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요한복음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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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요한은 이 머리말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神性)을  선언하고 있다. 그의 목적은 인류의 회복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을 통해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만이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과 활력을 불어 넣으실 수 있으며, 인간 그 자체 속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독특한 증거를 주셨으며 또 아담이 타락하고 실패한 이후에도 그의 후손들에게 은혜와 친절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생명과 구원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이와 같은 가르침이 확고히 서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주(安住)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자연이 아직 타락하기 전에 생명의 원천과 근원이 되셨던 분의 사랑을 통하여 생명이 이제 죽은 자들에게 다시 주어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Sermo)이라고 부른 것은,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의 으뜸이 되시며, 둘째로 그 지혜이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셨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경우에도 말씀이 사고(思考)의 표현이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이것을 하나님께서 적용시켜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또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고 말하는 것도 부적합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    (호 로고스)의 다른 의미들은 별로 적당하지가 않다. 이 헬라어를  분명히 정의하면 이성(理性) 또는 계산(計算)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믿음의 한계를  지나쳐서 이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이러한 철학적 논쟁을 전혀 긍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변론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침묵, 그  자체가 이와 같이 차원 높은 비밀(신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지식적인 접근이  얼마나
한심한 문제인가를 선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전에는 자기를 스스로 숨겨둔  상태였다. 따라서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이중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저 무가치하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스페인 사람 셀베투스(Servetus)는 영원한 말씀이 등장한 것을 창조할 때 나타남으로써 비롯됐다고 상상한다. 마치 그의 능력이 그의 대외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알려지기 전에는 그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말씀'에 시간적인 시작을 부여하지 않고 그가 태초부터 계셨
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 나는 그들이 개처럼 얼마나 잘  짓는지
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한때 아리안계 사람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
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태초(beginning;시작)라는 말은 순
서를 가리키는 말로 영원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위와 같
은 중상모략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만일 말씀이 시간적으로 시작이 있었다면,  그들은
또한 하나님 안에서 어떤 시간의 연속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요한은  이
귀절을 통하여 주님(말씀)을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분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여러가
지 의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말씀은  그의
능력을 어떻게 행사했는가? 그의 성품은 어떤 것이었는가? 어떻게 해서  그는  알려질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가 세상과 피조물 가운데 고정되어 있었다는 낭설을  부인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
이다. 그러면 태초를 천지창조와 관련짓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일반적인 세계 질서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분명히 격리된 창조주가 아니었
던가? 이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만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하나님의 지혜를 떠나서  별도로  생각하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면, 말씀의 근원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를 떠나서 찾을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셀베투스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대표되기 전에는 '말씀'도 구상(構想)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대 의사를 제기한다.  마
치 그가 공개적으로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그가 실존하지 않았던  것처
럼! 마치 그가 자기 자신을 외적으로 나타내기 전에는 내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처
럼!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무조건적으로 확언함으로써
위와 같은 억지나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는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았다. 요한은 우
리를 모든 임시적인 것으로부터 끌어 내었다. 동사(動詞)의 불완전 시제로부터 계속되
는 상태를 유추하는 사람들은 오해려 난처한 입장에 빠져있다. 이들은 요한이, 말씀이
"......계셨으니"(was)라고 한 것보다 "계셔왔으니"(was being)라고 하는 말이 계속적
인 연속을 나타내어 더 좋은 표현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에는 더  신중
한 이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제시한 바, 즉 요한이 우리를 하
나님의 영원한 처소로 이끌어 말씀이 세상을 외적으로 창조하면서 자신을 나타내기 이
전에는 말하자면 그곳에 숨겨져 있었다는 내용으로 만족해야겠다. 그러므로  어거스틴
(Augustine)이 여기서 언급한 태초(beginning)는 전혀 시작(geginning)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켰을 때, 그는 옳게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
이 순서상으로 그의 지혜보다 앞에 있지만, 그가 그의 지혜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할
때 어떤 시점(時點)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영광을
앗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었던"-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이 허용된다면-영원한 아들(generatio)로서, 그후  여
러해동안 율법 하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두호하게 윤곽을 드러내셨다가 시간이 차매 완
전한 모양을 입고 육신으로 나타내신 바된 분이시다. 나는 *              (로고스)라
는 말을 라틴어 성경에서 verbum(word)으로 번역하는데 놀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차라리 말(*              )의 번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가능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Sermo(Speech;강연)가 훨씬 더 적절한  표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에라스므스(Erasmus)가 쓴 단어를 더 좋은 말로 바꾸었을 때 그를 신
랄하게 헐뜯었던 신학자들의 가혹한 비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우리는 이미 하나니미 아들이  세상보다  높이
계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높이 계시며 모든 시대보다 앞서 계신 분이라고 밝혔다. 그러
나 동시에 이 표현은 그에게 아버지와 다른 실체(hypostxsis)를 안겨준다. 복음서  저
자가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거나 하나님의 존전에 계셨다고 했다면 그것은
불합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 안에 그의 확실한 실재를 갖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아들이 아버지와 분명히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에, 사벧리우스(Sabellius)의 오류를 논박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이미 앞에서이와  같
이 심오한 비밀(신비)은 신중한 사고를 요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 저
자들은 당시의 이교도들의 모호한 궤변에 대항해서 다른 방법으로는 참되고 순수한 진
리를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는  어휘를
만들어내야만 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가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단순한 하나
님의 본질(essence)안에 세 분의 인격(persons) 또는 세 분의 실체(hypostases)가  계
시다고 표현했다.
  실체(hypostasis)라는 말은 히브리서 1장에서 이러한 인격의  뜻(Person)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힐라리(Hilary)가 썼듯이 라틴어의 서브스탄티아(substantia)라는  말과
상통한다. 이들은 *                    (타 프로소파) 또는 Persons(人格)이라는  말
을 "하나님 안에 계신 분리된 소유물(주)"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들의 묵상에  자신
을 맡겼다. 나찌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가 세분이 나의  주위를  둘러
비추는 것을 연상하지 않고 홀로 계신 하나님을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리스도의 신성에 어떤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그
는 분명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한분이신 만큼,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은 본질에 속한 분이시면서 어떤 면에서는 다른 데가 있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두번째 귀절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아리우스(Arius)는 하나
님의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극히 사악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고백하게 되는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종의 피조물이라고  괴변을
떨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고 했는데, 더 이상 그리스도의 영원성
을 부인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이미 우리에게 말씀한 내용을 더욱 깊이  우
리 마음 속에 확신시킬 생각으로, 요한은 앞에 나온 두 귀절을 "그가 항상  계셨으며,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는 말로 간추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태초(시
작)가 모든 시간보다 이전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요한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하
고 그의 하나님되신 속성을 선포한 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works)을 통해서 그의 신
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실제적인 지식 안에서 특별히 훈련 받을  필요
가 있다. 왜냐하면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도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
리에게는 차거운 지식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가 과연 하나님이심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位格)에 적절히 어울리는 선언을  하
고 있다. 바울은 한 마디로 말하기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롬 11:36)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와 비교될 때, 그는 보통 이 기준에 의해서  구분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사물을 만들었다. 만물이 아
들로 말미암아 아버지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평범한 화법(話法)을 쓰고  있다.  앞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요한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 세상이 창조된
직후에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셨음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전에는 그  속성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의 능력의 결과에 의해서 공적으로 알려진 바 되었다. 심
지어 철학자들 중에도 하나님을 이 작품(천지를 가리킴)의 배후에 있는  지성(지혜)으
로 간주함으로 하나님을 세계의 건축자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다. 이 철학자들은  사실
바로 본 것이다. 성경이 그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
고의 가치가 없는 추리 속으로 빠져 들기 때문에 그들의 증거를 받아들일 아무런 이유
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하늘의 음성-요한의기록-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
면 성격은 우리의 마음이 감당하고 소화시킬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비록 이 귀절이 여러가지로 해석
되어 왔으나, 나는 "지어진 것이......하나도 없다"는 한 가지 뜻으로 받아  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헬라어 원본이(아니면 적어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원본들은) 이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이 이를 요구하고 있다.
'지어진 것이'라는 문구를 그 앞의 귀절로부터 분리시켜 뒤에 따르는 문장과 연결시키
는 사람들은 "지어진 것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는 억지 문장을 지어내지  않으
면 안된다. 그러나 이들은 이와 같은 화법이 피조물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가 없다. 자기 나름으로 극단적인 플라톤 학파에 속해 있던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세
상을 지으시기 전에 자기 마음 속에 전체 작품의 형태에 대한 개념을 품으셨고,  나아
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창조가 명령된 이후로, 그 안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만
물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품고 계셨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서
저자 요한의 생각과 얼마나 거리가 먼 생각인가를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나
는 그 앞의 문장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것이 같은 말의 되풀이처럼  느껴지겠지만
이것은 전혀 같은 문구의 반복이나 오류가 아니다. 사단이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로
부터 빼앗아 가기 위하여 온갖 힘을 경주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전혀 어떠한  사물
로 지어진 것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명백히 선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지금까지, 복음서 저자는 우리에게 모든 만물이  하나
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제 창조된 만물을  보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세상을 창조할 때  그의  능력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은 안정되고 고정된 자연의 질서
가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1장 3절에 그가  그
의 능력의 명령, 또는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
라, 이 생명은 넓게 감정은 없으나 살아있는 무생물체를 지칭할 수도 있고 생물체  만
을 적용해서 말할 수도 있다. 생물체나 무생물체 중 어느 쪽을 택해도 별로 문제될 것
이 없다. 왜냐하면 이 귀절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원천이 되실 뿐만 아니라-존재하지 않던 것을 생겨나게 하시는 원동력이 되시고, 그의
생명을 주시는 힘(살려주는 힘)이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그들의  현상(現狀)유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님의 계속적인 영감이 세상에 생명을 허락지 않는다면, 현재 번성
하고 있는 모든 물체가 쇠퇴하여 없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 마디로  바울이
하나님께 대해 소개할 때,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다(행17:28)고  말한
것을, 요한은 말씀의 축복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영원한 말씀을 통하여  우
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나는 요한이 뜻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다른  해석들
을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다른 생물체를 능가하는 생명의  부분이
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은 일반적인 생명이 아니라 이성(理
性)의 빛과 연합된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을
다른 피조물로부터 분리시킨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먼 거리에서 바라봄
으로써 의식하기보다, 우리 자체 내에서 그 능력을 느낌으로써 그의 능력을 더 인식하
고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27절에서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말라
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기를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더 가까이 시선을 돌리도록 설득할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일반적으로 고려할 때, 요한은 그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인간은 동물과 같은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성을 부여받은,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빛으로 인간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깨우쳐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특이한 축복의 주관자가 되심을 알게 할 목적으
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빛은 그빛의 원천인  '말씀'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빛은 말씀의 거룩한 능력을 더욱 명확하게 비추
어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성경 여러 곳에서 밝혀주고 있는 대로 인간이 눈이  어두
어졌다는 사실과, 그 어두움 때문에 인간의 정죄(定罪)받고 있는 너무나 잘 아려진 기
정 사실에 대하여 반기를 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은 그들의 모든 사고활동 가
운데서 비참하게 사라져 간다. 인간들이 자신의 지각(知覺)에 의해서  헛되고  거짓된
것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 왜 이렇게도 많은 오류가 범람하겠는가?  그러나
인간 내부에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요한의 이와 같은
증거는 파괴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인간의 생명 속에는 동
작과 호흡 이상의 훨씬 우수한 요소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애초
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빛은 현재의 상태에 의해서 측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즉시 경고함
으로써 이 질문을 미리 막고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상하고 타락한 성품 속에서 빛
이 어두움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고는  말하
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가득한 인간의 마음 속에도 아직 저 밝음의 불꽃이  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제 이 문장 속에 두 가지 생각이 들어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애초에 부여받았던 건전한 성품과는 판이한 상태에  있음을,  즉
모든 부분에서 광채를 발해야 할 그들의 마음이 불행하게도 눈먼 상태로 빠져들게  되
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말하자면, 인간의 성품이 이와 같이 부패한 가운데  그리
스도의 영광이, 어두움에 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요한은 이와 같은 흑
암의 와중에도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요소가 남아 있다고  말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인간의 마음은 그 눈이 아주 멀었기  때문
에 어두움에 압도당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음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요한이 더 부
드러운 단어를 써서, 빛이 흐리고 어두웠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는 첫사람  아담의
타락한 이후로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를 보여주기를 원했다. 빛이  어두
움에 비친다고 요한이 말한 것은 부패한 인간의 성품을 칭찬해서 한 말이 아니고 무지
한 인간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와 같은 표현을 썼던 것이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이 희
미한 빛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부르셨지만, 복음서 저자는 이것이 효과가 없었다고 말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
터 소외된 현재에 이와 같은 무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에게 남아있는 빛은 효력
을 발휘하지 못하고 명맥을 겨우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경험이 또한  매일같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靈)에 의해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까지도 아직 이성(理性)을 행사함으로, 우리가 호흡을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지각을 가지고 이를 행사하도록 지어진 존재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이
들은 이성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가까이 찾거나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의 지성(知性)은 헛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도우심으로 돕지 않는
다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빛
을 인간들 위에 비취셨으나 어두움에 빠져있는 그들은 그 빛의 원천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타락한 가운데 헛되고 비뚤어진 환상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부패한 성품 속에
남아 있는 그 빛 가운데는 두 가지 주요 부분이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종교의
씨가 뿌려져 있고, 또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그들의 양심에 새겨져 있다. 그러
나 그 열매는 종교심이 수천가지의 미신을 산출(産出)하고 양심이 모든  판단을  흐려
미덕(美德)과 악덕(惡德)을 혼동시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인
간의 타고난 이성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들이 인생을 살아 갈 지
혜를 부여받았으며 인문과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무런 효력
이 없이 사라져 버린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타고난 재능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 아직 중생(重生)의 은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겠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두 가지 뚜렷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능력은  세
상을 건축하신 것과 자연의 질서에 잘 나타나 있다. 두번째 능력에 의해서 그는  타락
한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해서 회복시킨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래서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그는 권능에 의해서 만물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특별히 인간은 지각(知覺)이라는 특유의 재능을 부여받았다. 비록 타
락에 의해서 인간이 지각의 빛을 상실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로 나
면서부터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아직
도 보고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우둔함과 완악함에 따라 그에게 아직 남
아있는 빛을 어둡게 가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중개자(仲載者)의 새로운  직분을
담당하셔서 중생의 영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간을 개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요한이 언급한 빛을, 복음과 구원의 도리에 연관시키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입장으로 추측한다.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 저자는 요한의 소명(召命)을 확인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지나가는 말로 언급할 뿐이다. 이러한 확언은 자신을 내세워 "나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나중에 이 증인에 대해 좀더 언급할 의향으로, 요한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내심을 받았다고 한 마디 말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후에 자기의 전도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요한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한에 대하여 저자가 언급한 내용이 교회의 모든 교사들에게도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가르침이 권위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 위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이다. 복음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요한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리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가 그에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의 천사를 통하여 그가  태어나면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요한을 위해 의도(예정)하신  직
분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            (요-하넨-), 모든  사람
이 이를 인하여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자(herald)임을 인식하도록 하
셨다.
  사람이 났으니 - 복음서 저자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방법을 논하
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임을 의심치  못하게  하려
고, 요한은 세례 요한이라는 전령(傳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공개적으로  선
포되셨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내셨을 뿐 아니
라 세례 요한의 전도와 증거에 의해서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는 그리스도에 앞서서 이 증인을 보내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보
다 쉽게 받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무슨  증인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게 보일 수도  있
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의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이 증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예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
리를 위해서 증거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의 증거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것이라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그  대답
은 역시 간단하다. 세례 요한은 개인적인 증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고,
인간이라기 보다는 사자(使者)의 몸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이 칭찬
을 받는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사자(대사)였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 것이다. 요한의 증거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증거한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전령(傳令;使者)으로서의 요한
의 존재 이유는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이끄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 복음서 저자는 요한이 부름을 받은 목적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서, 그의 소명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
다. 그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초대할 때,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요한은 추천을 받을 필요가 별로 없다, 복음서  저
자는, 따라서, 요한에게 돌려지는 조그마한 칭송이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을 염려해서, 요한은 그 빛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요한에게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새벽의 희미한  햇
살에 압도 당한 사람이 감히 태양을 쳐다보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제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빛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보기로 하자. 모든 성도들은,
성령님의 깨우침을 받아 자기 자신을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본을 보임으로 다른 사람
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주 안에서  빛'(엡5:8)이라  하였다.
사도들은 그들을 '빛'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복음의 횃불을 들고 세상의 어두움을 물
리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마5:14).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즉시 계
시의 원천인 영원하고 신비한 계시를 깨닫게 하려고 논의하고 있다.

 

1:8-9
  참 빛......세상에 와서 - 복음서 저자는 참 빛과 거짓된 빛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천사나 인간과 공통으로  빛이라고  불리우는
요소를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할 것을 우려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어떠한  빛과도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했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빛은 다만  파생된
광명일 뿐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통하여 온 세상에 밝히
비취는 빛이라는 점이다. 세상에 있는 빛(밝음)의 원천이나 근원은 다른 어느  곳에서
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요한은 주님을 그 본성 자체가 빛이신 '참 빛'이라고 부르
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 복음서 저자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자기 안에서 느끼는  결과
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빛이심을 알 수 있도록 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예수께서 영원
한 빛이시니 만큼, 근원적으로 빛이 되신다고 보다 더 정교한 논조를 전개할 수가  있
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우리 모두가 가졌던 경험을  회상하도록  우리를
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밝은 빛에 참예하게 하시는  분
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빛이라고 불리우는 존귀한 권위가 어울림을 우리는 인정하여
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겐, 이 귀절이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보편적인 용어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생명의 빛에 참예하게 된 성도들에게 국
한해서 쓰고 있다. 어거스틴은 학교 교장의 비유를 들면서, 어느 동네에 학교가  하나
뿐이라면 많은 사람이 그 학교에 다니지 않더라도 그 교장선생님은 온 동네의  교장으
로 불리우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귀절을 상대적으로 보고 있
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마음의 깨우침(빛)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떠
나서 달리 생명의 빛을 받았다고 자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라고 일반적으로 말한 것처럼, 이 빛에서 나
가는 광선이 전 인류 위에 비친다고 하는 의미로 더 좋게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이 다
른 동물보다 뛰어나 이성과 지성을 부여받은 특이한 존재임을 알고 있으며 또  양심에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빛에 대하여  아
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광신자들은 이  귀절을  붙들고
계시의 은혜는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곡해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이 믿음(신앙)보다 훨씬 못한 일반적인 이성의 빛을  지칭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인간은 아무도 자기 마음의 명철과 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영만이 그의 택한 자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신다. 나아가,  우리
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눠주신 이성(理性)의 빛이 죄로 너무나 어두워져 있기 때문
에 극히 작은 양의 섬광(閃光)이 아직 꺼지지 않고 이 극심한 암흑세계를, 아니  무서
운 무지와 허물로 꽉찬 인간의 마음 속을 비취고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 인간은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빛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
난 것인지를 모를 정도로, 말하자면 스스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는  인간
의 배은망덕함을 책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시대나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
서 육체로 나타나시기 전에도, 그는 여러가지로 그의 능력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
리의 일상 생활에 나타나는 주님의 능력이 인간의 게으름을 시정해야 할 것이다. 흐르
는 물줄기에서 물은 길어 먹으면서도 그 물이 흘러나오는 샘(원천)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
시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핑계를 댄다 해도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그들 가운데 항상 존재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의 나태함으로 일종의 악질적인 무지함으로 가리우는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그리스도는 사람이 그의 빛에 비추임을 받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정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11
  자기 땅에 오매 - 하나님의 아들이 볼 수 있게 육신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
그리고 그것도 열방 가운데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신 유대인들에게  계시하셨을 때-그를 알아보지도 않고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극히  불쌍할  정도로 사악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귀절도 또한 두 가지로 풀이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 저자가 전 세계를 다 지칭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 어느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기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지 못할 부분은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해석을 따르자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그는 외국 땅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 인류가 그의 기업이기 때문에 곧, 자기 세상에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한의 '자기 땅'이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의(本意)에 더 가깝다고 믿는다. 복음서 저자는 암시적(暗示的)인 대조를 통해서 인간의 배은망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이 거할 처소로 한 민족을 택하셨다. 그가 그곳에 나타나셨을 때, 그는
버림을 받았다. 이것은 인간의 완악함이 얼마나 극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들의 믿지 않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될 것을 알고 이 거침돌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들에게 특별히 약속된  구주가 오셨을 때 그를 멸시하고 배척했다면 누가 그를 이세상의 구속주(救贖主)라고  인정하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이 그와 같이 고민했던 것을 알고 있다. 나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강조점이 동사와 명사에 놓여있을 뿐이다. 복음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전에 계시된 곳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이 보다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새롭고 특별한 형태의 임재(臨在)를 의도하고 있다.  요한이  '자기  땅에'(unto  his own)라고 말할 때, 그는 유대 민족과 이방나라들을 비교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이 특이한 특권에 의해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유대 민족이 자기 가족이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에 따라 그의  나라에 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자신을 그들에게 제시하셨던 것이다. 이사야 1장 3절의 불평도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비록 주님께서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 계시지만, 그는 특별히 이스라엘에 속하는 주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말하자면 그의 거룩한 우리 안으로 모은 바 될 것이다.

1:12
  영접하는 자 곧 -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배척했다는  거
침돌에 아무도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그를 믿는 사람들을 하늘 높이 올려주고 있
다. 믿음의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이라고 그는 말한다.  -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이라는 보편적인 어휘는 대조법을  암시하고  있다.
유대민족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국한된 분인 것처럼 헛된 영광에 도취되어 있
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는 그들의 운명이 바뀌었음을 선언한다. 이방인들이 바로 기
업을 빼앗긴 유대인들이 남겨놓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
자의 권한을 나그네에게 이양한 것과도 같은 것이다. 바울이 말한대로 한나라의  넘어
짐이 온 세상의 생명(부요함)이 된 것이다(롬11:12). 말하자면, 복음이  유대인들로부
터 퍼져나왔을 때 그 복음은 세계 전역에 널리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
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특별한 은총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은  그리스
도에게 아무런 해를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 왕국의 보좌를 세
우시고 차별이 없이 전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였던 이방 만민을 구원의 소
망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영접받아야 하는가의  문
제는 그를 믿음으로써 영접하는 것임을 간단히 보여주고 있다.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이식(移植)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양자의 권리를 취득한다. 주님께서 유일
한 하나님의 아들, 즉, 독생자이신 만큼,이 영예는 우리가 식구가 되지 않는 한, 우리
에게 속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내용이 다시 '권세에 대한 허구'를 논박해 준다.  복음
서 저자는 이 권세가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이 이미  하나님
의 자녀가 된 것이 확실하다.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데까지는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믿음(Faith)을 격하시키는  것
이다. 그들은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현재의 결과를 대치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모
순은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다음  귀절에서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로서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
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비록, 히
브리어에서 가끔 '이름'이 '권세' 대신에 쓰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 즉, 복음의 도(道)를 지칭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파될 때, 우리는  그
를 믿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보통 평범한 방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자기  나름
대로의 혼동된 믿음은 복음을 깨닫는 것(이해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믿음으로  조작해
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도들 가운데 '믿는다'는 말보다 더 자주 쓰이는  말도  없지
만, 복음을 들음으로써 생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이 그냥 그대로  쓰이고  있
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나는 여기에 쓰인 *              (에크수
시아)라는 말을 존엄(dignitatem)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가톨릭 교도들의
헛소리를 반박하기 위해,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고 본다. 이들은 이  귀절
의 뜻을 고약하게 변질시켜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 즉 우리가 보기에 좋은대로  신용
할 특권만을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자유의지라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물 속에서 불을 찾아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신다고 하지 않
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은혜가 우리에게 베풀어졌을 뿐이며 그 은혜를 활용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추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한  단어에
대한 이 보잘 것 없는 궤변은 금새 무너지게 된다. 복음서 저자는 곧  이어서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면 그리고 하
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믿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
시는 양자의 은혜는 분명히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복음서 저자가 사
용한 완곡한 표현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한
마디로 말한 것보다도 은혜의 우월성을 더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더럽고
사악한 사람들, 영원한 수치를 받도록 정죄되어 사망의 암흑 속에 버려져 있는 사람들
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인간들에게 이런 영예를 부
여함으로써, 그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복음서 저자는 이 축복의 위대함을 드러내 말하고 있다. 바울도  에
베소서 2장 4절에서 같은 은혜를 말하고 있다. 설령 어떤 사람이 이 낱말의  일반적인
의미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복음서 저자가 쓰고 있는 대로, 권세(power)라는 말은  완
전한 그리고 충만한 효과를 포함하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부정(不淨)하고 할
례받지 못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긍휼을 베푸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무덤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를 일으키셨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변화이다. '권세'라
고 하는 것은, 바울이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말할   때에   *           
 (하카노레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1:13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 나는 이것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는-어거스틴
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추정하듯이-육정(flesh)을 여자에게 해당시킬 이유를 발견치
못한다. 복음서 저자는 다른 표현으로 같은것을 반복하여 말함으로 이를 우리  마음에
더 깊이 새기려고 시도하고 있다. 비록 요한이 특별히 육신을 자랑했던 유대인들에 대
해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귀절에서 일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
것은 우리의 성품으로나 우리가 먼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께서 즉각적인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자원해서 우리를 낳아주심
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우리가  생산
해 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중생(重生)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복음서 저자는  하나
님께로서 나지 않은 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
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차디 찬 지식이 아니다.  하나
님의 영에 의해서 다시 지음을 받기 전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
자는 여기서 믿음보다 중생을 더 앞에 놓음으로 앞뒤를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중생은
믿음의 결과이며 믿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순서
가 완전히 일치된다고 대답한다.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썩지 않는 생명의 씨앗을 잉태
하게 되며, 새롭고 거룩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며 또한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의미에서,  믿
음은 우리의 중생(거듭남)의 일부분이며, 믿음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 하나님의 자녀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깨우침
을 받는 것은 우리의 갱생(更生)의 삶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원천이
되는 중생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성령에  의
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양자의지위를
획득하는 시작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는 이보다 더 분명하고 직선적인 구분을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 넣으실 때 그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
런 방법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일단 믿음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양자
됨의 은혜는 물론, 새 생명과 성령의 다른 은사를 생생하게 인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믿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믿음은 우
리를 인도하여 그의 모든 축복을 소유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태도에  관한  한,
우리는 믿은 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생의 기업은  양자됨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로  돌
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사람이 아무리 면밀히 자기 자신을 살핀다 할지라도,  우
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서는, 하나님의  자녀
될 가치가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나는 이말이 유대인들의주제넘은 생각을  간접적으로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동감한다. 그들의 혈통의 가치는 항상 그들의 입술에  오
르내렸다. 그들은 거룩한 조상에게서 났기 때문에 나면서 부터 거룩한 것처럼  행세했
다. 그들은 참된 자손으로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육신적으로 난 것은 조금도  자랑스럽
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모든 부정하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
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머니 배안에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다시 창조함을 받
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혈통은 긴 족보의 서열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말과 같다. 유대인들의 자랑거리 중 일부는 그들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까지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따져 올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한은 이제 자기가 말해 온 그리스도께서 오신 성격에  대
해서, 즉 우리의 육신으로 옷입으시고 공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복음서 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이 설명할 수 없는 신
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이 간명함이 또한 놀라운 것이다. 어떤 머리가 돈
사람들이 여기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을 가지고 우리를 우롱하고 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하나의 정신적인 개념으로서 세상에 보
내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말씀이 무슨 미지수의 사상(思想)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순수한  인성의  실체
(hypostasis)를 표현하고 있음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육신이란 이 낱말은 요한이 말
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있게 그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높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얼마나  낮
고 비천한 상태에까지 내려왔는가를 보여주시기를 원했다. 성경이 인간을  경멸적으로
언급할 때, 그를 육신(Flesh)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영광과  썩는
냄세가 나는 우리의 육신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와 같이 사악한 죄악에 물들어 있는 육신을 스스로 입는 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
다고 이곳에서 말하는 '육신'은-바울이 말한-썩은 성품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가리켜 한 말이다. 육신은 그의 연약하고 일시적인 성품을  경멸
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사40:6)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낮은  부
분이 전체 인간을 포용한다는 수사적인 대유법임을 유의해야겠다. 그러므로  아폴리나
리스(Apollinaris)가 그리스도는 영혼이 없이 인간의 몸으로 옷입으셨다고 상상한  것
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수많은 귀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육신(몸)
뿐 아니라, 영혼을 부여받으셨음을 쉽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람을 육신이라고 부를 때, 영혼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뜻하는 평범한 의미는 만세 전에 하나님께로 난 말씀, 즉 아버지와 항상 거
하셨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믿음의 요소가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두 성품이 한 인격 안에 융화되어 한분 그리스도께서 참  하
나님과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의 인격의 통일성이 그의 성품을 유지해
줌으로, 신성(神性)은 신성대로, 그리고 인성(人性)은 인간성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단들을 통하여 갖가지 미친소리로 건전한 신학을 뒤엎으려할
때 그는 언제나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을  혼동되
게 전하거나 다음은 육신으로 옷입은 그리스도는 두가지 별개의 인격이었다는 두 가지
오류 중에 하나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각  성품을
분명히 인정했지만 하나님이었던 그리스도와 인간이었던 그리스도를 별도로  상상했던
것이다. 반면 유드고(Eutyches)는 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되
심을 인정하지만, 두가지 다른 성품은 제쳐놓고 두 가지 성품이 섞여 있었다고 상상하
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오늘날 셀베투스(Servetus)와 재세례파(Anabaptists)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인간이었던 것처럼, 이중 성품을 지닌 혼동된 복합체이신 그리스
도를 창안해 니었다. 그들은 분명히 말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그러
나 그들의 건전치 못한 상상을 따른다면, 신성이 잠시 인성으로 변하고  이제  인성이
다시 신성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이 두 가지 모독적인 망언을 논박
하고 있다.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일된  하나
의 인격을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인간이신 분이 항상 하나님이셨던 바로  그
분 이외에 다른 분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되었다고 언급된 분은 바로  하나님이
시기 때문이다. 요한이 인간 그리스도에게 '말씀'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보면  말
씀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그리스도는 그가 전에 가졌던 본체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아
니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본질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짧게 말
해서, 하나니므이 아들은 계속 영원한 말씀이 되시는 방법으로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육신은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가정집과 같았다고 말하는  이
들은 복음서 저자의 생각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거처
를 우리와 같이 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의 손님으로서 잠간 동안 우리 가운데  머무
르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쓰고 있는  *                   (에스케-노-센)라는
낱말은 장막(tabernacles)에서 파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셔서 그의 맡은 바 직분을 다 수행했는 동안 그는 잠시 동안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인간 가운데 거하셨던 것이다. '우리 가운데'라는 글귀가 일반적으로 인간  가
운데 거하셨음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요한 자신과 함께 그가 기록하고 있는  사진
의 목격자된 다른 제자들 사이에 거하셨음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나는 후자의 설명이 옳다고 생각한다. 복음서 저자는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비록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었지만,  그
영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이 가리워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성
령께서 눈을 열어주신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영광을 보았다. 이  귀절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보다 위대하고 숭고한 것을 보여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는 것
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이 육신을 옷입었다고 완전히 말살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은 육신의 비천함 아래 숨겨져 있었지만, 아직도 그 영광을  나타
냈던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외아들이
시기 때문에 그를 독생자라고 부른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인간이나 천사들 보다  우위
(優位)에 두고 다른 피조물에게 속하지 않은 그 분 특유의 위치를 확정하기 원했던 것
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이것은 최후 문장을 확정짓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위엄
은 분명히 다른 면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우리를 추상적인  지식보다
는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으로 단련시키기 위하여 다른것 대신에  이  말씀을
본보기로 택하였다. 이것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맨발로  물
위를 걸으실 때나 귀신을 달아나게 하실때나 기타 다른 기적을 행함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때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복
음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진리의 무진장의 원천이 되신다고 선언함으로써, 믿
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되는 그 증거(은혜)를 중심에 놓고 있다.  스데
반도 "성령(은혜)이 충만했다"(행7:55)고 하나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한 말이다. 왜냐
하면 은혜가 충만한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길어다 먹어야 할 샘물이 되시기  때문이
다. 이에 대해서는 곧 더 상세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 말씀은 환치법(煥置法)에  따
라 '참된 은혜'(true grace)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하나의  설명으로,  "그는
완전한 진리이며 은혜가 충만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곧 이어 같은 형태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두군데  다
의미는 같은 것으로 각주한다. 이 은혜와 진리를 요한은 율법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
래서 나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뜻으로  이
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신령한 나라에 속하는 모든 것으로 충만하셨기 때문
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자신이 구속자가 되시며 메시아가  되심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그분이 다른 모든 양상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
이다.

1:15
  요한이......증거하여 - 그는 이제 요한의 선포로 묘사하고 있다. 현제시제를  씀
으로써 저자는 계속적인 활동을 시사하고 있다. 요한의 음성이 계속 사람들의 귀에 울
려 퍼지듯이 이러한 전도는 계속 흥왕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이유로 사도요한은 세
례요한의 전도가 전혀 모호하거나, 흐릿하거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수근거린 것이 아님
을 보여주기 위해서 '외쳤다'는 말을 쓰고 있다. 요한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큰  음성
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첫째 문장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요한을  말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낮추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이 말씀에서 요한은 애초부터 자기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었
고 이것이 그의 전도 목표였음을 밝히고 있다. 자기의 제자들을 불러 그리스도에게 인
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사신(대사)으로서의 그의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요한이 그리스도보다 몇 달 앞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중 앞에 나타
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은 이미 선지자의 직분을 이행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보다 시간적으로 앞에 놓고 있다. 그러므로 공중 전도에 대하여  말한
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옮긴다면  "그분
은 나보다 앞서 오셨다" "그는 나의 주인(primus meus)이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훨씬 월등하시고  뛰어나셨
기 때문에 요한보다 모름지기 앞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낮추어 순종했으며 격언에 나오는 말처럼 횃불을 그에게 넘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
스도께서 시간적으로 후에 오셨다고 해서, 이것이 주님께서 신분상의 가치로 보아  앞
서 계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요한은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나 기타 영예에 있어서 뛰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아래에서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복음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직분에  대
해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축복이 풍성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구원의 어떠한 부분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과연 하나님 안에는 생명과 의와 능력과 지
혜의 원천이 있다. 그러나 이 샘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샘에  접
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이 모든 축복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축복을 찾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에게  길
만 열어준다면 언제고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 요한은 우리가  그리
스도를 떠나서 어떠한 축복도 구해서는 안된다고 간단히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
장은 몇몇 귀절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모두 영적인 축복을 전혀 가지
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
우시고, 우리의 가난을 채워주시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는 순간, 선(善)을 찾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선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만 거하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에  참예하려  한다
면, 천사와 인간은 앙상할 것이고, 하늘은 텅텅 비고, 지구는 폐허가 되어 만물이  무
가치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셋째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공급을  받
는 한, 어떠한 궁핍에도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면
에 완전 무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서 다함이 없는 생명의 원천을 발견한다. 요
한은 겸손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사람도 이에 대해 예외일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
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취급한다. 요한이 일반적으로 전 인류를 가리켜 말하
는 것인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후에 그의 축복에 더 많이 참예했던 이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율법 아래 살았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똑같은
이 충만함에서 공급함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나, 요한이 곧 시대상으로 구분하는  것을
보면, 나는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나타냈던 풍성한 축복을 특별히  찬양하
고 있다고 생각한다. 율법아래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택을 약간 맛보았을  뿐이지
만,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시된 후에는 우리가 만족할 만큼 축복의 샘이 터져 나왔
다. 이는 우리 가운데 누구도 성령의은사에 대해서 아브라함보다 더 풍성하게  받았다
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그의 은혜를 분정하시는 방법과 양
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해 그들이 결핍을 느끼고 있는 모든 축복의 풍성한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 있
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누가 이 말씀의 뜻을 더 깊이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억지가
아닐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모든 믿음의 조상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드르이
은사를 공급받았다. 비록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으나 그들이 은혜를 받은  것
은 모세를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설명이 어떤 것인지를
이미 보여주었다 - 요한은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월등하게 뛰어남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구약의  조상들과 비교하고 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축복은,
그리고 나아가 영생(永生)은 우리에게 빚진 것을 갚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공로(공적)
에 대한 갚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축복은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상을 주시고  자
기의 선물로 우리에게 관 씌우시는 순수한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상과  같
은 어거스틴의 이 귀절에 대한 풀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신령하고  현
명한 관찰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귀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견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내려주시는 은혜는 어느 것이나 똑같이 이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했다면
의미는 더욱 간단했을 것이다. 이것은 또 최후 목적, 즉 하나님께서 마침내 은혜의 완
성인 구원의 사업을 완수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 위에 쏟아진 은혜로 물을 마시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이
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것을 우리에게  거저주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흘러올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이다. 이
것이 그가 우리를 그와 함께 기름부음에 참예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풍성하게 쏟
아진 기름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그리스도라 불리우고 우
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1:17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이 부언(附言)은 앞에 지나간 말을 아주  적절
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가 모든 축복에  참예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
에, 우리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찾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 교리적인  귀결
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그릇은 우리가 가져와야 함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요한이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때, 육신의 눈으로 외모를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겠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
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
신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제시하신 것을 떠나
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옛날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리스
도를 통해서만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비밀스런 영광 속에 감추어  있
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을 볼 수 있게 제시하셨다는 의미에서 , 우리의 상태가  옛날
조상들의 처지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
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울 때는, 신약의 특별한 축복을 지칭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복음서 저자가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아들이  감추
어 있던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인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지
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찬양한다. 복음에 의해서 우리는 구약시대의 조상들보다 더 월등하게 구분이 되고  있
다. 바울은 이제 율법아래서 같이 없던 휘장이 가리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얼굴  안
에서 하나님을 떳떳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3장
과 4장에서 더 자세히 논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횃불을 넘겨  주었는
데 어떻게 조상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리에게 분정된 것
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완전히 제한되었던 것이 아니라-사람들이 말하는 대로-주(主)와
종(從) 사이에 대조를 보여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의 빛이 오늘
날 우리에게 환히 비치는 데 비해, 그들에게는 이 생명의 빛의 섬광이 약간 비쳤을 뿐
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그때에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나는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모호하게 멀리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좀더 선명하게 나타남을 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를 두고 말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겹겹이
쌓여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뿐이다. 모세가 산 위에서 보았던(출33:23) 이상은  특별한
것이었고 다른 모든 환상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직선적으로 선언하셨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하나
님께서는 완전하고 분명한 계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는 또한 조상들까지도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 언제나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돌렸
던 것을 유의해야겠다. 그들이 영원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리스도의 약속된 출현을 향해 한결같이 마음을 다해 손을 뻗쳤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
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다. 계승은 모순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에 인간이 볼 수 없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 속에'있었다고 말할 때, 요한은 인간적인 은유를  쓰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대상으로 품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가슴은
의논의 장소다. 그래서 요한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셨다고  가르치
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품이 활짝 열려 공개가 된 것이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이 부언(附言)은 앞에 지나간 말을 아주  적절
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가 모든 축복에  참예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
에, 우리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찾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 교리적인  귀결
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그릇은 우리가 가져와야 함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요한이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때, 육신의 눈으로 외모를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겠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
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
신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제시하신 것을 떠나
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옛날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리스
도를 통해서만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비밀스런 영광 속에 감추어  있
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을 볼 수 있게 제시하셨다는 의미에서 , 우리의 상태가  옛날
조상들의 처지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
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울 때는, 신약의 특별한 축복을 지칭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복음서 저자가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아들이  감추
어 있던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인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지
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찬양한다. 복음에 의해서 우리는 구약시대의 조상들보다 더 월등하게 구분이 되고  있
다. 바울은 이제 율법아래서 같이 없던 휘장이 가리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얼굴  안
에서 하나님을 떳떳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3장
과 4장에서 더 자세히 논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횃불을 넘겨  주었는
데 어떻게 조상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리에게 분정된 것
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완전히 제한되었던 것이 아니라-사람들이 말하는 대로-주(主)와
종(從) 사이에 대조를 보여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의 빛이 오늘
날 우리에게 환히 비치는 데 비해, 그들에게는 이 생명의 빛의 섬광이 약간 비쳤을 뿐
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그때에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나는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모호하게 멀리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좀더 선명하게 나타남을 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를 두고 말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겹겹이
쌓여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뿐이다. 모세가 산 위에서 보았던(출33:23) 이상은  특별한
것이었고 다른 모든 환상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직선적으로 선언하셨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하나
님께서는 완전하고 분명한 계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는 또한 조상들까지도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 언제나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돌렸
던 것을 유의해야겠다. 그들이 영원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리스도의 약속된 출현을 향해 한결같이 마음을 다해 손을 뻗쳤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
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다. 계승은 모순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에 인간이 볼 수 없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 속에'있었다고 말할 때, 요한은 인간적인 은유를  쓰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대상으로 품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가슴은
의논의 장소다. 그래서 요한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셨다고  가르치
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품이 활짝 열려 공개가 된 것이다.

 

1:19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 지금까지는 복음서 저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일상적인 전도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전도 가운데  좀
더 두드러진 예를 들고 있다. 이 증거는 제사장들의 사신들이 듣고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한이 하나님께 그를 보내신 이유를 공적으로 고
백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제사장들이 왜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심문(尋問)하
는지 그 이유를 묻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추리는 제사장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한
나머지 요한에게 거짓된 영예를 부여했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때까지 그들
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제사장의 반렬에서 나왔기 때문에  제사장
들이 그를 더 좋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
스도에게서 모든 형통을 바라던 그들이 스스로 거짓 그리스도를 만들어 낼 이유가  없
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다른 이유로 마음이 움직인 것 같다.  오랫동안
이들은 선지자가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요한이 갑자기 예기치 않게 나타났다. 사람들
의 마음은 흥분되고 기대에 차 있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모두 메시아의 임재가 가까
이 왔다고 믿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하거나 가장함으로써 제사장
의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제사장들은 요한에게 그의 신분을  물었
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처음에는 제사장들이 악의에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을 갈망하는 마음에서, 그들은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의 일반적인 질서를 변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장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그들에게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리스도의 영예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준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교회
정치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을 경솔하게 내세우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새
로운 종파의 창시자가 일어나지 않나 살피고 백성 중에 믿음의 통일이 무너지지  않도
록 유의하고, 아무도 새로운 이방 예식을 도입하지 못하도록 돌볼 책임이 있었다.  그
러므로 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모든 이의 마음을 흥분케 했다. 그
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명령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증거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다시 말해서, 요한은 숨기거나 피하거
나 외식하는 기색이 없이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먼저  '드러내어  말하고'(confess)는 일반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는 뜻이다. 두번째 '드러내어 하는 말'은  그의 고백의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되풀이된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힘주어 답변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