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사도행전 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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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 "제구시"는 우리  시간으
로 오후 3시를 가리킨다.  베드로와 요한은 시간을 지켜서 기도하였다.  인간은  규칙
을 세워놓고 제재를 받아야 선(善)을 이룰 수 있음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약
하여 방종해지며 해이해지기 쉬운 까닭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규율 있게 기도
생활을 한것도 귀하지만, 그들이 서로 합심하여 기도한 것은 더욱 귀하다.

 

 행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
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란
말은, 확실히 그것이 인력으로 고칠 수 없는 불구자인 것을 암시한다.   그는  신령한
은혜를 받기 위함보다 물질적 원조를 얻기 위하여 성전에 운반되어 와 있었다.   그러
나 그도  그 기대 이상으로 큰 은혜를 받게 되었으니, 곧 그가 주님의 권능에  의하여
걸어 다니게 된 것과 하나님을 찬미하게 된 신앙을 얻은 사실이다(8절).  하나님은 언
제나 인간(죄인)의 기대 이상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미문"(*       
  )은 여인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성전 동편에 있는 니가놀(Nicanor) 문의 별명일 것이
다.

 

 행 3:3,4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 이 말씀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앝은뱅
이를 "주목"(*               )하였고, 또 그들이 앉은뱅이에게 말하기를, "우리를 보
라"(*                             )고 하였다.  이 표현들을 결코 우연한 것들이 아
니고 집중적인 주시(注視)에 의한 인격과 인격의 접촉을 가리킨다.  인격과 인격의 참
된 접촉은 서로의 시선을 맞추어 직시(直視)하는 장면에서 이루어진다.  서로  시선을
피하는 만남은 살깊은 교통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앉은뱅이에게 대한 사도들
의 주목이 필요하지만 사도들에게 대한 앉은뱅이의 주목도 요구되었다.  이것은  사도
들의 시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전달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정신 차린
마음의 자세로 피차 만남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역이 유력하게 됨을 생각케  한다.  
시선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된다는 뜻은 여기에 없다.

 

 행 3:5,6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
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리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
고 -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명령에 순종하여 베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쉬운  일이
면서도 은허를 받는 데 있어서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순종의 태도이다.  순종은 반드시 힘드는 것만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전기 스위치를
누르는 것 같이 쉽다.  그런데 그런 순종이 큰 은혜를 받게 하는 준비 행위가 되는 수
가 많다.  우리가 마음의 태도를 취함에 있어서 종종 이렇게 미묘한 경우가 많다.  실
상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닌데, 우리 마음이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달리 고집하므로  큰
일이 잘못 되는 수가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고 마음에 걱정이  생겨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낙심이 생길 위협에 직면하였다 하자.  그 때에 그 사람은 심리
적으로 병들었으니 만큼 믿음으로 붙들어 줄 수 있는 형제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
는, 병자가 병원에서 치료 받는 것 같은 태도로 자기를 치료해 주는 형제의 지도를 순
종해야 된다.  그가 그리하지 않으면 참으로 낙심하고 믿음까지 잃어버릴 위험에 빠진
다.  그는 자기를 치료해 주는 그 형제의 말대로 극히 용이하고 작은 일들에 순종하면
된다.  
   베드로는 자기를 바라보는 앉은뱅이에게 하는 말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
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사도 베드로가 영적
으로 부요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우리 중에 그 누가 은과 금이 없음을 문제시하지 않
고 능히 그리스도를 더욱 귀한 줄 알고(빌 3:7-8; 히 11:24-26), 그로 말미암은  영적
부요(靈的富饒)로써 만족하고 남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려고 하는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의 이 명령은, 예수님에게만 권
능이 있음을 확신한 데서 발언된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간단한 말이면서 능력  있
는 말을 한 것이다.  "나사렛 예수"란 명칭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낮아지셔서 사람되신
사람의 명칭이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주권을 가지신 구원자를  가리킨다.   이
명칭들이말로 능력의 원천을 가리키는데, 믿음으로 이 이름을 말하는  자마다  능력을
체험한다.  베드로의 이 발언에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은 원칙적으로 사도적 역사에 국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
로 기독자마다 자기가 맡은 일의 분야에 있어서 주님이 그 일을 되게 하실 수 있는 능
력의 소유자이심을 구체적으로 믿어야 할 것을 우리는 주장한다.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 이 말씀에도  역시  베드로의
확신이 나타났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 앉은뱅이가 걷게 될 줄 믿고 그 앉은뱅
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다.  이렇게 믿은 결과로 그 앝은뱅이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이것은 발과 발목이 당장 힘을  얻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고서 사람이 남의 믿음으로도 도움 받는 일이 있다고 믿
는다.  믿음 있는 자들이 병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은 성경적이다(약 5:15-16).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
님을 찬미하니 -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이 말은 그 나타난 능력이 얼마나  확실
하고 위대한 사실을 지적한다.  앉은뱅이었던 그는 걸어갈 정도만 아니라 뛰기까지 하
였다.  이것은 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앉은뱅이가  고쳐진
사실을 지적한다.  그 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찬미"한 사실을 보니, 그의 영혼까지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즐거워한 것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은혜는 병 고친 것보
다 더 큰 은혜이다.

 

 행 3:9,10

   그 때에 "모든 세상"이 앉은뱅이의 걷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하고 귀하지만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이적 사건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11-26 절 참조.
   고등 비평가로서 편집사학파에 속하는 헨켄(Haechen)은, 베드로가  앉은뱅이  고친
이적 기사(異蹟奇事)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1)이 사건에  있어서  요한을
베드로의 동반자로 나타나도록 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누가(사도 행전 저자)의  
고안으로 꾸민 이야기일 것이라고 함(Er  hat  petrus  in  Johannes  einen  stummen
Begleiter gegeben).  누가가 그렇게 고안하였다고 추측하는 헨켄의 이유는, 장차  그
들(베드로, 요한)을 공의회 앞에 두 증인으로 나타나도록(4:20) 해야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Es mussen zwei Zegen Jesu sein, die nahher dem hohenrat  gegenuberstehen,
4:20.-Apostelgeschichte, 1965,s.162).  (2)1절에 기적 행한 시간이 명시되었으나 그
것도 본래의 이야기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 것이라고 함(Die genau Zeitangabe  V.  1,
geohrt enbenfalls kaum der ursprunglichen Erzahlung an.-Apostelgeschichte. 1965,
s.162).  (3)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리"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이 기적 이야기에 참으로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함(Diese  Worte
tragen ja ein der Heilungsgeschichte ganz fremdes Motrv  ein.-Apostelgeschichte,
1965, s.162).
   위의 헨켄의 추측은 성립될 수 없다.  그는 무슨 근거 위에 그런 과감한 추측을 하
는지?  사도 행전의 저작자가 바울의 수종자 누가인데, 그가 그런 엄청난 과장과 보충
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행 3: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
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 모든 백성이 이렇게 모임으로 베드로에게 설
교의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솔로몬 행각"은 성전의 동편  외벽(外壁)을  따라
있는 현관 같은 장소이다.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
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베드로의 이 말은 진정한 이적의 특징 하나를 알게 한다.  진정한 이적은, 그것을  행
한 인간을 중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증거함이다.  베드로는
그 이적이 "개인의 경건"과도 상관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참된 이적은 아무리  고
상한 인간적 요소에게도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 밝히 지적되어 있다.  백성들이
그 이적에 놀라서 베드로를 높이려 할 때에, 그는 그 영광이 자기에게로 돌아올까  두
려워하여 경계하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중심이었고,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종들의 표준이다.

 

 행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베드로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믿을 만한, 또는 믿어야 할 참 신(神)
이신 하나님께서 그 이적의 성취자이심을 증거한다.  다시 말하면, (1)나면서  앉은뱅
이 되었던 자를 고친 이적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아는 언약신(言約神), 곧  "아브라
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니,  도리어  믿음직한  일이라고  하며
(12-13).  (2)그 이적은 역시 언약과 관련된 영광 얻으신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이루어
졌다고 한다(13, 16).  그런데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옛날부터 선지자들이 예언
한 예언이 대상이다(21-2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도 믿을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의 오심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에 베드로는 그 이적이 언약과 관련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
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당연히 "하나님"과 "그 종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종 예수"란 칭호에 있어서 "그 종"이란 것은 사 52:13-53:12의 메시야
칭호를 채용한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을 "종"(*         )이라고 한 것은,  이  아래
귀절들(13하반-15)에 기록된 그의 수난(受難) 때문이다.  그의 낮아지심은 곧 그의 종
되신 형상이시다(빌 2:7).

 

 행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
그들의 죄는 의(義)에 대한 악독한 반역 행위였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님은  죽이도록
하고, 살인자는 놓아주도록 운동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흔히 메시야를 "거룩한 자"라
고 말하였고(시 16:10; 사 41:14), 또한  "의로운  자"라고도  하였다(사  53:11;  렘
33:15).  요 6:69; 행 7:52, 22:14; 요일 2:1 참조.

 

 행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 이것은 예수님에게 대한 유대인들의 범죄가 얼마나 큰  것
을 지적한 말이다.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배척하고 죽였으니, 이 얼마나 우
매한 짓이었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 유대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자"
를 죽였는데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하니, 이것은 유대인들의 불의에 대한 하
나님의 심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의(義)라고 할 수 있다
(요 16:10).  그러니만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자명(自明)한 진리이다.   그  이유는
진정한 의는 진실성을 그 생명으로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사도들의 증인 자격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증거함이다(행 1:21-22; 고전 9:1).  특별히 여기 "증인"이란 말(*            )은 법
정 술어니, 어떤 사건의 사실성에 생명을 걸고 증언하는 자이다.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 "그  이
름을 믿으므로"라는 문구는 베드로의 믿음과 앉은뱅이의 믿음을 가리킨다.  6절은  베
드로의 믿음을, 5 절은 앉은뱅이의 믿음을 각각 보여준다.  "그 이름"은 예수님이  하
나님의 아들이신 내용을 가리킨다.  이는 베드로의 신앙이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신앙적 지도를 바라보았으니, 그것이 역시 신앙이다.
   베드로의 열렬한 증거는 그 이적을 행한 이가 자기 자신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이신
사실을 밝힘에 있다.  곧,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
니라"고 한 말을 보아도 그렇다.  이 둘째 문구에서는 "믿음"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왔다고 하였으니, 그 이적 사역에 관계되신 이는 예수님 뿐이심을 알 수 있다.

 

 행 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아노라 - 베
드로는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배경하고  권면하다.   유대인들의  죄가  비록  크지만
(13-15),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 예수님의 공로는 그보다 더 크시다(사 1:18).  그
러므로 그들이 진실히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은 분명하
다.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이것은 죄인들에게 소망을  주는  위로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악독한 죄인들도 이런 위로의 말씀을
받은 동시에 회개의 기회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취급하실 때에는 언제나 그들
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여기서 그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죄책(罪責)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르고 행한  것일지라
도 불법은 죄다.  요일 3:4 참조.  다만 이 부분 말씀(특별히 19절)은 부드럽게  그들
의 죄책을 지적한 것이다.  사람이 회개한다는 것은 자기의 죄책을 지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행 3: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 베드로는 여기서 하나님의 예정과  섭
리를 내세움으로 그의 구원 계획의 성취를 설명한다.  곧,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고 예
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은 미리부터 그렇게 될 것을 아시고(예정하시고) 예고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으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실패  하신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일을 인류 속죄의 방법이 되도록 영원전부터 예정하셨다는  것
이다.  잠 16:4 참조.

 

 행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로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구원 계획에 들어 있는 사건인 것만큼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니, 그 주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마다 사죄함을 받을 소망이 있다.  인간이 우연한 사건에서는 아무 소망도
가질 수 없지만, 하나님이 작정하신 영원한 구원 계획에 참여하기만 하면 확실한 소망
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 성격(예정과 예언) 때문에
(18절) 회개하는 신자들만은 그들의 죄악이 아무리 클지라도 "죄 없이함"(*         
                                                     )이  되며,  "유쾌하게  되는
날"(기회들)(*                               )을 받으며, 주님의 재림으로 인한  만
유 회복(*                                         )의 복에 참여한다(3:21).   "죄
없이함"이란 문구의 "없이함"(*                    )은 죄악의 기록을 도말함을 의미
한다(Zahan, Die Apostelgeschichte des Lucas,  Erste  Halfte  Kap.   1-12,  1919,
s.155).  월렝가(Wielenga)는 말하기를, "죄를 도말한다 함은 죄를 가리워준다는 것보
다 더 강하다.  사도 베드로 자신이 이 진리를 체험하였으니, 그는  일찌기  예수님을
부인한 후 통곡하고 용서를 받았다.  그는 그 범죄에 대하여 언급한 바  없다.   그는
도무지 범죄하지 않은 자와 마찬가지로 되었다."고 하였다(Van Jerusalem naar  Rome,
Eerste Deel, 1928, p.35).
   "유쾌하게 되는 날"(*                               )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된
영적 구원의 기회들(*            )을 가리킨다.  이는 회개하는 자들이 죄에서  해방
되어 영적 평안을 얻음이다.  역 "기회들"이란 말(*            )은 "날"이란 말과 달
라서, 우리가 이 때에 심리적으로 긴장해야 될 것을 보여준다.  이 때, 곧 신약  시대
는 의미 심장한 기회이다.  '기회는 오직 한 번만 문을 두드린다'고 한 격언도 있으니
그것도 '기회'란 뜻을 알려준다.    

 

 행 3: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한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 "예수를 보내
시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그 사건도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
한 대로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21절), 구원 계획은 온전히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성립된 것이다.  구원 계획의 이와 같은 성격은 우리에게 믿음을 준다.

 

 행 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
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 "영원 전부터"란 말(*              
   )은 오래 전부터, 혹은 옛날부터란 뜻이다(Knowling).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통
하여 만유 회복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사 11:6-9, 35:1-10에도 있다.  "만유를  회
복"하신다 함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서만 이루어질 복된 신천  신지(新天新地)의
시대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이 시기(時期)가 오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다.  여기 "회복"이란 말(*                            )은 주님의 재림 때에 만물이
새롭게 되는 영화(榮華)를 가리킨다.

 

 행 3: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
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 이  귀절  초두에
설명 접속사 까르(*      )란 말이 있는데, 우리 성경에는 그 말이 번역되지  않았다.  
이것은 "곧", 혹은 "말하자면" 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은 윗절의 "선지자들"(*
                )이라는 말에 대하여 설명해 주려고 나온 것이다.
   앞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는 시기가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이 시기는
실상 신약 시대로서 교회가 그의 말씀을 믿어야 될 때이다.  그런데  이  시기(신약시
대)에 대하여 일찌기 모세가 예언한 바 있고(신 18:15) 과연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
러므로 우리는 그 이루어진 사실을 진실하게 믿어야 된다.  여기 "모세"의 말  가운데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라고 한 것을 보니, 그 선지자는  인간성도
지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예수)이신 것이 분
명하다(딤전 2:5). 월렝가(Wielenga)는 말하기를, "모세가 검으로 다스리지 않고 말씀
과 성령으로 다스렸던 것처럼, 메시야 역시 그러하시며, 하나님 백성의  생사  문제가
모세의 말씀에 달렸던 것과  같이,  메시야의  말씀이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Van
Jerusalem Naar Rome, Eerste Deel, 1928, p. 39).  이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모세와 예수님과의 공통점을 본다.  곧, 모세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충성하였고,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충성하셨다는 것이
다(히 3:1-6).  

 

 행 3: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 "그 선지자"란 말(*                       )은 관사를 가진 고로  특수한  선지자,
곧 메시야(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다(요 3:16).

 

 행 3: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 모
세 뿐 아니라 모든 다른 선지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메시야의 오실 것을 예언
하였는데 과연 그대로 메시야가 오셨다.
   메시야 예언이란 것은 비단 몇 개의 직접적인 메시야 관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
다.  메시야 시대를 예표하는 구약의 모든 제도나 재료들이 역시  간접적으로  메시야
관계의 예언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구약의 모든 말씀은 전폭적으로 메시야  예언
이라고 할 수 있다.  벧카워(G.c. Berkouwer)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  예
언은 단조롭게 중복되는 메시야 예언을 포함하는 정도의 책이 아니고, 메시야 내림(來
臨)의 예언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하나님의 행동으로 채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이
나 신약이나 서로 연락시키지 않고는 그 의미를 바로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秒筆)(The Person of Christ, pp. 136, 141).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성취라고 할 때에, 비단 일정한 몇몇 귀절의  성취
만을 가리킴이 아니다.  바빙크(Bavinck)에 의하며, 구약의 성취란 것은 신약에서  특
히 "참"이란 말(Ware)로 진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곧, "그리스도는  참된  선지자요
(행 3:23), 참된 제사장이시요(히 4:14), 참된 임금이시며(요 18:37), 참된 주의 종이
시며(빌 2:7), 참된 화목 제물이시며(롬 3:25), 참된 제물이시며(엡 5:2), 참된  할례
이시며(골 2:11), 참된 유월절 양이시다(고전 5:7).  따라서 그의 교회는  아부라함의
참된 씨요, 참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며(마  1:21;  눅  1:17;  롬
9:25,26; 고후 6:16-18; 갈 3:26; 딛 2:14; 히 8:10; 벧전 2:9; 계 21:3), 또한  하나
님의 참된 성전이며(고전 3:16; 고후 6:16; 엡 2:22), 참된  시온과  예루살렘이며(갈
4:26; 히 12:22), 그 백성의 영적 제물은 참된 종교다(요 4:24;  롬  12:1;  빌  3:3,
4:18)."(Grerformeerde Dogmatiek Vol. 3, Kampen 1929, p.234). 참되다는 것은  그림
자나 예표와 대조되는 완전한 실물을 가리킨다.

 

 행 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
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에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
라 하셨으니 - 여기 "너희는"이란 말(*          )은 역설(力說), 또는 강조하는 표현
이다.  베드로가 이것을 강조하는 목적은 그 청중에게 예수를 메시야로  믿도록  책임
지우려는 것이다(Bengel, obilgat auditores).  "선지자들의 자손"이란 말은,  선지자
들의 예언한 바가 이제 베드로 당시 유대인들의 목전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언
약의 자손"이란 말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가 이제 저들에게 이루어진 것을  가리
킨다.
   선지자들은 실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관련된 사항들을 중심하고  예언하였으
니, 그들의 말씀은 실질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대한 발전적 설명임에 틀
림 없다.  그렇다면 구약 전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마 하신 언약이
고, 신약은 그 성취인 것이다.  베드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성취를  보았으니  만큼
그들은 "언약의 자손"이란 명칭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으례 신약의 복음을 믿어
야 할 필연성 아래 있다.  그래도 안 믿는 자는 더욱 죄가 크다(눅 12:47-48).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에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세계적 구주(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리라는 예언이
다.  갈 3:16 참조.  이 말씀은 창 12:3,22:18,26:4,28:14에  약속되었다.   특히  창
12:3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여기 "땅
의 모든 족속"이란 말(*                          )은 분명히 세계성(世界成)을 가지
고 모든 인류를 생각한 보편주의이다.  델리취(Delitzsch)는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땅'이라는 것은 창 3:17에 선포된  저주(詛呪)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족속'이라는 말은 벌써 창 10:5,20,31에 관설된  모든  갈라진
민족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한 대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 축복
은 한 번 갈라진 민족들을 연합시킬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창 12:3에 결론한 말씀
은 모든 국가와 모든 시대를 포괄함이다.  바움갈텐(Baumgarten)이 말한 대로  아브라
함에게 주신 이 계약(契約)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전폭에  대한
축도(縮圖)이다."고 하였다(Commentaries on the Old Testament, Pentateuch, Vol. 1,
p.193).  칼빈(Calvin)도 이와 같은 뜻으로 말한 바 있다(Commentaries  on  Genesis,
Vol. 1, pp. 348-349).  특별히 창 22:18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 계약의  범세계성
을 더욱 명백히 보여준다.  곧,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으니, 여기 이른 바 "만민"이란 말(*           )은 아주 분명하게 이방 국가들을
의미한다.  예언서에도 이 사실이 확인되었고, 이방 선교에 대해 많이 예언되어  있다
(시 87:4; 사 19:18,44:5,49:1-9,52:13-15,53:10-12; 미 4:1-2; 슥 8:23).   베드로는
이 약속의 말씀들이 예수님에게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유대인들이 회개를  촉
구하였다.  그 시대의 유대인들을 가리켜 "선지자들의 자손", 또는 "언약의 자손"이라
고 했으니, 이는 위에 벌써 해석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메시야가  그들의
시대에 오셨으므로 그들은 그 약속의 실현을 보게 된 자손들이라는 뜻이다.

 행 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종"이란 말은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메시야의 순종을 생각케 하는 명칭이다.  "먼저"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의미한다는 학설이 있으나(Burton) 그렇지 않다.  이 말은  이방인에게보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임하였다는 뜻이다.  "복 주시려고"란  말(*                    )은, 말로 복을 축원함이 아니고 실제로 복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이 말씀과 행위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복이 된다.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유대 민족에게 보내신 목적은 단체적으로 회개케 하려는 것이 아니고 각 개인으로  하여금 악을 버리고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 "각각"이란 말(*   )은 그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취급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류 구원 운동은 온정(溫情) 깊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전체의  하나님이시 동시에, 개인(個人)인 나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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