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1
무리.- 이것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
고 온 이유는, (1)그들이 그에게 정죄한 것을 국가의 법률로써 확정시키려는 까닭이라
고 한다. (2)그러나 그것은, 요 18:32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 대로 이방인의
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으시려는 까닭이다. 예수님은 만인의 구주시니 그의
죽음심이 어찌 유대의 장벽 그늘 밑에 감추이시랴? 그는 유대인의 사형법 대로 돌에
맞아 죽으시지 않으시고, 이방 로마의 사형법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에 달려 만방에 높이 들리시지 않으시랴?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가 들리실 것은 마땅한 것이었다(요 3:14). 그는 십자가에 들
리어 죽으셔서 만국에 그 죽으심을 전파하시려고 이방 사람 빌라도에게 끌려 오신 것
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요 18:31,32; 마 20:18,19 비교.
눅 23:2,3
고소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메시야를 정죄하기 위하여 고
소하는 사실은 너무도 모순된다. 이것은 자식이 부모를 모르고 고소하는 것보다 더욱
악한 일이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여기 "백성"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에드노스(
* )라고 하는데 이방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말은 라
오스(* )라고 한다. 유대인들이 여기서 저희 민족을 에드노스라고 한 것은 이상하
다. 이 유대인의 두령들이 빌라도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드노스라고 한 것은, 그
들이 너무 타락하여 이스라엘의 거룩한 백성이었던 사실을 잊어버린 태도의 표명이다.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이것은 순전히 거짓된 고소이다.
자칭 와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저희가 빌라도 앞에서는 예수님에게 대하여 고소함
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순전히 예수님께서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하
신다고 고소하지 않고, 왕이라고 하신다고 까지 말하여 빌라도의 정치적 관심을 일으
키려고 한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과 같이 이 세상의 정권으로 되는 왕은 아니다. 그
러나 그는 이스라엘이 오랫 동안 바라보며 기다리던 그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
답변에 있어서 그가 왕이신 사실을 긍정하신 것이다(3절). 이 긍정이 있기 전에 그는
자기의 왕권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사실을 증거하신 것이다. 이 증거 내용은,
요 18:33-3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요한 복음의 말씀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눅 23:4,5
히브리인의 종교를 전연 모르는 빌라도라도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다. 예수
님의 무죄를 아는 그가, 그 아는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결국은 그 무리들과 타협하였으
니 그도 의를 위하여 서지 못한 점에 있어서는 무리와 마찬가지였다.
눅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 "헤롯"은 대헤롯의 아들 헤롯 안디바이다.
그가 이 때에 갈릴리 도의 분봉왕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때에 예루살렘에 와서 있는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려는 까닭인 듯하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그는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였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
고 제가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았는가 하고 두려움을 가졌으며(막 6:14-29), 한번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다(눅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보고자 한 이유는, 요행히 예
수는 전에 제가 죽였던 세례 요한이 아닌 사실을 발견하므로 저의 평소의 공포심을 청
산하려는 까닭이었겠다(Greijdanus). 그런데 이제 헤롯이 보니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아닐 뿐 아니라, 할 수 없는 죄수처럼 결박되어 있으므로 그는 안심하게 되었고 심히
기뻐하게 된 것이다. 헤롯의 이 행동도 그의 여우 같이 교활한 성질을 드러낸다. 그
는, 예수님을 다시 산 세례 요한인가 하여 남몰래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가 이제 그가
세례 요한이 아닌 사실을 보고서 기뻐한다. 그러나 그의 공포나 그의 희열은 모두 스
스로 속은 행동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다시 산 세례 요한인가 하여 두려
워하였다면 그것도 스스로 속은 행동이고, 그가 이제 자기의 눈 앞에 죄수 모양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 아닌 사실을 발견한 후 안심하고 심히 기뻐한 것
도 스스로 속은 것이다. 어찌하여 그는 기뻐하는고? 예수님은 할 수 없는 죄수처럼
보이나 세례 요한보다 더 큰 분이시다. 세례 요한보다 예수님은 더욱 두려우신 분이
시다.
(2)그가 심히 기뻐한 둘째 이유는, 우리 본문이 말한 바와 같이 "무엇이나 이적 행
하심을 볼까 바랐던" 까닭이다. 그는 에서의 자손이었다. 그는 에서처럼 망령된 자
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과 이적을 구경 거리로 여겼다. 그는 거룩한 것을 육체적
인 호기심의 만족 거리로 여겼으니 그것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에
서의 행동과 같다.
눅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예수님은 여기서도 그의 침묵
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신다. 망령된 자의 청구는 들어 주시지 않음이 하나님의
뜻이다. 헤롯이 이적을 보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요구한 바 있었으나 예수님은 응하시
지 않았다. 그 이유는, (1)이적은 하나님의 성역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한 개인의
사욕을 채워 주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예수님은 이 때에 이적을
행하시어 자신이 당하시는 고난을 면하심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권능을 행하므로 최후 승리를 가져오실바 아니고, 오직 죄인처럼 고난을 받
으시사 천지의 권세를 얻으신 것이다(마 28:18).
천국의 비밀이 헤롯과 같은 망령된 자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으니 만큼(마 13:11)
, 예수님은 전에도 그에게(헤롯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난해의 예언으로 말씀하시기를,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
라"(눅 13:32)고 하셨다. 이것은 주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가리키시는 알
기 어려운 예언이었다. 예수님은 성물을 개에게 던지지 않으시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
지지 않으신다(마 7:6).
눅 23: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여기 "대제사장들"이란 말과 "
서기관들"이란 말은, 헬라 원어에는 각각 "그"라고 번역할 수 있는 관사를 가지고 있
으니 이것은, 그들이 개인들이 아니고 산헤드린 공의회 단체임을 가리킨다. "서서"란
말은, "서서 있었다가"라고 번역해야 될 말이다. 헤롯이 에수님께 질문하는 동안은
그들이 가만히 서서 있다가 그의 질문이 끝나자 즉시 힘써 고소하였다. 이렇게 그들
이 힘써 고소하였으나 헤롯이 예수님에게 대하여 아무런 정죄도 하지 못하였다. 이것
도 역시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죄 없으신 증거이다. 그의 원수들도 그의 허물을 못찾
았으니 이는 그에게는 의만 있고 죄는 없으신 까닭이다.
눅 23:11
헤롯이.....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여기 "업신여기며"란 말이, 헬라 원어에
는 이 귀절의 맨 처음에 놓여서 힘있게 표시되었다. 이것을 보면, 헤롯이 예수님을
"업신여긴" 행동은 현저하였다. 헤롯은, 망령된 자니 거룩한 것을 알아 보지도 못하
고 귀히 여길 줄도 몰랐으므로 그저 업신여긴 것이다. 그는 에서의 성격을 그대로 나
타낸 것이다.
빛난 옷을 입혀.- 이것은 헤롯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조로애는 의미에서 가장 왕복을
입힌 것이었다. 이것은, 참되신 만왕의 왕을 모르고 도리어 조롱하면서 왕이라고 가
칭함이니 주님의 왕격을 믿지 않음의 극단이다.
눅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그들이 원수되었던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그들이 이렇게 화목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로
추측된다.
(1)헤롯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었는데 그의 생각에는 빌라도도 역시 예수님을 미
워하는 줄 알았다. 헤롯이 예수님을 미워하는데 있어서 이렇게 자기와 빌라도 사이에
동감이 있는 줄 알고 빌라도에 대하여 본래 품었던 원망을 풀어 버렸다.
(2)빌라도가 헤롯의 권리를 존중히 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그에게 넘겨 주었으므로
헤롯이 본래 가졌던 원한이 풀어졌고, 헤롯이 이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으
므로 빌라도는 헤롯의 태도가 자기의 직권을 존중히 하는 줄 알아서 그도 원한을 풀었
다.
(3)빌라도는, 헤롯이 예수님을 정죄하지 못한 점에서 자기와 일치한 것을 생각하여
헤롯에게 호의를 품은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서로 원수되었던 자들끼리도 복음을
핍박하는 일에는 일치하며 화합한다. 이 세상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복음을 가지고 찾아 오신 것이다(요 3:
16).
눅 23: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것은 빌라도가 온 공의회
와 및 백성을 모은 사실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빌라도가 백성까지 모은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무죄하신 사실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백성의 동감을 얻고자 한
까닭이다. 그는 추측하기를, 백성은 예수님에게 대하여 아무런 시기하는 마음이 없을
터이니만큼 예수님을 동정할 줄로 알았다. 그는 그 때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잡아 온 줄을 잘 알고 있었다(마 27:18).
눅 23:14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여기 "내가"란 말이 헬라 원어에서는 힘있게 나
온다. 그가 이렇게 자기를 힘있게 표시하는 이유는, 자기가 친히 예수님에게 대하여
조사해 보았다는 것을 힘있게 증거하려는 까닭이다. 그리고 "너희 앞에"란 말이 여기
사용된 이유는, 그의 조사와 심문이 사사로이 된 것이 아니고 공법적으로 그들의 입회
하에서 되어진 것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다.
눅 23: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이것은 빌라도가 법관으로서 약점을 보인 것이다. 곧,
그것은, 그가 공의 대로 스스로 결단하여 판단을 내리지 않고 헤롯의 이름을 이용하여
서까지 자기 처지를 세워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눅 23:16
때려서 놓겠노라.- 이것은 빌라도의 약점에서 나온 말이다. 무죄하신 예수님을 때
릴 까닭은 무엇인고? 그것은그가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간
교한 정책이었다. 예수님을 때리면 그를 잡아 왔던 자들의 울분한 마음이 유쾌하여져
서 그가 예수님을 놓아도 그들의 마음은 잃지 않게 될 줄로 알았다. 인심을 얻으려고
무죄한 예수님을 때리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럽고도 잔인한 것이다. "놓겠노라"는 헬
라 원어는, 아폴뤼소-(* )라고 하는데 빌라도가 스스로 결정하고 단행할 것을
가리키지 않고 무리의 의향을 물어보는 뜻을 포함한다(Greijdanus, want Pilatus zegt
feitelijk niet wat hij doen zal, maar komt eigenlijk met eenvoorstel of vraag.-
Lucas II. p. 1125). 채찍으로 때리는 것은, 로마의 형법이니 죄수를 기둥에 매어 놓
고 채찍(끝에 뼈를 박은 채찍)으로 치는 것이다. 이 매를 맞다가 죽은 자들도 있었다
고 한다.
눅 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여기 "무리가 일제히"란 말은, 헬라 원어로 팜플
레다이(* )라고 하는데 "군중이 전체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는 백
성들까지 포함되어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대제
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들을 충동하였기 때문이다(마 27:20). 백성이란 것은 이렇게 맹
목적으로 동하기 쉬운 것이다.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을 생각이 있어서 물어보는 때에 대답한 군중의 소리이다(마 27:15-23; 요
18:39,40; 막 15:6-14). 빌라도는 여기서도 약점을 보인 것이다. 무죄하신 예수님을
그의 무죄하신 조건으로 놓을 일이지 무엇 때문에 그를 죄수취급 하는가? 왜 그를 유
죄한 사람 놓는 규례 대로 취급하였던가? 이것은, 그가 예수님보다 군중을 무서워하
는 동기에서 생각한 안건이었다.
눅 23: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마 27:16-19을 보면, 빌라도가 이 명절 때의 은사
를 위하여 재판석에 나아갔다고 한다.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님에게 대한 꿈을 꾸어서
그 남편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소서"(마 27:
19)라고 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결국 무리가 두려워서 바라바
는 놓아 주고 예수님은 죽이라고 무리에게 내어주고야 말았다. 그는 예수님을 놓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놓고도 결국은 무리들의 하자 하는 대로 꿀리고 말았다. 그는
, 자기 아내의 뜻 있는 꿈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기회를 영원히 놓치
고 말았다.
눅 23:21-23
빌라도가 첫번 예수님을 놓으려고 한 것은, 위에 기록된 것과 같이 명절의 은사를
기회로 한 것이었다. 이 귀절들은 빌라도가 두번째 예수님을 놓고자 한 것과(20,21)
및 세번째 그리한 사실(22,23)에 대한 기록이다. 이렇게 다시 두번 빌라도가 예수님
을 놓고자 한 일에 대하여는 요한 복음의 기록이 더욱 자세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
19:1-14을 해석함이 필요하다.
눅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이것은 예수님이 매맞으시고 여러 가지로 해를 받으사 벌써
신체에 힘이 없어진 사실을 표시한다.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구레네"는 현재의 트리폴리(Tripoli)지방이다.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로마의 형법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가
그 형장에까지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법이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다(요 19:17).
그러나 예수님의 기력은 극히 쇠약해지셨으므로 그의 십자가를 운반하실 수 없게 되셨
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몬을 억지로 잡아 쓴 것이었다.
눅 23:27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 "여자의 큰 무리"
는 예수님을 동정하여 운 것이다. 성경에 여자로서 예수님을 대적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눅 23:28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것은 에수님께서 그들
의 동정하는 울음을 책망하심이 아니고, 다만 그들 자신과 및 그들의 자손따르의 비참
한 장래를 생각하사 탄식하시는 말씀이다. 그 탄식의 이유는,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
은 멀지 않은 장래에 큰 환난을 당하겠기 때문이다. 이 큰 환난은 유대인들이 많이
학살당할 일을 말함이다. 그것은 주후 70년에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
가에 못박히시려 나아가시는 길 가운데서도 자기를 스스로 동정하지 않으시고 남들이
받을 환난을 근심해 주신 것이다.
눅 23:29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전쟁이 일어
나 기근이 심한 때에는 가족이 많은 자가 더욱 곤란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환난의 때에는 자식을 생산하지 않은 자들이 오히려 복이 있다.
눅 23: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이것은 시적 표현이며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환난 중에 있어서 고통을 받는 자들은 차라리 속히 죽기를 원
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곧, 산들이 무너져서 그들이 속히 죽는 것을 원한다.
눅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이 말씀에 대하여 해
석이 대략 두 가지가 있다.
(1)"푸른 나무"는 의로우신 구주님(메시야)을 가리키고, "마른 나무"는 악한 유대인
들을 가리킨다. 의로우신 메시야께서 이렇게 환난을 받아 십자가를 지시거든 하물며
악인들은 장차 얼마나 무서운 환난을 받을 것인가?
(2)여기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의 대조는, 열매가 있고 없는 분변을 뜻함이 아니고
불이 붙기 어렵고 쉬운 그것의 분변을 뜻함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시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반역한 유대인들은
물론 망하리라는 의미이다(Schlatter).
눅 23:32
다른 두 행악자.- 이들은 강도들이다(마 27:38, 44; 막 15:27).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 여기 "해골"이란 말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니, 두골을 의미한
다. 데오도레 즈안(theodore Zahn)은 말하되, "이것은 두골모양으로 생긴 언덕의 이
름이고, 두골이 있는 곳을 가리킴이 아니다"(Hire name eine schadelformigen Hugels
nicht ein platz wo schadel Iiegen.)라고 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때에 로마
풍속대로 십자가에 못 박는 방식이 이러하였다고 한다. 곧, 못 박힐 자의 등을 십자
가의 나무에 가져다 대고, 그의 두 손을 나무의 좌우편 끝에 가져다가 못 박고, 두 발
은 나무에 결박하든지 혹은 함께 합하여 못 박든지 한 것이다(Hastings Dic. of the B
-ible). 요 20:20, 25, 27에 예수님의 발에 대한 말은 없으므로 어떤 해석가들은 말
하기를, 예수님은 그의 손에만 못 박히셨다고 한다. 그러나 눅 24:39에는 그의 발에
대한 말씀도 있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예수님의 손만 못 박히셨다는 그릇된
학설을 반대하였다.
눅 23:34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 이 귀절이 어떤 중요한 사본들(X,A,C,L)에는 없다. 그러나 크레다너스는
이 귀절이 있는 사본이 옳다고 본 것이다(Maar het zal beter aijn daar bij uittespr
-eken, latere invoeging zich moeilijker, latere weglating echter gemakkelijker,
verklaren laat en dit versdeel als oorspronkelijk door Lucas in zijn evangelieve
-rhaal geschreven te erkennen). 웨스트캐(Westcott)과 홀트(Hoord) 두 사람도 이
귀절이 여기 있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무엇보다 먼저 그의 원
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그의 원수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반대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하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
리를 알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의미에서 기다려 달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그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고로 용서하여 달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무식을 사죄의 이유로 삼
은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원칙상으로 무식을 사죄의 이유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
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좀더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이르기까지 그의 진노를 참아
달라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도록 좀더 기다려 달라는 말씀
이다.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요 19:23,24 참조.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용
신할 데 없이 된 극단의 고통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빼앗기신다. 그는 땅
위에도 살 자리가 없고, 하늘도 그 때엔 그를 영접하지 않는다. 그는 벌거벗기우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어지신 것이다.
눅 23:35,36
이 귀절들은 예수님이 받으신 무서운 조롱에 대하여 기록한다. 누가의 기록은 비
교적으로 간단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 복음과 종합하여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1)지나가는 사람들도 조롱하였고(마 27:39), (2)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조롱하였고(마 27:41), (3)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조롱하였고(마 27:44), (4)군병
들도 조롱하였다(눅 23:36).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이 모욕을 가리켜 지옥의 고통이라고 할만하다. 그리스도께서
는 거룩하신 분으로서 그런 모욕을 당하셧으니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랴? 죄인이 죄
인들 중에 있음과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도 괴로울 것인데, 거룩하
신 분이 죄인들 중에 있어서 죄인 대우를 받고 있음은 얼마나 큰 고통이랴?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이것은, 그들이 의리에 대하여 무지하고 냉정하고 무관심한
그릇된 태도를 가리킨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
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이 말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무식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에 대하여 진리와 정 반대되는 의견을 가졌다. 진리는 그리스도
께서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는 고난을 받고 죽으신다고 하였다(사 53:1-12). 그
러나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니만큼, 자기 몸의 보호를 위하는 권능
과 이적을 더욱 크게 나타낼 줄 안 것이다. 이런 사상으로는 언제나 진정한 그리스도
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한 사람만 아니라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욕하였다고 한다(마 27:44; 막 15:32). 이 두 가지 기록의 조
화는 다음과 같다. 회개한 강도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욕하였으나 후에 회개한 듯하다
. 그렇다면 마태 마가의 기록에 "강도들"이란 복수 명사가 문제될 것 없다. 마태 마
가의 기록에 "욕하더라"- 고 하고, 누가의 기록에는 "비방하여"- 라고 하였으니 그 두
가지 말은 서로 다르다. "욕함"은 "비방함"보다 경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회개한
강도도 처음에는 예수님께 대하여 욕은 하였을 듯하다.
눅 23:40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이 말은, 그 때에 그
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체험을 증거하여 나타낸다. "동일한 정죄"는, 예수님
이 받으신 정죄와 동일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
니하느냐"란 말은, 헬라 원어로 우데포베 쉬 톤 데온(* )이니 "
너도 친히 네 자신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곧, "이
세상을 떠나는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우니 너는 남을 비방하므로 죄만 더 범하지
말고 네 자신도 친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말이다. 이 말은 회개
의 이치 또 한 가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회개자는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고 자기 자
신의 죄과를 근심한다는 것이다.
눅 23: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이것은 정오쯤 된 시간을 가리킨다. 이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었는데 여기서 누가는, 그것을 잡아 당겨 말한다. 해가 빛
을 잃고.- 이 말씀은 사본상 서로 다르다. 우리 한역은 시내산 사본을 따라 한 것인
데 글자대로의 번역은, "일식이 되어"(* )라고 할 것이다. 그러
나 다른 사본들(A. D. Q)은 "해가 어두워져서"라고 한다. 즈안(Zahn)은 이 둘째 사본
이 원본에 합한다고 본다. 크레다너스는 말하되, "그 때는, 유월절이었으니 망월이므
로 자연 법칙으로 되는 일식은 있을 수 없었겟다"고 한다(Daar hat nu paschen was, d
-us volle maan, kan hier geene sproke zijn geweest van eene gewone zonsverduiste
-ring.- Lucas II. p. 1150).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제 구시"는 오후 3시쯤을 이름이
다. 이 3, 4 시간의 어두운 시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계시던 동안
이었다. 이 어두움은, 우리의 죄 값으로 대신 십자가 위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시는
예수님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의로운
사람이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신 일이 있었다. 초대의 기
독교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이 때에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이오니시우스(Dionysi
-us)라는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이렇게 해가 어두워진 광경을 당하여 말하기를
, "이것은 신이 죽든지 혹은 우주가 무너지면서 되는 현상이겠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전설을 성경 말씀처럼 믿을만하다고 할 필요는 없다. 이 캄캄한
어두움이 그리스도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광명의 영생 세계가 오게
되었다.
눅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마 27:51에는,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쩨어져 둘이 되고"라고 하였다. 이렇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몇 가
지 중요한 뜻을 가진다.
(1)그것이 위로부터 찢어졌으니 하나님께서 그 휘장을 찢으셨다는 뜻이다. 사람이
휘장을 찢는 경우에는 손 가까이 아래서부터 찢을 것이다.
(2)이 휘장이,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들어가는 지성소 휘장인지, 백성은 들어갈
수 없고 제사장들만이 들어가는 성소의 휘장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성전의
문호를 무차별적으로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찢긴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다는 뜻이며(히 4:16),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이제부터 온 세상에 어디든지 그의 백성을 찾으시며 경배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유대
인의 성전은 열렸다. 비유컨대 백성이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은 어디든지
나가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로 인하여 이루신 것
이다.
(3)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죽으심을 인하여 이루어진 계시를 가
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을 계시하시나 역시 아직 하나님을 가리운 것이다(
히 10:20). 그가 육신으로 계신 동안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지 못
하였으므로 아직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으신 후에야 보혜
사께서 오시어 온 천하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만케 하신 것이다(히 10:20).
(4)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실은, 옛 성전은 폐지되고 의문도 폐지되며 레위 자손의
제사직도 폐지됨을 의미하는 동시에,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이제부터 영
원히 대제사장이 되심을 표시한다. 레위 자손의 제사직을 폐할 수 있는 권은, 레위 자
손의 제사직 위에 있는 높은 제사장에게만 있다. 레위 자손의 위에 있는 높은 제사장
은 오직 멜기세덱이다(창 14장). 그 이유는, 레위 자손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또 그에게 11조를 바쳤기 때문이다(히 7:1-10).
예수님은 레위의 계통으로 대제사장 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세계적인 멜게세덱의 반
차 대로 대제사장이시다. 레위적 제사직을 초월하시는 멜기세덱의 반차 대로의 대제
사장 예수님은, 레위식 성전 휘장을 찢으실 권이 있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일이
있는 동시에 또 다른 이적도 이때에 있었으니 그것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난 일이다.
그것은 마태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마 27:51-53에 말하기를, "땅이 진동하며 바위
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말한
대로 지진이 일어난 것과 성도들이 부활한 것은, 장차 임할 대심판에 대한 예고이다.
지진은 세상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때 성도들의 부활은, 장차 대심판 때에 있
을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부활을 예고하는 사건이다.
첫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으신 때에 성도들이 다시 살아 일어난 사건
은, 확실히 이 세상 끝에 있을 많은 성도들의 부활을 예언한다. 예수님의 고난 당하
시는 일에 있어서 천사들의 수종드는 일도 없었고 사역도 별로이 없었다. 다만 겟세
마네 동산에서 한 천사가 나타났던 일 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위한 사
의 방법은 점점 유력해진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증거함이었다. 이
것은 천사들의 증거보다 유력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전에는 천사들이 증거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친히 증거한다. 구원은 천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하여 천사가 증거하는 것보다 사람이 친히
증거하는 것은 더욱 유력하다. 외국 선교사가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
거함보다 그 나라 사람들이 자립하여 복음을 친히 증거하며 믿으면, 더욱 그 나라의
복음 증거는 유력해진다. 이렇게 복음 운동의 새벽이 아직 이르기 전에는 무덤에서
나온 기이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증거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
신 후에는 질그릇과 같은 인간들이(아직 몸으로 부활하지는 못한 신자들) 복음을 증
거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온 성도들의 증거보다 유력한 것이
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이 자력적으로 친히 초자연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며,
기이한 것으로 무장하고 나오는 것보다 진실한 것으로 띠를 띠고 나온 자연스러운 사
람으로서, 친화력있게 자기와 성정이 같은 인간들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유력한 증거의 방법이다.
둘째, 그 때에 성도들의 몸은 무덤들이 열림에 따라서 동하였으나 완전히 다시 살기
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되었다. 그것은 마 27:53이 가르친다. 이 부활의 순서는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계 1:5)이신 사실과 합한다.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큰 소리"는 근심과 걱정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폭발도 아니
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정신이 분명하신 가운데서 필요 있게 소리를 높여신 것이다.
이 "큰 소리"는 두 가지 뜻을 가진다. 곧, (1)그는 영혼의 무한하신 고통을 큰 소리
로 발표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라 하신 것처럼 이제 몸과 영혼의
분리 곧, 몸의 사망에 대하여서도 큰 소리로 선포하신다. 그 이유는, 이 일들은 그의
고난의 절정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2)이 큰 소리는 그 영혼이 떠남을 원치 않는
마음으로 내신 것이 아니고, 그의 원하시는 순종으로 그렇게 하심이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이 귀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에게 대한 예수님의 순종의 태도를 발견하였
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큰 소리가 근심으로 난 것이 아닌 사실은 이
귀절에 있는 대로 그가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시는 쾌한 태도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는 이 큰 소리로써 땅과 지옥과 하늘과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선포하신 것이다. 곧, 그가 그의 분명한 정신과 감심으로 그의 목숨을 사망에
내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귀절이 말한 그의 행동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그의 순종
의 태도를 보인다"(.....Maar het was de betooning voor aarde, hel, en hemel, mens
-chen, duivelen, en engelen, dat Hij met volle bewustheid Zich overgaf in den do
-od zijn leven aflegde vrijwillig niet onteweder standelijk genoodzaakt, Joh. 10
:18, alsdaad van gehoorzaamheid.....Lucas II. p. 1151)라고 하셨다.
"아버지여"란 말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의 부자 관계의 느낌이 여기서부터 다시 회복된 것을 표시한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버림 당하신 그 무서운 지옥 같은 고통 자리에서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하실 뿐이었다.
눅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
도다 하고.-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여기 이방인 한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신 광경을 보고서 예수님을 깊이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막에서 진주를 줍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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