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
"가이사랴"는 대헤롯이 건축한 도시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지는 않았다. "백부장"은
100명의 군인을 거느린다. "고넬료"는 로마인인 만큼 그를 상대하여 사도를 보내신 하
나님의 역사는, 곧 이방 전도의 발원(發源)이라고 할 수 있다.
행 10: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
료야 하니. - "제 구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경이다. 이 때는 구약 시대 유대인
들이 성전에서 저녁 제물을 드리던 시간이다. 성전에서 먼 거리에 살던 사람들은 성전
에 갈 수 없었으므로 그 시간에 기도하곤 하였다.
"환상"(* )은 사람의 눈 앞에(혹은 심령의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인 한, 참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임이 확실하
다. 그러나 성경 밖에서 사람들이 받았다고 하는 어떤 환상은 신앙의 표준이라고 하기
어렵다. 예컨대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가 환상에서 본 대로 불빛 같은 단구(短
軀)의 천사가 황금빛 나는 창으로 테레사의 심장을 찌를 때에 처음에는 고통스러웠으
나 점점 그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느껴져서 감수할 수 있었다고 기록된 것이다
(Evelyn Underhill, Mysticism, p.292).
"밝히 보매." 여기 "밝히"라는 말(* )은 야퀴에르(Jacpuier)가 말한
바와 같이, 천사가 실제로 고넬료에게 왔던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Grosheide). 칼
빈(Calvin)은 말하기를, "이 환상이 낮에 나타났으니만큼 더욱 참되고 착각이 아닌 사
실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Acts of the Apostles, I, p.410).
행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
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 고넬료가 두려워한 이
유는, 거기 나타난 이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만큼 하나님의 엄위를 연상시킨 까닭이
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엄위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늘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성경)도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합당하게 대한
다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어두워져서 그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모르는 때가 대부분이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이 문구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경전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으니, 곧 신자의 기도는 그의 선행으로 병
행되어야만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이다. 약 1:27 참조.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말
씀을 보니, 고넬료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처사가 얼른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넬료는 오랫동안 기도를 해 오다가 마침내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사건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
는다. 눅 18:1-7 참조.
행 10:5,6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 이 지시는 하나님께서 이방 전도를
위하여 세우신 방침이다. 그 때에도 유대인과 이방인은 종교 문제로 서로 원수처럼 여
기며 상종하지 않았었다.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대하여 그런 장벽을 두었기 때문에 여
기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이 절대로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 전도가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
은 확실한데, 이방인에게 대한 유대인의 완고한 편견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고 있었
던 것이다. 이제 그 편견을 깨뜨리는 초자연적 간섭이 임하였다.
행 10:7,8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교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
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 고넬료는 군대에서 지위 있는 인물
이었으나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아이 같이 순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이
되도록 만전을 기하였다. 그가 천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 그의 보내는 사람들에게
고하여 알게 하였으니, 그렇게 한 목적은 베드로로 하여금 꼭 자기 집으로 오도록 하
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착실히 실행하였다.
행 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
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 근동 지방의 "지붕"은 평평하여 사람들이 거기서 운동도
하고(삼상 11:2), 면담도 하고 자기도 하였으며(삼상 9:25), 그 밖에 여러가지로 사용
되었다(수 2:6; 삿 16:27; 삼하 16:22; 왕하 23:12; 느 8:16; 렘 19:13; 습 1:5; 마
10:27, 24:17). 베드로는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 이런 고요한 처소를 좋게 여겼을 것이
다. "제 육시"는 정오(正午)의 뜨거운 때이다.
행 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 "비몽사몽간"이란 말
(* )은 황홀한 심리상태를 가리키는데 초자연적으로 베드로의 심령이
하나님의 교통을 받도록 준비되었던 상태이다. 알포드(Alford)는 "비몽사몽"을 환상
(* ))과 구분한다. 곧, 환상은 객관계(客觀界)에 사변(事變)이 일어나는 것인
반면에, "비몽사몽"은 보는 자의 심라가 초자연적으로 변동되어 꿈꾸듯이 하나님이 보
게 하시는 것을 보는 것 뿐이라고 한다(Greek Testament, II, p.112). 이 점에서도 우
리가 명심할 것은 있다. 곧, 성경에 기록된 "비몽사몽"이 이교(異敎)의 그것과 다른점
이다. 성경의 것은, 그것을 보는 자가 자주 의식(自主意識)을 가지고 자기 처지를 비
판적으로 의식하고 있다(14절). 그러나 이교의 그것은 그 보는 자의 자주의식이 없고,
그 소위 탈혼(脫魂)에 있어서 신인 합일(神人合一)을 주장한다. 그것은 정당한 유신론
체계(有神論體系)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며, 사람을 속이는 범신론(汎神論)에 속한
다.
행 10:11,12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
이 있는데 -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베드로가 보는 이 일이 하늘에서 온 계
시(啓示)란 뜻이다. "네 귀를 매었다"는 것은 땅의 동서남북 모든 지역을 상징한다
(Neander). 곧,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 그리고 인종의 차별 없이 그 어디서든지 와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뜻이다. 눅 13:29 참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먹지 못할 불결한 모든 동물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 이
계시는 베드로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을 차별하지 않아야
될 것을 가르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 시대에 어떤 종류의 동물들은 불결하
다는 조건으로 먹지 못 하도록 하나님의 법규(레 11장)를 받았었다. 이 법규에 대하여
기스펜(W.H. Gispen)은 말하기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백성으로서의 신분
을 가져야 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에게서 특수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
성으로 나타나도록, 여호와께서 구분하셨다."고 하였다(Commentaar ophet Oude
Testament Leviticus, pp.174-175). 그러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계시, 곧 보자기 안
에 들어있는 각색 불결한 동물들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이제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처
럼 그 법규를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계시는 결국 신약
시대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없이하라는 뜻이다.
어떤 학설에 의하면 그 보자기 같은 그릇에 들어 있었던 불결한 동물들 그 자체가
이방인들을 비유한다고도 한다. 사 43:20 참조. 이해석이 우리 본문의 큰 뜻에는 위반
됨이 없다. 무디(Moody)선생 기념교회의 목사였던 해리 아욘사이드(Harry Ironside)의
아버지가 별세할 때에 이 귀절을 읽으면서 힘을 얻었다고 한다. 곧, 그가 병상에서 이
귀절을 읽어 내려가다가, "기는 것"이란 말씀에서 특별히 깨닫고 기뻐서 말하기를 "나
는 기는 것과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
어갑니다."고 하였다고 한다.
행 10:13,14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
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 여기 "소리"란 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것인데,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 점에 있
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씀하시기 때문이다(Grosheide). "잡아 먹으라." 레위기 11장
에 의하여 못 먹을 것인데도 "잡아 먹으라"고 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셔서
인류의 속죄를 이루셨으므로 레위기 11장의 법규는 해제된 것인 만큼, 유대인들은 그
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이방 세계로 진출해야 된다. 구약에 제정된 의식적 법규(意識
的 法規)들은 거의다 그 바라보던 메시야(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으
므로 해제되었다. 히 9:10에 말하기를,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것이니라"고 하였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베드로는
일찍부터 레위기 11장에 규정된 불결한 동물들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때에도 잡아
먹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발언은 레위기 11장의 규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제된 사실을 깨닫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행 10: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
라 - 여기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이라는 문구(*
)에 있어서, "깨끗케 하신"이란 말이 단순한 과거 동사인만큼 그것
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영광을 얻으
신 사실로 인하여 모든 의식적 법규들이 해제되었으므로(골 2:14-15), 어떤 동물들에
대해서 의식적(意識的)으로 깨끗하다, 혹은 깨끗하지 않다고 하던 구분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문구에서 "네가"란 말(* )이 강세형(强勢形)이어서
그 윗문구의 "하나님"이란 말과 대치하는 기미를 보인다. 따라서 이 표현에는, 네가
하나님과 대립할 처지를 취할 수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0:28; 롬 14:14 참
조.
행 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하나님께서 베드
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부탁을 하신 목적은, 그 "비몽사몽 간"(황홀한 상태)에 나타
난 일이 확실한 객관성(客觀性)있는 것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순간적
으로 빛이 반짝인 것처럼 얼른 지나가버린 희미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당한 시간
을 잡고 선명한 대화의 장면을 가졌던 것이다. 또 그 때에 베드로는 자주의식(自主意
識) 없는 기계적인 피동 상태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비판적인 심리로 그 일을 대하였
던 것이다(14절).
행 10:17,18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
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 베드로의 의심하는 태도를 보면, 지식문제에 대한 사도들의 심리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지식에 대하여 무관심주의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Bengel). 그들은 계
시(啓示)의 의미를 명백히 알고 전한 자들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에게서 온 환상의 뜻
을 알기 위하여 애썼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쓴 인물이었다. 베드로가 애쓰
던 그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의 유하는 집에 도착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난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해 주신 것이다.
행 10:19,20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
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
이 때 성령이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의 심령 속에서 된 영음(靈音)이었을 것이다
(Grosheide).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고넬료는 세 사람을 보냈는데, 여기서 성령께
서는 왜 "두 사람"이라고 하셨을까? 여기 사람 숫자에 관하여 사본상 차이가 있다. 시
내산 사본(* )과 기타 사본들(A.C.E)에는 "세 사람"으로 되어 있고, 바티칸 사본(B)과
또 다른 사본들(W.H.)에는 "두 사람"으로 되어 있으며, 또 그 밖의 몇 사본들(D.L.P)
에는 인원수를 밝히지 않았다. 위의 사본들의 차이나는 문제에 있어서 시내산 사본
(* )보다 바티칸 사본(B)이 더욱 권위가 있으니, 그것을 따라서 "두 사람"이라고 한다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고넬료가 파견한 사람들 중에 특히 사명
을 띠고 온 사람을 생각하시고 말씀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는 명령은 베드로의 신앙 부족을 경고하심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에 순종하되 의심하는 태도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사람
이 하나님 말씀에 관한 난제들을 모두다 일시에 해결 받으려고 기다리면 안된다. 그는
그 받은 교훈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만 알면 평안한 마음으로 신속히 순종해야 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절대의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양심은, 하
나님의 말씀 밖에 다른 것으로는 평안을 얻지 못한다. 인생 문제에 대한 최고의 해결
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함이다. 그렇게 할 때에 평안이 온다.
행 10:21,22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
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이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열심으로 고넬료의 사절단을 영접한 것이
다. 그 때에 그들은 베드로에게 고넬료를 천거하는 말을 하였다. 그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을 잘 공경하였으니, 그의 경건은 수준 높
은 것이다.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받고 베드로를 청하게 되었다는 말에 베드로의 마음은 더
욱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사실상 그 때에 유대인 기독자로서는 이방인들의 초청에 응
하기 어려웠으나(27-26) 이런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는 목적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말을
들으려"는 것이니, 곧 복음을 들으려는 것이다. 그는 기적보다 복음의 말씀을 더 원하
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다(고전 1:22-23). 베드로는 특별히 복음을 듣고
자 하는 고넬료의 아름다운 태도에 끌리는 바 있었을 것이다. 33절 참조.
행 10: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 베드로는 고넬료의 사절단이 이방인들인데도 거리낌 없이 대접
하였으니, 이것이 벌써 그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한 태도이다. "이튿날... 저희와 함
께 갈"때에 그는 욥바에 있는 두어 형제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여기 이른바 "두어 형
제"란 말(* )은 실상 "어떤 형제들"이라고 번역되어야 한
다. 이때 베드로와 동행한 사람은 여섯 명이었다(11:12). 베드로가 이렇게 여러 형제
와 동행하였으므로 후일 그가 난제를 당하였을 때에 그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였을 것
이다. 곧, 베드로가 그의 이방인 방문건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힐난을 받았을 때에
논증한 사실(11:4-18)을 이 형제들도 지지하는 증인이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와 같이 한 것은 지도자로서 지혜롭게 행한 것이다. 신앙이란 것은 현
실적 타산의 노예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인 만큼, 사람들
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려고 성경의 지혜를 사용한다(단 12:3). 마 10:16 참조. 중
요한 일을 증거하는 데는 언제나 증인들을 소유함이 성경의 지혜이다(신 19:15). 신앙
의 사람이 강직(剛直)해야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직(愚直)하면 안된다. 그는 옳게
행하면서도 남들에게 오해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혜롭게 걸어가야 한다.
행 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
고넬료가 베드로를 기다린 태도는 그의 경건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다른 사무를 다
제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자기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도 모아놓
고 베드로의 말 듣기를 원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긴 증표이
다. 그는 그 귀한 말씀을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들려 주기를 힘썼다.
행 10:25,26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
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 베드로는 자기에게 대한 고넬료의 경배를
옳지 않게 보고 부드러운 말로 교정시켰다.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는 것은 하나님께만
드릴 경배를 사람에게 돌림이다. 그것은 그 사람을 우상화 하는 죄악이다. 어떤 인물
을 과도히 높이면서 그 앞에서 충고 한 마디도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 인물을
절대 완전자로 모시는 셈이다. 그것은 사람을 우상화 함이다. 만일 누가 그런 넘치는
대우를 받게 된다면 그는 그 잘못된 일에 책임이 있다. (1) 그는 그 때에 베드로처럼
"나도 사람이라"고 해야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2)
그는 그 자신도 남들과 꼭 같은 피조물이요, 꼭 같은 죄인인 줄 알고 참람한 지위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조심하지 않으면 남들이 높여 줄 때에 자기도 모르게 인
류 중의 한 분자라는 신분을 남들과 동등 지위에서 지키지 않고 남들보다 높은 자인
듯이 처신하는 반역자가 된다.
행 10:27-29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
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 베드로는 여기서 솔직하게 이방인과 유대
인 사이의 장벽에 대하여 타개한다. 이렇게 사실은 사실대로 말한 뒤에, 그 문제를 그
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그 어떤 난제 앞에서도 그것을 해
결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자로서는 두려움이 없다. 27:22-25; 왕상
17:2-14 참조.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의 일반적 교제까지 금지된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Calvin). 하나님의 율법은 유대인과 가나안 민족과의 혼인을 금지한 것 뿐이
었다(신 7:3). 이 법규는, 유대인으로 하여금 이민족(異民族)들의 우상 종교에 물들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 교제까지 금지한 것은 후대
인들이 만든 유전이다. 이 유전은 이제 그리스도의 속죄의 세계성(世界性)으로 인해
해제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이방인을) 깨끗케" 하셨다고 가
르쳐주었다. 이 말씀에 대하여 15절 해석을 참조하라.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자기와
이방인들과의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인 장벽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 밑에서 깨뜨려 버렸
다. 우선 자기 편에서 먼저 그것을 깨뜨렸다는 의미에서 그는 말하기를, "부름을 사양
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하였다(29절 하반). 이렇게 전도자와 듣는 자들과의 사이에 막
힌 것이 없어야 그 전하는 말씀이 효과 있게 전달된다.
행 10:30-32
이 귀절들에 대하여는 2-6절의 해석을 참조하라. 고넬료는 자기가 베드로를 청해
오게 된 경위를 진술하며 보고한다. 그는 그의 체험한 바를 그대로 말하면서 특별히
천사의 모습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다(30절). 그가 이렇게 말함으로 (1) 자기가 친히
체험하여 얻은 확신을 보여주고, (2) 그 체험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지적
한다.
고넬료가 보고하는 말에, 그가 "기도"하던 중에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것을 보
니 사람이 기도하는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가까이 해 주시며, 또한 그 때에 하나님이
그 기도자로 더불어 교통하시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는 중요하다.
대하 16:9에 말하기를,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
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였다.
행 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 고넬료의 이 말
은 매우 겸손한 말이다. 그러므로 벵겔(Bengel)은 이점을 주석하여 말하기를, "고넬료
는 자기 집에 잇으면서도 마치 자기와 그 친구들이 베드로의 집에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고 하였다(Gnomon II, p.605). 그 때에 고넬료는 마치 군대에서 사병들이
상관을 대하듯 베드로를 대한 것 같다. 곧, 그는 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를 통하
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믿고 순종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행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
고 - 야퀴에르(Jaquier)는 말하기를, "베드로가 이 때에 아람어로 설교했는데, 고넬
료와 그 친구들이 알아 듣도록 다른 사람이 헬라어로 통역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
러나 그렇게 되었다고 할 만한 증거가 우리 본문에 보이지 않는다.
"입을 열어"라는 말은 중대한 발언에 대하여 쓰는 표현이다(8:35; 마 5:2). 크로솨
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여기에 이런 표현이 사용될 만하다. 그 이유는 베드로
의 전도가 여기서 처음으로 이방인을 상대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Handelingen
1-14, p.341).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
께서는 민족 차별이나 인종 차별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인종차별을 하시지
않는 이유는, (1) 그가 모든 인종을 꼭 같은 사람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며, (2) 그들이
모두 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것은 일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고 하셨다(막 16:15). 여기 "만민"이란 헬라어(* )를 자역
(字譯)하면, "모든 피조물"이다. 이것은 인종 중에 그 어떤 미개한 민족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점에서 문명한 민족과 동등이고, 복음 전파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
로 누구든지 인종 차별을 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하
는 죄요,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도 꼭 같은 죄인인 사실을 무시하고 자기를 다른 민
족보다 높이는 어두움이요 교만이다. 아프리카에서 평생 선교한 리빙스톤
(Livingstone)은 이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 자신은 영국인으로서 아프리카 흑인들과
잘 섞였고, 그들과 잘 통하였다. 그는 토인들에게 어머니 같이 온화하였으며 사랑이
깊었으므로 토인들이 그에게만은 해를 끼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행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
다 - 이 말씀은, 언뜻 보면 이방인들이 그들의 종교(기독교 이외의 종교)에 의하여서
라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으며, 그들 표준의 의(義)라도 가지면 하나님에게 합당하
다는 말 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런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교도(異敎徒)들의
우상 종교를 배척하였다(벧전 4:3). 행 4:12 참조. 이 귀절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에
게 합당하게 간주되는 것이 어떤 민족적, 또는 인종적 우생(優生)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복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로워지면 하나님이 그를 받
으신다는 것이다.
행 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
에게 보내신 말씀 - "만유의 주." 헬라어에서는 "만유"라는 말(* )이 어순
상 역설체(力說體)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도 주님이심을 밝혀준다.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렇게 "만유의 주"로 높
임이 되셨으므로(마 28:18) 그의 말씀이 이방 민족들에게도 전파될 권위를 가졌다
(Grosheide). 여기 "만유의 주"란 성호는 베드로의 이 설교에 있어서 그 강령(綱領)이
라고 할 수 있다. 이 아래 38-43절에 진술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결과가, 이 성호의
의미와 같이 이방인들에게도 미친다. 그러므로 슐라텔(A.Schlatter)은 이 점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시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소유가 되었고,
그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며, 또 그에게 합당한 자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
도의 통치는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가서 이방인들을 포섭한다. 고넬료는 이렇게 혜택을
입은 자들의 수효에 든다"라고 하였다.(Erlauterungen zum Neuen Testament, I,
pp.917-918).
"주"라는 말(* )은 70인역(LXX)에서 "여호와"(* )를 번역한 성호
이다. 예수님을 여호와 자신으로 믿는 사도들이 그를 가리켜 "주"라고 한 것은, 70인
역을 배경한 것이다. "화평의 복음." 이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된 인간을 하
나님과 화목케 하는 복음이란 뜻이다. 이 복음은 예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신 말씀의 내용이다.
행 10: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
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의 내용이 무엇임을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
하여 진술함에 있어서, 먼저 예수님의 역사적 위치를 밝힌다. 이것이 역시 기독교의
특이한 점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근대의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말씀
의 역사성(歷史性)을 중요시하지 않고 오히려 비역사적(非歷史的)인 것으로 규정한다.
불트만(Bultmann)은 시간 세계의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다 신화(神話)
라 하고, 그런 것의 기록은 우리가 신화 제거 작업에 의하여(demythologisierung) 읽
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역사적 성격을 중요시한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
이라 -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
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기름 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란 뜻이다
(A.Schlatter).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는 말씀 역시
그가 그리스도(메시야)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마귀를 정복하시는 이는 오직 하
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뿐이시다. 요일 3:8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
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
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 말씀이 역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
도라는 뜻이다(요 8:29). 베드로의 설교가 예수님의 속죄적(贖罪的) 죽음에 대하여 말
하기 전에 이렇게 먼저 예수님의 신분을 말한 것은 합당한 순서이다. 우리가 먼저 예
수님의 신분의 위대하심을 알아야 그의 죽으심의 가치와 다시 살으심의 능력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고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
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가치를 가졌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이시
니만큼, 사람들이 그에게 대하여 책을 저술하기를 근 2천년 가까이 계속하여도 끝이
안난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에게 대하여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
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하였다(요 21:25).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행적에 흥미를 끌지만 그의 인격(Person)의 위대에 대하여는
느낄 줄 모른다. 인간은 이렇게 무엇의 결과는 느끼면서도 그 원인은 못 느낀다. 예수
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만큼 우리는 그의 죽었다
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우리를 속죄하여 영생케 한다고 할때에 못 믿을 것 없다. 하
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속죄하여 주셨으니 일은 된 것이다.
행 10:39,40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 유대 땅에서 예
수님의 행적(38절)에 대하여 고넬료와 기타 이방인들이 간접적으로 들었겠지만(37절
끝),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과 그 행적을 직접 보고 말하는 "증인"이라고 자
백한다(Alford). 이 대조적 설명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강화시킨다. "증
인"이란 말(* )은 법정 술어(法廷述語)인데, 성경에 그 의미로 사용되었다.
법정에서 증인은 사실에 입각하여 증거하니만큼 재판장의 판결은 그 증거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복음 증인의 증거는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의 최후적 판결(영
생, 혹은 정죄에 대한)을 성립시킨다. 그 증거를 받는 자들은 영생을 얻고 그것을 배
척하는 자들은 멸망한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실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독일무
이(獨一無二)한 구원의 원천이다. 그가 죽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받을 죄값인 저주
가 그대로 존속할 뻔하였다. 또한 그가 죽으셨을지라도 다시 살아나시지 못하셨더라면
우리를 생명 세계로 영원히 인도할 목자가 없었을 뻔하였다. 이제 그가 다시 살으셨으
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벧전 1:3), 영원히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롬 14:9)
행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
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 믿음은 보는 데도 관계 있지만
(요 20:27-29), 보통으로는 듣는 데서 생긴다(롬 10:14, 17). 사도들 밖에 모든 다른
백성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타나 보이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예수님께서 도
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하셨다(요 20:29). 베드로가 그 서신에도 말하기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
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
뻐하니"라고 하셨다(벧전 1:8). 다만 기독 교회의 기초를 세운 증인들, 곧 사도들은
그리스도 사건(그리스도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친히 본 것으로 자격
을 이룬 것이다(고전 9:1).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기독교는 어떤 이상(理想)들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고 그리스도 사건을 전파하는
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의 복음 전파자들이었던 사도들은 그 사건들을 직접 목
도함이 절대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사도들의 전도를 받아서 믿도록 되
었다. 사도들의 신앙과 같은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
들에게 충분히 주어진다. 기독교 복음은 이렇게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만을 관계시켜 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사도들의 전도 내용(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그 전도 내용임)대로만 믿도록 역사한다. 우리는 어떤 환상보다
성경과 성령에 의하여 역사적(歷史的) 예수, 곧 죽었다가 다시 사신 나사렛 예수 그리
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은 그의 종들을 세우셔서 말씀과 성
령으로 복음(역사적 그리스도의 사건)을 우리에게(사도 시대 이후 사람들에게)전해 주
신다.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이 말은 헬라어(*
)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미
리 택하심을 받은 증인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할
자들을 특별히 택하여 세우시고 그들에게 특수한 분량으로 성령을 주셔서 예수님에게
대하여 참되이 증거하도록 자격을 갖추어 주셨다(1:8).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예
수님의 부활을 친히 보고 증거하도록 하신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령은 실
수하시는 법이 없으며, 속이시는 법이 없고 오직 진리의 신이시며, 사랑이시며, 의로
우시며, 거룩하시며, 지혜로우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 영적으로 성숙한 이
들은 성령의 역사를 명백하게 체험한다. 이 체험을 한 신자로서 성령께서 거룩하시고,
참되시고, 의로우신 사실에 대하여 의심할 자는 없다. 성령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시면
서 증거하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 이것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하신
사실을 본 것이 확실하다는 의미이다. 콘젤만(Gans Conzelmann)도 이 말씀을 그렇게
본다(Die Apostelheschichte, 1963, p.65). 예수님은 그의 부활 사실을 확증하시기 위
하여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눅 24:30, 41:43; 요 21:12-13). 크로솨
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베드로의 이 말은, 자기와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
활 증인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
니만큼 그들은 그의 몸의 부활이 확실함을 알게 된 참 증인들이다."고 하셨다
(Handelingen 1-14, p.349)
행 10: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말씀이다.
그는 땅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사시면서 우리를 체휼하셨고, 또 죽었다가 다시 살
아나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일을 마련하셨다. 이렇게 우리 인생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기울이신 그가 또한 심판자이시다. 우리의 최후 심판을 하나님의 사랑이 하시
는 것인 만큼, 그 심판을 받는 자는 정당한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심판은 횡포
성(橫暴性)도 없고, 전자성(專姿性)도 없고, 권력 과시가 전연 없는데도 두려움으로
표현되었다(계 6:15-17).
"산 자와 죽은 자." 이것은 모든 인류가 예수님 앞에서 심판 받음에 있어서 한 사
람도 제외되지 않을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인 만큼 그들이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현세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 그의 안으로
피해야 된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다음 귀절에서 사람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구원론을 말해준다.
행 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사 33:24, 53:5; 렘 31:34; 겔 34:16; 단 9:24 참조. 여
기 "저를 믿는다"는 말(* )은 온 인격을 그리스도
안에 맡기는 것을 가리키는 바, 구원 받는 데 이르게 하는 신앙이다.
행 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 이와 같은
일은, 사람들이 설교 듣는 도중에 성령을 받게 되는 하나의 실례(實例)도 된다. 하나
님은 특별히 그의 말씀 전파와 함께 성령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
님이 타시는 불 수레와 같다(David Thomas).
행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
라니 - 여기 이른 바 "할례 받은 신자들"은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이방인들의 성령 받음을 보고 놀란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아직 이방인도 그들과 꼭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놀랐다.
행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하나님께서 그 때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높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후에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고 그것으로써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경항이 있었다(고전 14:2-33). 그러므로 현대에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신자들은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힘써야 된다. 60페이지에 있는 '특별참고'를 참조하라.
행 10:47,48
이 귀절들을 보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곧, (1) 세례의 의식(儀式)보
다 성령을 받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과, (2) 세례도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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