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요한복음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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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예수께서......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 이 장에서 본 복음서 기자는 소경의  눈
뜨임 받는 것을 묘사하며, 동시에 그 이야기와 더불어 교훈을 곁들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기적에서 얻은 수확임을 표시한다.
  날 때부터 - 이 항목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는 모태로부터  성
인이 될 때까지 계속된 그의 소경됨이 인간의 치유법으로 고쳐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자들이 질문한 바 누구의 죄에 대한 형벌이냐고 묻게 된  이유였다.  첫째로
성경은 인류가 겪는 모든 고통이 죄로부터 오는 것으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에게 임한 고통을 하나님이 내리신 형
벌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즉시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
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으로 오류를 범한다. 첫번째  오류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악한 비판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당연히 자기들에게도 해
당되는 가혹한 비판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 형제에게 일이 잘  안
되었을 경우 사람들은 즉시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더 심한 채찍으로 때리셨을 때는 나는 내 죄를 묵과해 버린다. 형벌은  생각함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바로 자기 자신을  빼놓아서는  안된
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 공평한 판단자가 되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죄악
에 대해서 보다 우리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 지자.
  두번째 오류는 지나치게 가혹한 판단에 있다. 어느 사람이 하나님께 벌을 받으면 우
리는 즉각 그것을 무섭게 증오스러운 것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범죄로  규정하여  그의
구원을 거의 소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매우 중한 죄를 범했을  때
는 우리의 죄를 경감시켜 우리 자신의 잘못한 생각은 거의 갖지 않는다.
  세번째 오류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단련시키는 모든 사람들을 하등의 관계없이  우
리가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방금 말한 바, 즉 우리의  모든  고통이
죄로부터 임한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유로써 그의 백
성을 괴롭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의 죄는 보수(報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형벌을 미래의 생애로 지연시켜 더욱 가혹하게 단련시키는 경우
하나님은 가끔 그의 백성들을 아주 가혹하게 징계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보
다 죄를 더 범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위하여 육신의 죄를 제어하시기 위한  하
나님의 뜻이 계시기 때문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죄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
이 인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순종과 훈련을 목적으로 연단시키신다. 우리가  알다시피
의인(義人) 욥은 남다른 불행을 겪은 사람인데, 그가 이렇게 불행을 당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계셨기 때문이다. 욥의 경건은 바로  그의
역경속에서 그 진가가 잘 나타났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받는 모든 고난을 아무 분별없
이 무조건 다 죄의 대가로 생각하는 것, 곧 모든 형벌의 평가를 동일시하거나, 또  하
나님은 꼭 형벌 받을 죄를 범한 사람만을 형벌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
람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목할 것이 두가지 있다. 첫째로 심판은 대체로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벧전4:17). 따라서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묵과하시는  반면
에 그의 친 백성이 범죄했을 때는 그들을 심하게 벌하신다. 교회의 죄악된 행동을  고
치실 때 하나님의 채찍은 훨씬 더 가혹하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바울을 가장 악한 강도와 다를
바 없는 집행관에게 붙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람들이 받는  형벌의
원인에 관해서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추론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벌하신 그 죄가 무엇이었는지  제자들
이 일반상식을 쫓았을 때 그들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죄를 범했는지를 물어보았을  때
와 같이 그렇게 불합리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질문은 일반적으로
유행되는 상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이 피타고라스가 상상하던 *               
          (메 템푸시코-시스;수,數)를 믿었다는 것은 다른 성경말씀을 비추어 볼  때
에 매우 확실하다. 이때부터 우리는 특히 인간의  오만함의 호기심이 얼마나 깊은  미
궁에 빠져 허덕이게 되었은가를 깨닫게 된다. 그들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절름발이
로, 또 어떤 사람은 사팔뜨기로, 또 어떤 사람은 완전한 맹인으로, 또 어떤 사람은 불
구된 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마땅히 두려워 했어야 할 하나님의 은밀
하신 심판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대한  확실한  이유를
알고자 원했다. 그들은 경솔해서 어린 아이 같이 어리석은 생각에 빠졌는데 곧 그들은
생각하기를 한 영혼이 한 생애를 마쳤을 때 그 영혼은 새몸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과거
생애로 인한 형벌을 받는다고 한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에서 이와 같은 어
리석은 망상을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라고 선포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만약  우
리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고 하나님의 심판을 탐문한다면 우리는  우리
의 마음의 혼돈과 오류가 우리를 무서운 심연 속에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는 것을 이 예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그렇게 중대한 오류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가
운데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은 진실로 괴상망측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는  하
늘에 속한 지혜의 빛이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불붙여 졌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만
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오만함을 그렇게 심하게 보수하셨다면 하나님의행사를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은 이러한 겸손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가  우리에게서
사라질 때 우리의 마음은 벅찬 감탄에 빠지게 되어 우리의 혀는 즉시 이렇게 부르짖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오 주여 주는 의로우시며 주의 심판은 의
로우시나이다".
  부모의 죄에 대한 제자들의 의문은 부당하지 않다. 비록 무죄한 아들이 그 아버지의
과실로 인해서 벌받지 않고 또 "죄진 영혼은 죽으리라"(겔18:20)고 했을지라도 주님께
서 부모들의 범죄를 자녀들의 가슴 속에 밀어넣어 삼사 대까지(출20:5) 갚으신다는 것
은 헛된 위협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노하심은 종종 한 가정에 여러  세대동안
머문다. 하나님께서 믿는자들의 부모로 인해서 그 자녀들을 축복하시는 것과 같이  하
나님은 또한 악인의 후손을 버리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공변된  보응으로
서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파멸을 당하도록 정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이런 면으
로 그가 타인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벌 받는다고 불평할 수 없다. 성령의 은혜가 부족
한 곳에, 즉 나쁜 새에서 나쁜 알이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부모
들의 어떤 죄로 인해서 그 아들에게 벌을 내리셨는가 하는 데 대한  사도들의  의아한
문제점이었다.


9:3
   이 사람이나.....범한 것이 아니라 - 주님은 이 소경이나 그 부모들에게서 완전히
허물을 벗기시지 아니하시지만, 소경된 것의 원인은 죄에서 찾아서는 안된다고 말씀하
신다. 이것이 내가 이미 말한 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실 때 하나님은  그
들의 죄를 벌하시는 것 외에 때때로 다른 뜻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고난의
이유가 확실하지 않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해를 끼치지 아니하고 또한 우리  형제들에
게도 악한 생각을 품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의아심은 제거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도 다른 이유를 인용하신다. 즉  "그에
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주님은 단수형으로  한  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복수형으로 일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소경으로 있는  동안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엄주하심의 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
로 두려워 하게 하여 자신들을 낮추도록 하기 위한 데 목적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그를 구한 은혜였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하심이 반영되었다. 이와 같이 주
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제자들을 감동시켜 기적을 바라도록 의도하셨던 것이다. 그
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때 이 이유가 세상 사람들의 보는 앞에서 참되고 정당한 것으로 충분하
게 보여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비하게 나타나시든지 혹은 엄하게 나타나
시든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이와 같은 양 면으로 자기의 영광의 도구로  삼으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할 어떠한 권리도 없는 것이다.


9:4
  나를 보내신......하여야 하리라 - 주님은 지금 소경의 눈을 밝혀 주심에서  하나
님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사실을 증거하고 계신다.  주님은
또한 평소 생활에서 한 비유를 들어 사용하고 계신다. 해가 뜨면 사람은 일어나  일을
한다. 그러나 밤은 시편 104편 22절의 말씀과 같이 휴식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
므로 주님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을 '낮'이라고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주님은  낮
이 있을 동안에 그에게 명한 일을 마치셔야만 하신다. 이것은 마치 어느 공무에  부름
받아 나온 사람마다 각기 그 일의 성격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기 위하여 매일의 과업에
몰두해야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또한 일반적인 규범을  추론해야
만 하는데 그것은 곧 한 사람의 인생 행로가 말하자면 그의 낮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낮의 길이가 짧으므로 일군들을 일깨워 근면하고 수고하게 함으로 하던 일이
중도에서 밤의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 함과 같이, 우리도 인생의 짧은 시간
이 우리에게 할당된 것을 생각해서 태만한 중에 빈들빈들 지나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일깨우실 때  즉각적으로  우리는
그 기회를 잃지 않도록 지체해서는 안된다.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 나는 이 말씀을 앞을 내다보시면서 부언하신 말씀으
로 해석한다.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밤에 덮치는 위험이 있는 것처럼 그의  일
하는 시간을 미리 정하신다는 것은 불합리하게 보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구별하심으로 그의 일하시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
음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자신을 태양에 비교하고 계신다. 태양은 그  광채로  지구를
밝히시지만 태양이 질 때 낮도 그와 함께 가버린다. 이와 같이 주님은 주님의  죽으심
이 태양이 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죽으심이 주님의 빛을 소멸하
거나 희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그 태양의 모습을 가져간다는 말이다.
동시에 주님께서 육체로 오셨을 때 그때는 진실로 세상의 낮이었다는 것을 주님은  증
거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를 비추셨지만 그리스도는 친히 오심으로 새롭고 희귀
한 광채를 가지고 오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지금이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운  일을
행하시어 자신을 더욱 밝히 드러내시기를 원하시는, 즉 아버지의 영광을 확실히  나타
내는 매우 적합하고 타당한 때, 곧 가장 밝은 낮이라고 추론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일어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하나님의 더 큰  능력
이 그 가르침의 열매에서와 기적에서 빛을 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자기 자신의
전도의 시간에 바로 적용하고 있다. 즉 "창세로부터 빛을 명하여 어둠 가운데서  비추
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그때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추셨다"
(고후4:6). 주님은 주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지금 세상
을 비추고 계신다. 주님께서 그 사명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셨을 때 주님은 세상에 계
실 때 자신을 통해서 일하신 것 못지 않게 그의 종들을 통해서 힘있게 일하셨다. 나는
이것을 사실로 인정한다. 그러나 첫째로 주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셨을 때에 아버지께서
명하신 것을 주님께서 수행하셔야만 했던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둘째로 주님께서  육
체로 오심으로 세상의 참되고 놀라운 낮이 되었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주님의 광
채는 모든 시대를 비추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하루하루가 지속되기 위하여 주님
께서 항상 그 광채를 오래도록 비추어주지 않았다면 옛날의 선조들이나 지금의 우리들
에게 그 빛과 낮이 어디로부터 왔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안내자로 모시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소경과 같이 어둠 속에서 헤매며 혼동과  무질서
가운데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귀절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뜻을  파악해야만
한다. 즉 태양이 우리의 눈에 지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과 하늘 및 전 자연의 질서르
마보게 해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서 그의 사역의  최고의  영광을
확실하게 나타내셨다.


9:6
 땅에 침을 뱉아 - 그리스도의 목적은 그 소경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데  있었
다. 그러나 주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불합리한 방법으로 일을  시작하신다.  이는
주님께서 그의 눈에 진흙을 바름으로 말하자면 그의 소경됨을 갑절로 더 소경되게  하
시기 때문이다. 누구나 주님께서 그 불쌍한 사람을 조롱하고 있거나 미친 사람처럼 상
식 이하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
로써 그 소경의 믿음과 순종을 단련시키고자 하셨다. 이는 그로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 소경이 주님의 말씀만 받고서 그의 시력이 회복될 것이라고
완전히 확신한 것은 보통 믿음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는 이 믿음을 가지고 가라고  하
신 곳에 속히 달려갔다.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들이 많았을지라도
그가 단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순종했다는 것은 또한 그의 믿음에 대한 놀라운  찬
사가 아닐 수 없다. 경건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만족하고 믿음없이는 믿을
수 없어 보이는 사실을 미리 확신할 때 그것이 참된 믿음에 대한 시금석이다.  순종하
고자 하는 마음을 갖추면 즉시 믿음은 따라오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의신실
한 아내자가 되실 것을 확신하는 사람마다 고요히 자기 자신을 그의 지배하심에  굴복
시키는 것이다. 그 소경에게 자신이 조롱을 받고 있다는 의혹과 두려움이 스쳐갔을 것
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쫓은 것을 안전한 일로 판단했을 때  그는
모든 장애물을 헤치고 나가는 것이 쉬운 일임을 깨달았다. 만약 어느 사람이 그  소경
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아야 마땅한  존귀
를 그리스도께 돌리지 못했다고 이의를 제기해 온다면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
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
도께 순복했고 또한 주님께서 참되신 분이심을 의심하지 않음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오
직 신적인 것만을 보았다. 더우기 그의 믿음이 더 칭찬을 받아 마땅함은 그가  그렇게
적은 지식을 가지고서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바쳤기 때문이다.


9:7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 '진흙'이나 '실로암 물'에 물론 눈을 고칠 만한  효능
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유로이 또한 자주 외적인 상징을 그의 기적으로 장식
하셨다. 이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표적의 사용법을 잘 알게 하기 위해서나, 혹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 아래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나, 또는 주님께서 수여하시고
자 하는 대로 그의 각 피조물 안에는 그만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이
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먼지와 침으로 만들어진 진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으
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비유라고 설명한다. 즉 먼지는 땅에 속한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키며 그의 입에서 나온 침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적 본질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
나 나는 이 비유를 신뢰한다기 보다는 지나치게 교묘하기 때문에 버리고, 다음과 같은
단순한 견해로 만족한다. 즉 사람이 처음에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의 눈을 회복시키시는 데 진흙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
서 사람의 온 몸을 창조하시는 데 사용하신 똑같은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그 소경의 몸
의 일부분에 사용하신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주님께서는  장
애물을 제거하시고 그 소경의 눈을 열어주는 것이 어느 사람이 진흙을 씻어 내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 아님을 이 표적을 통해서 선언하시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한편은 사
람이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르는 것과 같이 사람의 시력을 주관하는 것이  그의  능력에
속함을 선언하시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나는 이 후자의 해석을 더 좋아한다. 주님께서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한 것은 아마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현재  하나님
의 능력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들의 과실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것은 이사야가 그 당시 사람들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사8:6)라는  일
로 그들을 책망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러므로 내 생각에는 엘리사도 아람 사람  나
만을 명하여 요단 강물에 씻으라고 말했던 것과 같다. 제롬의 말에 의하면 그 못은 일
정한 시간에 시온 산에서 솟아나오는 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 복음서 기자는 의도적으로 실로암이라는 낱말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이는  성
전 근처에 있는 그 못이 매일같이 유대인들에게 초림하실 그리스도를 상기시켰기 때문
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분을 멸시했다. 그러므
로 본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천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만
이 우리의 어두움을 밝혀주시며 소경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이 한 사
람의 경우에 우리 성품의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즉 우리는 모두 모태로부터 빛과  총
명을 자고 나왔으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병폐에 대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
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때 임재해 계셨을지라도 표적의 본질은 폐하고 단지  그  텅빈
그림자만 가지고 있던 이 백성의 둔감해진 마음을 책망하는데 주님은  상징을  소홀히
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을 유의하자. 더우기 소경이 도와달라고 기도할 때까지  기다
리지 아니하시고 자진해서 소경을 고치러 오신 일에는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선하심이
빛나고 있다. 사실상 우리는 본성적으로 그리스도를 떠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부르기 전에 만나주시고, 또한 완전히 빛과 생명을 망각한 우리를 그의 자비로
지켜 주시기 아니 하신다면 전혀 소망이 없는 것이다.


9: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 그 소경은 성전 문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모든  주님들에
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서민들은 그와 같은 사람을 더욱 주목한다. 이 소경이 이
와 같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 기적의 소문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
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의 일을 흐리게 하는 데 있어서 명철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하나님의 새로운 능력이  그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위엄이 밝게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만큼
하나님의일은 사람들 가운데서 호응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의심은 기적
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는 그들이 소경으로 하여금 자기 간증을 하게  함으
로써 더욱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케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복음서  기자는  이
기적의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낸 모든 세부적인 일들을 모으고 있다.


9:11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 순종의 이러한 결과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
실 때마다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할 것을 요구하며,  주님의
인도하심과 권위에 의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결과적으로 잘 될 것을
의심하지도 말 것을 요구한다.

9:13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악인들이  하나
님의 일로 인하여 결코 유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권세로써  재촉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 속에 묻혀 있는 독을 더욱 더 발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경에 대한 시력의 회복은 돌같은 마음이라도 부드럽게 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은 기적의 신기함과 위대함에 충격을 받아 그 기적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지의 여부를 조사하는 동안에 최소한 잠시라도 주저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심은 그들을 쏜살같이 그렇게 불합리한 데로 몰아갔기 때문에 그들은 즉석에
서 주님께서 행하셨다고 들은 것을 정죄하고 있다.
  본 복음서 기자는 바리새인들을 지목해 부르고 있다. 이것은 다른 당파들이  그리스
도의 편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바리새파는 현상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위선은 언제나 잔인하고  교만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거룩하다는 그릇된 관념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의 가
르침으로 말미암아 주로 상처를 받았다. 복음의 가르침은 그들의 모든 거짓된 의를 정
죄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율법을 변호한다는 구실 아래 그들의 세력과 나라를  유지
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본 복음서 기자는 군중들이 소경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간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태도와 목적이 불확실하다. 그들 가운데 거의 한 사람도 바리새인들이  그리스
도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중들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기적의 신비를 감추려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과반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관원들을 결재자나  재판관으로
삼기를 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양 빛 속에서 스스로 소경됨으로써 그들은  빛을
흐리고 하는 흑암을 자신들에게 초래하고 있다. 서민들은 의곡된 종교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가장 아래서 그들은 교회의 악한 폭군들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말
씀과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멸시하거나, 최소한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9:14
    눈을......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 그리스도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하셨
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실족의 원인을 주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이 일도 허위  진
술되기 쉬울 것을 중풍병자와 관련해서 이미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쉽게
피할 수 있었는데도 왜 실족을 주는 일을 피하지 아니 하시는가? 그 원수들의  악의에
찬 반발이 하나님의 능력을 영화롭게 할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안식일은 그들을 날
카롭게 하여 모든 문제를 더욱 열심히 조사하도록 만드는 숫돌과 같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자세하고 진지하게 조사함으로 인해서 이 기적의 진실성이 더확실하게  빛나게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슨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가? 더우기 우리가 이  예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원수들을 노하
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종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서 세상과  그리스
도 사이에서 타협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잘못된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반대로 아시
면서도 의도적으로 악인들을 격노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외에도 주님
께서 소경과 소경의 인도자들을 무시하여 버리신(마15:14) 그런 사실에  주의해야  한
다.


9:15
    바리새인들도......물으니 - 백성들은 이미 소경으로부터 직접 이 고백을 들었다.
이제 바리새인들이 그 일에 대한 증인이 된다. 그들은 서민들의 근거 없는 소문을  경
솔하게 퍼뜨리고 또 경솔하게 믿었다고 이의를 제기 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첫째로 그
들은 사실에 대한 문제는 제쳐놓고서 단지 이 사건의 법적 문제에 대해서만  논쟁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소경에게 시력을 회복시켜준 사실을 부정하지 아니한다.그
러나 그들은 그일에 행해진 것에 대해서 책을 잡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부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안식일을
범한 것인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첫번째 심문이어야 한다. 그들이 타락한 태도와  악의
에 의해서 혼미케 되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면 이것을 보지 못하게  그들을
방해한 것은 무엇인가? 이밖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하례가
그런 것같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반대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많이 배워 왔다. 이는 율법의 말씀이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일에서  쉬라고  명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로부터 쉬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강력하게  논
박을 받은 오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는 것은 완강한 악의로 평가되어야만  한
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그들은 잘못하고 싶어서 잘못하는 그런 이유외에는 다른 잘
못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도들은 강퍅한 마음으로 수백 번이나 밝혀진 사실에 대해서 헛
되고 어리석은 거짓 선전을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해
야 하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가 임할 때, 우리는 거짓된 편견을 가지고 복음을 비
방하며 중상하는 사람들의 사악함을 대적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무리 의로운 변호로써
그들을 잠잠케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이 오히려 아주  담대한
믿음으로 비방하고자 하는 저 완강한 열성분자들을 짓밟아야 한다.  그들은  거짓으로
우리를 억압하고자 한다. 우리는 교회를 탈퇴하여 믿음의 연합을 깨뜨리는 자들의  말
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그들의 규범을 쾌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한 토론의 주
제를 교모하게 빼놓는다. 그것은 우리가 수천 곳에서 확실하게 설명한 것인데, 즉  교
황과 그의 불량배만큼 교회답지 않은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미신적으로 꾸민 이야기로 인해 감염된 부패한 조작품의 엉성한 태도는  결코  진실한
믿음이 아니다. 그들의 광폭한 오만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우리가 그렇게  단호
하게 보존해 온 진리가 종국에 가서 승리할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리
새인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는 그럴 듯한 공리로  그
리스도를 비방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가리켜 안식일을  범했다고  주장한
것은 부당한 일이며 잘못이었다.


9;17
    이에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 그들이 열심히 물으면 물을수록 하나님의 진
리는 비례적으로 더욱 힘있게 나타난다. 이는 그들이 마치 숨결로 불꽃을 끄려고 하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뒤엎고자 온갖  노력을
경주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 두려워 하거나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진리를 더욱 맹렬히 불타게 할 뿐이기  때
문이다.
  더우기 그들이 소경에게 그의 의견을 묻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의 의견을  따르
고자 하거나 또는 거기에 무슨 지극히 작은 가치라도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히
려 그들은 소경이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들이 원하는 답을 줄까 바라는 까닭이었다. 이
점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계신다. 불쌍한 소경이 그들의 위협을  무시
하고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담대히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이 담대함은 또 하나의 기적이다.  그리스도
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직 알지 못하나 사람이 용감하게도 기탄없이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고백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또 거기로부터 온 세
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는 나머지 주님을 부인한다거나 잠잠한 자
들의 반역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만약 이 소경이 그의 조그만  지식의  섬광을
끄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비쳐진 온전한 광채로부터 솔직하고 온전한 고백
이 비쳐 나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9:18
    유대인들이......믿지 아니하고 -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
들은 기적이 이루어진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미워함으로 마음의  혼미
를 자초했기 때문에 그들은 확실한 것을 깨닫지 못한다. 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믿
지 않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만약 그들의 믿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들의  혼미는
자초된 것임이 틀림 없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목전에 제시된 하나님의 확실
한 일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가? 또한 그들이 완전히 논박을 받았을 때, 그들의  마
음 속에 있는 악의가 그들의 눈을 감게 하지 아니했다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무엇이 믿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가?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
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이 오직 버림받은 자들에게만 가리워지고  숨
겨져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했다"(고후
4:3,4). 우리는 이러한 예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길에 장애물을 놓지  않도록  경고를
받자. 이것이 우리로 믿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본 복음서 기자는  제유법
을 사용하여 백성의 관원인이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9;19
    너희 아들이냐 - 그들은 첫번째 시도에 실패하자 이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그
러나 주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의 계략을 뒤엎으실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정
반대의 목적으로 돌리신다. 그들은 단순하게 단도직입적인 질문만을 말하지 않고 교묘
하게 답변을 못하도록 여러가지 질문을 함께 늘어 놓는다. 그러나 이 복잡하게 약점을
찾는 심문에서 소경의 부모들은 오직 반만을 택하여 대답하고 있다. 그 부모들은 그가
자기들의 아들이며 또 날 때부터 소경된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가
자연적으로 보지 못하다가 기적으로 그의 눈이 띄어진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부모들
은 후자의 사실은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빼놓고 있다. 부모들은 이 일에  잠잠함으
로 그들의 배은망덕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그들이 그렇게 찬란한 하나님의 은
사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타올랐어야만 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포에 질려 하나님의 은혜를 묻어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속에 머물고 있는 한 그렇다. 그들이 자기 아들을 사실 그대로 전 사건을 진술하
도록 증인으로 내세운 일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아들의 입을 통해
서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이 중간 입장을 취함으로 정중하게 위기를 모면했
을지라도 그것이 성령께서 본 복음서 기자의 입술을 통해 그들의  비겁함을  정죄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
다면 하물며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부인하는 자들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기적
과 그의 능력과 은혜를 더불어 감추는 자들이 어떻게 핑계를 댈 수 있겠는가?


9:22
    유대인들이......결의하였으므로 - 이 말씀은 출교의 관례가  옛적부터  있었으며
또 모든 시대를 통해서 집행되어 온 것을 보여준다. 출교는 그때 새로이 고안된  것이
아니라 배도자들과 율법을 멸시하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서 옛날부터  사
용되어 온 형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교의식이 교회의 가장 오래된 징계로부터  생
겨난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그 죄악은 근래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이것으로 인해 악인들은 그들의 신성모독적인  일로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를 더럽힌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반역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어떤 교정  방
법이 있어야 할 것을 결정하셨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죄한 자들을 괴롭히는  데
에 이 권세를 독재적으로 남용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하나님과 및 그의 가르침을 불
경건하게 하기까지 공격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이렇게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과 규범으로 그것을 거스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벼락같은 출교를 선언했던 것이다. 같은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행해져 왔다.  거짓
감독들이 교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사용한 야만적인 횡포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감히 수군거리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이 출교의 무기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비치해  놓
았는지를 안다. 그러나 우리는 출교가 사람들의 감정에 의해서 부당한 목적에  적용될
때 우리는 그것을 안심하고 경멸적으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출교의 권리를 교회에게 위탁하실 때 하나님은 폭군들을 칼로 무장시켜 주
시거나 또는 집행관들로 불쌍한 사람들을 살인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들을 다스리기 위한 규범을 세워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더우기 하나님께서  최
고의 통치권을 잡으시고 사람들을 그의 종으로 삼으시는 조건 하에서 그렇게 하신  것
이었다. 거짓 감독들로 맘대로 큰 소리를 치라고 하라. 불안과 의심 속에서  방황하며
아직 선한 목자의 음성을 통해 어느 것이 참 양의 무리인지를 알지 못한 사람들을  제
외하고는 그들이 그들의 허무한 목소리로써 아무도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알기에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는 자들은 출교할  법적  권리를
상실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출교당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명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구원되신 그리스도께서 추방당하신 가톨릭이나 유대교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
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교황의 회당으로부터  물
러나와야만 한다. 하지만 비록 출교의 규례가 고대 교회에서 그렇게 악하게  의곡됐을
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제도가 폐지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셨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 가운데서 건전하
고 활발하게 사용되도록 하셨다. 비록 이 거룩한 징계의 불경건한 세속화가 오늘날 가
톨릭 안에서 횡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폐지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그 이전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데 권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일들이  잘
정돈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율법도 인간들의 악덕으로 말미암아 부패하게
될 것이다. 만일 사단이 그가 더럽히는 모든 것을 다 폐지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물론 사단에게 과도한 권세를 준 것이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세례도,  주님의  만찬도, 간단히 말해서 아무런 종교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어느 부분도  오염되지 않도록 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9:24
    이에 저희가......두번째 불러 - 그들이 소경을 다시 부른 것은  물론  수치였다.
그들은 처음에 이 소경이 지나치게 단호하고 강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하나
님을 대항하여 싸울수록 그들은 그만큼 자신들을 올가미로 묶게 되고 또한 그만큼  빨
리 자신들을 꼭꼭 묶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말을 하게  하려
고 그를 그러한 방법으로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소
경에게 말하는 것은 사실상 허울좋은 발언이다. 즉시 그들은 그가 그의  확신을  따라
대답하는 것을 엄하게 막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그가 노예
같이 무조건 순종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 이 권면의 말은 이 사건의 정황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 있다. 즉 소경이 그가 받은 은혜를 사람에게 돌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해
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어느 사람에게 맹세를 요구
할 때 사용된 엄숙한 공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동조한다. 이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저주받은 물건을 취한 것을 정직하게 자백하라고 할 때  여호수아는  똑같은
말로 그에게 맹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수7:19). 그들이 이 말로써 그에게 깨닫게  하
는 것은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할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께  적잖은
모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우리가 맹세하도록 요구를 받는다면 우리는 이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리에게 더 보배로운  것이
없게 하자. 이렇게 될 때 맹세의 신성함은 매우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것이다. 사람들
이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생
각없이 무분별하고 모독적으로 경솔하게 맹세한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거짓 증거들
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위선자들이 하나님을 제일로 경외하는 것처럼 가
장하나 사실은 그들이 거짓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무례하게 조롱하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시에 소경이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맹세하여 하나님을  공공
연히 모독할 것을 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계교를
서서히 드러내고 계신다. 그들이 아무리 자기들을 숨기려 할지라도 말이다.


9:25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 소경이 두려움으로 인해 그의 솔직 담백한  증
언을 회피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말에 내포되어 있는 대로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떠한 의심을 품었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그들의  양
심을 더욱 깊이 찔러 주려고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금
전에 그리스도를 선지자라고 고백한 바 있었다. 그가 이 이상 앞서 나가지 않은  점에
서 보면 그는 주님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사실 자체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러므로 그의 양보는 조소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9:26
    저희가 가로되 - 우리는 악인들이 그들의 타락한 행동으로 인해 그렇게 분주해 있
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에 무관심하게 임하는 우리의 태만함에 대해서 부
끄러워 해야 한다. 그들이 기적을 덮어 감추려고 비방할 자료를 찾아 내려해도 주님은
소경의 단호한 태도를 통해서 그들의 계략을 놀랍게 분쇄하고 계신다. 소경은  자기의
견해를 고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진상을 조사하여 확실히 파악한  후에
도 그를 계속 심문하므로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고 그는 그들을 기탄없이 또한  심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와 같은 말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있음을 비난하
고 있다.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것은 그들이 수백 번 논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결단코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의와 적개심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천박하고 미천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구걸하는  신세로  인해서
거의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는 그가 자기를 적대하는 모든 제사장들의 분노를  기
탄없이 격동시키고 있다는 것은 진실로 놀라운 자유가 아닐 수 없다. 믿음에 대한  준
비를 갖추는 과정에 있는 이 소경이 믿음의 대상인 주님에 대한 논쟁에서 이렇게 담대
할 수 있었다면, 하물며 교회의 대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런 급박한  사태
가 아닌 상황에서나, 혹은 위험한 사태 속에서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도저히 그  변명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더우기 이 질문은 냉소적이다. 그는 그들이 진리를 진지하게
알고자 하는 것보다는 악의에 자극되어 이 질문을 그렇게 급하게 재촉한 뜻으로 한 말
이다.


9:28
    저희가 욕하여 - 그들은 아마 맹렬한 분노 중에 그들의 혀로 할 수 있는 온갖  욕
설을 그에게 다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말해서 그들은 그를 율법의 배도자라
고 불렀다. 그들의 생각에 그가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반대 명제로 밝히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모세의 가르침을 배반할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변명같이 보인다. 이는 경건의 참 표준이 선지자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것
은 우리의 믿음이 사람들의 생각에 이끌려 다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이 참된 원칙으로부터 추론한다. 그들의 거짓은 율법의 완
성이 되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돌아서면서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라고 말한  데  있다.
이렇게 위선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보호를 받고자 할 때 하나님을 갈기갈기 찢는  데
익숙하다. 바울이 로마서 10장 4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라면 율법이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그것이 어찌 죽은 몸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사람만이  하
나님께서 바라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진실하게 귀를  기울인
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할 때
그들은 주님의 고향이나 출생지가 아닌 예언적 직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으로 영접할 만큼 주님의 소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
다고 주장한다.


9:30
    이상하다 - 소경은 그들이 이와 같은 뚜렷한 기적에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아니하
고 또 그리스도의 소명에 대해서 모르는 체 한다고 그들은 간접적으로 나무라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러한 예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여겨지고, 또한 그로 인해 증
명되고 증거된 그리스도의 소명이 그들 가운데서 아무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소경은 그들의 우둔함이
나 악의를 더 확실하게 드러나기 위하여 예로부터 사람이 그러한 일을 들어본 적이 없
다는 사실로부터 그 기적의 우수성을 높이고 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분명하신  일을
의도적으로 모르는 체 하려는 자들은 악의적이고 배은망덕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추론하고 있다. 이는  주님
께서 하나님의 성령의 크신 능력을 힘입으셔서 자신의 가르침에 신뢰를  얻고  계시기
때문이다.


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우리가 아나이다 - 소경이 이말을  상식에
맞추어 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경건치 아니하
고 부도덕한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참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사람들의 기도에만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은 성경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오직 믿음만
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므로 모든 악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는 심지어 주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싫어하시
며 그들의 제물을 증오하신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녀들을 자신에게로  청
하신다는 것은 특유한 특권이다. 오직 양자의 영만이 우리 마음 속에서 '아바 아버지'
(롬8:15)라고 부르짖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의 마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
끗해지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께 기도할 정당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
나 악인들이 그들의 기도로써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더럽히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에
대해서 그 무엇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아야 마
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기도에 호의를 베푸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으로 서투른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9:34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 나는 그들이 그 소경의 눈먼 상태를 이런 태도로
대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즉 아무 결함이 없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불행하고  불우
한 사람들에 대하여 동정하고 있다고 그들은 마치 그가 죄의 흔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
람처럼 그를 모독하고 있다. 이는 모든 서기관들이 영혼이 한 생애를 마칠 때  새로운
몸으로 들어가 거기서 그들이 전에 지은 죄에 대하여 형벌을 받는다고 마음에  확신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자는 그 순간에도  그의  죄로
말미암아 부정해져 있고 오염되어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
  이 의곡된 비방은 어느 사람의 죄를 항상 하나님의 채찍으로 측정하지 않도록  조심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주님께서 인간들에게 재난을
가하시는 데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위선자들은 이 불행한 사람
을 모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거룩하고 선한 여러가지 경고도  배척하고  있
다. 자기가 멸시하는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일이 어렵다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경청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시
든지 우리는 어느 사람이건 멸시하지 않도록 하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주  천하고
우리를 가르치기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양순하고 순복하는 사람들이 되자. 이는 교만심이 우리의 귀를 막으려 하지 않을 때보
다 심한 재앙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무익하고 천한 사람들을 택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며 경고하신다.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 - 그들이 완력으로 그를 성전에서 쫓아낸 것이 있을  법한
일이라 할지라도 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이 그를 실제로 출교할 것을 뜻한 것 같이  내
게는 보인다. 그리하여 그의 출교당함은 법적인 위세를 보였을 것이다. 이 해석이  또
한 문맥과도 더 잘 맞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그를 육체적으로만 쫓아냈다면 그것
은 주님의 귀에 들려올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일을 들으신 사실로부터 추측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매우 중요하고 엄숙한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그 일을 행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예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
는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출교 선언을 두려워 하기에는 얼마나 사소하고  적은  일이냐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했다면 그것
은 우리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우리에게 내려진 두려운 심판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의 아들의 나라로부터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으
로 다스리지 않는 그런 곳으로 부터는 만약 우리를 내어 쫓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우리
는 자진해서 나와야 한다. 우리는 물론 악인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욕보이는  그런
무모한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9:35
    그를 만나사 - 만약 그가 회당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점차 그리스도로부터
떠나서 위험에 돌입하여 악인들이 당하는 그러한 멸망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
스도는 지금 성전 밖에서 배회하는 그를 만나신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쫓겨난  그를
영접하시며 넘어진 그를 일으키시고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  우리
는 우리 시대에서 같은 일을 경험했다. 루터와 그와 같이한 사람들이 교황의 악한  폐
단을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순수한 기독교에 대한 조그만 관심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교황이 그들에 대해서 노발대발하여 무서운  칙령으로  그들을
가톨릭 회당에서 내어 쫓은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임하시도록  우리가
복음의 원수들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이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 주님은 지금 어려서부터 율법의 가르침 속에서 양육함을 받고
또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약속한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유대인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주님께서 그에게 메시아를 쫓아 가서 자신을 바치라고 권고하
시는 말씀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당시의 관습과는 달리 더 명예로운  이
름을 사용하고 계신다. 이는 메시아는 단지 다윗의 자손으로서만 이해되고 있었기  때
문이다.


9;36
    그가 누구시오나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 소경의 대답을 미루어 볼  때  비록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직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알고 있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믿
음의 자세를 가진 양순한 사람이었던 것이 명백하다. 그의 말은 "나는 주님을  나에게
지적해 주시자마자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소경이  선지자
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원하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
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경
솔하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9;37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소경을 냉담하고 조그만 분량의 믿음 이외의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이나  아버지께 보내심을 받은 이유, 또는 주님께서 인간들에게 가지고 오신 것을 언급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일은 우리의 죄가 주님의 죽으신  희생을  통해서 정결케 된 것과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된 사실을 아는 것이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었던 그 사망에 대한 승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육신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며, 또 우리가 주님의 성령으로 새로와진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것과 성령은 우리의 양자됨의 보증이 되시는 것, 간단히 말해서 주님 안에는 영생의 모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본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소경과 대화하신 것의 전부를 진술하고 있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소경이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곁으로 왔다는 것을 단순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의 시작에서  주님은 그를 인도하여 주님에 대한 더 온전한 지식에까지 이르게 하기 위해서  그에게서 그리스도를 인정받기 원하셨다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9:38
 절하는지라 - 소경이 그리스도께 신적 존귀를 드렸는지 물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본 복음서 기자가 사용하고 있는 낱말은 단순히 무릎을 꿇거나 기타 다른 표시로써 경의와 존경을 표하는 것을 뜻한다. 나로서는 그것이 무언가 희귀하고 비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 사실상 소경은 평범한 사람이나 선지자에게 보다  그리스도께 훨씬 더 큰 존귀를 드렸다. 그러나 나는 그 때가 그가 그리스도를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알 만큼 진보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절한다'는 낱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소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해서 마치  정신 잃은 사람처럼 경이 중에 넋을 잃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렸던 것이다.

9:39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 '심판'이란 낱말은 이 대목에서  단순히  악인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형벌로 해석될 수 없다. 이는 그 낱말이 조명의 은혜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심판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혼동되고 어지러운 것을 참된 질서로 회복시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이  인간들의 일반 여론과는 달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사실상 인간의 이성은 보는 자들이 세상의 빛에 의해서 소경되는 것과  같이 불합리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심판의  하나이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인간들의 교만심을 낮추신다. 더우기 여기에 언급된  소경됨은 그리스도로부터 보다는 오히려 인간들의 과실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 성격상 과실이 어느 사람도 완전하게 소경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의 가장 강한 욕망은 그 빛을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의와 부패를 사모하는 그들의 마음의 눈은 그들에게 비추어진 빛에 의해서 환하게 비추임을 받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본성적으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으로  어떤 사람들이 소경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소경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판국에 보는 이  사람들은 누구냐고 다시 물어보아 좋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즉 이것은  양보해서 냉소적으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눈이 멀지 않는 자들이라도 사실은 영적 소경이 많은데 소경이 자기들은 매우 예리하고 통찰력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자신감으로 마음이 교만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애써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더우기 그리스도 밖에서는 육체의 지혜가 아주 훌륭한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세상은 참 슬기로와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자기 소견의  인도를  받아 자기들의 헛된 망상을 지혜로 생각하는 자들이 곧 보는 자들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복음의 광채 속에 나타나시자 즉시 그들은 소경이 된다.  이것은 불신의 흑암 속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어리석음이 이제 드러난 점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으로 인해 그들이 더 깊은 흑암 속에 빠져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남아 있는 조그만 빛마저 잃어버린 점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정말 다 소경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의 흑암  가운데도 아직 조그만 불꽃이 남아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은 무지한 짐승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자기 생각을 교만하게 신뢰함으로  오만해져서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현명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광채가 그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이는 인간 마음의 허무함이 하늘의 지혜가 나타날 때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바대로 그리스도는 이러한 말씀을 하심으로써 무엇인가 더 알려주시고자 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빛을 내시기 전에는 위선자들이 그렇게 완강하게 하나님을 거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이 그들에게 가까이 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공공연히 대적하여 일어난다. 이와 같은 타락성과 배은망덕한 마음으로 그들은 두배로 소경이 되고 또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판단으로 전에 참 빛이었던 그들의 눈을 완전히 멀게  하신다.  우리는 이제 이 대목의 전 요지를 깨닫게 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소경은 보게 하고 또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첫째로 주님은 빛을 밝히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이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바울은 복종치 않은 모든 자들에 대한 벌을 예비하고 있다(고후10:6)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부언하기를 이 형벌은 경건한 자들의 순종이 온전히 이루어진 후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심판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복음의 사역자들을 통해서 매일 그 일을 수행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주님께서 실제로 몸으로 함께 하실 때에만 국한하여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에 대한 어리석은 견해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에게 이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지 않도록 더욱 더 주의해야 할 것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얼마나 사실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여 현기증에 빠져 광분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아담은 살아서 참된 명철과 지혜의 빛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볼 수  있는 것 이상을 보려고 하다가 그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였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눈먼 상태에 빠져 있고 주님께서 우리를 낮추셨을 때에, 우리가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잇는 우리 자신을 기뻐하고 우리의 미친 생각으로 하늘에 속한 지혜를 대적한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우리에게 떨어져 우리가 두배(二重)로 눈이 멀게 될지라도 절대 놀라서는 안되겠다. 이전에는 같은 심판이 율법 아래 있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임했었다. 이사야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눈멀게 함으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사6:9).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선지자들 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눈먼  장님의 예는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보였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비치고 있는  복음의 대낮과 같은 빛이 외식하는 자들을  광분상태로 유도하고 있는것과 같다.

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 그들은 즉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드러난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주님을 혐오하여 그와 상종도 하지 않았던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들은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이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의 질문은 분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눈먼자들 가운데 끼이게 됨으로써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질문은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조롱과 경멸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 "당신은 우리의 수치가 없이 유명해질 수 없을 거요.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함으로써 당신이 영광을 얻게 되는 꼴을 참고 보란 말입니까? 눈먼 자들에게 새로운 빛을  준다는 당신의 약속은 당장 집어 치우시고 축복은 당신이나 혼자 받으시지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고 인정하면서까지 당신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소." 따라서 우리는 위선이 언제나 교만과 악독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교만은 자기 만족에 있었고, 그들의 현상(現狀)과 떨어지기를 거부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악독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병을 지적하셨을 때 그들에게 심한 상처라도 입힌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논징을 걸며 덤벼든 데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가 그들에게 베푼 은혜를 경멸했던 것이다. 그 강조점은 "우리도 소경인가?"라는 질문 중에 '우리도'(also)라는 말에 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다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취급된다 하더라도, 자기들만은 평민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뜻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교만에 취해 있어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거의 망각하고 있다.

9:41
  너희가 소경되었더먼 -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생활태도를 고집하고 고의적으로 진리를 대항해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의 무지(無知)가 그들의 죄를 어느 정도 가볍게 해 주었을 것이라는 뜻이거나, 그들이  자신들의 병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무지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전자(前者)의 뜻은 우리가 15장에서 공부하게 될 그리스도의 말슴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동등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절에 '본다고 하니'라는 말이 부언된 것을 보면, 자기의 보지 못함을 알고 그 병에 대해 치유책을 구하는 자는 '눈이 먼'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일관성이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대조는 상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너희가 너희 죄를 인정했다면 그 병은 전혀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는 절박한  상태에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그들의 무지를 무해하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덮어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다만 병은 그 증세가 참으로  실감될 때에만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눈먼 소경이 구원을  갈망할 때, 하나님은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병에 둔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은 고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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