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 "선지자"(*
)는 초자연적 교통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은사(恩賜)의 소유자이
다. 그리고 "교사"(* )는 가르치는 재능을 가진 지도자를 의미한
다. "바나바"는 구브로 사람이고(4:36) 복음을 위하여 안디옥에서 많이 활동한 지도자
였다(11:22-30). "니게르"란 말(* )은 검은색을 의미하는 바 흑인종에 속한다
는 뜻이다. 안디옥 교회는 이렇게 인종 차별을 하지 않았다. "루기오"는 누가(사도행
전 저자)와 동일한 사람이라고 하나, 노울링(Knowling)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바울의 친척이다(롬 16:21).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이 사람이 헤롯 안디바
와 이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왕국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으니 복되다. 벴겔(Bengel)은 마나엔이 "왕궁의 영광과 관
련된 시험거리에서 햅자되었으니(freed from the temptation of a court) 행복되다."
고 까지 말하였다. "사울"은 이 때에 사도직을 가졌지만 아직 신진 일군인 것만큼 그
의 이름이 맨 나중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천국의 원리대로(마
20:16) 후에 그는 높아졌고, 그는 바나바를 선배로 섬긴 후배였으나 나중에 훨씬 앞섰
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아무런 경쟁심도 없었고, 자기는 다만 죄인의 "괴수"라는 겸
손을 소유하였을 뿐이었다(딤전 1:15).
안디옥 교회는 선교적 교회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단단히 뿌리 박였을 뿐만 아니
라 크게 확장해 나아갈 큰 힘이 갖추어져 있었다(B.Wielenga, Van Jerusalem Naar
Rome, Tweede Deel, 1928, p.8). 그뿐 아니라 거기에는 자격 있는 복음의 일군들이 준
비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곳 교회로 말미암아 이방 각국에 선교사들을 보내실 섭
리가 이 사실로 인해 뚜렷이 알려진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 그 때에 "금식"한 사람은 선지자들과 교사들만 아니고
그들과 함께 온 교회가 하였다. 그들의 행사는 교회와 달리 행동한 어떤 그룹 운동이
아니었다. "섬겨"란 말(* )은 하나님에게 대한 개인적인
영적 교제만 아니라 단체적인 예배 행위도 가리킨다. 그들의 금식은 물질 개악석(物質
皆惡設)에서 나온 고행주의 동기에서 한 것이 아니었고, 육적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
의 영적 감동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B.Wielenga). 이런 목적 때문에 그들이 전심 기도
하려고 금식하였다.
"성령이 가라사대." 이 때에 성령의 음성을 안디옥 교회 선지자들중에 누가 들었을
것이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이란 것은 외국 선교 사업을 가리킨다. 바나바와 사울
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기에 외국 선교 사업을 위하여 동역할 수 있었다.
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본릴. - 금식 기도는 주님의 중대한
일을 위하여 하는 법이다. "안수"에 대하여는 6:6에 있는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라.
여기서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에게만 안수한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이것은 그들에게 사
도직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갈 1:1)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14:26).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고 함은 복음을 전하려고 이방에 들어가
는 그들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에 부탁함이다(J.A. Alexander). "보내니라." 이
말의 헬라어(* )는 보냈다는 것이 아니고 놓아주었다(released)는 뜻이
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를 부흥케 하는 요인(要人)들임에도 불구하고
(11:22-26), 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여 그들을 선교사로 내어 놓았다.
행 13:4,5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
었더라. -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이 있으니, 곧 복음
서에서는 그리스도 자신께서 전도자를 보내셨으나(요 20:21) 여기서는 성령께서 그들
을 보내시는 이로 진술된 것이다(*
). 그는 보내라는 명령을 교회에 내리신 것 뿐 아니라 친히 보내
시는 인격적 권위자이시다. 아니 그보다도 그는 그 선교 도상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순간순간 보내는 이로 계셔주신 것이다. 그는 교회에 영원토록 계셔주신다(요
14:16)(B.Wielenga, Van Jerusalem Naar Rome, Tweede Deel, 1928, p.25).
바나바와 사울의 선교 운동은 그들 자신의 운동이 아니고 이렇게 성령의 운동이었
다. 그러니만큼 그것은 유망하였다. 사람들이 자진하여 하나님의 일을 시작함으로 성
사하는 것도 있으나(물론 주님을 의지하고 실행함). 성령님이 주동이 되시어서 시작된
일은 안될래야 않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
은 하나니미의 일에 있어서 성공이란 것은 양적(量的)으로 펴어가될 것이 아니고 질적
(質的)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루기아"는 안디옥의 해변에 있는 항구이고,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다
(4:36). 그가 고향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한 것은 자연스럽다.
"살라미"는 구브로의 동해안에 있다. "요한"은 마가 요한인데 바나바의 생질이다(골
4:10). 그 때에 마가의 하는 일은 무엇이었던가? 마가는 두 선교사(바나바와 사울)의
육신 생활에 필요한 수종도 하였겠지만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로서 이방 전도와
인연을 맺은 처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는 일은 언제나 보편적 합작에 의하
여 완전을 이루는 법이다. 안디옥 교회가 실행하는 이방 선교는 마가 요한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와 합작한 셈이다. 이 때에 그들이 예루살렘 사람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간 것은 의미 심장하다. 이것은 적어도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합
심과 협력의 의미를 가진다. 그 때의 교회 지도자들은 각 교회로 하여금 총화적(總和
的)으로 복음 사업에 참가하도록 함으로 교계의 화평을 힘썼다.
행 13: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 "바보"는 구브로 섬의 서해안에 있다. "바예수"(* )는 예
수의 아들이란 뜻이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에 이적을 많이 행하신 것만큼, 그가 예
수님을 모방한다는 의미에서 자기를 가리켜 예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은 믿기 어렵다. "박수"(* )는 요술쟁이를 의미하는데 이 말이
무당을 의미한다는 학설이 있다.
행 13: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 그 때에 "서기오 바울"이 총독이었던 사
실은 근대에 발견된 조각문에서도 증명되어 있다(Lightfoot, Zockler, Ramsay,
Knakenbauer). 그는 지혜 있는 사람인 만큼 바예수를 맹종하지 않고 다른 이들(바나바
와 사울)의 말도 듣고자 한 것이다. 지혜 없는 자는 아부자들의 말만 듣다가 망한다.
행 13:8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
하게 힘쓰니. - 언제든지 거짓된 자는 진리를 대적하는 법이다. "엘루마"란 말(*
)은 점치는 자란 뜻이다. 바예수란 "박수"는 자기 자신이 진리를 안믿을 뿐 아
니라 남들도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기도 하며 방해하기도 하였다. 롬 1:32 참조. (1)
그는 초자연주의를 거짓되게 꾸며서 진정한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를 반대하였다. 그
가 그렇게 한 것은 돈을 탐한 까닭이었다. (2) 그러나 진정한 초자연주의자 바울은 하
나님과 및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고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하였다(9절).
행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 "바울"이란 말(*
)은 로마식 이름으로서 작다(小)는 뜻이다. 그가 바보에서 "서기오 바울"을 개
종시킨 때에 저자 누가는 사울의 이 이름(바울)을 흥미있게 기억시키는 듯하다. 바울
이 이 때에 "성령이 충만"하였으니, 그것은 그 때에(원수가 진리를 대적할 때에) 필요
한 은혜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적당한 은혜를 주신다(히 4:16). 바울이 이렇게
충만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진리의 원수를 꾸짖을 수 있었을 것이다.
행 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이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 굳은 옹이는 날 선 도끼로 찍어야 깨
어진다. 바예수는 거짓과 불의로 굳어진 거짓 선지자니만큼, 사도 바울의 강한 책망을
받음이 필요하였다. "궤계", 곧 속이는 것은 마귀의 본질이다(요 8:44). 저놈이 아담
과 하와를 유혹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거짓말로 그 방법을 삼았었다(창
3:4-5). 거짓은 모든 악의 앞잡이요 그 보호자이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악명도 받았다.
"모든 의의 원수." 진리의 스승은 정의(正義).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하나님
의 의(義)를 가르쳐 준다(Bengel). 그러나 거짓 스승은 그것을 대적한다. "주의 바른
길." 정진자과 단순성은 하나님의 도(道)의 특성이다(Bengel). "그치지 아니하겠느
냐." 악을 회개할 줄 모르며 그치지 아니함은 마귀의 특성이다.
행 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
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 바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였으므로 그 영안(靈眼)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움직임을 깨닫게 되었
다. 그리하여 그가 바예수에게 예고한 대로 천벌이 임하였다. 이때에 바예수에게 임한
벌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임한 것보다는 가볍다. 그가 소경 된 것이 "얼마 동안"이
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진노 가운데서도 긍휼을 기억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합 3:2). 그것은 그로 하여금 회개케 하려는 징계였다.
행 13: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구
브로 섬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선교한 결과 "총독" 서기오 바울이 믿었다. 그들이 선교
도상에 있어서 "믿으며"란 말(* )이 처음 나왔으니만큼 서기오 바
울의 믿음은 결코 낮게 평가될 수 없는 희귀한 것이다.
행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
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란 문
구(* )는 바울을 둘러 있는 자들이란 뜻이다. 이 문구를 보
아 그 때에 바나바보다 바울이 그 일행의 지도자였음이 알려진다(Werner De Boor, Die
Apostelgeschichte, 1965,s.243). 그런데 그 때에 요한(마가)이 선교단(宣敎團)에서
떠나 귀국한 것은 좋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가 외국에서 나그네 생활이 곤란해서 그리
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바울은 그의 떠남을 좋지 않게 여겼다(15:38).
행 13:14,15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
라 율법과 선지자의 긁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혀어제들
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 "비시디아 안디옥"은 소아시아의 부
리기아(Phrygia)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수리아 안디옥과 구부누하기 위
하여 이와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고대의 조각문에 나타난 대로 이 도시에는 로마
사람들이 많이 살았꼬, 또한 수리아의 안디옥 대제(Antiochus the Great)는 유대인
2,000 세대를 이곳에 이민시켰다. "회당" 제도는 유대인들이 바벧론에 포로되었다가
돌아온 뒤부터 생긴 것이다. 이렇게 각처에 회당이 준비되었으므로 예수님과 사도 시
대에 복음 전하기에 편리하였다.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유대인들이 안식
일에 예배하는 순서는 율법에서 한 부분과 선지서에서 한 부분을 공동(公讀)하도록 되
어 있다.
행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 "손짓함"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의 할 말을 청중에게 주의 깊이 듣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이것은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신자들을 가리킨
다.
행 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란 말은 그 하
나님이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신 참 하나님이신 사실을 역설(力說)한다.
바울의 이 설교도 스데반의 설교(7장)처럼 이스라엘 역사로써 예수님을 메시야(그
리스도)라고 강력히 증거한 것이다. 이것을 보아도 기독교는 어떤 철학이 아니며 사상
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로 전개된 하나님의 계시(啓示)라는 것이 드러난다. 기독교는
관념이 아니고 사건이며 사실이다.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바울은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主
權的役事), 곧 선택으로부터 말씀하기 시작한다. 디 부어(De Boor)가 말한 바와 같이
선택은 구원사(救援史)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본적 해가동으로서 거기서 모든 제시 사
건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歷史)는 인간의 공로나 업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선택의 은혜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De
Apostelgeschichte, 1965, s.246).
이 설교에서 바울이 가르친 것은, (1) 구약의 선민 운동이 바로 그리스도를 이 세
상에 보내시기 위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의의를 가졌다는 것이다(17-23). "하나니미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광야에서 약 40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란 말은 언약의
원칙에서 택한 백성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 원리를 보여준다. (2) 또한 다윗까지
열거하고서는 이스라엘의 여거사를 더 말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
였다(22-23).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메시아)이라는 언약 사상을 역설하기 위한
논조이다. (3) 그 다음에 많이 나오는 그 당시의 청중을 가리켜서 "아브라함의 후예"
(26절), 또는 "우리 자녀들"(33절)이라고 한 말이라든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
아나심이 예언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다는 것이(27, 29, 33) 모두 언약 사상에 속하
는 표현들이다. (4) 인간들에게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기어코 그 본래
의 언약대로 메시야를 보내셔서 구원 역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죄인
들이 예수를 믿으면 어김 없이 그로 말미암아 의(義)롭다 함이 된다(38-39). 인간들이
칭의(稱義)를 얻는 것은 이렇게 그들의 완강한 대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언약 체제 때문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사상이요 동시에 베드로의 사상이
다(3:13-15, 18-21).
행 13:18,19
광야에서 약 사십 년 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 간). -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번 하나님을 시험
(의심)하며 원망하였고, 또 배반하였을지라도(금송아지 만든 것과 같은 일), 하나님께
서는 그 민족을 아주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긔까지 구원하셨다. 이것은 그가 저희의 열
조와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신 9:5-6). 신 1:31 참조. "일곱 족속"의
이름은 신 7:1; 수 3:10; 느 9:8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들을 멸망시키신 것은
전자적(專姿的) 행위가 아니고, 다만 그들의 죄악이 가득찼기 때문에 내리신 공정한
심판 행위였다. 창 15:16 참조. 그리고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基
業)으로 주신 것은 그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대로 이루신 그의 진실성이다(창
15:7).
"사백 오십 년 간"이란 말은 즈안(Theodere Zahn)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에서 고생하던 기간과 광야 여행 기간과 가나안 정복 기간을 종합한 연수라고 한다.
그러면 이 귀절의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까지 450년이란 긴 세
월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장구한 세월을 지나서야 이루어지는 것도
많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신앙함에 있어서 조급한 악습을 버리고 오래 참으며
기다릴 줄 알아야 된다.
행 13: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 사사(士師)들은 하나님이 세우
신 자들인 만큼 좋은 지도자들이다. 이 말씀이 역시 택한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지적한다. 사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삿 6:1, 10:6, 13:1).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자주 떠
났던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이 그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
시고 그 때마다 징계하셨으며, 그들이 부르짖으면 다시금 선한 지도자들(사사들)을 세
워주셔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어 선히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것을 보면, 하나
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택하신 사실 때문에 늘 구원하여 주셨고 버리지 않으셨다. 그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언제나 어김어벗이 약속을 지
키신다(딤후 2:13). 디 부어(De Boor)는 말하기를, "이 모든 일에 간섭하시며 은혜 주
시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 중심한 신학자이다."고 하였다
(In allem ist Gott der Handelendeund Gebende. Paulus hat eine theszentrische
Theologie, weil die Schrift die Gottheit Gottes so vor uns hinstellt.-Die
Apostelgeschichte, 1965, s.246).
행 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
십 년 간 주셨다가. -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한"것이 역시 그들의 잘못이었다(삼상
8:5, 7). 그들의 이 행동은 그들이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선한 정치를 배척함과
마찬가지의 죄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워주셨으므로 다윗
도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하여 다윗의 왕통에서 그리스도가 나시게 되
었으며, 일찌기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하여 주신 약속이 성취되었다(창 49:10). 이스라
엘 백성이 왕을 청원한 것이 죄악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행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
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 하나님께서 사
울왕을 "폐하신" 것은 그의 범죄를 인함이었다. 삼사가 13:13-14, 15:19, 22-23 참조.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
라." 이 말씀은 다윗에게 대한 하나님의 증언인데, 삼상 13:14; 시 89:20-21 등의 혼
합 인용이다. 그가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다윗은 전
연 무죄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성취
하시는 데 잘 사용될 인물이라는 뜻 뿐이다. 그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것과 우리아
를 사지(死地)에 빠뜨린 것은 극도로 악한 일이었다(삼하 11장). 그 죄악 때문에 그가
받은 벌도 컸다. 하나님은 그를 회개케 하셨으며, 끝까지 의(義)의 길을 사모하도록
하셨다(왕상 1:4, 15:5).
그보다도 (1)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적 표상으로(시 16편) 하나님이 다윗을 지정하
셨고, (2) 그리소도(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나님께서 경륜
하신 뜻을 이루셨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면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거룩하신
뜻을 다 이루신 것이었다.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벌써 다윗을 왕으로 세우심
으로도 현저히 준비되고 있었다.
행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구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미리 약속하신
대로 성취된 일이다(롬 1:2-3).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건의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그
를 신앙하게 만들어준다. 약속한 대로 성취된 것은 왜 믿지 않으랴! 이렇게 약속하신
것이 마침내 계약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잘못 말함과
같은 초절주의적(超絶主義的)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 사건은 만인(萬人)이 읽도록
기록되었던 대로 만인이 체험하며 볼 수 있게 성취된 일반 역사상 사건이다. 다시 말
하면 그것은 과거가 증거하고, 현재가 체험하고, 미래의 확실한 소망을 가진 구체적
진리의 사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말함에 있어서 최가능한 한도에서 그리
스도의 일반 역사와의 관련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바로 역사적 인물,
곧 "예수"라고 지적하였다. 삼하 7:12에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으며,
사 11:1에는 "이 새의... 가지", 겔 34:23에는 "다윗"이란 명칭 등으로 기록되어 있
다. "구주"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를 이름이다(마 1:21).
이 점에 있어서 윌렝가(B.Wieleng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애굽의 비참하고 낮은 처지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높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한
계가 있었고 지나갔다. 구약사의 역할은 '다윗의 자손'(메시야)의 높아짐을 그 열매로
맺고 끝났다."고 하였다(Het oud verbond heeft zihn dienst gedaan. Het is gekomen
totzihn vrucht: de verkieing, de verhoohing van den grooten Davidzoon.-Van
Jeruzalem Naar Rome, Tweede Deel J.H.K., Kampen, 1928, p.60).
행 13:24,25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
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
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
으니. -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야)이신 사실에 대하여는, 예수님 오시기 퍽 오래 전
옛날 선지자들만 증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의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도 증거하였
다. 그에게 대한 증거는 이렇게 시간상으로도 원근(遠近)을 겸전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하여 여기서 바울이 세례 요한의 증거로부터 시작함은 의
미 심장하다.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사죄함 받도록 하
기 위한 사역이었다(마 3:3; 막 1:4; 요 1:6-7, 23).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자립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부종하는 길닦이에 불과하였다. 여기 이른 바 "그 오시는
앞"이라는 말과(24절). "내 뒤에 오시는 이"란 말은(25절), 하나님의 아들로
서 하늘에서 오시는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특수한 표현이다. 말 3:1-2 참조.
행 13: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 "아브라함의 후예"는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하나님을 경외하
는 사람들"은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 구원의 말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파된 복음이다.
행 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
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 이 귀절
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그를 정죄하게 된 원인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눈 앞에 모시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과 안식일마다 외우는 선지서를 깨닫지 못한
사실에 있었다. 인간들은 비록 위대한 지도자라도 자기들에게 가까이 있으면 경멸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뿐 아니라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이 그들에게 익숙
해지면 그것을 귀히 여기는 열심이 식어진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 말씀의 참 뜻을 깊
이 참고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눅 4:24 참조. 인간성의 이런 심리 경향은 죄악으로
인하여 어두워져 스스로 높아진 결과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들 관원들"이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해할 것을 하
나님은 미리 아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수
님을 정죄한 것도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한 것이 되었다(시 2:1-2; 사 53:1-12). 그
러므로 이 사건 역시 우리의 신앙을 일으킨다.
행 13:28-30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
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
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 여기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곧,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 그 시체를 무덤에 장사하였으나, 그와 반대로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어 구원 받게 하시려는 것이
다. 이 점에 있어서 월렝가(B.Wielenga)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예루살렘 사람
들은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은 "살아나라"고 하셨다. 이 강한 대조 속에는 차원 높은
통일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임이 되지 않으셨더면 그 부활의 기적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은혜를 준비하셨다(意譯)(Van
Jerusalem Naar Rome, Tweede Deel, J.H.Kok, Kampen, 1928, pp. 65-66). 사람들은 예
수님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행 13:30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아파에 그의 증인이라. - 10:41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
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최후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실 마지막 길)에 동행한 제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이 마지막 길에 동행한 것
만큼, 그와 생사(生死)를 같이 할 정도로 친밀하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이 사
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것은 이유가 있다. 죽으시기 전의 예수님과 다시 살아나신 예
수님이심을 밝히 알아 볼 자들은 그들(예수님과 친밀히 지내던 제자들)밖에 없다. 일
반 세상 사람들은 죽으시기 전 예수님도 잘 몰랐으니 어떻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그 본래의 예수님과 동일하신 분이라고 식별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다시 살아나신 예
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실 필요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와 생사(生死)
를 같이 하려고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함께 올라갔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가 "여러날" 나타나셨으니, 그 나타나심이 순간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환상 같은 것
은 아니었다. 그의 나타나심은 실제적 역사(歷史)로서 인간에게 구체적인 관찰과 연구
의 충분한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바울이 여기서 "여러날"이란 말(*
)을 사용할 때에 주님의 나타나심이 이런 신앙의 충분한 근거가 될 만할 것임
을 알게 한다. 1:3 참조.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여기 "이제"란 말은 청중의 신앙심을 일
으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사실을 본자들이 바로 그 청중들과 같은 시
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행 13: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 "우리", 곧 바울과 바나바
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다. 여기 "약속"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 내용을 가리킨다. 그들의 선교는 결코 그 때 청중에게 모순되게 들릴 이상
한 교훈이 아니고,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그대로였다.
26:6-7, 22-23, 27 참조.
행 13: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함이라 시
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 바울은
여기서 "자녀"라고 할 때에 구원 계약에 참여한 영적 자녀들인 것을 잊지 않았다
(Grosheide). 그는 앞에 말한 "약속"이란 말이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그대로 예
수님을 다시 살리신 내용임을 가르친다. 이 약속은 시 2:7에 있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들(이들은 우선 바울과 그의 시대 사람들)을 위하여 성취되었다.
"오늘 너를 낳았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고차원
적(高次元的)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을 예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덤을 새
생명의 태(胎)로 삼으신 셈이다. 윌렝가(B.Wielenga)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켜 메시
야의 두 번째 출생(tweede geboorte als messias)으로 간주하였으니, 일리 있는 해석
이다(Van Jerusalem Naar Rome, 1928, Tweede Deel, p. 68).
행 13: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
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이 말씀은 사 55:3의 인용이
다. 그 말씀의 뜻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거룩하고 미쁜 은사", 곧 그리스도의 부활로
실시될 영생의 은사를 모든 택한 백성에게 주시겠다는 뜻이다.
행 13:35-37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
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 여기 이
른 바 "다른 편"이란 시 16:10을 말한다.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시 16편 말씀의
성취라고 증거한 바 있다(2:25-32). 이와 같은 공통성은 그 두사람(바울과 베드로)이
꼭 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에 근거한 육체 부활로 확신한 결과이다. 사도들은 성경
을 절대적 진리로 믿는 데 있어서 같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일치하게 된 것이다. 고
전 15:3-8 참조.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원사(救援史) 취급에 나타난
바울의 성경 해석 방법이다. 그는 구약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
히 취급하였으며, 계시(啓示)의 역사적 현상에 기준하여 진리를 찾았다. 예를 들면 시
16편의 말씀이 다윗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가리켰다는 진리를 증거하
기 위하여 그는 말하기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
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라고 하였다(36절). 그는 저렇게 다윗이 무덤에
서 "썩음을 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준하여 그 시편이 썩음을 당하지 않으신 그
리스도에게서만 이루어진 사실을 들어 결론하였다. 이 점으로 보아서 그의 역사 취급
이 근대의 실존주의와 다르며, 또한 그의 성경 해석이 실존조의 시가학자 바르트
(K.Barth)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계시의 진리를 역사적 사실 면에서 알뜰히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바르트
는 예수님의 부활(고전 15장)에 대한 강해에 있어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진 사실을
그리 중대시 하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소망이나 어두움이나 신앙도 무덤 앞에는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빈 무덤이 그의 부활을 증거하는 역사
적 증거품으로서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하는 그릇된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그는
또 말하기를, "우리가 원한다면 신약 성경이 말하는 바를 다 안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신약 성경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바울
은 왜 이렇게 부활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기사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부활의 역
사적 증거를 들기 위함이 아니다."고 하였다(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ranslated by H.J.Stenning, p.13). 바르트(K.Barth)의 이 말을 보면 그는 확실히 계
시의 역사적 성격을 거의 부인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다. 고전 15:8-11을 보면, 바
울은 자기의 부족을 말하였고, 또 자기와 같이 악한 자에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그가 은혜로 자기를 사도로 세워주신 사실을 지적하였다. 즉, 큰 죄인이
변화하여 신앙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가 본 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바르트는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진리는 보이는 역사적
모습에 취하지 않을 때에 오히려 유력하다. 진리는 그것이 인간의 이름을 취하거나 일
정한 슬로간에 의하여 학파나 운동으로 나타날 때는 죽었거나 혹은 치명적으로 병든
것이다."고 하였다(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ranslated by H.J.Stenning,
pp.145-146). 바르트의 이 말은 복음 진리에 대한 역사적 체계가 있을 수 없다는 그릇
된 사상이다.
행 13:38,39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
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 "이 사람을 힘입어"란 말(* )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힘입는 다는 뜻이니, 이는 예수님이 중보자(仲保者)이심을 가리킨 표현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처럼 불행한 것이 없는데 그것을 사함 받도록 중보하여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인간은 남을 정죄하기에 분망하나,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에 지체하시지 않는다. 바울은 이 복음만을 전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의(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義)를 얻을 수 없음을 역설(力說)하였으니, 곧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란 말씀이다. 여기 "모든"이란 말(* )은 요긴하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한, 무슨 죄든지 사함을 받고 또 의롭다 함이 되기까지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절대 완전하신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다(마 11:28).
행 13:40,41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 이 말씀은 합 1:5을 인용한
것인데, 이는 갈대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에 대한 예고이다. 그 때 선지자
의 예고를 멸시한 자들은 마침내 그 예고대로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구원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
도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1) 누구든지
복음을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와 같다는 것. 히 2:3 참조. (2) 하나님
은 그 하실 일을 정하신 때에 반드시 하신다는 것. 전 3:1-11 참조. 심판은 하나님께
서 날마다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때에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지 않
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란 것은 없는 줄 안다. (3) 하나님께서 그의 하실 일을 보
통으로는 사람들에게 예고하시지만 그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 창 19:14; 눅 17:27; 요
1:5 참조. 그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
행 13:42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 그들이
같은 설교를 또 듣기 원한 이유는 그들이 그 설교에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부
분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는 잠간 있다가 없어질 이 세상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설교는 영원한 가치 있는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곧 하나님, 영생, 사죄에 관한
것이다.
행 13: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
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음은 복음의 은혜를 사모하는 까닭이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
운데 있으라"는 권면은 초신자(初信者)들에게 적합한 것이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옳은
길을 가다가도 낙심하거나 중도에 물러가기 쉽다.
행 13:44,45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
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 하나님
의 말씀은 언제나 환영만 받는 것이 아니고 반대도 당한다. 이 때에 대중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하였으나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시기하여 비방하였다.
행 13:46,47
여기서는 바울이 이방 전도의 당연함을 두 가지 이유로 말한다. 곧, (1) 유대인들
이 복음 듣기를 거절한 까닭(46절)이라고 하며 (2) 성경적 근거로 보아서 당연한 까닭이라고 한다(47절). 사 49:6 참조.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진심으로 주님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기쁨이 있는 법이다. "영생을 주
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말씀은 확실히 예정(豫定) 교리를 가르친다. 크로
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영생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누구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예정 교리가 있다."고 하였다.
(Handelingen 1-4, p.446).
48절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救援歷史)가 전적으로 은혜로 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
다. (1)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의 복음이(요 4:22)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받은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2) 그들이 영생을 받기로 예정된 사실이 알려진다.
그들이 영원 전에 구원의 예정에 들게 된 것은 그들의 어떤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주권적(主權的) 은혜로 된 것이다. 롬 9:11 참조.
그러면,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가 벌써 구원 받기로 예택(豫擇)된 증표이
다. 그러므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예택의 거울은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 의
미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보면 그가 예택된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이다.
행 13: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 이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체의 자
동적 역사로 퍼지는 것처럼 진술되었다. 사실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올바로
전파되었으니만큼 그것이 자체의 능력을 잘 발휘한 것이다.
행 13:50
이 때에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할 뿐 아니라 남들을 "선동하
여" 저희의 핍박 행위에 가담하도록 만들었다.
행 13: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 "발에 티끌을 떨어버린" 것은
그들이 그 핍박자들의 멸망함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힘껏 복음을 증
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멸망을 자취한 것 뿐이다(마 10:14; 막 6:11; 눅
9:5).
행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바다하니라. - 여기 말한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듣고 믿은 신자들이니,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이다(14절). 그들은 핍박 중에서도 기뻐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만족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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