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1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 이 제자는, 70전도인 가운데 하나인지, 12제자 가운데
하나인지 알기 어렵다. 즈안(Zahn)은 말하기를, "여기 그 사람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
면, 12제자 가운데 하나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Theodore Zahn, da er
nicht mit Namen genannt ist, schwerlich einer der Zwolfe.-A.W.S.441).
눅 11:2
아버지여.- 이것은 그리스도 신자들만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부르는 특별한 내용있
는'아버지' 되심을 말함이다. 이 이름의 내용은 이방인들이나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이
생각한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다.
(1) 이방인이 신을 아버지라고 한 사상도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의 것과 다르다. 그들
의 신이 참된 신이 아님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 신을 '아버지'라 함은 그 신을 그들
의 종족의 선조라는 뜻으로 그리한다. 헬라 사람은 제우스 라는 신을 아버지라고 하였
다.
(2) 구약이 말하는대로의 하나님 아버지
구약은 하나님을 메시야의 아버지 또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보호자 혹은 창조자라는
뜻)라고 하였으나.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신 14:1,
32:6; 사 63:16; 렘 3:4, 19, 31:9; 말1:6; 삼하7:14; 대상17:13; 호 11:1; 시 2:7참
조
(3)신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의미를 두가지 들 수 있다.
1)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에도있고 (마11:25-), 서신들에도 있다.(롬15:6; 고후1:3, 11:31; 엠
1:2).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였으나 '우리(예수님 자신을 포함하는 뜻으
로)아버지'라고는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대하여 아버지이
신 관계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부자 관
계는 영원적인 것자고 하나님과 사라모가의 부자 관계는계약적인 것이다.
2)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마6:4,6,10:20,29, 13:43; 눅6:36; 고전1:3; 고
후1:2; 갈1:3;엡1:2,6:23; 벧전1:2,17)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특별 은혜로 되는 것인데그것은, 성령으로 중
생되어 얻어지는 것이며 (요 1:3-13) 양자되어 얻어지는 것이다.(롬 8:1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 '이름'이란 말은, 헬라 원어의 직역대로는
'당신의 이름' 이라고 할 것이다. ]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은 하나님께서 거룩히 경배 받으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기구
라기보다 송영이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송영하기를 찾아야 한다. 왜
그런고 하며,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어떤 때에
는 먼저 하나님께 드림으로 받는다. 사막이 사막인 이유는 수분을 내어주지 않는 까닭
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 이것도 헬라 원어의 직역대로는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라
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성취됨을 기구함과 같다. 이 기도가 참되려면 그 기
도자에게 하나님을 순종할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순종심은 없이 이 기도
를 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고 거짓말을 함이다. 그것은 떡을 안 받겠다고 하면서
떡을 달라함과 같다.
눅 11:3
일용할 양식.- 헬라 원어로 톤 알톤 에피우시온(* )
이니 '오늘날의양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학설에 이것은 '근근히 먹을떡' 이라고
한다. 물욕과 탐심을 그대로 가지면서 이 기도를 하는 자는 참으로 기도하는 자가 아
니고 거짓말 하는 자이다.
눅 11:5-7
이 부분에서 가르치는 기도훈의 요점은 '벗된' 관계이다. 여기 '벗'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사람들이 벗에게 주기를 원함과 같이 그리스도의 벗된 신자들은 그로말미
암아 기도 응답을 받게 된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면, 그의 뜻(그의 계
명)을 순종해야 한다.(요15:7,10) 신자들보다 머저 그리스도 께서는 저희의 친구가 되
시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을 완전히 실행하셨으니(요15:13-15), 저희도 그를 믿고 순종
하기만 하면 그의 친구가 된다.
눅 11:8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 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이 말씀의 뜻은 이러하다. 하나님과 그 신자와의 친교 관계도
귀하지 않은 바 아니나, 우리가 하나님의 무슨 은사를 받으려면 간절한 기도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기 '강청'이란 말은 파렴치란 뜻이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
는 자는 너무 간절하므로(주지 않으려는 것을 그냥 달라고 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아
니하여야 그 구하는 바를 받는다. 사람에게 '강청' 하므로 이기 주의자의 마음도 얻거
든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이랴?
눅 11:9,10
내가 또.- 이것은 힘 있는 어세를 띤다. 구하라.- 이것은 소원을 구하라 함이고
찾아라.- 이것은 잃은 것을 다시 찾음이고 두드려가.- 이것은 쫓겨 났다가 다시 받아
줌이 되기를 원함이다.
눅 11:11-13
여기서는 기도 응답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자관계를 가지고 비
유하신다. 곧,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것 만큼 좋은 것을 그 자식에게
준다. 자식이 알을 달라고할 때에 전갈을 주는 자가 없다.'전갈'-은 새워럼
생긴 작은 동물인데 돌담 속에엎드려 살며 그 꼬리에는 쏘는침이 있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우리가
구할 것이 무엇보다도 신령한 은혜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우리가 물질을 구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 대신 신령한 은혜를 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이 이 부
분 말씀이다.
눅 11: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드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
냐.- 예수님은 유대인이 마귀를 쫓아내는 방식도 마귀의 힘을 이용하는 일이 없음을
논거로 하여 자기가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이 마귀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
신다. "너희 아들들"은 고래의 벽사법을 계승한 자들을 이름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벽사법은 솔로몬 왕으로부터시작되었다고 한다. 슐라텔이란 주석가는 요세보라는 유대
인 역사가의 문구에 의하여 이 사실을 증언하였다. 그 증언에 말하였으되, "솔로몬
때부터 벽사의 방법이 생겼는데, 그것은 오늘 우리 가운데 유력하게 되어 있다."(*
고 하였다.
눅 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여기 "손"이란 말은 손
가락이란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손"이란 말과 같다. 윗 귀절에 유대인들이 사귀를
내어쫓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그것이 마귀를 의뢰하여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전적
으로 힘입어 한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귀를 내
어쫓으신다는 것을 여기서 이 말씀으로써 역설하신 것이다.
눅 11:21,22
마12:25-30의 해석 (3)을 참조하여라.
눅 11: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
치는 자니라.-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한다고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들을 경계하신 것이다. 슐라텔은 말하
되, " 이 문구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직역에서 활동하는 목자로 생각하셨다. 그는 양
무리를 모으는데 이 모으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자는 곧, 양 무리를 산산이 헤치는 자
이다"(in der senrenz jesu wird an die tatigkeit des hirten gedacht sein jesus
sammelt die herde wer sie nicht mit ihm zusammentreibt jagt sie auseinander A.
W.S.408)라고 하였다. 요 10:16참조.
눅 11:24-26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르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집에 소재되고 수
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이 귀절들은 그 윗절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다시 설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하는 자에게서 마귀는 나갔으나 그에게 아직
전적으로 성령님이 충만하지 못하고, 또한 그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봉사하지 아니하
면, 마귀는 다시 많은 세력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
수님과 동거하지 않는 자는 이렇게 위험하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의 정상이
었다. 슐라텔은 이 말씀에서 복음을 받은 자의 책임의 중대성을 보았다. 그는 말하되,
"받은 은혜가 큼에 따라서 그 받은 자에게 책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받은 것자마
오용함은 죄이다."라고 하였다.
"물 없는 곳"은 광야를 의미하는데 사귀들의 거처하고 옛날부터 생각하여 온 것이다.
계18:2참조.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다 함은 비유이다. 사귀 떨어진 그 사람이 예수님과 동
거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의 일에 생명을 바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사귀가 다시 들어
가기 좋은 형편이다. 예수님과 그의 진리를 찬성하면서도 따르지 않는자로서, 마귀편
으로는 안 갈 수 있는 중간 처지는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중간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런 처지를 취한다면 그는 마귀가 역사하기 좋은 사람이다. 크레다너스
는 말하되 "구속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하는 은헤를 받지 못하고 주
님을 봉사하지 아니하면, 그의 전날의 죄과는 지나갔다 할지라도 그것을 대적할 만한
선이 그것의 자리에 오지 못하였다. 그 사람은 홀로 있기 때문에 자신의 힘만 가지고
있고 ,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그를 봉사함과 그로 더불어 교통하
는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De gemeensvhap met God heft hij na zijne verlossing
niet gezovht, aan den dienst des heeren zivh niet gegeven. het vroegere
verkeerde is wdg. Maar het daartegen overstaande goede kwam er niet voor in de
plats. Deze mensch staat als op zichzelven in digen kracht, niet in s'Heeren
vteeze, dienst, gemeenschap, welkev door den heiligen geest gewerkt worden-locs
I)라고 하였다.
눅 11:29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그 때의 무리가 생각한 '표적'이란 것은, 내부적으
로 임하는 윤리성있는 성령의 역사보다 사람의 호기심에 만족을 주기위한 외부적 기사
들을 이름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구하기 좋아하니 그것은, 불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세대는 악하다.
눅 11:30
요나가....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요나가 사흘 동안
고기 배 속에 있다가 육지에 나온 것은, 예수님이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시다가 부활
하실 것을 예언한 표적이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에게 예언적인 표적으로 경이가 된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시대에 경이 곧, 표적이되신 것이다. 주 예수님은 그의 부활로
써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시는 표적이라고 하셨다.(롬1:4)
눅 11:31,32
이 귀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불신앙을 탄식하심이라. 그 시대의 사람들
이 솔로몬보다 더 크시고 요나보다도 더 크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니 그들은 솔로몬
의 지혜를 배우러 왔던(왕상10장; 대하9장) 남방 여왕만 못하고,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만도 못한 것이다. 그 시대는, 남방 여왕이나 니느웨 사람에게서
정죄를 받을 만한 극악한 시대이다.
눅 11:33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두지 아니하고 동경 위에 두나니.- 이 말씀의 뜻
은, 하나님의복음은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즈안(Theodore Zahn)
은, 이 말씀이 윗 말씀(29-32절 ...요나의 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것)에 연
락이 있다고 하여 예수님의 몸이 무덤 속에 있을 수 없고 반드시 다시 살아 나오실 것
을 가리킨다고 했다.(A.W.S.470)
이 해석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해석도 역시 이 말씀이 복음 전파의 필요를 역설
한 것임을 포함적으로 의미한다.
눅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 여기 말한 등불은 개인의 속에 있는 마음 눈을 의미하
였다. 우리의 마음눈은 복음의 등불 빛을 받아서 밝아져야 행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
는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이 귀절 이하의 말씀들을 주셨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에 의
지하여 복음과 마음 눈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자.
(1) 복음은 이 세상에 등불과 같음
복음을 등불로 비유한 이유는 몇가지 있다. 첫째, 그것이 빛처럼 깨끗한 까닭이다. 우
리는 더러운 빛이란 말을 듣지 못한다. 빛은 어디를 가나 자체를 더럽히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음은 사람들이 아무리 더럽히려고 하여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딤후2:19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의 힘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전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을 아시고 그 택하신 백성에
게는 복음이 완전히 이루어 지도록 하신다. 둘째, 복음은 어두움이 없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우주에 대한 경륜으로 밝힌다. 이것은 오묘한 것이기 때문에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한다.(벧전1:12) 그러므로 복음대로 생활한 사람들은 후회 할 것이 없고 즐
거움이 추안하며 죽는 때에 더욱 광명한 자리로나아간다. 안드류 리베트(Andrew
Rivet)는 신학자로서 별세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과거 50년 배운 것보다 이 즈음 10일
동안 배운 것이더 크다'고 하였다.
(@) 마음 눈이 밝아야 복음을 전할 수 있음
육신의 눈은 태양 빛을 받아야 볼 수 있음과 같이 영혼의 눈은 복음의 빛을 받아야 밝
아진다. 마음 눈이 밝아진다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됨을 이름이다. 이것은
일공을 통한 심리적 산물이 아니다. 중세대의 보나벤추라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하
였다. 곧, "마음의 눈이 다른 것에서 아주 떠나 하나님께만 붙일 수 있게 되어진 그
때에 광명은 보이지 않고 흑암으로 향해진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엑스타시
(ecstasy)곧 탈혼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한대로 눈을 밝게
한다 함이 어떤 인공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개획적 계시의 말씀
곧, 복음과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에 임할 때에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16:14을 보면, 루디아가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마음이 열려 바울의 마음을 청종하
게되었으며 온 집이다 세례를 받고 겸손히 또한 간절히 바울을 영접하였다. 곧, 루디
아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하였다.(행
16:15) 이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 눈이 열린 사람의 심정의 표현이다. 그러므
로 우리가 확실히 알기는 진정으로 마음 눈이 열리려면 밖에서 부터 복음의 말씀 전파
와 겸하여 성령님의 역사가 마음에 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가들은 이것을
잘못 안다.
중세대의 유명한 에칼트(Echart)f라고한느 신비가는, 만물에서 떠나 생각하는 주의를
가졌으니 그것은, 그가 말한대로 압게쉬덴하이트(Abgeschidenheit)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정신 통일의 방법에 의하여 영혼에 하나님의 들어오심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는 위에 말한 압게 쉬덴하이트가 겸손의 덕보다 승하고 사랑보다 승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성경에서 탈선한다. 성경은 마음 눈의 열림이 타율적으로 복음과 성
령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고 자율적으로 하는 육체적 공작이나 심리적 준비로 되어지
는 것이 아니라고한다.
눅 11:35,36
여기서는, 신자들이 그 심령으로 하나님을 깨닫는 빛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조심해
야될 거슬 가르치낟. 그 심령이죄를 회개하고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실하기만하면 그
영혼이 환하여지고 유쾌해진다. 요일1:7참조. 이것은 마치 방안에 등불을 켜므로 밝음
과 같은 상태이다.
눅 11:37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비록 강퍅한 바
리새인의 집에라도 들어가서 대접을 받으셨다. 그것을 보면 그는 인륜상으로 살필일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눅 11:38
잡수시지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보고 이상히 여기는 지라 - 음식
먹기 전에 손 씻는 규례는 성경에 없고 사람의 유전이다.(마15:2,3)
눅 11:39
주께서 이르시되.- 여기 특별히 '주'란 말잇스인 것을 보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을 책망하신 이 일에 있어서 대주재 하나님의 권위를 보이신것이 분명하다.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은 탐심과 악독이 마음에 가득하였다. 그들은 외모보
다 귀중한 내면 생활은 더러울 대로 더러워지게버려두니 어리석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면도
지으셨으니 만큼 그는 내면도 깨끗하게하여하나님께 바칠 책임이 있다.
눅 11:40,41
주님께서 속을 깨끗이 하라 하심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 하였느냐.- 사람이 하나
님을 섬기는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까닭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무엇이
나 개끗하게 하여야 된다. 바리새인들은 의식적 정결만 위하고 속 마음과 생활 내부는 더러운 대
로 감추어 두었다.
그 안에 있는 거스로 구제하라.- 이 말씀의 의미는, 그릇속에 있는 음식을 가지고 구
제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탐심으로 남들의 물질을 가져다 쓰는 동안 그들의 생활 이면
은 불결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그 물질을 가져서 구제하기만 하면 그들의 속도 깨
끗하게 될 것이다.
눅 11:42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 '박하와 운향'은 채소의 종류니 바리새인들
은 구약 율법에 의지하여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다.(례27:30; 민18:21; 신12:6,
14:22-27)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 '공의'는 사람에게 대하여올바르게 행함
이니 불쌍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일까지 포함 하는 것이다.(Greijdanus)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가질 경건을 의미한다. 이 둘은 온 율법을 가
리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의식적 부분만 지킬 뿐이고 그 내용은 버렸다. 그들은
참으로 외식하는 자들이다.
눅 11:43
회당의 높은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도다.- 이것은 저 외식하는
자가 어떻게 사람 앞에서 영광받기를 좋아하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모든 영광은 하나
님께 속한 것인데, 그것을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자요 도적하는 자이다.
눅 11:44
평토장한 무덤.- 이것은 무덤이 무덤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려고 평지처럼 만들어
회칠한 것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그곳을 무덤인 줄 모르고 밟으므로 의식적으로 더럽
힘을 당한다.(민19:16) 그와 같이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외식에 속히워 좋은 사람인 줄
알고 사귀면 종교적으로 더럽힘을 당한다. 외식하는 자는 이렇게 두가지 방면으로 위
태하니 (1) 그것의 속에 더러운 것이 있는 줄 사람이 모르는 위험이며, (2) 그 외식하
는 자와 사귀는 자는 자기도 모르게 가증스러운 죄악의 감염을 받는다.
눅 11:46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예수님이 그 율법사의 면박한 질문에 대하여 거
리낌이 없이 바로 말씀하신 것은, 필요한 때에 바른 말씀 하시기를 회피하시지 않은
모본적 발언이시다.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율법사들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이데, 모
세가 가르친 뜻 그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것에 자기들의 의견을 첨부하여 더욱 더 엄하
게 만들어서 사람들더러 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수님은 이런 그릇된 율법 해석가들을
엄하게 꾸짖으셨다. 오늘에 있어서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것임을 이것
으로써 알 수 있다.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 곧, 저 율법사들 자시는 저희가 해석한
대로의 엄한 율법을 지키려고 힘써 보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율법 시행에 실
패자라기 보다 무관심한 자이다. 예수님은, 율버을 실행 하려다가 실패한 자에게 대하
여는 이런 엄한 말씀을 발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다만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기는 그
교훈을 행하려고 힘써 보지도 않는 자들에게 대하여는 '화있을진저' 라고 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눅 11:47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 그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쌓는 것은 언필칭
선지자를 대접하는 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의 이 행도을 보
시고 '화있을진저'라고 하였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무덤을 쌓은 것은, 실상 선지자
를 대접하는 의미가 아니고 자기들의 낯을 내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두렵도다. 선
지자를 죽인 악인들의 후손이, 선지자의 무덤을 쌓아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는데 이용
하는 더욱 악한일!
눅 11:48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 도다.- 그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쌓는 일은, 일견 경건한 일과 같기도하나 그렇게 하지 않음보다 가증스럽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지자의 교훈과 증거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리하기 때문이다. 선
지자들의 교훈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무덤을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내니, 그들
은 선지자를 죽이고 또 죽이는 자들이다. 그들의 조상이 선지자를 죽였으나 그들도 그
조상들의 행동 원리 대로 행하는 자들임이 틀림없다.
눅 11:49
하나님의 지헤가 일렀으되,- 여기'하나님의 지혜'란 말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가?
그 아래 인용된 내용이 구약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확실하지 아니하다.혹 렘7:21-29;
잠9:3, 8:22-31 등을 가져다가 대나, 여기에 꼭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
수님이 아신대로, 하나님의 지혜는 말하기를 그 아래와 같이 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눅 11:50
이 말씀을 보면 조상들과 그 자손들은 서로 연대적 관계를 가지어 조상들의 범죄
의 결과가 그 자손들에게 미친다. 유대인들의 조상이 선지자들을 죽인 죄값은 그 후손
들에게 미쳤다.
눅 11:51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여기사가랴는 누구를 가리
키는가? 마태는 그를 바라갸의 아들이라고 했다. 대하24:20을 보면, 거기 스가랴는
바라갸의 아들이 아니고 여호야다의 아들이다. 이것은 난제이다. 그러나 (1) 사본상 어떤 관계로 이렇게 되었을 수 있고 (2)여호야다의 존호가 바라갸 이었을지도 모른다.(Calvin) (3)그러나 혹설에 예루살렘의 멸망 직전에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 라고 하는 의인이 성전에서 피살된일이 있었다고 한다.
눅 11:52-54
이 말씀은 그 때에 율법사들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권리를 가지고 자기들 자신이 그것을 바로 해석하지도 않고 또 바로 해석한 말씀을 실행하지도 않음으로 남들에게 천국의 진리를 전하여 주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시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오신 메시야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자기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남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지 않게됨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