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2:1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이 때에 무리 수 만명이 모여있은 것만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주의를 시키신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보다 대중앞에서
의식죄의 시험은 받는다.
눅 12:2,3
이 귀절들은 외식하는 행동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외식자는 남들이 그의
내막을 모르는 줄 알고 외식한다. 그러나 실상은 이 세상에서도 모든 것이 다 드러나
고야 만다. 그것은 다만 시간 문제이다.
눅 12:4
내 친구.- 예수님의 친구된 우리는 죽음도 두려울 것 없다. 여기 '친구'라는 말
은, 헬라 월어로 피로이스(* )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
사랑은 특히 우애를 의미하는바, 동고동락 할 수 있는, 인력이 뜨거운 관계의 사랑을
의미한다. 사람은 친구에게 배경하여 안심하는 일이 많다. 유력한 사람들 중에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은 난제를 해결하기 쉽다. 따라서 그 사람은 난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다. 그 이유는 거기서 그의 친구가 그 난제를 자기의 일과 같이 알고 해결해 주기 때
문이다. 당 나라 사람 오 보안, 곽중상은 서로 친구였다. 곽 중상이 야만족에게 사로
잡혔을 때에 저희가 비단 천필을 가져다 주면 놓아주겠다고 하므로 오보안은 그 일을
위하여 10년 동안 장사하여 비단을 예비해 가지고 야만족에게 주고 그 친구를 구하였
다.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속하여 주셨으니, 우리는 죽
음도 두렵지 않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를 죽이는 자
(인간)은 몸만 죽이고 영혼은 못 죽인다.. 인간의 몸은 죽을 만한 이유가 이다.
(1)그것이 죽는 것은 자연스럽다. 낮이 있은 뒤에는 밤이 오는 것처럼 육신의 삶이 있
은 뒤에는 죽는 때가 온다.
(2) 육신의 괴로운 생을 한번 체험해 보았으니 죽음도 한번 체험해 볼 만도 하다. 부
라우닝은 말하기를 '당신은 죽기 전에는 생의 뜻을 모른다'라고 하였다.
(3) 그 뿐 아니라 우리의 몸이 죽게 되는 때에 그것을 감당 할 만한 은혜가 주님으로
부터 우리에게 온다. 이 은혜는 죽음을 당하는 시간에 오는 것이니, 그 시간이 오기
전부터 죽음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 은혜가 오기 전에 죽음에 대하여 근심하면 염
려가 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 은혜받을 시간이 아직은 오지 않았으므로 그 은혜를 받
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스펄죤(Spurgeon)목사의 부친께서 한번은 설교할 때에 여러가
지 은혜를 들어 말하면서 끝에 말하기를 '당신들에게 지금 이 시간에는 요구 되지 않
은 은혜가 있다. 그것은 죽음의 은혜라'고 하였다. 죽음의 은혜는 제 시간에야 온다.
윌리암(William Hunter)은 죽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글을 쓸 힘만 있다면 죽는 것이
얼마나 쉽고 기쁜지 적어보고 싶다"라고 하였다.
눅 12:5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를 두려워 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는 이 말씀에
있어서 명령으로 된 어체에 주의해야 된다. 명령하신 분은 누구신가? 그는 이 세상에서 두려워
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분이시다. 그는 울기도 하셨고 목마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두려
워 하신 적은 전연 없으셨다. 그 이유는, 내세 본위로 인생을 보셨고 내세를 환하게
내어다 보시고 어두움이 전연 없으셨기 때문이다. 공포심은 무식에서 오는 법이다.
예수님은 영계를 창조하셨고 모둔 교훈을 주신 것이다. 그는, 물질에만 가치를 주고
온갖 세상체계를 전개시킨 칼 맑스와는 정 반대이다. 물질만 시존으로 알고 덕과 같은
것을 인간에게서 없애 버린다. 그것은 인생의 가치를 말살기키려는 악마적인 운동이
다. 누구든지 공산주의 유물주의가 틀린 줄 알진대 예수님의 주장에 가담해야 된다.
그는 물질 본위가 아니고 영혼 본위의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4:4에 말
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고 하셨고, 또 눅12:15에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마6:28-30참조. 그렇다면, 우리가 육신
의 생명을 영혼의 생명에 비하여 초개와 같이 여겨야 한다. 옛날에 장자는 이 세상 생
활을 꿈과 같이보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내가 꿈을 꾸었는데 나비
가 되어서 날아다녔다. 깨어보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우리가
장자의 철학을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이런 비유는 인생이 자기 자신을 꿈
가운데서와 같이잘못 아는 일이 많다는 점을 생각케 하는데 유조한 비유이다.
우리는 영원한 가치있는 영혼(인생)인데 몸둥이나 하나 가진 짐승처럼 낮게 처신하는
일이 많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진리로 믿고 영혼 본위로 처신해야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인데도 불구하고 영혼보다 몸을 중대시 하여 죽이려는 자를 두려
워하는 것은 실상 어리석다. 우리는 마땅히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해야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잠1:7)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 줄 알았던들, 우리는 이 때까지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가장 은밀한 곳에서 그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실상 하나님은 가장 은
밀한 곳을 보신다고 성경은 말한다(마6:4,6:18) 은밀한 곳 중에서 가장 은밀한 곳은
마음이다.
눅 12:6-9
마 10:29-33의 해석 참조
눅 12:10
마12:31,32의 해석 참조
눅 12:11,12
마10:18-20의 해석참조
눅 12:13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이 청원은 형제간에 가신을 나누는
일에 있어서 억울함을 당한 자가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 일에 있어서 형에게
지지 않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그 형에게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은 일종 탐심에
끌린 발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런 병든 심령을 치료하려 하사 그를 꾸지람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셨으니, 곧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
냐'란 말씀이다.
눅 12:15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 인간은 소유가 넉넉하여야
산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알지 않으시고 인간의 삶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신앙이 넉넉한데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21절) 그러면 예수님이 보신 대로 진정한
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생활이다.
눅 12:17-20
이 귀절들은 부자의 미련을 지적하신다.(1) 그 많아진 재산 관리 때문에 공연히
염려와 걱정을 가짐(17-19). (2) 재산만 믿고 안일한 생활의 확실성을 자신하는 망상
(19절) (3) 영혼을 도로 찾으시는 하나님의 집행명령이 잠간 동안에 떨어질 줄을 모른
것(20절) 우리에게 영혼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영혼의 삶은, 소유의 넉넉
한데 걸려 있지 않고 전연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의 뿌리 박을
데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눅 12: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자 -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중 신앙이 넉넉하지 못
한 자를 가리킨다.
눅 12:22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의식에대한 염려는 많은 사람을
멸망케 한다. 그 이유는 많은 사라밍 의식을 얻으려고 일생을 바치는 까닭이다. 그들
은 의식의 종이 되고 말았으므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 신자들
을 먹여 주실 것이므로 신자들을 염려하지 말아야한다. 염려는 언제나 헛된 것이니 해
로운 것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므로 염려한다. 우리는 먼저 이 세상에서 은밀히 움직이
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보아서 맛볼 줄 알아야 한다. 소는 풀 밭에서 무지하게 화
초를 뜯어 먹으면서 달콤한 맛을 보지 못하지만 벌은 꽃송이 속에 기어 들어가서 꿀을
빨아 먹으므로 그 단 맛에 취해 버린다. 그와같이 신자는 소와 말과 같은 무지한 자가
아니고, 만물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연구해서 알고 그 사랑에 취하면 근심스럽
던 가운데서도 염려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다. 사람은 무지한 상태에서 두려움과 염려
를 느낀다. 사람이 밤중 캄캄할 때에는 바삭바삭하는 소리에도 놀라지만 낮에는 그와
같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밤은 어두워서 그 사람이 무엇을 분변하지 못
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만물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깨달으므로 염려를
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의 경중을 바로살피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사랑을 깨
달을 수 있다. 어떤 사리의 경중은 그것의 효용의 성격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가 생
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식 보다 귀중한 선물을 주신 사실이다. 우리는 그
것을 보고, 그가 우리에게 덜 귀한 선물도 주실 줄 안다.
눅 12:23
목숨이 음식보다.....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목숨(영혼)
과 몸의 중요성을 알고 살 때에 하나님께서의식을 주시리라고 믿어진다. 목숨(영혼)과
몸이 중요하다 함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1) 목숨과 몸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의식이 생기도록 하나님께서 좋게 지으셨
으니 중요하다는 뜻이다. (2) 그 뿐 아니라 목숨과 몸은 성령님의 전이니 바로 쓰이면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고로 중요하다는 뜻이다.(고전6:12-20)
목숨은 천하보다 중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일이 있다.(마16;26) 이것은 무슨 목숨
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가? 그것은, 그 윗말이 보여줌과 같이 예수님을 위하여 잃으므
로 찾아지는 생명이다(마16:25) 이것을 보면 진정한 가치있는 생명은 예수님을 위하여
죽어지는 생명이다. 곧 마16:25,26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
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지고 우리의 목숨(영혼 혹은 생명)은 예수님을 위하여 죽고 사는
처지가 되어질 때에는 우리에게 의식이 없을 이유도 없지만 의식 문제 따위는 작은
문제가 되어진다.
고전9:9에 말하기를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다께서 식물을 주실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다(고전
9:10).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몸과 목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의식이 없지 않다. 하나님의 명령
에 순종한 엘리야를 까마귀가 아침 저녁 고기를 물어다가 먹였고(왕상17:1-16) 바알에
게 무릎을 꿇지 않은 100명선지자는 오바댜가 숨겨 두고 먹었다.(왕상18:13) 성경에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10)고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릉마 하는 자가 하나님에게서 먹을 것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의미이다. 하나님은 우
리 인생에게 빚지는 법이 없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든지 그것은 후하게
갚음을 받는다. 매클라렌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 내어던짐이 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사람에게 빚지고 갚지 않으시는 법이 없다'(Nosacrifice for God is ever
thrown away. He remains in no man'sdebt)라고 하였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이 말씀은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셨는데 여기 '생각하
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카타노에사테(* )라고하는데 연구하는
마음으로 생각함을 이름이다. 조류를 연구한 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까마귀는 무엇이
나 먹는 새이다. 까마귀는 꾀가 많아서 무리로 모여서 먹을때에는 가장 경험있는 까마
귀가 보초를 보다가 위험한 일이 있으면 경고한다고 한다. 특별히 까마귀는 농작물에
해로운 곤충들을 잡아 먹기도 하고 또한 그 값으로 농장의 곡식도 먹는다. 까마귀가
먹을 것이 많은 이유는, 그것이 무슨 저축을 가진 까닭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것이 먹을만한 것을 이 세상에 준비하시고 그것을 내신 자녀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명분을 지키는 동안 먹을 것에 대한 것은 근심할 것이 없다.
염려는 우리에게 해독을 가져올 뿐이고 유익은 못가져온다. 로마의 씨자황제는 배타고
가을 건너면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그 뱃사공에게 말하기를 '씨자를 이 배에 태웠으니
걱정 없다'고 하였다. 일개의 황제로서의 자존심에서도 이렇게 태연하게 염려가 없었
거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알아 주시는 그리스도 신자야
얼마나 마음이 든든할까?
눅 12:25,26
마6:27해석 참조.
눅 12: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이것은 특별
히 꽃의 미를 생각하시어 하신 말씀이다. 옷은 사람에게 대하여 두가지 목적을 가진
다. 그 첫째는 몸의 온도를 조절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몸의 외관적 미를 나타내려는
것이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외관적 미를 생각하시어 말씀하신다. 그는 솔로몬의 지극
한 영광(외관적미)으로도 입은 것이 백합화 하나만 못하다고 하신다. 우리는 꽃의 미
에 대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다. 미는 무지한 세력의 조
작이 아니며 우연의 발생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특히 꽃의 미는, 인격적신께서 그
지극한 지혜와 능력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잠깐 있다 없어지는 풀에게
도 미로 단장하시거든 하물며 영생할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를 옷으로 입히지 않으시
랴? 참된 신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면 그는 새나 풀보다 탁월한 자니 의식을
염려할 필요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 함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나 자신에게 대
한 하나님의 통치를 구함이니 곧 하나님의 계명을 감심으로 순종하며 그의 뜻에 합당
하게 행함이다. 곧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대하여 가질 수 있
는 신종의 생활이다.
눅 12:28-30
마6:28-32의 해석 참조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여기
'그의 나라'는 장차 이 세상 끝에 임할 나라를 가리킨다. 즈안(Theodore Zahn)도 그렇
게 생각하였다. 신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받는 때에는 만물을 완전히 주장하는
완전한 자유를 가지게 된다. 그 때에 만물은 그에게 축복이 되어지고 다시는 그에게
저주가 없다.(계22:1-3) 신자는 현재보다 미래에 받는 축복이 더 크다. 그는 소망의
사람이다. 미래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현재에 모든 풍부한 소유가 있다 할지라도 안심
이 될 수 없다.
눅 12:33,34
마6:19-21의 해석 참조
눅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고 서 있으라 .-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파수하며 성
령님의 인도하에 있음을 이름이다.(엡6:14-19)
눅 12:36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이것은, 신자가 기
도를 부지런히 하며 직책에 충성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대망함을 가리킨다. 이렇게 경성해 있는 자들이 받을 상은 주님이 수고하여 얻어 주시는 모든 하늘의 복락을 누리게 됨(37절)이니 곧 천국에 참예함과 거기 있는 영광을 받음이라
눅 12:37-40
이 귀절에 대한 설교를 참조하여라
눅 12:42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 여기 말한 '지혜'는 다른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교
훈을 그대로 순종함이다. 그리고 '진실'하다 함은, 곧 충성을 이름이니 주님다께서맡기신 임무에 대하여 주님의 진리대로만 이행함이다(고전4:2). 양식을 나누어 줄 자.- 이는 교회와 뭇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나누어 주는 자이다. 이런 충성스러운 사역자가 받을 상은, 주님의 모든 영광을 자기의 것과 같이 누림이다.
눅 12:43,44
이 귀절들에 대한 설교를 참조하여라
눅 12:45-48
불신실한 청지기의 행위와 종말, 이 무리는 주님의 재림을 긴장하며 대망하지 않고 책임감이 부족하여서 그 맡은 주님의 양떼(종들이란 말은 양떼를 가리킴)을 업신여기며 먹고 마시는 일만을 생각한다.(45절) 이 무리가 받을 벌은 엄하다. 그들 중에 주님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한 자의 벌은 더욱 엄하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면 멸망을 받나니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안된다. 그러나 알고도 행치 못하면 벌이 있으니 그것도 위태하다(약3:1)
눅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불은 복음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처분하시는
그의 성역을 가리킨다.(말3:1,2 4:1,3)불은 소멸시키며 청결케 하는 작용을 가진
다.(Vuur verteert en loutert.- Greijdanus) 그것처럼, 복음의 역사는 죄를 소멸시
키며 심령을 깨끗하게 한다.
눅 12:50
받을 세례.- 이것은 그가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일을 이름이다.(막10:39)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십자가 위의 고난을 열망하시고 계셨던 것이 이 탄식에 드러난다.
눅 12:51-53
마 10:34-39참조
눅 12:54,55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 그것이 지중해에서 올라옴이니 팔레스틴에 소나기 올 때의 현상이다.(왕상18:44) 그리고 ' 남풍이 붐'은, 사막 지방의 뜨거운 바람이 오는 것을 이름인데 물론 그 때에는 기후가 뜨거워 진다. 이것 역시 필레스틴에 있어서 기후 변동상 상칙으로 되어 있다.(욥37:17)
눅 12:56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여기서 천
지의 기상을 분변한다는 말은, 사람들이 그 경험에 의지하여 고학적 현상으로 나타난 기후의 동향을 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은 자연 현상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 뿐이고 음양론에서 가지는 천기에 대한 관상론과는 다르다.
음양관계로 징조를 살피는 관상론은 한서 춘추전에 많이 나타나있다. 성경진리는 이런 것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때 사람드링 천지의 기상은 분변 할 줄 알면서 종교 윤리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상을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셨다. 세례 요한을 선구자로 하시고 정식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왔다고 선포하셨다. 때가 이르거니와 지금도 그 때라고 하셨다. 그것은 구약이 벌써 예언한 대로이루어진 것을 이름이다. 새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사람들은 들어도 듣지 못한 듯이 냉정하게 생각하면서 회개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외식이다. 그들은 외부에 나타난 천지의 기상만을 분변할 줄 알고 영적으로 움직이는 내부적 사리들에 대하여는 분변할 줄 모르며 중대시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속보다 겉을 보고 움직이며 큰 것보다 작은 것을 귀중히 하는 외식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음 귀절은 근대 사람사람들의 회개하지 않는 외식을 지적한다.
눅 12:57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여기 이 귀절에 '스스로 판단'한
다는 말은, 결단성 있는 자각 생활을 가리킨다. 의와 불의는 나타나서 사람들의 단호한 자각적 선택을 요청하고 있었다. 근대에 사람들은 누구든지 머뭇머뭇하지 말고 옳은 것에 대하여 선택 하였어야 된다. 곧, 그들은 의를 표준하고 그 누구에게 타협할 것도 없이 결단성 있게 회개의 길을 가야할 것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임한 천국은 얼마든지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원하려고 사람들에게 결단성있는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 외치신 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눅 12:58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회개하지 않으면 안될 인간들은
고소 당한 죄인과 같다. 고소를 당한 자는, 화급히 자기가 지불해야만 될 것을 속히 지불하고 화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처럼 천국은 임하였으니 사람들은 화급히 회개하고 그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이 긴요하다. 사람들이 언제나 회개심으로 지내지 않는다면 언제나 외식자가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언제나 죄인이고(주관편에 있어서) 언제나 고치는 생활을 하여야 되기 때문이다. 어두운 가운데있어서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한 공자도 말하기를 '50살 나서도 49살 때의 실수를 발견한다'라고 하였다. 하물며 구원의 진리를 아는 신자들은 얼마나 죄를 깨달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속담에 ' 사람은 제잘난 맛에 산다'고 하니 사람들은 스스로 속아서 자기의 부패를 깨닫지 못하고 옳은 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외식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생활이다. 나무들 중에는 가롯 유다 나무라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 나무는 새빨갛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데 잎이 피기 전에 꽃이 먼저 핀다고 한다. 많은 벌들이 그 꽃을 찾아와 꿀을 빨아 먹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꽃이 가지고 있는 액체는 취하여 죽게하는 아편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벌들은 그 꽃에 와서 다 죽어 떨어진다고 한다. 그와같이 인간은 겉 모양은 이로운 것 같아서 많은 사람을 사귄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그와 관계한 사람은 누구든지 더러워질 뿐이다. 그것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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