  effectively)란  뜻이다
Meyer). "그렇게 힘있게" 말씀하시는 방법에 대하여는 고전 2:1-5이 잘  설명하여  준
다.

 

 행 14: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
을 품게 하거늘. - 여기 이른바 "순종치 아니하는"이란 말(*                     )는
복음을 믿지 않고 또한 반역하기까지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
에게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 박해를 받는 법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백성이 있으며, 또한 얼마 동안이라도 하나님과  원수
된 사상을 가지고 대항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고
핍박 받는다고 낙심할 것 없다. 복음을 올바로 전하는 자라면 핍박 받는 일이 없을 때
에 도리어 이상스럽게 생각해야 된다. 여기 이른 바 "형제들에게"란 말(*           
               )은 "형제들을 대항하여"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형제들"은 기독 신자
들을 말한다. 이때 이고니온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충동을 받아 믿는 형제들을  미
워하는 "악감"을 가졌다. 신자들은 이런 때에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진다.
악선전이란 것은 인력으로 막기 어렵다. 그러나 억울함을 당한 신자를 하나님께서  도
와주신다(벧전 2:19-20).

 

 행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
를 행하게 하여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 여기 "두 사도"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없다. 그러므로 그저 "그들"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그리고 "오해"란 말로 번
역된 헬라어(*                        )는 충분한 시간 동안을 의미한다. 그들이  이
고니온에 충분한 시간 동안 있은(지체한다는 뜻) 이유는 그곳에 머물음이 평안한 까닭
이 아니고 핍과 난관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믿는 형제들이 곤란에 바진 것을  보
고 그곳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을 증
거할 힘을 주셨다. 성도들이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도
강화된다. "은혜의 말씀"은 예수 믿는 자의 죄를 거저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복음
을 말한다.

 

 행 14: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
인류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복음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복음을 반대하는 무리도 생긴다. 이와 같은 분렬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뒤에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야 예언(창 3:15)에 예고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분
열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놀랄 일도 아니다. 기독자들은 이런 일 때문에 도리어 믿음
에 굳게 서야 된다. 그 때에 복음을 반대하는 운동에 유대인들이 선봉에 선 것은, "먼
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20:16)의 성취이다. 그 때 유대인들은  구
약 시대 메시야 약속을 받았던 자들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3:25) 그  약속의  성취로
오신 메시야를 배척하는 데 선구자가 된 것이다.

 

 행 14:5-7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
음을 전하니라. - 여기서도 "두 사도"라고 번역된 말(*            )이  "그들"이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이 때에 이방인과 유대인 이 공식으로 합작하고 박해 운동을 일으켰
다. 이 핍박 중에서 바울 일행은 이번에는 그곳을 피하는 방침을 취하였다. 그것도 예
수님이 가르치신 바이다(마 10:23). 이것은 구차스럽게 고난을 피함이 아니다. 복음의
명예에 훼손이 없는 한, 신자가 박해를 피할 경우가 있다. 핍박으로 인하여 복음 전할
문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한 지대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도리어 전도의 문이
열려 있는 곳으로 들어감이 지혜롭다.

 

 행 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30마일  서남쪽에  잇는  도시이다.
"나면서 앉은뱅이"는 조상 적부터 죄인 된 일반 인간들에게 대한 좋은  비유도  된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의(義)를 행할 수 없는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앉은뱅이
를 일으키듯이 이런 죄인을 멸망 받을 자리에서 건져내신다.

 

 행 14: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 전도자에게는 그의 전하는 말씀을 잘 들어주는 사람처럼 반가운 것은 없
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앉은뱅이의 말씀 듣는 태도를 주의하여 보았다. 이적(異蹟)에
집중하는 태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태도가 구원 받을 신앙자의 태도이다.

 

 행 14: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 바울이
"큰 소리"로 말한 이유는 그 병 고치는 목적이 그 앉은뱅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루스드라의 모든 주민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Grosheide).  그가  이렇게
앉은뱅이더러 "일어서라"고 명령한 것은 자기의 권위로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성령님
의 권위 있는 말씀을 대언한 것 뿐이다.

 

 행 14: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
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 "루가오니아 방언"은 그 지방 사투리니
보통 헬라어가 아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이같은
것은 헬라 신화(神話)에 흔히 나오는 관념이다. 호머(Homer)의  시집(詩集)에도  이런
사상이 있다. 이런 신화적 경향은 타락한 인간의 우상주의에 속한다.

 

 행 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 바나바를
"쓰스"라고 한 이유는 그는 비교적 바울보다 늙은 까닭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쓰스"는 로마의 최고신 쥬피터(Jupiter) 신을 가리키는 헬라어 명칭이다. 바울을  가
리켜 "허메"라고 한 이유는 그는 말을 잘 하였기 때문이다. "허메"는 대변하는 신(神)
을 말한다.

 

 행 14: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
사하고자 하니. - 마귀는 사람을 충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려고 하더니(5절), 이
제는 군중을 충동시켜 이들을 신(神)으로 높여 제사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그들을  죽
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악한 대우이다. 미련한 자들은 사람들의 지나친 대우까지도  환
영하다가 멸망한다. 눅 16:15; 행 12:23 참조.

 

 행 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
"옷을 찢음"은 극도의 놀람과, 단정코 용납할 수 없다는 맹세의  표시이다(창  37:29,
34; 수 7:6; 마 26:65). 루스드라의 군중과 그들의 제사장의 행동은 사람을 신격화(神
格化)하는 큰 죄악이다.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행동을 금지시켰다. 사도  베
드로도 일찌기 고넬료의 지나친 경배 행위를 즉시 금하며 말하기를, "나도  사람이라"
고 한 바 있다(10:26).

 

 행 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 이 말씀은 인생을  신격화
하는 큰 죄악을 금하는 강한 이론이다. (1) 자기들(바울과 바나바)도 일반인과 동일한
수준에 속한 자라고 함이며. (2)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헛
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  이
른 바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그 윗말 "헛된 일"(헛된 것이란 뜻인데 우상을 의
미함)과 정반대로 확실히 계시고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이란  뜻이다
(마 16:16; 요 6:69; 고후 3:3, 6:16; 살전 1:9; 딤전 3:15, 4:10;  히  3:12,  9:14,
10:31, 12:22; 계 7:2).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로서 창조된 만물을
보라고 한다(롬 1:19-20). 하나님이 확실히 계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시 14:1, 53:1).

 

 행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
"자기의 길들"이란 것은 이방인들의 우상을 섬기는 생활을 이름이다.  "묵인"하셨다는
말(*         )은 그들의 우상 섬김을 죄악시(罪惡視)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이렇게 죄를 범하는 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다.

 

 행 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
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만 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그를 알게 하시는 증거를 주셨다. 그것은 그
가 자연계에 나타내신 능력과 혜택이다. 그 실례로서 비를 내려 곡식이  되게  하심을
들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연계에 나타나는 그의 능력으로써 그의  살아계신  사실을
증거하시지만 이방인들은 그를 믿지 않고 우상을 섬겼다. 그들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 전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증거를 깨닫지 못한다(15절 하반).

 


 행 14: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 여기 "겨우"
무리를 말렸다고 하였으니, 그 무리가 얼마나 열심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신(神)으로
여겨 숭배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유대인들의 박해는 극도에 달하였다. 그들은 먼 거
리에서 전도자들(바나바와 바울)을 박해하려고 쫓아왔고, 또 군중을 자기  편에  들어
협력하도록 유인하였다. 그 때에 전도자들은 이와 같은 원수들까지 회개하고 구원  얻
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전도자들을 죽이려고 계획한  것이다.
여기서 성도와 악도의 차이점이 보인다. 남을 불쌍히 여겨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은
언제나 성도의 심정이지만, 남들의 망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악도의 심리이다.

 

 행 14: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
베로 가서. - "제자들"은 바울의 전도를 듣고 복음을 믿는 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둘러 선 이유는 바울의 시체를 장사하려는 까닭이다. 그 때에 바울은 다시 살았다. 딤
후 3:11 참조. 어떤 학설에 의하면, 이 때에 바울이 기절하였다가 회생한  것  뿐이고
아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혹시 기절했다는 학석이 옳다고 해도
이 사건에 기적이 나타났던 것은 확실하다. 그가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치료 받은 일도 없이 그냥 일어나 여전히 전도 사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이적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일어나서 다시 루스드라에 들어간 것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의  당당한
모습이다. 그는 대적들이 미워하는 복음을 그들 앞에서 담대히 전하기를  계속하였다.
이때에 그의 처신은 고후 6:7-10의 말씀과 같았다. 거기 말하기를, "진리의 말씀과 하
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
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
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하였다.

 

 행 14:21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
어가려면 많은 환련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 여기 이른 바 "이 믿음에 거라하"(*
                                )는 것은 굳게 붙잡고 참아  나감(to  persevere)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좋은 일을 시작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끝까지 계속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것이 용이하게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
를 구하시는 것은 그의 은혜로 결실할 수 잇는 것에 국한하여 그리하신다. 우리가  노
력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마 11:12)에 있어서 그 노력이란 것도 주님의  은혜의
뒷받침을 받아서, 혹은 주님의 은혜속에서 되어지는 우리의 노력을 가리킨다.  은혜로
성립되는 노력은 실상 안식과 같은 것이다. 마 11:28-30 참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천국
에 들어가게 하는 공로로서 환란 겪음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게 하
는 공로와 의(義)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신자
가 천국에 들어가는 도중에는 많은 환란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자가 고난을 받
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체된 증거이다(요 15:19-20).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계시는 동안
고난의 사람이었으니만큼 그와 연합된 신자가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그
가 그렇게 많은 환란을 당하면서 천국에 반드시 들어가게 됨이 하나님의 정하신  필연
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곧,  "많
은 환란들을 경유하여 하나님 나라에 반드시 들어간다."라고. 여기 "반드시"란 말(*
   )은 "들어간다"(*                 )는 말과 관련되어 들어감의 신적  필연성(神的
必然性)을 말해준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이루어주
신다는 것이다. 롬 8:17; 살후 1:4; 딤후 2:12 참조.

 

 행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함"은 그 교회를 다스리며 가르치게 하려는 것이다.  "금식  기
도"는 중대한 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행위이다. 바울은 교회 없는 곳에  전도함
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고전 9:16). 그 뿐 아니라 그는 복음을 전한  결과로  세워진
교회도 그만큼 중요시하였다. 그는 그 교회들을 무정치(無政治)의 상태로  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그 교회를 위하여 장로들을 세웠고, 또 그 교회와 장로들의 장래를 위하
여 금식 기도하고 그들을 주님의 수중에 부탁하였다.

 

 행 14:24,25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 그들이 비시디아 안디옥(21절)을 경유하여 "비시디아"로 왔다. 그리고 그
들이 거기서 남쪽으로 행하여 "밤빌리아"란 섬에 속한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앗달리아"는 버가 해안에 있는 항구이다.

 

 행 14: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
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은 선교사업을 가리키고, "하
나님의 은혜에 부탁"함은 그 선교사들을 위하여 금식 기도한 사실을 말한다(13:3).

 

 행 14:27,28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
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것
은 그들 자신의 신앙을 굳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전도를 듣는 모든  사람의  신앙도
굳게 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사실을 아는 사람
마다 구원운동이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 차별 없이 임함을 확신하게 된다. 두  사도
가 안디옥에 "오래" 머문 목적은 목회를 위함이었다. 안디옥 교회야말로 이방  선교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선교의 근거지가 든든해야 선교 사업이 힘있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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