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사도행전 0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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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8:20,21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
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
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 선자가 받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돈으로 살 줄로 생각한 시몬은,  (1)그의  은과
함께 망할 자요, (2)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하나님의 도(道)와는 상관이
없는 자이다.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한 한 가지는, 그가 이때까지 요술로써 많은  사
람들을 속여 온 헛된 자였는데, 이제도 참된 회개는 하지 않고 권능만 탐하는 헛된 자
로 나타났다.  요술하던 자들도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만 하면 복음의 은혜를  받는
다(19:18-20).  그런데 시몬은 간교하게 회개를 회피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 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바르지 못하다"는 것(*                               )
은 곧지 않다는 뜻이다.

 

 행 8:22,23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
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 베드로는  여기서
시몬에게 그 할 바를 지시해 주었다.  곧,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려고 함보다 먼저 "회
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경고했다.  마음에 품은 악이 큰 문제이니 그것부터  해결되
어야 한다.  곧, 마음에 있는 은밀한 죄악을 용서 받아야 된다.  "악독이 가득하며"란
말(*                                       )은 "쓸개로 가득하며"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쓸개"는 거짓 스승의 악을 말함인데(신 29:18), 불경건의 독소이다.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라고 한 말(*                                 )은 시몬의  심령의
불의(不義)의 종이 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행 8:24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 (1)시몬은 아직도 죄감은 없이 비윤리적인 요행수나 따르는  요
술 심리로써 이런 부탁을 한다.  그 뿐 아니라 (2)그는 아직도 하나님께 친히  기도할
마음은 가질 줄 모르고 남의 기도를 의지하려고만 한다.  자기가 친히 하나님께  기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심령이 아직까지 거듭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열리지 않
은 까닭이다.  레클렐(G.V. Lechler)은 말하기를, "쓸개 같은 거짓은  통절한  회개로
끊어버려져야 한다.  쓴 것(죄의 독소)이 가셔진 심령에만 단맛 있는 복음이 들어오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느껴진다."고 하였다(Lange, Commentary on Acts, p.152).

 

 행 8: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
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 "두 사도"는 베드로와 요한인데(14 절), 이들이  사마리
아 신자들에게 안수기도하였을 뿐 아니라(15-17),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리스도
를 증거함이 무엇보다 중요한 그들의 사명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 사실을  강조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진 것"이 나타난 것(2:3)은 말씀
전파가 기독 교회의 사명인 것을 지적한다.  사람의 혀는 악하지만(약 3:6)  하나님은
그것을 성화(聖化)시켜서 사용하신다(사 6:5-7).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직행하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전도한  사실이  역시
"불의 혀"의 역사이다.

 

 행 8:2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디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 두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에 빌
립도 동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때에 천사가 빌립에게 지시한 것이  그의  심령에
영적 충동으로 임한 것이 아니고 그로 하여금 음성을 듣도록 하는 객관적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꿈으로 나타남이었을 수도 있다(Grosheide).  하나님께서  에
디오피아 한 내시의 영혼을 위하여 빌립을 친히 보내셨다.  그는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귀히 여기신다(눅 15:3-7).
   "가사"는 본래 블레셋의 영토였고 지중해안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가는
여행자는 이 도시를 경유하게 된다.  그곳은, 알렉산더 야네우스(Alexander Jannaeus)
로 말미암아 멸망되었고, 가비니우스(Gabinius)가 재건하였다(Antiq. 145.3).
   하나님께서 전도자 빌립을 파송하신 방법이 여러가지이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갈
때에는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하여 갔었고(4절), 가사로 가는 광야에는 천사의  지시
를 받아 갔었고(26절), 아소도에 갈 때에는 주의 영에게 이끌려 갔었다(39절).   하나
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이렇게 다양하니만큼 우리는 복음 전도자들을 볼  때에  어떤
한 가지 표준으로만 평가하지 말아야 된다.

 

 행 8:27,28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시야의  글
을 읽더라 - "에디오피아"는 흑인종인데 함족속의 계열에 속한다.  그 나라는  애굽과
아비시니아(Abyssinia) 사이에 있다.  이 때에 이 나라의 고관이 복음을 받게 된 것은
시 68:31의 예언 성취이다.  거기 말하기를,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
히 들리로다"고 하였다.
   "간다게"(*                )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애굽의 바로나 로마의  가이
사와 같이 임금의 존칭이다.  "내시"라고 번역된 헬라어(*                 )는  환관
(고자된 관리)이란 뜻을 가진 말이다.  모세 율법에 고자는 성전뜰에 들어가지 못하고
(신 23:1)성전의 문지기로서 참여할 뿐이었다(Hort, Judaistic Christianity).   그런
데 더우기 이방인이요 고자인 사람도 신약 시대에는 아무 차별 없이 거룩한 영생의 기
업에 참여하게 된다.  누가는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자
세히 말한 것이다.  이 사건은 역시 사 56:4-5의 성취이기도  하다.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의 길이다.  그리고 그 때에 "내시"가 가던 길은  황막
한 사막길이었으니, 위험하기도 하였다.  그런 여행 길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성경을 읽고 있었다.

 


 행 8:29,30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 에디오피아인은  이
방인인데, 이방 전도에 먼저 집사(빌립)가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 전도자를
성령으로 지시하여 이방인 한 사람에게 인도하신 사실을 보면, 그가 (1)이방인 구원을
위하여 열심이 계심을 알 수 있고, (2)다만 한 사람에게 전도하시기 위하여서도  얼마
나 큰 성의를 기울이심을 알 수 있고, (3)그 내시가 마침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을 때
에, 하나님께서 빌립을 그에게로 인도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가 깨어  은혜를
사모할 때에 그를 더욱 각근히 권고하신다는 증표이다.
   "빌립이 달려가서." 성령의 말씀을 들은 빌립은 순종하기에 민첩하고 즉각적이었으
니, 이것이 전도자의 자격이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빌립이 이렇게 문답식으로 내
시를 가르치고자 한 것은 배우는 자의 심리를 긴장케 하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우리
가 이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알게 되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이 유익하나 깨달으면서 읽
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행 8: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 32-33절에 인용된 사 43:7-8의 예언은 누구를
가리킴인지, 믿는 자는 알기 쉬우나 불신자로서는 알기 어렵다.  특별히 불신  유대인
들은 이 예언을 읽기 싫어한다.  그 이유는, 그들을 예수님이 이  예언의  성취자이신
사실을 양심으로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유대인으로 브라질(Brazil)에서 선교사로
봉사하였던 긴스버그(Solomon Ginsburg)는 랍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린  시절
에 폴랜드에서 살 때 이 예언(사 53장)을 읽고 그의 아버지께 묻기를, "이 예언이  누
구를 가리킵니까?" 하였다.  그 때에 그의 아버지는 침묵을 지켰다.   그가  계속해서
물어보았더니 그의 아버지는 그 책을 빼앗고 손바닥으로 긴스버그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그가 런던에서 살 때에 유대인 기독자에게서 그 예언의 설명
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많은  유대인들과
무신론자들이 이 예언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Gnomon  Vol.  II,
p.590).

 

 행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지삭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  "입을  열
어." 이것은 빌립이 증거할 말씀의 중대성을 가리킨다(Grosheide).  빌립은 이제 이사
야서에 예언된 그 인물이 오실 메시야이며, 나사렛 예수가 이 메시야라고 증거하였다.  
예수님을 예언 성취로 오신 메시야라고 증거함이 복음이다.
   학자들 중에는 이사야서에 예언될 말씀이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고  하
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신빙성이 없다.  그들 중에서 이사야서  53장
에 대하여 가장 길게 저술한 바 있는 젤린(Sellin)은 처음에는 그 예언이  스룹바벧을
가리켰다고 하다가(1898년) 그 다음에는 그것이 여호야긴을  기리켰다고  하였다(1899
년).  그 후에 그는 또 다시 변하여 그것이 모세를 가리켰다고 하였고(1922년),  네번
째는 또 다시  변하여  그것이  소위  제  2이사야  자신을  가리켰다고  하였다(1937
년)(E.J.Young, Isaiah 53, p.64).  이렇게 비평가들은 진리를 확실히 모르는 것만큼,
그들이 발표한 의견에 그들 자신도 확신이 없으므로 일관성이 없다.

 

 행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
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 내시는 이와 같이 부드러운 질문으로 세계 받기를  원하는
그의 간절성을 나타냈다.  그가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믿는 한, 신앙의 외부적 표현인
세례 받음을 주저할 것 없다.  그는 도리어 은혜의  방편인  그것을  받기  원하였다.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내시는 자기 신앙 정도가 세례를 받을 만한지 빌립에게 판단
받기를 원하였다.  이것은 그의 겸손과 경건이다.  기독자는 세례 받는 그 시간에  정
규적이고 공적은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그 시간이 바로 그의 신앙적 결단을 내리는
기회인 만큼, 그는 진실되이 하나님 앞에 서야 된다.

 

 행 8:37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 우리 한역 성경에는 이 말씀이 기재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중요한 사본들(  ABCHL p. 13,61)에는 없기  때문
이다.  이 귀절이 대서사본(大書寫本)들 중 한 사본(E)에 있고 어떤  소서사본(小書寫
本)들과 교부(敎父)들의 인용문에 나오며, 공인 성경(Textus Receptus)에도 있다.  이
귀절을 원본에 속한다고 해야  옳다고,  어떤  학자들은  강력히  변증하였다(Belser,
Betrage, p.50, Wendt).  칼빈(Calvin)도 그렇게 알았다.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는다"는 것은 진심으로 믿는다는 뜻이고, 행실에 약점이 전
연 없는 완전한 믿음이라는 뜻은 아니다.  행실에 어떤 약점이 있는 신자도 거짓 없는
참 믿음의 소유자일 수 있다(Calvin)

 

 행 8: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사 세례를 주고 -  여기
이른 바 "내려 가"란 말(*                  )은,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의미가 아니고
길에서 물 있는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는 뜻이 아니다.  침례교에서는 이 말을  해석할
때에 물속에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례를 베풀던 빌립도 물  속에
들어갔다는 말인가?  로저스(Clement F. Rogers)는 침례가 초대 교회의 세레 의식이었
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고고학적으로 많이 연구하였다.  그런데 그가
그 연구를 통하여 초대 교회의 세례 의식이 침례가 아니었고 물을 부어 시행되었던 사
실을 발견하였다(Baptism and Christian Archaeology, Oxford, Clarendon Press).  우
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논란할 것은 없다.  세례 자체를 무시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런 주장에는 양보할 수 없지만, 세례 베푸는 의식(儀式)에 있어서 조
금 다른 것은(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써 세례를 행하는 한에 있어서) 피차 이
해해야 된다(Calvin's Commentary, Acts of the Apostles I,p. 364).

 

 행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의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초자
연적으로 빌립을 운반하신 것을 의미한다.  왕상 18:12; 왕하 2:11, 16;  고후  12:2,
4; 살전 4:17 참조.  이렇게 빌립이 초자연적으로 이끌려 간 사실을 본 에디오피아 내시는 그 신앙에 더욱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빌립은 이끌려 갔으나 내시는 고독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기쁨으로 길을 갔다.  그가 "흔연히"(*             =기쁘게)  길을 갔다는 것이 그 의미이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내시는 빌립을 다시 보지 못하였다.  그는 빌립을 더 보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그에게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인간의 안내를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Gnomon Vol. II, p.592).

 행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 "아소도"는 가사에서 20마일 먼 북쪽에 있다.  빌립이 거기에 "나타났다"(*      )고 함은 거기에 발견되었다는 뜻인데, 그가 초자연적으로 거기까지 이른  것을 가리킨다.  빌립은 거기서부터 해안 지방들을 찾아 다니면서 전도하였고,  "가이사랴"에 이르러서는 거기에 정착하였다(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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