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1,2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 이것은 세려 요한이 전도를 시작한 연대
이다. "디베료"는 아구스도 황제의 후계인데 아구스도가 죽기 전 벌써 2년 동안 섭정
했으니 만큼, 이 해는 로마 연대로 779년 혹은 780년인바 780년은 주후 27년 경이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 - "유대"지방은 대헤롯이 그 아들 아켈라옥에게 준 것이대 아켈
라오가 죽은 뒤에 로마 제국의 직할이 되어 로마 사람 "빌라도"가 총독으로 오게 된것
이다.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 - 이 헤롯은 대 헤롯의 아들 안디바를 이름이고, 분봉왕은 4
분의 1영을 가리키는 바 이는 대 헤롯이 그 아들고 자기를 위한 영토분할에서 온 명칭
이다.
이두래와 드라고닛 - 이 지방은 리바누의 동남에 있는 곳이다.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 - "구사니아"란사람이 주전 36년경까지 이 지방에서 왕
노릇한 일은 있으나 이 때에 이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는 누가의 기록은 오착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루사니아니 아마도 엣 루사니아의 자손일 것이다. 곡학의
발굴한 조각에 의지하면 디베료 황제 때에 루사니아 분봉왕이 있었다고 하니 누가의
기록이 정확하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 이것은 이상스러운 어귀인 듯하다. 어떻
게 두 사람이 한 때에 대제사장이 되었을까? 그 내막은 이러하다. "아난스"는 주후 14
년에 발렐리우스라고 하는 유대 총독으로 말미암아 면직되고 그의 사위 가야바가 주후
17년에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종신직이니 만큼 명의상으로는 안나스
가 아직 대제사장이였으므로 가야바 취임 후에도 그대로 그의 직명을 불러 주었던 것
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두 사람이 같이 대제사장이었다고 함이 옳은 것이다.
눅 3:3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 그는 세례 주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이니만큼 물이 항
상 있는 요단강 근처에서 사역하였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요한 자신은 남이 죄를 사할 권세가
없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고 또
한 회개한 자의 죄가 사함이 된다는 약속 혹은 표로 세례를 주었다. "세례를 전파하"
였다는 말은 세례를 공개적으로 누구든지 받도록 하였다는 말이다. 세례 요한의 세례
는 회개하는 또 진실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받을 수 있다. 신약 교회의 세례는 그
받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삶을 믿는 신앙 고백을 인치는
예식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각에 달려 죽으실 때에 미
든 사람이 죄 값을 대신하셨으니 만큼 그 사람도 죽은 것과같이 여김이다. 그리고 그
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은 그도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 살
게 됨을 이름이다. 롬6:1-5비교. 그러므로 신약 교회의 세례에 있어서 세례 받는 자가
물에 적심이 됨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매장되었다는 표요, 물에서 올라옴은 그리스
도와 함께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온다는 표이다. 신약 교회에 있어서 옛날의 동방
교회는 침례를 행하였으나 그 때에 동방과 서방이 이 차이점을 가지고 구원 문제의 관
게를 말하지 않았다. 세례의 그 방식은 한 개의 표뿐이며 근본 문제는 아니었다.그러
므로 오늘까지 복음적 교회가 물을 차기어 베푸는 예식을 족하게 여겨 오는 것이다.
눅 3:4-6
이 말씀은 사40:3-5의 인용이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한 개의 외치는 음성이라
는 뜻을 가진다. 성경은 그들 가리켜 외치는 자 라고 도 하지 않고 다만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를 완전히 감추고 하나님의 말씀만 드러나도
록 사역한 사실을 잘 알게 한다. 세례요한은 한 개의 음성이엇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의 음성이었으며 그리스도만 드러내고 자기는 감춘 선지자엿다. 그는 모든 진리 증거
자들의 모본이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지고 오래지
않아서 오실 터인데 그 때에 그의 주시는 구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회개하고 마
음으로 예비하라는 뜻이다. 곧 주님이 그 구원의 선물을 가지고 오실 수 있는 마음이
되어져야 할 것을 가리킨다.
"첩경"이란 말은 헬라원어로 트리부스(* )인데 상하여 거칠어진 길을 의
미한다.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을 비유로 가리킨다.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도들은 언제나 그대로 있고 변치 아니할 것이나 사람이 그의 죄행으로써 그것들을
훼상했다."(Gods ordeningen zijn wel dezelfde gebleven maar de mensch heft ze
door zijne zonde ais uit zijn denken en handelen verdwijnen - Lucas I.P 157)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본래 사라이 마음에 좋은 법도들과길을 주셨으나 사람이 그 마음
에 모든 죄가 지나가도록 허락하였고 또 그 죄에게 점령되도록 까지 허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의 모든 선하던 궤도와 법칙들이 흐리어졌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
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 이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왕으로생각하고한말씀이다. 옛날에
왕이 한번 민간에 행차하게 될때에 미리 사신을 보내어 그 지방 백성으로 하여금 길을
닦게 하는 풍습이 있엇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 곧, 만왕의 왕께서 이 세상에 오심에대
하여 세례요한은 먼저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바로 가지도록 명령한다. 이
는 왕을 위한 것이니 그 어느 누가 반항할 수 있으랴? 어렵고 힘들어도 길을 닦아야
한다. 골짜기를 메워라. 높은 산과 같은 어려운 장애물도 치워 버려라. 작은 산과 같
은 작은 장애물도 용납할 수 없다. 물러가거라. 지나가거라. 모든 사람들은 만왕의 왕
의 권위를 생각하여서라도 회개해야 할 처지이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아니하면 죽을
수 밖에 없다. 누구든지 높은 산과 같은 죄도 회개하지 않으 수 없고, 작은 산과 같은
작은 죄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 굽은 것도 험한 것도 다 고쳐야 된다. 이것은 만
왕의 왕의 행차를 위한 것이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 모든 육체란 말은 모든 나라 백성들을 가
리킨다. 유대사람만 아니라 천하 만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잇는 전무 후무의 기회니
그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온 몸이 녹아지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이기회를 앞
에 놓고 어찌 마음 준비를 하지 않으리요? 사람은 누구나 이 때에는 산 같이 큰 죄라
도 회개하고 기다릴 만한 것이었다. 천하 만민이 전무 후무한 구원의기회를 앞에 놓
고 긴장하여 기다릴 때인데 그 어느 누가 홀로 정신 차리지 않고 있을 수 있으라!
눅 3:7
독사의 자식들아 - 이것은 악독과 교활을 가리키는 명사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악
독한 마음으로 종교의식밑에 숨어 의인인 체하고 사실 진정한 회개는 피하였으니 독사
같은 자들이란 말을 들을 만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세례요한의 권위 있는 외침에 눌
려져서 세례를 받고자 하였으나 참 마음으로의 회개는 피하려고 한 것이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이는 유대인의 그릇된 견해를
공격하는 말씀이다. 그들이 그릇된 편견은 다른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심판을 이방인들
만이 받고 저희 자신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그들의 그런 오
착을 지적하는 무서운 말을 던진다. 스스로 생각히기를 자기들만은 의인이므로 벌을
피할 줄 알앗다. 스스로 인정하는 의인은 도리어 어려운 죄벌을 받는다. 칼빈은 말하
기를 "죄인이 하나님을 피하므로 얻은 소득이 무엇이냐? 그것은 더욱 더 하나님의 진
노를 격동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눅 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맺고"라는 원어 포이에사테(* )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되었으니 단번적 행위를 가리킨다. 회개는 주의상 방향 전횐이니
곧 인적의 에서 신적의를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다. 이것은 일생에 있어서 단한번 있는
것이다. 이 방향 전환이 있은 후에도 행위에 있어서 다소의 불만족이 없지 않지만 그
것에 대한 회개는 위에 말한 주의 상 방향 전환과 달라서 여러번 있을 수 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 이 말의 바른 번역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속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시작하지도 말라고 했
으니 아주 엄금하는 말씀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자손이라는 육체적인 혈통을 빙자
하여 구원을 자신하였으니 참으로 망상이다. 그것은 (1)하나님께 아브리함과 그자손
을 택하심의 이유를 오해한 것이다. 유대인 선택은 하나님께서 만민으 구원하시기 위
한 복음 계시의 그릇으로 삼으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금이라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에 순종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할 것이다. 그
러나 이것을 오해하여 이 민족적 선택으로 말미암아서 각 개인은 순종하지 않아도 남
달리 구원 얻을 줄 알았던 것이다. (2) 그들이 이렇게 민족적 선택을 오해한데 따라서
교만해진 것이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이 말씀의 뜻은 구원 얻은 여부가 전
연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달렸고 인간의 육체적 잘나고 못난 그 어떠한 조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인다. 그러므로 구원을 앞두고 달음질하는 신자는 하나님 앞에 신뢰와
겸비를 그 특징으로 가진다.
눅 3:9
본절 말씀은 그 때에 유대의 부패한 종교계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을 선포한
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바리새 주의 종교를 심판하시고 생명 있는 신약 종교를
수립하시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주의의 종교가들은 필경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눅 3:10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 이 말은 회개하는 영혼의 탄식하는 소리이다 .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도 강퍅하여 마음에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은 필경 멸망할 것 밖에
없다.
눅 3:11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 이말씀은 우리가 옷 한 벌 이
상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듯이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기
"옷"이란 말은 헬라원어로 키튼(* )이니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속 옷을 말
한다. 여행자는 보통으로 그런 내의 두 벌씩 입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셨다. 이 속옷 두 벌씩 입는 자들을 보고 필요 이외의 것은 남에
게 주라고 권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권면은 그 특수한 경우에 나타난 과분한 개인 주
의를 경계함이고 ,사재를 다른 사람과 나누라는 원칙을 세움이 아니다.
이렇게 요한은 그 때 사람들에게 행위상 개혁을 권하여서 멀지 않은 장래에 나타날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심령을 닦에 한 것이다. 이 권면은 결코 구원의 길인 복음 그것
을 말함이 아니고 , 복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준비를 주기 위한 교훈인 것이다. 행위
적 개혁이 바로만 되면 그것은 복음을 믿는데 이르는 길을 닦음이다. 음란하고 방탕
하던 자가 그것을 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준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으니 믿음에 이를 수 있게 하는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 해도 성
령님의 역사 없이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눅 3: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샌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 유
대인들은 세리들을 업신여겼다." 세리들도 "란 말은 그들까지도 세례 요한의 공개적
세례 사역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사역은 재래의 바리새 종교와 달라서 사람
을 차별하지 않는 점을 이 말이 지적한다. "선생님"이란 말은 "높은 선생"을 가리켜
부른 이름이다. 무리들도 세레 요한을 이렇게까지 존경하지 않은 듯하고 군병들도 그
리하지 않은 듯하다.
눅 3:13
정한 세 외에는 늑장치 말라 - 세례요한은 그들더러 세리 노릇을 하지 마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들로 하여금 그 직분대로 하되 옳게 하여야 될 것을 가르쳐 주었
다. "늑장치 마라"함은 정한 세금밖에 불의하게 세금을 매는 가혹한 행정을 금지하는
말씀이다.
눅 3: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길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하니라 - "강포"는 잔인하게 또는 불법하게
사람을 해함이고 "무소"는 군인이 자기의 권세를 믿고 자기의 미워하는 사람을 까닭
없이 고소함을 이름이다.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함은, 군인의 뇌물 받아먹는 악
한 버릇을 금지시키는 말씀이다. 세례요한은 군인의 직분 그것은 좋게 여기고 그 직권
악용을 금하였다.
눅 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 그들은 듣고 생각하기를 메시야께서 오실줄 알고
기다렸다.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론하니 - 이 사실은 요
1:20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눅 3:16
나는 그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신들매를 푸는 "일은 종의 하는 일
이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종노릇 할 자격도 없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나타
내는 일에 있어서 명백히 하는 귀한 증인이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성령으로 ... 세례를 주신"다함
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사 거듭나게 하실 것을 가리키고 " 불로 .. 세례
를 주신"다 함에는 해석이두 가지 있으니 곧, (1) 그리스도 재림읠대에 끝까지 주님을
불 신앙하는 무리들이 멸망의 심판 받을 것을 의미한다 하고 (2) 성령 세례의 성결을
가리키는 말 뿐이라고 한다. 성령 세레로 말미암아 그 받는 자의 죄악이 깨끗해지는데
그것은 불로써 무엇을 태워서 깨끗이 함과 같다.
눅 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죽정
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일을
비유로 가르친 것이다. "알곡"은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죽정이"는 모든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이름이다.
눅 3:18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 여기 "전한"다는 말은 세례 요한이 백성을 꾸
짖어 죄악에서 떠나 의로 돌아오게 하는 설교를 가리키고 "좋은 소식"은 그가 메시야
를 백성에게 알게 한 전도를 의미한다.
눅 3:19
분봉왕 헤롯 - 대 헤롯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들이 유대 나라를 나누어 한 지방씩
차지하고 왕이 되었으니 이것이 분봉왕이다. 눅3:14해석 비교. 여기 헤롯은 갈릴리 지
방을 차지한 헤롯 안디바를 이름이다.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나의 일 - 헤로디아는 헤럿 안디바의 동생 빌립의 아내이고
그의 재수였다. 그는 본래 아라비아 왕 아레다의 딸을 아내로 취하였던 것 이다. 그러
나 그는 악한 사람인지라 그 아내를 버리고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
았다.
눅 3:20
한 가지 악 - 그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 행위를 이름이다. 세레요한이 갇혔던 옥
은 베레아에 있는 마케루스(Machaerus)옥 이었다.
눅 3:23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 이 귀절은 헬라 원
어로 온 휘오스 호스 에노미제토 요셉 투 엘리(*
)라고 한다. 이것을 다시 고쳐 번역하면 "법률상으로 말
하면 요셉의 아들이지만 헬리의 아들이요"라고 할수 있다(greijdanus).
이렇게 번역하면, 예수님은 요셉의 장인 헬리의 자손이란 뜻이 나타난다."헬라 원어
를 보면 여기 누가 복음 족보에, 모든 조상들이 이름 위에 관사가 있으나 요셉이란 이
름 위엔 관사가 없다. 그것은 요셉이 법률상으로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었고 사실상으
로는 그렇지 않다는 표적이다."(f.rienecher, Durch das fehlem des artikels ist der
name joseph aus der geneologischen kette hinausgeruckt und ihm eigene stelle an
gewiesen). 크레다너스도 말하기를, "요셉의 이름 위에 관사가 없는 사실은 요셉은 이
족보에 정식으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눅 3:24-27
이 부분은 포로 이후이 모든 조상의 이름들인데 스알디엘과 스롭바벧이라는 두
이름에서만 마태 복음과 일치하고 그 밖에 이름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의 원
인은 마태 복음의 포로 이후 족보나 혹은 누가 복음의 그것에서 양자의 조계를 채택한
까닭이겠다. 그 두 조계가 다 함께 스룹바벧을 공동 조상으로 한다.
눅 3:28-31
여기 포로 이전 조상이 이름들을 다윗까지 소급하였는데, "네리"라는 조상부터 다
윗까지 20명이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다윗 외에는 전연 다른 이름들이 나온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네리가 여고냐의 아들 스알디엘을 양자로 삼은 경우에 있어서, 마태는 스알디엘의 실조들을 소급하였고, 누가는 스알디엘의 양부 조계를 소급한 경우에 그 두 족보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윗을 공동 조상으로 한다.
눅 3:33
여기 "아니"라는 조상 이름은 마1:3,4에 기록된 "람"에 해당한다 . 왜 "람"을
"아니"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미나답이 "아니"나 혹은 "람"의 양자였던 경우에 해결된다.
눅 3:35,36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 이 족보 토막은 대상 1:24
에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가이난"이란 이름이 없다. 그러나 구약의 가장 중요한 번역 "70인역"은 누가의 기록과 같이 "가이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본상 논쟁되는 어귀라고 할 수는 있으나 성경이 그릇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눅 3:37,38
창 5:1-24 참조. 이들이 다 아담의 자손이지만 가인의 계통이 아니고 셋의 계통에
속한다. 누가는 예수님이 세계 만민에게 보편적으로 관계된 구주님이신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렇게 족보에도 전인류의 조상인 아담까지 소급한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주님이시다.
그리고 아담의 아버지가 하나님인 듯이 여기 표현된 것은 실상 하나님께서 아담을 낳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그가 아담을 권능으로 창조하신 것을 가리킨다. 아담은 자연적인 부모에게서 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성립되었다. 그러면 인류의 존재가 초 자연에서 기인한 동시에 그 구원도 초자연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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