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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 복음서 저자는 계속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회에 일어났던 사건 가운데에서  가치있는 것만을 선별적으로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요한은 예수께서 유대인들 중에는  안전한 곳이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갈릴리에서 생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의 원수들의 모든 노력을 파괴하고 전복시킬 수도  있었을텐데 피난처를 구한 것은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 대답은 용이하다. 주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분부를 기억하시가, 자기 자신을 인간의  범주에서 이탈시키지 않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때까지 자신을 비우셨고, 따라서 인간적인 모양으로 위험으로 부터 피하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죽을 때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를  회피할 이유가 없었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은 해답이 여기에 적용될 것이다. 주님은 위험한 상황에서 해를 입을 수 있는 인간으로 행동했으며, 따라서 그가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았다. 위험에 직면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정하신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직분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일생을 어떻게 정렬하는 것이 옳바른 길인가를 구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
록 그리스도께서 위험을 피하셨지만, 그는 그의 직책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주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안전한 삶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는 항상 살기 위하여 생의 목적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갈릴리의 멸시받는 구석에서 유대가 용납할 수 없는 그리스도에게 거처를  마
련해 주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경건이 교회의 높은 자리에서
항상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 복음서 저자는 계속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회에 일어났던 사건 가운데에서  가치있
는 것만을 선별적으로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요한은 예수께서 유대인들 중에는  안전
한 곳이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갈릴리에서 생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리스도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그의 원수들의 모든 노력을 파괴하고 전복시킬 수도  있
었을텐데 피난처를 구한 것은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 대답은
용이하다. 주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분부를 기억하시가, 자기 자신을 인간의  범주
에서 이탈시키지 않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아버지께서 그를  높
이실 때까지 자신을 비우셨고, 따라서 인간적인 모양으로 위험으로 부터 피하셨던  것
이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죽을 때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를  회
피할 이유가 없었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은 해답이 여기에 적용될 것이다. 주
님은 위험한 상황에서 해를 입을 수 있는 인간으로 행동했으며, 따라서 그가 위험  속
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았다. 위험에 직면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정하신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
님께서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직분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
의 일생을 어떻게 정렬하는 것이 옳바른 길인가를 구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
록 그리스도께서 위험을 피하셨지만, 그는 그의 직책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주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안전한 삶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는 항상 살기 위하여 생의 목적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갈릴리의 멸시받는 구석에서 유대가 용납할 수 없는 그리스도에게 거처를  마
련해 주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경건이 교회의 높은 자리에서
항상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나는 이를 확실하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
지만,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은 이듬해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로서
는 복음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으나 명절날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모세
는 레위기 23장 33절에서 무슨 목적과 용도로 이 명절이 명령되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초막절을 연례적으로 지킴으로써 그들의 조상이 집이 없을 때 광
야에서 40년동안 장막생활을 했던 것을 기념했고, 그렇게 함으로 구원의 은혜를  찬송
했던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이 명절에 예루살렘
에 올라왔다고 밝혔다. 첫째는 주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멍에에서 구속해야 했기  때문
에 율법의 어떠한 부분도 어기기를 원치 아니하셨다. 둘째는 군중 속에서 그리고 특별
한 집회에서 복음전파를 위한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
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아니하실 것처럼 갈릴리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고 쓰고 있다.


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
로 가소서 - 유대인들은 이 이름 아래 모든 친족과 혈연관계를 포함시켰다. 요한은 그
리스도께서 여러 사람의 눈을 피하여 갈릴리라는 멸시받는 구역에 와 숨어 있었기  때
문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웃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가
유명하게 되기를 바라는 욕망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멸시하
고 비웃었다. 그들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유명해지기를 원하면서 여러 사람 앞에  공
개적으로 나타날 자신이 결여되어 있다고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기 까지 했다.  그들
이 '제자들도 보게'라고 말할 때, 그들은 주님의 주위의 제자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
라 전국에서 그가 얻기를 원하는 모든 제자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고" 부언했던 것이다.

7:4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그
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그러한 위대한 일에 이르도록 그가 원한다면, 이를 이행함으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주님과  함께하
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대조시키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잇을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드러낸다면,즉 그의 기적에 의하여 명성을 획득할  능
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낭비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능력을 알
아주지 않고 당신을 보아줄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낭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고려하는 일에 얼마나 나태한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친
족이 그의 신령한 능력을 짓밟지만 아니했다면 그들은 절대로 이와 같이 말할 수 없었
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주님을  최
대의 공경심으로 받들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게 되는 이와 같
은 내용은 매일 재연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외인으로부터 듣는 것보다 자기 친척
과 가족으로부터 악한 비난의 말을 듣는다. 이들은 충실히 그리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탐욕과 욕망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단의 공격을 결연히 물리치시며 형제의 어리석은  바람에
굴복하지 말 것을 친히 본을 보여주심으로 경고하고 있다.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 이에서 우리는 육신의  관계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많은 주님의 역사를
목도하고도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척들에게 영원한 오명과 불명예의 낙
인을 찍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헤아림을  받고  싶은
사람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고후5:17, 갈6:15). 하나
님께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의 위치
에 앉힌 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께서 전적으로  부인하신
다. 동정녀 마리아의 다른 면은 일체 무시하고 그녀와 그리스도의 관계에만 영광을 돌
리는 가톨릭 교도들의 미신은 더욱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한 여자가 무리  중에
서 음성을 높여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7-28)고 대답하지 아니하셨던가?

 

7:6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 어떤  사
람은 이를 그리스도께서 죽을 대가 이르지 아니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나  이는  그릇된
것이다. 주님은 다만 자기가 여행을 떠날 때가 되지 않았음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면에서 자기가 그의 형제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은 세상이 그들의 편이고 세상이 그들에게 친절하기 때문에 아무 때에나 안전하고  자
유롭게 세상에 나다닐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스스
로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심으로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알
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충고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는 그들의 세상적임과 육신적임을 책망하
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화평하는 것은 악덕과 각종 악에 불경건하게  동조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7:7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 세상이란  여기서
거듭나지 못하고 그들의 옛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
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다 그의 원수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행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
도의 결정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온통 부패하고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그 성품에서 옳은 것이나 진실된 것이나 선한 것을 전혀 기대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스스로 기분이 좋고  만족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
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주님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정죄되어 있는 것으로 송사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세상을 죄에 대하여 책망하리라"(요16:8)고 말씀하신 것처럼,
혈과 육은 부서질 대로 부서져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타고난  교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죄악 중에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눈이 멀어 있지 않다면 책망을 받았다고 하여 그와
같이 분개하면서 자기의 죄악 가운데도 스스로 자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죄악
가운데 첫째되고 가장 파괴적인 것은 거만함과 교만이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남의 질책을 인내로 견디게 하며 복음의 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도록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한  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척하면서도 불신자들과 짝하여 안전한 가운데  행하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우리 눈앞에 보여주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세상의 미움을 받으면서 자기 직
분이 그를 나타내도록 강권하기까지 조용히 잠적하셨던 그리스도 자신을 보여주고  있
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로부터 소외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우리로  하여
금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화평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7: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 여기서 우리는 당시 교회의 상태가 어떠
했는지를 고려해야겠다. 왜냐하면 그 때 유대인들은 허기진 사람들처럼 약속된 구속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은  의심에
싸여 있었다. 따라서 갖가지 의견과 수군거림이 따랐던 것이다. 이 교회가-당시  세상
에 존재하던 유일한 교회가 혼돈과 목자없는 혼란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무서운  예
가 아닐 수 없다.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목자의 직분을 행하는 대신에 사람들
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 몰아 넣고 있었으며, 따라서 모든 영토에는  황페와  슬픔만이
있을 뿐이었다. '유대인들'이라는 말은 두 해 동안 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평민
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예대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제
그를 찾고 있었다. 그들이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분명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투는 그들이 심각하게 감동을 받지  못
하고 있었으며 항상 의심에 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7: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 요한은 큰 무리가 모인 가운데  사
람들이 비밀리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음을 뜻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견의
분리는 사람들이, 심지어 교회의 한 복판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의견
을 달리하는 것이 새로운 악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한 때,  대
부분의 자기 백성에 의해서 정죄되었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
여도, 우리는 매일 같이 있을 수 있는 이와 같은 의견 충돌이 무리를 혼란시키지 못하
도록 같은 방패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인간이
얼마나 경솔한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하찮은 일에는 그들이 좀 더 신중을  기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가장 거룩한 교훈이 관계된 일에는 즉시
판단을 내렸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로 우리 자신의 일생을 정죄하게 되는 일
이 없도록 더욱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세상이 우리를  사기군으로
간주하더라도, 우리가 동시에 순수하고 진실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이것이  그리스
도의 흔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큰 무리 가운데 대부부의 사
람이 혼잡하게 얽혀 있을 때라도 항상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
다. 그러나 바로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불건전한 많은 사람에 의하여  삼키운  바
된다.

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 여기에  유
대인들은 그들의 손에 정권을 잡고 있던 집권층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찬반의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
다. 그리스도께서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는 것을 그들이 원치 아니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름은 아예 언급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진리의 원수들이 그들의 야만성에 의하여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될 때, 그
들의 욕망은 진리를 기억지 못하게 억압하는 것 뿐이며, 그들은 그 한 가지를  위하여
정진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드러나게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을 그
들의 집권층이 횡포로 다스리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규제가 없는 방종이  질서
가 잡힌 교회에서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자유가 한 마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억압에 의하여 짓눌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극히 비참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무장한 원수들 사이에서, 분노에 찬 증오 앞에서,  억압적인  정부
하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려질 대 더욱 힘있게 그리고 더욱 분명히 나타났던  것이
다.


7:14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실피할 정도로 두려워했던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가  지체했던
이유는 더 큰 무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의도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위
험에서 물러설 수는 있으나, 선을 행할 기회가 있을 때 이를 소홀히 하거나  생략해서
는 안되겠다. 주님께서 성전 안에서 가르치신 것은 옛날 관습을 따라  그리했던  것이
다. 비록 하나님께서 수 많은 예식을 명하셨지만, 그는 사람들이 냉냉하고 텅 빈 장면
만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예식의 목적과 뜻이 이해되도록 하
려면 가르침이 수반되어야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외적인 예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형태를 취할 때에 신령한 진리의 산 형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그때
에 거의 벙어리가 되어 있었으며 서기관들은 순전한 교훈을 그들의 누룩과 거짓된  교
리로 더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잠시 후 자기는 아버지의 명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행치 않는다고 확언하고 계시다.

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
냐 - 그리스도의 말씀이 환영을 받아 유대인들이 이를 귀히 여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은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그들의 주님의 말씀을
멸시의 이유로 삼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때 언제나 이를 범죄
의 기회로 삼음으로써 그들의 배은(背恩)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만일 하
나님께서 보통 일반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시면, 눈에 보이는 가시적(可視的)인  방법은
휘장과 같은 것이어서 하나님의 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하
나님의 역사(役事)중에서 인간적인 것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례적인  능력
이 자연의 질서를 초월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법을 초월해서 나타나게  되
면, 우리는 마비되어 무기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지각에 깊은 감동을 주었어야  마
땅한 내용이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우리의 교만은 이와 같은 정도여서 그 원인이  밝
혀지지 않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린다.
  어떠한 선생의 가르침도 받은 적이 없는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이례적으로 뛰어난 이
해를 갖고 있어, 학생의 위치를 한 번도 거치지 않은 분이 선생과 교사가 되었다고 하
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놀랍게 입증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를 멸시한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지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상고할 때 하나님께 더 큰 경의를 표하도록  하고  이들의
본보기를 보고 경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7:16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
에게 그들에게 걸림이 되었던 말씀은 그들이 더 높이 올라가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데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
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사람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는 선생이 하나님께 가
르침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는 그의 아들을 서기관의 학교로 보내지 아니하시고 목수의 작업장에서 나오도록 작정
하셨다. 따라서 복음의 원천은 더욱 드러나고, 아무도 그 복음이 세상에서 만들어졌다
고 생각하거나 어떤 사람이 복음의 창시자라고 상상하지 못하도록 하신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그의 사도로 택했던 것이
며, 삼년 동안 무식한 상태로 그들을 남겨 두셨다가 어느 순간에 그들을 깨우쳐 새 사
람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영적인 가르침의 권위를  하
나님의 한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아
버지의 교훈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실 때, 주님은 자기를 하나의 인간으로 밖
에 생각하지 않고 있던 유대인들의 이해 능력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
은 양보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과 다르게 헤아리고 있으나,  아버지께
서 명하신 것을 그들에게 전하는 목적으로 그리하셨다. 이를 종합해서 말하자면, 주님
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며 사람에게서 나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턱대고 멸시하고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자기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세우는 방편을 보게 된다. 주님은 자기의 교훈
을 창안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어떠한 권리와  어떠한
이유로 그들에게 주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아
버지께서 가르치도록 그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요건은 선생의 직분을 맡게
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것들이다.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 주님은 오히
려 반대를 에측하고 있다. 거기에는 많은 원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다음
과 같이 불평을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합니까?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만을 가르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올바른 판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대
답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쉽게 분간할 수 있다. 동시에 주
님께서는 그들을 간접적으로 힐책하고 있다. 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위한 첫째  필요
조건인 경건함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간절함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면,  진위를  분간치
못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사단은 언제나
그의 그물을 치고 그의 간계로 우리를 사로잡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단의 거짓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훌륭한  경
고를 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의 성령의 빛으로 우리를 깨우쳐 진위(眞僞)를 가릴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의 고집과 배우기 싫어하는 마음자세가 아니면 우리의 올바른 판단을 그르칠 아무  것
도 없으며, 사단에 의하여 우리가 기만을 당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위선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사람은 결코  사단
의 기만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신13:3). 그래서 우리 시대에도 많은  사람
들이 잘못을 범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배우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삼켜 버리고 있는 것
이다. 마치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라는 말씀이  헛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순종하는 일에 완전히 우리를 맡겼다면 하나님께서 분별의 영
을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계속 우리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심치 않도록 하자. 만
일 어떤 사람들이 흔들리기를 좋아한다면, 그들은 마지막 날에 "몰랐기  때문에  그랬
다"는 핑계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의 진리가 무
엇인지 읽고 들음으로써 심각하게 이를 알아보지 아니하고 주저하면서 의심을 품는 모
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 대담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미딪 못하고 또 패역한 사람들이 연옥에 대하여 지어낸 소리를 감히 정
죄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말할 것이다-그러나  그  자신은
자유롭게 음란의 죄를 범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순전한 교훈과 사람이
지어낸 이론을 구분할 만큼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할 것이다.-그러나 그는  도둑질하고
거짓말하는 데는 지혜롭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의 논쟁에서 의심의 휘장 뒤에 숨어
있는 모든 회의주의자들은 전혀 모호하지 않은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는 사실에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말씀은 참된 종교에 대한 정의를  포함하고  있
다. 참된 신앙생활은 우리가 충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
한 것이며, 자기 자신의 견해를 포기한 자만이 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 우리는 어떠한 교훈에 대하여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  것
인지에 대하여 주님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유의해야겠다. 주님은 하나님께로 말미
암은 것은 우리가 무엇이나 따지지 말고 받기를 원하지만,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은 무
엇이나 자유롭게 거절하기를 바라신다. 이것만이 참 교훈을 구별하는 척도가 되기  때
문이다.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 지금까지 주님께서는 사람이  눈이  먼
가운데 거하는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생활을 하는 데 있음을  보여주
었다. 이제 교훈 그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를 나타내는 모든 것은 거룩하고
신령하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을 키워주며 사람을 높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는
모든 것은 믿을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곧 거절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결코 그릇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시된 이 시
금석으로 시험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사이비한 자에 의하여 기만을 당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또한 개인적인 야망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만을 전력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충실히 선생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음을 경고해 주
고 있다. 주님께서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말할 때, 주님은 그  안에  악하거나
거짓된 것이 없음을 뜻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진실된 종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 복음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설교를
완전히 다 기록하고 있지 않고, 전체의 요점을 전달할 만한 원칙적인 주제만을 선별해서 기록하고 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쳤다고  해서  주님께 대하여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분내는 것이 율법을 사모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외식을 공박하기 위하여 주님은 주제에 따라 말씀하지 않고 그들의 성격에 따라 말씀하셨다. 그들은 아무런 율법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무절제하게 그들의 악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율법을 귀히 여기지도 않고 사랑하는 마음도 없다고 단정하셨다. 이 논리는 주님의 주장을 증명해 주기에는  불충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짓된 동기 아래 그들의 악하고 부당한 증오심을 감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셨다면 그리스도가 옳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에 의해서 우리의 죄를 가
볍게 하려고 노력해서는 안되겠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두 귀절을 연합시키고 있다. 먼저 주님은 그의  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저들이 스스로 율법의 옹호자라고 교만스럽게  자랑하고 나섰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이 율법을 지킬 생각도 않고 있으며 아무 때나  원하면 마음대로 범한다고 그들을 책망함으로써 그들의 가면을 벗기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질문 자체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변명은 완전한 것이고  모든  면에서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이 귀절의 요점은 율법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율법을  사랑하는 것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데는 다른 원인이 있다고 유추한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대항하고 건전하 교훈에  대항하여 싸울 때, 우리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숨은 곳에서 끌어내야  한다.  이들은 언제나 신령한 동기로 행동하는 척하여 스스로를 가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을  가장 신랄하게 비난하는 원수들과 가톨릭교를 가장 열성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은  불타는 열심 이외에 자기 편에서 더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생활을 조사
해 본다면, 그들은 모두 추하고 부끄러운 일을 숨기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지나친 향락주의가 가톨릭의 교황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인가?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그들의  추잡함을 숨길 만한 겸양을 지니고 있는가? 그들에게서 종교의 냄새라도 풍길 만한 진실함이 있는가? 승려와 언쟁가들이 또한 탐욕과 음란 등 각종 죄악에 빠져 그들의  생활자체가 그들이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음을 큰소리로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열심을 자랑하는 데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답변 앞에 낮아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7:20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 이 말은 "당신은 미쳤도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
람이 분을 내거나 마음과 이성을 잃었을 때 그런 사람은 귀신이 들렸다고 믿도록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흔히 통용되는 말이었다. 사실 하나님의  징계는 아버지의 인자하신 채찍과 같이 부드러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심하게 다루실 때는, 우리를 자기의 손으로 직접 치시는 것보다는 마귀를 그의 진노의 집행관으로 이용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어떤 무리는 그리스도를 원망하고 있다.  그들은 제사장들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불평했을 때 이를 미쳤다고 부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무지한 자들에 의하여 터무니 없는 정죄를 받았을 때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조용히 그 모욕을 삼켜버려야 할 것이다.

7:21
  내가 한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 도다 - 이제 주님
은 그들의 성격을 떠나서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주님은  자기가  행한 기적이 전혀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주님께서  한가지 일을 행했다고 말할 때, 그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 한가지 때문에 자기가  죄인으로 몰리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안식일날 이와 같은, 또는  비슷한  일을 행하면서도 이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유대의 많은 아기들이 안식일날 할례를 받고 있었다. 주님은 비록 비슷한 것에 비추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예에 의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주님은 큰 것과 작은 것을  비교하고 있다. 할례와 중풍병자를 고친 것은 둘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는 것이 전자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중풍 병자를 고칠 때는 그 혜택이 병자의 전신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의 육신의 병만을 고쳐 주셨다면 이와 같은 비교는 타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할례가 영혼의 건겅에 더 유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의 영적인 결과를 육체에 베풀어진 외적인 은혜에 연결시키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 전체를 고치신 것이 할례보다 낫다고 하신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이와 같은 비교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즉 성찬 예식에는 늘 능력과  효력이 따르는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중풍 병자를 고치는 데 있어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할례에서  보다 훨씬 밝게 나타났던 주님의 역사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있다는 전자의 해석을 더  좋게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얼마나 존귀하게 취급했던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해도 안식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괴이히'여긴다는 것은 자기가 행한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수군거린 것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율법의 정한 바를 넘어서 정당하지 못한 일을 감행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
례를 주느니라 - 나는 안식일에도 할례라는 징표를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명한  바 되었다고 설명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에 의하여 안식일의 예배가 범해지는 것이  아님은 이제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할례의 예(例)를 현재의 사건과 결부시키고 있다. 주님은 모세가 할례를 처음으로  행한 사람이 아니라고 밝힐 때 즉시 잘못을 바로 잡고 있다. 그러나 안식일에 대하여  그와 같이 엄격했던 모세가, 할례를 안식일에 행하게 되더라도, 갓난아이에게 팔일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한 것으로 족했다.

7:23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 자기 변호를 끝마친 주님은 그
들의 비뚤어진 성격에 이끌려 사건의 핵심에 근거한 판단을 내리지 못함을 꾸짖고  있다. 그들이 할례를 귀하게 생각한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에 할례가  행해졌을 때 그들은 그것이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로서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도 같이 생각했어야 될 것이 아닌가?  판단은  어떤 사태의 실상과 진실을 근거로 하여 내려지지 않는 한 절대로 옳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인격이 들어오자마자, 시선과 감각은 그것에 집중되어 진리는 즉시 자취를  감추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경고는 모든 경우와 사태에 적용되어야 하겠으나, 특별히 하늘에 속한 교훈을 논할 때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증오하거나  멸시함에 따라 교훈을 저버리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7: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 몇 사람이란 위정자의 계략과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미움을 받고 있는가를 아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위에서 밝힌 대로, 평민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꿈이나 미친  생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위정자들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전 안에서 행하시며 자유롭게 설교하는 것을 보고도 그를 그대로 둔 것에 대하여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지 못함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목격할 때마다 놀라움을 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생각은 아예 그들의 마음에 떠오르지를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좀 더  지혜롭게 생각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불경건한 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복음의 진보를 방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저들의 노력을 막으시고 저들을 흩으시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겠다.

7:27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사람이
하나님의 신령한 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눈이 멀었는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게 할 강에 물을 쌓는 데는  거의  내재적인
지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치게 하는 일은 종종 사단의 간계로 생겨나서 많은 사람
을 그리스도로부터 이간시킨다. 그러나 길은 평탄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각자  스스
로의 거침돌을 만들 것이다. 위정자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한, 그들의  믿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무리에게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 장애물이 제거되기 때문에 그
들은 믿지 않는 이유를 또 하나 지어냈다. 그리고 위정자들이 보여주는  본에  의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들은 정도(正道)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
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진해서 첫걸음부터 넘어졌다. 그러므로 처음에 잘  시작한
사람도 주님께서 그들의 길을 끝까지 인도하시지 않으면 도중에 실족하기가 쉬운 것이
다.
  그들이 스스로를 방해하는 논조는 다음과 같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출현이  알
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증거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부터 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간주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난도
질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반만 헤아림으로써 그리스도를 난도질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씨에서 구세주가 나
실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이 직분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어야만  했
다. 그래서 미가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날 장소를 지적하였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
는 유다 족속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그러나 미가는 곧 이어서 훨씬 더 고상하며
숨겨지고 감추어진 또 하나의 출현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 불행한  무리
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명할 내용만을 보았기 때문에, 생각도 없이 주님께서 약속된 메
시아가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천함을  보고,
악한 자들에 의해서 멸시 받았던 이 겸손이 우리를 하늘의 영광까지 끌어 올리도록 그
리스도를 바로 보는 법을 배우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분이 태어나야 했던
베들레헴은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이 될 것이다.


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 주님께서는,  그들이  거만스럽게
거짓된 견해로 자신을 우롱하고 진리의 지식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켰기 때문에, 그
들의 경솔함을 심한 말로 공격하고 있다. "너희는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아무  것
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이 자신의 조그만 학문에 대한 자
만에 빠져 자기의 의견과 다른 모든 것을 무조건 거부할 때, 그보다 더 심한 전염병이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
니로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지어낸
거짓된 의견에 대하여 진리를 대조시키고 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나 다름
이 없다. "너희의 눈은 세상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너희는 자 전체를 본다고  생각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비천한 땅의 아들로 멸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증거할 것이다. 비록 너희가 나를 거절할지라도 하나
님께서는 내가 참으로 그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실 것이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
후2:13). 주님께 바울이 그를 미쁘시다고 말할 때와 같은 뜻으로 하나님을 '참'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님의 논조는 복음의 신앙이, 온 세상이 달려들어 이를 뒤엎어치려  할
지라도 조금도 약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악한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그에게
속한 것을 취하여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확고하게 그대로 서  있기  때문에
주님은 완전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멸시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
는 자들의 교만을 누르고 놀랍도록 승리하셨다. 모든 신자는 이와 같은 불굴의 정신으
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아니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께 대항해서 일어나는 악한 자들
의 오만을 진멸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굳건한 토대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건한 교사들은 온 세상이 건전한 교훈을 저항한다 할지라도  이
를 지지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
기가 사기군으로 정죄되었을 때 자기의 보증이 되시는 하나님께 호소했던 것이다. "내
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20:7). 그래서 사방으로
조롱과 비방의 소리에 둘러싸여 있던 이사야도 자기를 의롭다 하실 하나님께 피신했던
것이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 누구뇨"(사50:8) 그러
므로 바울은 사방에서 부당한 판단으로 에워쌈을 당할 때에 그들을 모두 주의 날에 붙
임으로써(고전4:5) 분노하는 세상을 대항하는 데 하나님 한분으로 족하다고 여겼던 것
이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 주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를 모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무턱대고
이러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본에 의해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일컫고 우리의 취지를 변호해주고 후원해 주시는 분으
로 함부로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제넘
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가 스스로 지어
낸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광신자들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거절하는 데 더
대담한 사람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만하고 어리
석은 확신을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한 이후에는 사람의 의견을 용감하게 저지할 것을 가르치
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편에 계심을 확신하는 사람은 세상의 거만과  교만의  송사를
조금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7:29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문구를 구별하여 전자는 그리스도의 신적인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고,  후자는
주님께서 육신과 인성을 취하실 때 아버지께서 그에게 내려주신 직분을 가리킨다고 말
하고 있다. 비록 나는 이를 거부할 정도로 강경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주님께서
그와 같이 간교하게 말씀하셨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물론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신 것을 유츄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리우스파의 교
리를 반박하기에 충분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는 되지 못할 것이다.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 그들에겐 그리스도를 상해할
뜻이 다분히 없지 아니했다. 그들은 그를 해치려고 시도하기 까지 했고 이를 행할  능
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와 같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손발
이 묶인 것처럼 기력을 상실했을까? 복음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
다고 대답한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지
키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동시에 요한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시하고  있
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원에 따라서 십자가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에 따라서 그와 같은 제물이 되도록 정한 바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을
들을 때 불쾌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교훈  하나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왔지만, 각 사람의 죽을 시간은  하나님
에 의해서 작정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많은 사고의 위험 아래 있는  우리가,  또
인간과 짐승의 위험과 많은 질병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를 불러가실 때까지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하는 것은 사실 믿기가 어렵다. 그
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불신(不信)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여기
서 가르치고 있는 교훈을 붙들어야 하며 다음으로 그 목표를, 그리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권고를 포착해야 한다. 즉 우리는 각자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각자의  소명
가운데 봉사하며 어떠한 공포에 의해서도 자신의 임무에서 움직여서는 안되겠다는  것
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한계를 넘어서 행동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
신이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는 것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 그리스도께서는 귀머거리와  고집불
통에게 설교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약간의 열매가 따랐다고  말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불평한다 할지라도 다른 이는 미소를 짓고 또 다른 이
는 중상과 비방을 한다. 비록 많은 차이점이 나타난다 해도 복음 전파에는 효력이  따
르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를 뿌리고 때가 되어 열매가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믿는다'는 말은 분명하게 쓰이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보다도 기적에 더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위한 준비를 믿음이라고 불
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와 같은 조그마한 태도 변화에 그와 같이 영예로운
칭호를 허락하신 것을 볼 때, 우리는 아무리 적음 믿음이라도 하나님께서 이를 받으신
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되겠다.


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  이  말씀으로
보건대 바리새인들이 항상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못하도록 경계했던 것이 분명하다. 처
음에는 복음서 저자가 바리새인들만을 언급했지만 곧 이어 그들과 한 패였던 대제사장
들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을 옹호하는 열성파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그리스
도를 다른 이들보다 더 신랄하게 반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
들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저지할 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에게 그 일을 위
임했던 것이다. 다른 점에서 서로 달리하던 사람들이 사단의 지도 아래 하나님의 아들
을 대적하는 일에는 한 가지로 공모했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횡포와 교회의  부패상
을 변호하는 데 그와 같이 열심이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지키는 일에 얼마
나 더 열심을 내야 하겠는가? 오늘날 복음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가톨릭 교도들의 열성
도 이에 못지 않게 광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그릇된 열심을 보고도 우리가 참되고  건
전한 교훈을 변호하는 일에 더 용감하게 열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
가겠노라 -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이 설교를 그곳에 있던 무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생
각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체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던 관
원들을 향하여 하셨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멸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그의 원수들을 향하여 특별히 말씀하고 있다고 믿는다. 주님은 그들의 노력을 비
웃고 있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그들의 노력은 허사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
다. 주님께서는 또한 그들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이를 저항했던 저
들의 완악함을 책망하고 있다. 동시에 주님은 그 은혜가 곧 그들로부터 취하여 간  바
되리라고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그들의  배은
(背恩)을 책망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를 그들에게 주셨으며, 주님께서 하늘의  영
광을 버리고 내려 오셨고 또 사랑스럽게 그들을 자신에게 초대하시며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었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조금 더'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자기의 은혜가 그와 같이  수치
스러운 멸시를 당하는 것을 오랫동안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의 생명이나 죽음이 그들의 능력이나 수중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이 말씀에서 주님은 자기가 죽음에 의하여 멸
절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죽을 몸을 벗은 후에는 그의 부활의 승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일할 테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아라 너희는 내가 나에게 맡겨진 직무를 다  이행
했을 때 아버지께서 나를 하늘의 영광으로 영접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다.  그러므
로 나의 죽음 후에도 나의 처지는 조금도 변동이 없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훌륭한 위
치가 나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복음 전파에 의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소망으로 부르실  때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17절에서  복음의  도를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내
밀고 있는 손을 우리가 잡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할 것이다.  그
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주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신 자신을 보여 주실 뿐
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자신을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임재
하심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생명에 대하여 전혀 낯선 나그네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하여 그를 찾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찾는다는 말의 모호한
의미를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얼마 가지 아니하여 다른 방법으로, 즉 그들의  비참하
고 잃어진 상태에서 어떤 도움과 위로를 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찾을 것이기  때문
이다.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제 너희에게 참을 수  없
고 어울리지 않는듯한 나의 임재로 잠간 동안에 불과하다. 이제 곧 너희는 나를  찾으
나 헛수고일 것이다. 나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능력에 있었서도 너희에게서 멀리  떨
어져 있을 것이며, 하늘에서 너희의 멸망을 지켜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
도께서는 복음을 배척하는 데 있어 극도로 완악했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
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노력과 공로를 통한  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이를 가르침에 연관시키는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은, 유대인들이 그들이 극도에 달했을 때 헛되이 구세주를 구했기  때
문에, 이 말씀은 메사아의 인격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악한자들이
필요에 따라 하는 수없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의 비참한 신음을 상징하는  표현이
라고 이를 간단히 설명하고 싶다.
  그러나 주님을 찾는 중에도 그들은 참으로 주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신과
고집이, 그들의 마음을 닫아서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속주로서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
은 회개치 않음과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그들의 길을 막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장
자 상속권을 빼앗겼을 때 슬픔에 잠길 뿐만 아니라 신음하며 이를 갈고 분을 참지  못
하던 에서(창27:38, 히12:17)에게서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추락시켰다. 따라서 하나님은 버리운 바들 사이에  자
기 은혜를 멸시한 것에 대해 보응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한 심판의  고통을  당하
고, 비참한 죄책에 눌리고, 곤경에 빠져 불평하고 울고 아우성을 치지만 아무런  소용
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여전히 전과 같은 잔인함을 품고 하나님께  나아오지를  않는
다. 오히려 하나님은 멸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성품의  하나님이기를  바란
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아직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지체없이  그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자. 주님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금방 우리에게서 지나가기  때
문이다. 문이 일단 닫힌 후에는, 우리가 들어가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대로 "은혜 받을 만한 때"(사58:9)에 부지런히 하나님
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태함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실
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말씀에 그는 미래 시제  대신
에 현재 시제를 쓰고 있다.


7:35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 복음서 저자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이 말을 덧붙이고 있
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막을 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경
고의 말씀도 신화나 동화를 듣는 것처럼 조소해 버린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라고
이름을 밝혀 말씀하셨다. 그러나 땅의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그들은  그가  거리가
먼 타지방에 가는 것만을 생각했다. 유대인들이 외국 사람들을 헬라인이라고 부른  것
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
갈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산(Dispersion;離散)이라는 말은 자기 본토에 살고 있는  사람
들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유랑자들과 포로가 된 유대인들에게 적합한 말이다. 그
래서 베드로는 그의 첫번째 편지를(*                                           ;팔
에피데 모이스디아스포라스)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냈던  것이며(벧전1:1),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엔 테 디아스포라)그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저가 바다를  건
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려는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아마 그들은 "만일  이
사람이 메시아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거처로 가나안 땅을 지정해 주셨는데,  헬라에다
그의 나라는 세우려는가?"라고 조롱함으로써 그를 괴롭히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찌되었든,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각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본다.


7:3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 여기서 처음으로 유의해야 할  것은  원수들의
어떠한 계략이나 음모도 그리스도에게 공포를 주어 그의 임무수행을 중단시키지는  못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님은 위험을 당할 때 더욱 용기를 내게 되었고 더욱  용감하
게 행동했다. 이것은 시간과 모인 군중과 사방에서 그를 체포하려는 손이 기다리고 있
을 때 사람을 초청하는 주님의 자유로운 행동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관원들은 아마 그
들의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호 한 가지만 의지하고 수중에  온갖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의 광폭한 노력에도 끄떡 않고 이겨내고 있는 것을 유의하게 된다.  하
나님께서 그들의 분노를 제어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던 성전에서, 그리고 하속들이 준비된 이후인데, 그와 같이 큰 날에 설교할 수 있는
다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복음서 저자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서  와서
마시라"고 외친 그리스도를 소개해 준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준다.  왜냐하면
한두 사람을 작고 낮은 목소리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
도록 큰 소리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귀를 막고 그의 외침을 들으려 하지 않
는 사람들 외에는 숨겨질 수가 없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 이 귀절에서 주님은 사람이 자신의 빈곤을 의식하고 도움 받
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와서 자기의 축복에 참예하라고 권하고 있다. 비록 자
신의 빈곤에 대한 의식이 모든 사람을 치유책으로 인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
두가 가난한 자요, 공허한 자로서 모든 축복이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비참한 내리막길을 걸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릭  하나님
의 영이 그의 불로써 그들의 마음 속에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깨워 주기까지 자신의 공
허함에 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
에 대한 갈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성령의 직무인 것이다. 본문에 관해서,  우리가
첫째로 포착해야 할 점은, 축복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자는 아무도  성령의  부요함에
참예하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갈증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
가를 알고 있다. 많은 양의 일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아주 강인한 사람도 갈증이  심하
면 기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중에 쓰게 될 물이나 물마심이라는  말
과 연결시키기 위해 배고픈 자보다 목마른 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
의 모든 부분이 일관성이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55:1)고 한 구약의 말씀을 암시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거기
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돌렸던 그 말씀이 끝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한 동정녀 마리아의 노
래와도 같은 것이다(눅1:53).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만이 모든 사람의 갈증을 완전히
채워줄 수 있다고 말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를 직접 자기에게 나오오도록  부르
고 계시다.
  마시라 - 권고에 약속이 덧붙여지고 있다. 비록 이 말씀은 하나의  권고이지만,  그
말씀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마르고 텅 빈 저수지가  아니
라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음료수를 공급할 수 있는 무진장의  생명샘이라고  선언하고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구한다면 우리의 소망은 좌절되지  않을  것이다가
가.

7:38
  나를 믿는 자는 - 여기에 주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접근 방법이다. 주님께 나아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믿는 것이다.-믿는다는 말의 뜻을 바로 정의한다면 말이다-우리가 이미 밝힌 대로, 우리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그대로 능력과 지혜와 의로움과 순결함과 생명과  기타 성령의 모든 은사가 충만한 주님을 영접할 때 주님을 믿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여기서 우리가 막 언급한 약속을 더 평이하게 그리고 충분히 재확인하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풍요함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한 비유는 약간  투박하고  세련도지 못한 말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분명하다. 믿는  자에는 신령한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생수라고 부르고  있다.  결코 고갈되지도 않고 흐름이 중단되지도 않는 생수의 강이다. 강(Rivers)이  복수로  쓰인 것은 우리의 영혼의 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나는 풀이하고 싶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에게는 성령의 은사의 풍요하모가 연속적인  면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믿는 자의 배에서 흘러나는 물을 성령을 받은 자가 그 일부를 자기 형제들에게 전달함으로 우리 사이에 상호 교류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말씀의 의미가 단순히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유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께서 4장에서 "누구든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애다는 까멋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보통 우리가 마시는 물은 갈증을 잠시동안 채워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영생하도록 솟아오르는 생명샘이 되시는 성령을 마시게 된
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믿는 자들이 첫날에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어 다시는 목마르거나 배고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즐기는 만큼 우리는  주님에 대한 새로운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성령은 믿는 자 안에 이어 흐르는 생명의 샘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8장 10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한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실 각자가 믿음의 분량을 따라 성령의 은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세상에서 성령의 은사를 완전히 충만하게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믿음에 성장하는 만큼, 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성령의  축복을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우리의 믿음의 역량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경고해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은사는 물방울처럼 우리에게 떨어지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로 모신다면 우리의 믿음이 그를 포용할 수 있다면, 이 물은  강물과
같이 흐르는 것이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 - 어떤 이들은 이 말슴을 앞부분에 국한시키고 또 다른  이들은 이 문구를 후반부에 국한 시킨다. 나는 이 문구가 주님의 말씀 전체에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의견에는,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어떤 특별한 말씀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증거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풍성함에 있어서, 주님이 이를 생수에 비교할 때마다, 주님은 주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말하고 있으며 믿는 자들의 마음을 그곳에서 이끌고 있다. 생수에  관한  모든 예언은,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만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보화를 공개하여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온갖 은혜가 그에게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한 데에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친절하고 은혜롭게 부르셨는데도 사방으로 방황하는 자는 비참하게 멸망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물이라는 말은  때때
로 그 순수함 때문에 성령에 적용된다.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귀절과 다른 비슷한 귀절에서 표현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그의 숨은 능력으로 우리에게 물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의 생기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대유(代喩)방법이다. 물이라는 한가지 낱말 안에 주님께서는 생명의 모든 부분을 종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무슨 생명의 가면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죽은 사람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우리가 아는 대로 성령은 영원하신 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거하는 한,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사람 위에 부은 바 된 성령의 은혜는 아직 공개적으로 임하지 않았다고 복음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신약이 구약에 비교될 때처럼 비교적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조상들에게 한 번도 허락하신 적이 없는 것처럼 그의 성령을 약속하고 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미 성령의 첫열매를 받았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믿음이 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전에 성령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계시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나중에 나타날 것처럼 밝고 명확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가장 큰 영광은 주님께서 교회를 그의 영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히신 바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는, 그의 나라를 정당한 절차를  따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때까지 성령을 충분히 나타내는 일을  연기한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아직 남아 있다. 주님은 여기서 성령이 가시적(可視的)인 열매나 중생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약속되었던 성령은 하나의  거울에 비친 것처럼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국의 위엄을 입으시고 아버지 우편에 영광 중에 앉아 계실 때, 우리가 지상에서 가난하게 굶주리고 모든 영적인 축복이 고갈된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과 천박한 믿음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7:41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 그리스도를 무분별하게 거절하는  것같이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성경 말씀으로 무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반대되게 성경 말씀을 곡해하지만 그들은 다소 진리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갈릴리 사람으로 취급하는 데에만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지의 원인은 경멸이 아니고무엇인가? 만약 그들이 묻는 것을 지나치게 성가신 일로 생각지 자낳았다면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사실과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두 가지 자격을 구비하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성품이다. 즉  사소한 일들에는 태만할까 부끄러워 하면서도 천국 비밀에 있어서는 우리의  안이함으로 방관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기  위하여 구실을 찾는 데는 빈틈없이 열심을 내지만 바른 교훈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놀랄  정도로 더디며 무감각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않을 구실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바로 그 성령말씀을 가지고 이와 같이 그들 스스로  장애물을 설치한다.

7:43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 본 복음서 기자가 이 말씀으로 뜻하는 바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악한일을 할 때 그리스도를 해하고자 하는 잔인한 음모와 정욕이 동반되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미신은 항상  잔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온갖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간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의 보호를 의지하고 또한 그 보호를 받으셨으므로  온갖 위험을 다 극복했기 때문이다.

7:45
 하속들이......오니 - 여기서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의 오만이 얼마나 혼미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기들의 위대성을 그렇게 자만하며 그렇게 숭배하기 때문에 인간과 및 하나님의 법을 짓밟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들은 즐겨 모든 것을 흐트러 놓는다. 이 악한  제사장들이 왜 그리스도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마치 자기들의 명령을  그 무엇도 반대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권세를 과장하고 있다.     

7:46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정복을 당해 용기를 잃
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로 회개하게 하거나 그 말씀에 정당한 경의를 표하게 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 사람처럼 말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면 어찌해서 그들을 강권한 그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이 마음을 감동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인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11:4)라고 한 말씀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잠시 후에 주님을 죽이려 하던 이 사람들이 마치 망치로 얻어맞고 쓰러진 사람들처럼 단순히 그리스도의 음성에 암도되어 뒤로 물러가 엎드러진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슴에는 악인들이라도  두렵게할  만한 커다란 능력이 있음을 배우자.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멸망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하여 마음의 부드럽게 함은 받되 낙담하지는 말자.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 하속들과 아주 흡사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복음의 가르침에 감복하기를 싫어하고 또한 그리스도께 굴복하기는 커녕 그들은 여전히 대적의 진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있다. 즉 그들은 악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비방하는  말을 총동원하여 그 가르침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면서도 말이다.

7:47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 그들은 그 하속들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그와 같이  책망하
고 있다. 그들이 이 말로써 의미하는 바는 비록 온 백성이 떠나가는 경우라도 그들 자신이 흔들린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만하 다태도로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그 쟁론의 이유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서민층과 무식한 사람들 뿐이고 관원들과 저명 인사들은 그리스도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히 바리새인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학문과 성결에 있어서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높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관원들 중에서도 배어낸 사람들과 같기 때문이다. 이 반대 이론은 얼핏 듣기에 그럴 듯도 하다. 만약 교회의 지도자가 치리자들의  권한과 권위를 보유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질서도 잡힐 가망성이 없고 또한 교회가 잘 정돈된 상태에서 오래오래 지속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민층 사람들의 열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또한 사람이 저마다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자유를 허용할  때  곧 따르게 될 무질서를 모르는 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의 권위는 교회 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요소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이 율법에도 부여되어  있는 바, 곧 그것에 대한 조사는 대제사장에게 맡겨야만 한다(신17:8).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께 기꺼이 순복하기를 싫어하고 최고의 권위를 자기들에게 두는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결정권을 위임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율법을  따라 결정할 것을 뜻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지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제 자리를 지키게 되며 하나님 홀로 높임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는 목사들이 스스로  권위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거룩하고 합법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인간의 권위만을 내세울 때 그것은 헛되고 무용한 자랑이다. 그러나 악한 자가 교회를 주관하는 일이 종종 있는 일이므로 우리는 일단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경우에 사람에게 아무 것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이러한 폐단에 의해서 근심했던 것을 안다.  사람들은 그들의 교리를 은폐시키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방백과 제사장과 교회라는 높은 이름을 가지고 선지자들을 대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와 똑같은 무장을 한 가톨릭 교도들은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을 대적한 자들과 그 잔인함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진실로 두려운 우맹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단이 하나님의 진리보다 자기 자신들의 야심을 더 사랑하는 자들을 몰아넣는  광란적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경회함으로 세상의 모든 영화가  소멸되고 그 허무한 안개가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구원이  방백들의  뜻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잘못되어 있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구원이 그들의 비위에  좌우된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주 불안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49
  이 무리는 - 그들의 교만심의 첫 면은 제사장의 이름의 권위를 사용하여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 다음 면은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무가치한  자들로 멸시하는 데 있었다. 자신들을 과신하는 자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경멸적이고 또한 형제들에 대한 경멸은 언제나 자기 사랑을 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 무리들을 저주받은 자로 선고하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가? 분명히  율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변명한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교단을 떠나서는 거룩함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 가톨릭은 자기들만이 교회라고 주장함으로 소위 그들이 지칭하고 있는 바 평신도들을 마치 이교도들인 양 멸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자들과 권세있는 자들보다, 낮고 멸시받은 자들을 더 사랑하시므로 그렇게 오만한 광란적 태도를 뒤집어  놓으신다. 그들이 여기서 자랑하고 있는 율법에 대한 지식은 사람들에게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직 자기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당한  해석자인 것처럼 교사적 오만심을 대답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가 거룩해지는 까닭에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이  저주받은 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소수에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잘못된 자아심에 부풀어서 자신들을 일반 대중으로 부터 분리시킬 수도 있으나 그 지식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같은 믿음의 순종으로 함께 모일 수 있는 것이다.

7:50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 본 복음서 기자는 니고데모를 중립적이고, 또한 경건한 교리를 엄숙하게 변호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진리를 억압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는자로서 묘사하고 있다. 본 복음서 기자가 니고데모를 "밤에 찾아왔던 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면적으로는 그를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감히 경건치 않은 자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결코 발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누구라도입을 열어 발언하기만 하면  즉시 그들의 증오와 위험의 대상이 될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힘 없는 말일지라도 한 마디 발언하는 모험을 했을 때 그것은 그의 마음  속으로부터 뛰어나오는 경건의 조그만 불꽃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더욱  기탄없이 변호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잔친 두려움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복음서  기자가 뜻하고 있는 바는 니고데모가 아직도 밤의 은닉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 복음서 기자는  니고데모가 전에 밤에 그리스도께 찾아왔었지만 공공연히 대적 가운데 남아 있어서 그들의 진영에서 신분을 같이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한층 더 주의 깊게 주목할 문제이다. 즉 오늘날 니고데모와  같은 체 하면서 이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조소하면서도 벌 받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점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이 니고데모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태도가 어떻게 그들을 돕겠는가? 니고데모는 먼저 말을  듣기 전에 그리스도를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강도나 살인자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무죄한 자를 정죄하는 것보다 범죄자를 면죄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는 것은 두발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리스도의 인격을 뚜렷이 드러내고자 하는 열심으로 그는 그가르침  자체를 버리며 포기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경건하고 믿는 사람에게 무슨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이 후에 열매를 맺은 복음의 씨가 지금은 그 사람 속에서막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예를 다른 목적에 적용한다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 다 없어져 버린 것 같은 교훈을 가지고 은밀히 뿌리가 나게 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싹이 나게 하며 처음에는 확실히 낙태된  것같이 하시지만 후에는 생명과 활기가 넘치게 하신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니고데모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부터 새롭고 갑작스러운 활기를 얻었다.

7:52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 그리스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 뿐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난하는 말이다. 즉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의  천한 구석에서 태어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기편에 있게 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니고데모에 대한 그들의 억설은 얼마나 그들이 맹렬히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로 불타고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니고데모가 공공연히 그리스도를 변호하려 하지 않았을  뿐더러 단지 먼저 말을 들어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정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만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가톨릭 교도들 가운데는 아무도 복음을 억압하는 일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하는 최소한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면 원수는 즉각 화를 내며 그를 이단자라고 부를 것이다.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 이 제 이 장면을 끝맺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자세히
주목해 보라. 만약 누가 제사장들의 치리하던 방법, 그들의 분노와 그들의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권세를, 무장한 경호원도 없이 맨손 맨주먹만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와 비교해 본다면 그리스도는 틀림없이 처치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음모가 저절로 사라지고 또 이 모든 사람들이 노도와 같은 맹렬한 분노를 버렸을 때  누가 그들의 흩어짐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원수들의 온갖 노력을 원하시면 언제라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음모를 이루고자 모든 군세를 가지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뜻을 이루지 못하고  흩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종종 경험하게 되는 것은 원수가 복음을 소멸하기 위해 어떠한  계략을 꾸며 놓았을지라도 곧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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