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사도행전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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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4: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1
절) - "제사장"이란 말은, 즈안(Zahn)이 말한 바와 같이 성전을 지키는 특수한 제사장
들을 가리킨 듯하다(Grosheide).  "성전 맡은 자"(*                       )는  성전
수위장(守衛長)이다.  이들이 온 것은 폭력으로써 사도들을 잡으려 함이었다.   "사두
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전함을 싫어하여(2절 하반)  -  "예수를
들어"란 말(*                     )은 예수 안에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의  뜻
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소망 전함을 그들이 싫어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부활"은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모든  성도
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싫어하여"란 말(*                )은 "화가 나서", 혹은 "심히 괴로워서"라고 번
역될 수도 있다.  제사장들은 백성을 가르치는 사도들의 권위가 자기들의 권위와 대립
되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므로 그
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의 전도에 대하여 화
를 냈을 것이다.  복음 진리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이렇게 세상에서 어느  편으로든
지 박해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마침내 승리한다.

 

 행 4:3,4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3절) - 유대 랍비의 법
에 밤중에는 심문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Knowling).  그러므로 사도들은 밤 사이 구
류되었던 듯하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이
것은 사도들이 구금(拘禁)된 결과를 역설한 말이다.  복음은 위협을 당해도 도리어 더
전파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자의 숫자가 늘기 시작하여 얼마 후에는 수만명이 되었
다(5:14,6:1,7,21:20).

 

  행 3: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 이것은 산헤드린  공의
회의 모임을 가리킨다.  여기에 "관원"으로 번역된 헬라어(*                )는 다스
리는 자들이란 뜻을 가지는데, 대제사장들을 의미한다.  "장로"는 기독교회의  장로와
꼭 같지는 않다.  이 직분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재판건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세
운 것이었다(민 11:16-17).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선생들이다.  어느 시대나
교권주의자들이 주님의 진실한 종들을 핍박한다.


 행 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 "안나스"는 그 때의 현직 대제사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직 중에  있는  가야바의
장인이었고, 또 유력한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이름이 함께 나왔다.  "요한"이란 사람은
누두인지 알 수 없으나 즈안(Zahn)은 추측하기를, 주후 36년에 대제사장 된 요나단(안
나스의 아들)을 가리켰을 것이라고 하였다.  "알렉산더"에 대하여는 알기 어렵다.

 

 행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 산헤드린 공의회는 유대의 종교적 최고 회의이다.  그들이 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사
도들을 심문한 것은, 사도들의 전도를 막으려는 데 완벽을 기한 증표이다.  "무슨  권
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것은, 사도들이 행한  이적(앉은뱅이  고친
이적)이 하나님 밖에 어떤 다른 신(神)의 능력으로 되었을까 하여(신 13:1)  물음이다
(Knowling).  어떤 학설에, 이 질문이 교리적 투기심에서 나왔다고 한다.  다시  말하
면, 산헤드린 공의회의 허락 없이 어찌 그런 이적을 행하였느냐 하는  질문이라고  한
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는 앞의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
와 이름을 높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와 이름을  높이
는 듯이 이 질문을 하였다(Calvin).  그러나 그것은, 말라빠진 형식으로써만 하나님을
높이는 체하는 외식(外食)에 불과하다.  신앙이 타락된 자들은 이렇게 외식적 경건 밑
에서 자기를 내세운다.

 

 행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 그런 삼엄한  공
의회 앞에서 담대히 말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없다.  이는, 일찌기  예수님이
약속해 주신 말씀대로 임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마 10:19-20) 되어진 것이었다.   하
나님께서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능력을 그의 충성된 종들에게 주신다.

 

 행 4: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 베드로의 담력이 이 말에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두드러진 말로
써 심문자들 앞에 임한다.  곧, 그는 자기가 한 일(병자를 고친 일)이 "착한  일"인데
왜 심문하느냐 하는 반문의 태도를 은근히 이 대답에 나타냈다.  베드로의 담력은  확
실히 성령  충만의 결과이다.

 

 행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
에 섰느니라 -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에게 대한 설명을 두 가지 대조로 나타내어  예
수님에게 대한 신앙을 일으킨다.  곧, (1)사람들은 악하여 그를 핍박하여 죽였으나 하
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복음)은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셨다.  그리고 (2)그는 나사렛 사람이었지만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 자신이
었다.  이 오묘야말로 우리의 믿을 만한 지극히 깊은 진리이다.  그는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셨고,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이시다.
   베드로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이 죽인 그 예수의 이름으로 앉
은뱅이가 고침을 받았다고 증거한다.  이것이 역시 그의 확신과 담력에서 서슴치 않고
한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저 예수 죽인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
이다.  담대한 전도인은 이렇게 듣는 자들의 악한 심령에 교란을 일으키기를 두려워하
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섭섭하게 생각하든지 노여워하든지 그런 것을 문제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직언(直言)했다.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이것
은 예수님을 가리켜, 시 118:22의 성취로 보는 말이다.  "건축자들"이란 말은  이스라
엘 민족의 지도자들을 비유한다.  그들은 바로 베드로의 눈 앞에 있는 산헤드린  공의
회원들임을, 베드로는 여기서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  역시  저들의
예수 죽인 죄를 정면으로 지적하는 담대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돌"에  비유한
것은 베드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벧전 2:4-8).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것(*
                           )은 성전의 양벽(兩壁)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놓여  있는
요석(要石)이다.  이것은 건물의 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초석(foundation stone)이라
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버림 받아 죽임이 되셨
으나 다시 살아나셔서 교회의 터가 되셨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이 귀절의 헬라어는 다음과 같이 개역할 수
있다.  곧, "또한 아무 다른 이에게 구원이 없으니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구원 얻도록  
해주는  아무 다른 이름이 하늘 아래 인간계에 주신 바 없다."라고.  여기서 "구원"이
란 말은 육신이나 영혼을 합한 전 인격의 구원을 의미한다.  "하늘 아래...없다"는 말
은, 예수님의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신 구주격(救主格)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보장한다.  
어디든지 언제든지 예수님 밖에 없다.  다른 종교를 기독교와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는  
비교종교 학자나 신신학자들은, 이 말씀 앞에서 답변이 막힐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이름"은 진리이기 때문에 참 사람은 아니 믿을 수 없다.  그 이름은  능
력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우리는 안식할 수 밖에 없고, 그 이름은 영광이기 때문에 찬
양의 대상이고, 그 이름은 위로이기 때문에 즐거움의 대상이다.  예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밖에서는 유리 방황하게 되고,  그는 참이시기
때문에 그를 떠난 자는 거짓말하는 자가 되고(요일 2:22),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그대로이다(엡 2:1).
   이 귀절의 말씀으로 보아서 계시 종교(啓示宗敎) 외에는 참된 구원의 종교는 없다.  
자연인들이 만들어 내는 모든 이교(異敎)들은 어두움에 속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이교들은 고작해야 인간의 자연적 종교심의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
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다(렘 17:9).

 

 행 4:13,14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
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
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의 말이  막히게
된 이유 세 가지가 여기에 진술되었다.   곧, 그들이 사도들에게 대하여 알게  된  세
가지이다.  (1)불학무식한던 사도들이 신기할 정도로 기탄 없이(담대히) 말한 사실(13
절 상반).  (2)그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을 아는 사실(13절 하반).   다시
말하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지도 아래 있었던 사실이 저들로 하여금 저렇게 변론을  담
대히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3)병 나은 사람이 사도들과 함께 서서 그 이적
의 확실성을 실물로 환하게 보여준 사실(14절)이다.  이런 사실들 앞에서는  공의회원
들이 양심적으로 행한다면, 예수님을 믿게 될 수 밖에 없을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막는(롬 1:18) 비양심적 행위를 취한 것이다.  15-17 절 참조.  모든 불신앙은
비양심적 행위이다.

 

  행 4: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사도들은 공개적으로 담대히
말하였는데, 공의회원들은 비밀 회의로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두움의
차이점과 같다.  진리는 언제나 광명정대하고, 비진리는 사특하고 음흉하다

 

 행 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 저들이 사도들의 이적을 부인
할 마음은 간절했으나 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없게 됨은 그 사실이 벌써  "예루
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까닭이라고 한다.  만일 그 사실이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 사실이 참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폐(隱蔽)해 버리
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양심을 눌러 버리며 진리를 막아 버리려는  운동에
만 급급하였다.

 

 행 4:17,18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
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
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 진리를 위협으로 막아보려는 행동은  가장  어리석
다.  진리는 위협을 받을수록 더욱 전파된다.  "예수의 이름"은 예수님의 계시,  또는
권위를 가리킨다.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미워하여 사도들을 위
협하는 불의한 수단을 쓰게 되었다.  그들이 사도들을 위협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아
들 예수님을 위협한 셈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위협에 못 견디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 산헤드린 공의회원이 예수님
에게 관하여 말하지 말라고 제지하는 데 반대로 사도들은 "보고 들은" 사실에 대한 양
심적 고백을 안할 수 없다고 하면서 나온다.  진리와 사실대로 움직인 양심은  제재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양심이 진리대로 움직임을 제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을 받은 기관을 질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살과 같은 무서운 악이며,  그  결과는
멸망이다.

 

 행 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 -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
이 40여세나 되었다니, 그 불구가 오랜 세월 동안 고침받지  못한  불치의  것이었다.  
이런 불구자를 단 한 마디의 말로 고친 것이야말로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이적이다.  
이런 놀라운 이적 앞에서 저 강퍅한 산헤드린 공의회원인들 별 수 있었으랴!

 

 행 4:23,2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
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 여기 "그 동류"는 다른 사도들을 가리킨 것이다.  핍박 중에 있는 신자
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연락하며 교통함으로 힘을 얻으며 어려운 시험을 이기게  된다.  
그들이 합심하여 기도한 것은 귀한 일이다.  이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주재"라고
하였는데 이 말(*              )은 노예들에게 대한 상전의 주권을 생각하게 하는 칭
호이다.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는 사도들의 마음 가운데는 그에게만 순종할 결심이 있
다.(Grosheide, Handelingen 1-14, p.143).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가리켜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칭호를 부르는 사도들의 언사에서 우리는 그들의 신앙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피조물인 천지 만물이 하니님의 능력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위대하시며, 또한 그것들을  지배하시면서  성도들의
기도를 이루실 줄로, 그들은 믿었다. 시 121:1-2 참조.  이 점에 있어서 헬만 바빙(H.
Bavinck)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창조의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종교 윤
리적 관계를 성립시켜 준다.  존재의 근본 진리에서 떠나서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대하
여 옳은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의 만물 창조에서 그의 위대하심, 그의 전능하
심, 그의 장엄성, 그의 선하심, 그의 지혜, 그의 사랑이 현시(顯示)되었다(시 19;1-1;
읍 37장). 그리하여 그것이 그에게 대한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하여주며, 그를 신뢰하
게 하여주며, 특별히 고난 중에서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해준다(시 33:6, 65:6,  89:12,
121:2, 134:3; 사 37:16, 40:28, 42:5).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낮고 천하고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한다(읍 38:4; 사 29:16, 45:9;  렘  18:6;  롬
9:20). "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Vo1. 11, Kampen, 1928, p.371).

 

 행 4:27,28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
을 하감하옵시고"란 말은, 이제라도 핍박자들의 행동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되도록 섭리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 때 원수들의  핍박이  복
음 전파에 해로울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현실(예수님을  
핍박하는 운동)을 그대로 두시고도 그의 뜻을 이루시는 그의 오묘하신  경륜을   믿었
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면한 역사상 현실을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
은  역사를 관할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歷史)를 전용(轉用)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어  주
시기를  기도한  것이다.  캄벧  몰간(Campbell Morgan)은 이 점에 있어서 바로  말하
였으니, 곧 "이들이 가진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지혜 뿐 아니라 인간계에  간섭하
시며 통치하심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원수들의 박해가 그치기를 기도하지 않았으며,
그 핍박에서 벗어날 것을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원수들의 적개심을 일으켰
던 그들의 전도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원한 것이다."고  하였다(The
Acts of the Apostles, 1924, Chicago, pp. 131-133).  그들이 이렇게 박해를  그대로
받으며 하나님의 통치로 인한 복음 운동의 호전(好戰)을 기구(祈求)한 것은, 예수  그
리스도의 수난 역사를 본보기로 하고 행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역사를  본
보기로 하고 행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해하려던 원수들의 역사적  반역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고 말았다(25-28).  시 76:10에 말하기를, "진실로  사
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라고  하
였다.  인간의 악행도 주님께서 전용(轉用)하셔서 결국은 그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
신다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위로되는 말씀인가!  그리고 인간의 악해 중에  하나님을  
찬송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은 주님께서 막으신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더욱 위로와 힘
을 얻는다.  누구든지 악한 자에게서 핍박을 받을 때에는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도우심
을 구할 수 있다.  이 때에 기억할 것은, (1)선한 측에서 끝까지 선해야 된다는  것이
다.  분노나 원망이나 교만으로 기도하지 말 것이다.  (2)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핍박
을 없애주시도록 기도하지 말고 복음의 승리만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악인들이 교회
를 박해하므로 교회가 얻는 유익도 있으니, 첫째, 참된 성도가 밝히 드러나고,  둘째,
참된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 세째, 참된 성도들이 연단을 받아 더욱 정미로워짐이다.

 

 행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 이것은 이적이 나타나기를 위하여 기도함인데, 이적 그  자체
를 목적한 것은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목적 뿐이었다.   하나
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음이 잘 전파되게 하기 위하여 이적과 기사를 행하도록 도와주신
다(막 16:17,20; 요 4:48,20:30-31; 히 2:4).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사도들이 기도하는 그 즉석에서 응답을 받았다.  "모인 곳이 진동"
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증표이다.  눅 21:26; 행 16:26; 히 12:26,27;  시
114:7; 사 6:4; 겔 38:19; 욜 3:16; 암 9:5; 학 2:6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되는 은혜가 그 기도 응답의 결과이다.

 행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그 때에 교회가 하나된  이유는,  "그들이 다 함께 영원히 구원 받기 원하는 한 가지 소원만 가졌던 까닭이고, 다  함께  성령의 위로를 체험한 까닭이다."(Besser).  그 때에 교회가 물질을 유무 상통하였으나, 그것은 폭력에 의한 공산주의 정치 제도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때  교회의 자유로운 은혜 생활의 현상이었다.  은혜(하나님의 은혜)는 제도화 하거나  법규화 하지 못한다.  그렇게 못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은혜라고 한다.  그 때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때의 경제적 유무  상통이  신자들의 자발적 행동으로 되어졌던 것이고 외래의 제도가 아니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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