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7:11
나인이란 성.- 로빈손이란 학자가 가버나움에 가 하루길 쯤되는 곳에서 "작은 허몬
산"기슭에 있는 작은 동네를 발견하였는데 그 이름이 "나인"이다 . 그 작은 동네 입구
는 하나 뿐이고 거기서 10분간 걸으면 묘지도 있다. 이 작은 동네는 반드시 예수님께
서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신 곳이겠다.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예수님의 그 위대한 이적들은, 적은 사람들 앞에
서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신 것들이니 많은 증거들을 가진 진실한 사실들이다.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생명의 구주님은
들어오시고 죽은 자를 실은 상여는 나오는 묘한 만남이다. 이것은 인간이 보기에 우연
한 만남이면서 하나님의 섭리로 되어진 일이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여기 "주"란 말은 특별히
예수님게서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사실을 가리킨다. 그는 이 때에 외
아들이 죽은 과부를 불쌍히 여겨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신앙 있는 자에게
권능을 나타내신 것이 많고 또한 신앙의 유무는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적으로 불쌍히
여겨서 가련한 자들에게 권능을 행하신 일도 적지 않다.
눅 7:14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이것은 그가 그 상여 멘 자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기위하여
그리하셨다. 긴급한 때에는 말보다도 행동이 먼저 나간다. 불쌍한 과부의 가긍한 정지
를 보시고 그의 속에 긍휼이 끓어 오를 그 때에 그의 구원 실시의 행동은 급하여졌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여기 "네게 말하노니"란 말씀에 "네
게"란 말은 헬라 문법상으로 힘있게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죽은 청년을 보
신 적이 없어도 친히 그를 아시며 그를 사랑하시는데 주재 하나님이신 사실을 나타내
신 것이다. "일어나라"고 하신 말씀은 생명의 주재이신 하나님으로서 발하실 수 있는
명령이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일어앉고"란 말은 여기와 행9:40과 단 두 곳에만 있다.
이것은 의사들의 술어라고 한다.
눅 7:16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모르고 한개의 선지자로 오해하여 한 말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신
행적은 복음서와 원시 교회의 유전이 증거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원시 교회
가 의심없이 믿은 것이다.
그런데 변증론자들 중에 가장 옛 사람인 콰드라투스란 사람은 주후 125년에 하드리안
에게 보내는 기독교 변증서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곧, "우리 구주님의 하신 일
들은 언제나 현재에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참되기 때문이다. 병 고치을 받은 자
들과 죽었다가 다시 살림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의 시대에만 아니라 그의 별세 후
여러해 동안 살았고 또 어떤이들은 우리의 시대에 까지 살아남아 있었다."라고 하였
다.
눅 7:36
바리새인- 이 사람이 이름이 시몬이라고 한 것을 근거로 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 기
름 부은 사건이 마26:6, 막14:3; 요12:3에 기록된 그것과 동일하다고 한다. 위의 모든
장절들에도 시몬이 그 연회의 주최측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때에 시몬은 흔히 있
는 이름이니, 신약에만도 모두 열 한 번 나타나고 , 요세보 사기에는 스무번이나 보인
다. 그러므로 이 기름 부은 사건은 딴 것이다.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 - 이 사람은 이방인 된 의미의 죄인(눅5:32)은 아닌데
무슨 죄인인지 알 수 없다. 초대받지 않은 자가 연석에 출입함은 그 지방에 오늘날까
지 있어 오는 풍속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찾아 옴은 무엇보다도 영적 요구이
갈급에서 그리했던 것이다.
눅 7:38
한편으로 그 여자는 예수님을 사죄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경외하는 데 다른 한편
으로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하나의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아니하려는 악한 마음을 품
고 있다. 한편에는 광명이요 또 한편에는 흑암이다.
눈물.- 클로스텔만은 이 눈물이 감사에 못이겨 흘린 것이아니고 회개하면서 흘린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 아래 말씀(40,41)을 보면 이 누눌은 그 여자가 사죄받은 일
때문에 감사해서 흘린 것임이 분명하다. 그 눈물로써 주님의 발을 적신 이유는 (1)주
님을 지극히 존귀히 보는 경외심과 (2) 자기의 봉사를 적게 평가하는 겸비심을 가진
까닭이며, (3) 주님에게 대한 지극한 정성을 가진 까닭이다.
머리털로 씻고 (1) 공석에서 머리를 풀어 내림은 유대의 풍속에서 큰 수치였다. 그러
나 감사로 인하여 그런 것을 돌아 볼 생각조차 없게 된 것이었다. (2) 그 뿐 아니라
머리털은 여자의 영광인니데 그것으로써 발씻는 수건으로 대용하니 주님을 위한 그 여
자의 희생심은 크다.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 행동이 역시 하나님의 지존 막대를 아는 경외
와 및 자기와 자기의 것의 지극히 낮고 천함을 인정하는 겸손에서 일어난 것이다.
눅 7:41
데나리온.- 이것은 로마의 돈 이름인데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 값에 해당하다고
한다. 이 귀절부터 45절 까지는 죄를 회개하고 사죄 받는 자와 그리하지 않는 자와를
대조시킨 것이다. (1)그 여자는 자기의 죄를 알고 깊이 회개하므로 사죄를 받아 큰 감
사를 주님께 표시하였다. 그러나 시몬은 그리하지 않았다. (2) 회개하는 자는 인간의
보기에 누구보다 죄가 많은 것과 같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때문이
다. 그는 마치 우리 본문에 있는 5백 데니라온 빛진 자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
기에가 이 회개자가 오히려 죄가 적은것이다. 그는 그 회개하는 많은 죄를 사함 받으
며 따라서 사죄자 곧,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눅 7:42,43
그리스도의 사죄를 부채 탕감에 비유한 것은 마18:23-35에도 있다. 사람이 하나님
께 범죄한 것은 부채와같이 의수로 부채를 탕감받는 것이 얼마나 감가한 일인가? 많이
탕감함을 받는 자일수록 더욱 감사할 것은 명백하다. 시몬도 이것을 알았다.
눅 7:44-46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대한 시몬의 봉사와 그 여자의 봉사를 비교하여 대조
시키신다. 이 대조에 의하면 시몬의 것은 손님 접대의 보통 정도에서도 떨어지는 반면
에 그 여자의 것은 보통 이상의 것임을 지적하신다. 이 세상 신자들 중에는 하나님을
봉사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보통으로 행하는 것만큼도 못하는 일이 많다. 시몬
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기 예수님의 발에 기름 부은 여자는 자기에게 있는 가
장 귀한 것을 소비해가며 예수님을 대접하였다. 이는 사죄 받은 일에 대한 감사하는
심령의 표현이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일처럼 감사한 일은 없다.
"감람유"는 팔레스틴에서 값 싼 기름인데 누구나 사용하는것이고, "향유"는 매우 값
비싼 것이다. 요12:3,5참조.
눅 7:47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이것은 사죄의 원인
이 그 여자의 봉사적 사랑에 있다 함이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 여자가 사죄 받
은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이니 , 그 사죄 받은 증거는 그의 봉사적 사랑이라고 한다.
눅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그 여자는 사죄의 은헤
를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벌써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순간
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여자의 사죄받은 사건에 대한 재확인이다.
눅 7: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사죄의
선고는 친히 사죄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보기에
는 예수님은 사람 뿐이므로 이런 선언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으로 사람이신 동시에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저희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
수님이 누구이심을 아는 자는 그의 사죄 선언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눅 7:5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것은 신앙이 무슨 공로가 되어 그것 때문에 구원
을 얻는다 함이 아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공로는 오직 예수님의 義뿐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신앙을 통하여 예수님의 공의를 받게 되므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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