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이것은 그 때에 벌써 전파되어 들은 자들이 믿고 있는 복음의 모든 사실들을 가리킨다.
눅 1:2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 - 여기 "말씀"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서 나타내신 복음이 모든 말씀과 사실을 가리키고 "목격자"들은 눈으로 친히 본 자들이요, "일군된 자"들은 복음에 봉사하는 자들이다
붓을 든 사람들이 많은지라 - 여기 이른바 많은 집필자는 누구들인가? 가경 집필자들은 이 반열에 들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가경은 그 때에 없었고 그보다 퍽 뒤에 나온 문학이기 때문이다 풀러머는 말하기를 " 누가는 마태복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 점에 있어서 마태를 생각하지 아니했을 것이고, 마가를 생각하였는지도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크레다너스도 여기에 마태는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후 마가는 생각되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또한 캐드베리느 여기 "많은지라"라고 한 말은 "매우 많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 이 귀절은 누가가 이 글을 기록하는 이유를 보인다. 예수님에 관해여러 사람들이 기록했지만 누가 자신만큼 자세히 기록할 수 없는고로 그가 붓을 든다는 것이 이 귀절이 의미이다. 누가는 복음을 기록할 수 있는 자격으로서 몇가지를 생각하였으니 (1) 모든 일을 알았고 (2) 근원부터 알앗으며 (3)자세히 미루어 알았음이다.
"미루어 살핌"은 헬라원어로 파레콜뤼데코티(* )라고 하는 데, 어떤 사실을 연구함에 있어서 연구자가 그 생각을 미루어서 그 곁에 가까이 연접하여 알아봄으로 명백한 지식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 누가는 이와 같이 자세하게 살펴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 에수님에 관한 기록이 도합 170부분이 있는 48부분은 독특히 누가복음에만 있다. "데오빌로"란 이름은 이방인들중에 많고 유대인들 중에는 이 이름이 예디이야로 불려진 것이다. "각하"란 말은 벼슬의 지위있는 자들에게 붙여준 말이다.
눅 1:4
확실함을 - 이것은 헬라 원어로 텐 아스팔레이안(* )이라 한다. 이 말의 위치가 4절 끝에 있어서 힘있게 나타난다.
눅 1:5
아비야 반렬 - 제사장을 24반렬로 나눈 것은 다윗왕으로 말미암아 된일이다. (대상24:7-19). "아비야"는 엘르아살의 자손인제 제 8반렬이었다. 한 반렬이 매 6개월만에 한번씩 성전에 가서 7일 동안 봉사한 것이다.(대상 9:25)
탈무드 라는 책에 말하기를 "주후 70년 8월 4일에 제 8반렬의 당번이었다고 할까 거기서 계산하여 보면 아비야 반렬이 로마 연대로 748년의 4월 주간과 10월 주간에 봉사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레요한은 이 봉사 후 9개월만에 출생한 것같은데 이 봉사가 4월 주간이라면 예수님의 출생은 요한의 출생 후 6개월이 지난 대에 된 일이니 749년 7월경이겠다. 그러나 그 봉사가 10월 주간이라면 750년 1월경이겠다. 지금까지 쓰고 있는 성력 연대는 로마의 다이오니시우스가 주후 525년에 그릇되게 계산하여 발표한 것이다.
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 이것은 그들이 도무지 죄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고 다만 사람들 앞에서 책 잡힐 일은 없다 함이다. 그들의 행위의 표준은 하나님의 눈 앞에 맞추어 가려는데 있었다. 여기 "의인"이란 말은 노아, 욥 같은 이들에게도 사용되었다.(창6:9, 7:1 : 욥1:1,2:3). 주의 모든 계명과 규레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계명"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규례"는 그 명령을 실행하는데 관계된 모든 법칙들을 가리킨다.
눅 1:7
저희가 무자하고 - "무자"한것은 구약에서 부끄러운 일로 말한다(레20:20,21:렘22:30;창15:2, 16:2,30:23; 삼상1:2-11)
눅 1:8,9
반렬의 차례대로 - 제 5절에 해석한 것과 제사장들이 반렬은 매 6개월만에 한번씩 7일 동안 성전에서 봉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직무에 있어서 제비를 뽑은 대로 각기 할 일을 정하였다. 분향하는 일에 대하여 제비 뽑기는 하루에 두번만 있고 그 일에 당선되기는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일에 책임 맡은 자느 다른 두 제사장의 도움을 받는다. 한 사람은 향단에서 재를 담아다 내어버리고 한 사람은 새로 불을 담아다 향단에 놓고 그 후에는 책임 맡은 제사장이 분향한다고 한다. 사가랴의 한 일은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렇게 요긴한 일을 하던 중에 있었다.
눅 1:10
모든 백성은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 의인 사가랴는 성소 안에서 분향하고 성소밖에서는 백성들이 기도로 도왔다. 이것은 이상적인 예배였다. 그러한 시간은 하늘에서 좋은 소식이 올 수 있다.
눅 1: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 이는 천사 가브리엘이었다. 그가 향단 오른편에 벌써 와서 있는 것을 사가랴가 발견한 것 뿐이고, 그의 찾아 오는 광경을 본 일은 없다. 이것을 보면 천사는 그의 시간을 자기 사명 외의 다른 일에 별로 쓰지 않는다. 그는 사명을 위하여 문득 나타났다가 그것이 끝난후에는 즉시 가버린다. 그는 그의 내왕에도 시간을 많이 잡지 않는다. 이렇게 사명 이행에 그의 쾌속한 걸음은 우리의 모본이다.
눅 1: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존과 갑자기 접촉하게 될 때에 두려워하게 될 것은 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존은 사람보다 탁월하고 또한 사람에게 낯이 너무 선 까닭이다. 그러므로 천사는 사가랴의 이름을 부럴주므로 그로 하여금 친근미를 느끼게 하여서 그의 공포심을 없애려한다.
눅 1:1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여기 "간구함"이란 것은 어느 때의 것이었느냐? 그가 향단에서 분향할 때의 것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그이 평소의 것이라는 학자도 있다. 우리는 이것이 사가랴가 그 때에 분향하면서 드린 기도라고 생각한다. 사가랴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드리는 기도는 자기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한 것이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종인 만큼 이스라엘 구속의 대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이 출생되로록 허락하심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한 사가랴의 기도를 허락하심이었다.
네 아내 엘리사벱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 헬라 원어에는 이 귀절 첫 머리에 또한( ) 이란 말이 있다. 플러머라는 학자는 이 "또한 "이란 말에 주목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삭랴의 기도를 들으섰다함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시게 되었다는것이다. 그 위에 또한 사가랴에게 복을 더행 줄 것으 다그에게 요한을 출생하게 함이었다."고 하였다.
그 이름은 요한이라 - "요한"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을 가진다.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이 남을 기뻐하리니 - 세례요한은 말라기 이후 첫 선지자로서 400년만에 처음으로 땅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출생을 그의 부모 뿐만 아니라.다른 모든 사람들도 기뻐할 수 밖에 없었다.
눅 1:15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위대하여 질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가 그의 사명에 있어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자가 될 것을 가리킨다.그가 광야에서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회개를 부르짖을 때 도시사람등은 그에게 물밀듯이 찾아왔다. 이것을 보아서 그의 성결한 생활이 대중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그가 사람을 찾아 다니면서 전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간 것이다. 그가 광야에 살며 예언한 것을 보아서도 그의 사역의 성격을 알 수 있으니 (1) 강직하여 진리를 굽히지 아니한 것 (2)염결하여 인기나 명예를 취하지 아니한 것. 그는 자기 자신에게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하였다가. 그가 이와 같이 엄결하여 이 세상 쾌락이나 영광을 받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주님에게 돌림에 있어서 진실하였다. 이것은 위대한 성결이다.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 이것은 하나님께 드림이 된 자 곧,나실인의 생활 방식이다. 삼손도 그러한 사람이었고 사무엘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술에 취하지 않도록 극히 주의하는 생활이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봉사할 때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일하였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세례 요한은 모태에있을 때에도 주님의 모친이 오시는 때에 뛰놀았다. 이것을 보면 그가 모태에 있을 때에소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것은 , 그가 자기의 사명을 잘 실행하기에 족한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총명이 있으며 또한 깨어 있어서 신려안 일을 잘 깨달은 자였다. 그는 모태에서 벌써 주님의 모친을 감각하였다. 술에 취하며 세상에 취하면 신령한 일에 대하여 감각이 없으나 , 성령이 충만하면 신령한 일에 분변력이 민첩하여진다. 진리의 증인은 이와 같이 신령한 일에 대하여 잘 분변할 수 있어야 한다.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 이것은 세례요한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며 세례 받게 한 일을 예언함이다. 세례 요한이 외칠 때에 바리세 교인들까지도 그를 찾아왔으니 그것을 보면 그의 회개운동이 얼마나 컸는가!
눅 1:17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 - 이 말씀은 말4:5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즉 엘리야가 강정한 예언으로 회개를 재촉한 것과 같이 요한도 그렇게 하리라는 말씀이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 이 문구의 해석은 좀 어렵다. 이 뜻은 (1)아비들이 그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으리 만큼 시대가 타락했는데 이제 요한이 회개를 전파하여 아비된 자들이 그 자식을 사랑하리라는 말이라고 하며 (2) 아비의 마음곧, 경건한 부조들의 정신을 그 자손들에게 회복시키리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 이것은 하나님을 불신앙 하는 자를 신앙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뜻이다.
눅 1:19,20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 성경을 보면 천사들의 이름들이 알려진다. 하나는 가브리엘이고 또 하나는 미가엘이다. "가브리엘"이란 말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서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천사라는 것을 가리킨 듯하고, "미가엘"이란 말의 뜻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리요"라는 것이니 , 하나님을 위하여 사단과 싸우는 전쟁의 사역을 하는 천사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가브리엘이 자기의 이름을 소개하는 이유는, 자기의 권위를 내세우려 함에 있지 않고 자기가 전하는 말은 자기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 만큼 권위와 권세를 가진 사실을 알리려 함에 있다. 이러한 권위와 권세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죄악이니 이 죄악 위에 징계가 내릴 만하다. 그러므로 사가랴는 벙어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벙어리되므로 인하여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렸으니 그 징게는 그에게 유익한 것이었다.
눅 1: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가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 "성소"는 거룩한 장소니 거기서 사람이 실수하다가 징계를 받은 일이 많다. (레 16:1-13). 그러므로 제사장이 그곳에 들어갔다가 빨리 나오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며 근심하게 되었다. 탈무드경에말하기를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빨리 나오는 법이었다. 그 이유는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근심시키지 않으려는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
눅 1:22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안에서 이상을 분줄 알았더라 - 사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반대한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아 벙어리가 되었다. 이 때에 사가랴는 귀머거리까지 되었다. 그것은 눅 1:62이 보여준다. 거기 말하기를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었으니"라고 하였다. 그가 말을 잘 들었다면 어찌하여 그에게묻는 사람들이 말로 물어 보지 않고 형용하여 물어보았으랴? 화란 주석가 크레다너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가 이렇게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것은,
(1)그가 받아 마땅한 벌이었다. 우리에게 귀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기 위한 까닭이요, 우리에게 입이 있는 까닭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고백과 간증과 찬양 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가 귀와 입을 가지고 이러한 믿음이 일들을 안할 진대 귀머거리 되고 벙어리 됨이 오히려 낫다. 그 이유는 불신앙하면서 귀가 열려 있고 입이 열려 있으면, 불신앙의 말을 드기도 하며 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귀와 입으로 범죄함보다 귀머거리 되고 벙어리 됨이 좋다.
(2)그에게 귀머거리와 벙어리 되므로 유익한 일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첫째는 그가 그렇게 되므로 회개하고 믿는데 이르렀고 둘째는 그가 그렇게 되므로 그가 받은 계시의 내용을 경솔히 또는 너무 밝히 세상에 드러내지 아니하게 되었다. 엘리사벳도 수태한 후 6개월 동안 숨어 있어서 그 받은 바 계시를 나타내지 않았다 . 사가랴가 그받은 계시에 대하여 세상에 조급히 드러내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눅 1: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 이것은 제사장으로서 봉사하는 기간이 찼으므로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눅 1:24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 왜 엘리사벱이 숨였던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그것은
(1)그가 수태한 여부를 확실히 안 후에 대외적으로 나서려는 동기에서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
(2) 수태하게 된 은혜에 대하여 갑자기 흥분된 감사를 실현시키는 것보다 점점 나타내는 것이 더욱 덕스러운 것이므로 그러한 것이라 한다.
(3)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그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
(4)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곧, 이 귀절부터 45절까지를 읽어보면 엘리사벱이 수태한 후 6개월만에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게되었으니 엘리사벱이 수태한 후 숨어 있다가 제일 처음 마리아를 면회하게 되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듯하다.
주님에게 사용될 태중 요한이 먼저 세상 다른 사람들을 접촉하기 전에 태중에 계신 주님께 접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실 때에도 사람들이 타 보지 않는 나귀를 사용하신 것과도 같다.(막11:2)
눅 1:25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 이것은 엘리사벱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이다.. 그가 무자하므로 세상에서 부끄러움이 있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들 없는 수치를 없이하여 주셨다.
눅 1:26
여섯째 달에 - 이는 엘리사벱이 수태한지 여섯째 달을 이름이다. 나사렛. 이 동네 이름이 구약에는 없 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 신흥한 곳이라고 할 수 는 없다. 이 곳은 현제 "엔 나시라"라고 하는데 인구가 5000명이며 기독교인이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은 꽃이 많고 원근에 있는 산들을 많이 바라볼수 있다고 한다.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처녀"라는 말과도 연결될 수 있으니 만큼 학자들의 해석은 갈린다. 그러나 학자들의 많은 수효는 이것이 "요셉"이란 말과 연결 된다고 한다.
마리아. 신약성경에 이 이름 가진 여인이 몇이 있다.
(1)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눅1:27)
(2)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요19:25)
(3)막달라 마리아(막15:40,47)
(4)제다니의 마리아(눅10:39)
(5)로마의 마리아(옴16:6)이다.
"마리아"란 말의 뜻은 "높이 된자"라는 것이다. 마리아는 과연 그 이름과 같이 높임이 되었다. 그의 찬송도 낮은 자로서 높임이 된 사실을 찬미한다. 그 노래에 말하기를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하였고 또 말하기를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라고 하였고 , 또 다시 말하기를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라고 하였다.
눅 1:28
은혜를 받은 자 - 로마교 신학자들은 이 말을 의지하여 마리아가 은혜와 축복으로 옷입듯이 되고 충만하게 되어 거기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 중 다우쉬라는 이가 말하되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은 메시야 곧,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 될 분에게 불러질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성결과 완전성이 마리아에게 불러질 수 있는 것을 생각하여 하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로마교에서는 이렇게 과도히 마리아를 숭배하여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문 까지 지었으니 곧 "거룩한 마리아여! 하나님의 어머니여! 이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서서 또한 우리가 죽는 시간에 기도하여 주서서"라는 것이다. 이 기도문은 1568년에 법황 피오 5세로 말미암아 교회가 채용하도록 작정되었다. 그러나 이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우리 분문 28절의 말씀은 마리아가 절대의 성결과 온전의 덕을 가지게 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모친되실 높은 복을 받은 사실과 및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사실을 가리켰을 뿐이다.
눅 1:29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 마리아는 그가 본 천사의 한 말에 대하여 이해가 곤란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가 이런 기이한 일의 체험에 관습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러한 일을 구하거나 혹은 숭상하지 않았다.그는 이런 기이한 일이 있는 때에 도리어 놀라고 고민하였다. 사가랴도 역시 그러하였다. 사가랴나 마리아를 가리켜 환상보기를 즐기는 환각가라고 하는 비평가들은 크게 그릇된 자들이가. 여기 "생각하매"란 말은 헬라원어로 디엘로기제토(* )라고 한다. 이것은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생각하는 중에 있었다."는 말이다.
눅 1: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천사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른 이유는 마리아의 공포심을 덜어주려는 까닭이다. 사람은 자기의 읾이 불리우는 때에는 그 불러 주는 자와 친하여지는 감상을 가지게 된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 헬라 원어에는 이 말씀의 첫 부분에 가르(* ) 곧,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무서워 하지 않을 이율마 보였으니 곧.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얻었다는 거이다. 은헤를 얻었다함은 낮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나 혹은 웃사람에게서 좋은 대우 받게 됨을 이름이다. 이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모친이 되는 큰 복을 받게 된 사실을 가리켜 말한다.
눅 1:31
예수 - 이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가진다.(마1:21)
눅 1:32
저가 큰 자가 되고 - 눅1:15에 세례 요한은 "주앞에 큰자 "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주앞에서 선지자의 서명을 받아 행할 자로서 위대하리라는 의미이다. 여기 말한대로 예수님의 위대는 그런 제한된 것이 없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 헬라원어로 휘오스 휩시스투(* )이다. 여기 "지극히 높으신 이 "란 말 위에도 "그"라는 의미 있는 관사가 없고 "아들"이란 말 위에도 없다. 그것은 두 분이 다 독일 부이하신 분들이십을 표시한다.
그 조상 다윗이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 이것은 다윗에게 예언한대로 되는 일이니 이 세상 나라가 아니고 신령한 나라의 왕위를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예언하시기를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케 하리라 고 하신 일이 있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예언이니 , 솔로몬의 계승으로 다윗 왕통이 영원히 있으리라는 뜻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예언에 기초하고 모든 예언들은 다윗 왕통에서 영원한 왕이 오실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렘23:5에 말하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라 이르리니 네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르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라고 하였고, 겔 34:23,24 에는 말하기를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이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이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말이니라"라고 하였다. 사9:6,7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께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하였
고 사11:1-10에 말하기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이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치 아니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니띠르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땐 아이가 독사의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삼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음이니라 그 날에 이 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이 기호로 설것이요, 열방에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하였다.
위에 기록된 예언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왕이 날것을 가리키는 데 그 왕은 (1) 의로우신 분이고 (2)목자의 일을 하실 분 곧, 강포로 다스리지 않고 긍휼과 자비로 구원하시는 분이시고 (3) 참 사람이 시며 하나님이시며 (4) 끊기웠던 다윗 왕통에서 나실 분이시고 (5) 성령으로 일하시는 분이시고 (6) 그 존재와 활동이 영원하신 분이시다 위의 여섯 가지 성질을 가지신 인물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다잇의 왕손으로 이실 영원하신 왕이시다.
눅 1: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 "야곱의 집"은 신령한 백성 곧, 하나님이 백성을 가리키는바 그들은 만국 중에 섞여 있다.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하였으니 그 나라는 흥망 성쇠를 그 특성으로 가지고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눅 1:34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일이 있으리이까 - 이것은 마리아가 천사의 전한 말을 의심하는 의미의 말이 아니고 오직 그 말씀이 이루어질 방도를 물음이다. "어찌"라고 번역된 헬라원어 "포스(* )"는 "어떠한 방도로"혹은 "어떻게"라는 의미를 가진다. 마리아는 천사의 전한 말씀을 믿고서 그 이루어질 방도를 탐문하였으니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진리를 찾아 보는 귀한 마음이다. 이것은 좋은 믿음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입은 엘리사벱이 마리아를 가리켜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45)라고 하였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란 헬라원어는 "나는 남자를알지 못하는 고로"라고 번역할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어떤 남자든지 모르는 순결한 미혼 처녀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 거록한 천사 앞에서 무엇이든지 감출수 없는 줄 아는 그로서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눅 1:35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 여기 "덮으시리니"라는 말은 헬라원어로 "에피스키아세이(* )"라고 하는 데 "그림자로 덮는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행5:15에도 있다. 거기 있는 말씀의 요지는 베드로가 거기를 지날때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이 다시 예수님의 변화산 행적의 기록에도 나온다 거기에 말하기를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느지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이 마치 그림자가 와서 가리우듯이 혹은 구름이와서 덮는 듯이 , 인간의 지헤로는 알 수 없게 역사함을 의미한다.
눅 1:36
네 친족 엘리사벱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 그 천사는 하나님의 권능이 벌써 실제로 엘리사벱에게 나타난 것을 마리아에게 지적해 보인다.
눅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 이 귀절자다 그 윗 귀절의
이유를 보인다. 늙은 엘리사벱이 수태 하게 된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무소불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가리킨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다 이루어지는 법이다.
눅 1:38
이 귀절은 마리아가 그 가진 신앙을 더욱 견고한 순종의 양식으로 고백한 말씀이다. 믿으면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의 신앙은 더욱더욱 장성하는 법이다.
눅 1:39
마리야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마리아는 어제나 진리를 탐구하는 귀한 신자였다. 그는 믿는 마음으로천사의 말대로의 사실을 더듬으려고 길을 떠난다. 그는 이와같이 귀한 일에 걸음이 빨랐다.
유대 한 동네 - 이 동네의 이름은 모른다. 그러나 즈안은 유대 한동네란 말을 "유대라는 한 동네"라고 번역하여 이 동네 이름이 "유대"임을 밝혔다. 그것은 헬라원어로 보아서 할 수 있는 마이다 수 15:55,21:16을 보면 유대 지방에 "윳다"라는 고을 이름이 있다. "윳다"라는 고을은 즈안 박사가 말한대로 "헤브론에서 부터 두 시간쯤 남쪽으로 내려가 아름다운 언덕위에 있는 그 부근에는 감람과 포도가 많고 거기서 한 시간 서쪽으로 감녀 사해로 향하여 내리붙은 광야가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눅 1:41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 이것은 성령이 감동으로 되어진 움직임이 었다. 이렇게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은 그의 모친 엘리사벱에게 역사하시게 되어 충만을 이룬 것이다. 크레다너스는 말하되 , "성령님의 역사의 순서는 아이에게 시작하여 엘리사벱에게로 이른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순서는 아니었다. "라고 하였다. 이 때에 엘리사벱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그 때에 마리아에게 대하여 예언하기 위한 것이겠다. 엘리사벱의 예언은 다음 귀절에 나온다.
눅 1:42-45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이것은 마리아가 여자들 중에 유레없는 높은 축복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태중의 아이 - 이것은 헬라원어에서 글자대로 번역할 때에 "태의 열매"라고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마리아의 혈육에서 출생되셨다.
"복이 있도다"라고 한 말은 "율로게메노스"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베푸신 귀한 복을 알아보고 찬양함이다.
눅 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 이 말씀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도무지 임하지 않는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특수하게 임한다는 것이다.
눅 1:51-53
이 귀절들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주재이신 고로 인생의 운명을 이와 같이 자기의 장중에서 교체시키신다는 뜻을 보인다. 이것은마리아의 체험한 바이지마는 미래에 대한 예언도 된다. 이 귀절의 동사들(흩으셨고, 내리 치셨고, 높이셨고, 보내셨도다)은 모두 과거 시상이다. 예언은 그것이 벌써 성취된 듯한 확실성을 가지는 고로 과거 시상으로 표현되는 수가 많다.
눅 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 여기서 "이스라엘"을 "종"이라고 한 것은 그 백성이 전혀 하나니을 섬기기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도우사"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안테라베토(* )이니 돕기위하여 붙드는 것을 의미한다. "긍훌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라는 말은 긍휼을 기억하신다는 의미이다. "여기 "기억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옛날에 메시야 보내실 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는(창12:1-3), 그 후 2000년 가까이 지난 긴 세월로 그 약속은 다 잊어버려진 듯이 사람에게는 생각된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하나님에게는 기럭되어 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곧 그가 잊으셨을 것 같은 데도 그렇게 오랜 세월 후에도 그 약속을 기억하셨다는 일종의 찬송이다.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을 잊은 듯이 아무런 은고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잊으신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대한 축복 방법과 시일은 그들도 모르게 오묘하게도 내정되어 있는 것이다.
눅 1: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 이 말씀은 윗절의 긍휼을 기억하심이 어떤 내용임을 보여준다. 곧, 아브라함을 위시한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내용대로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그 성취는 물론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관계된 메시야의구원 운동이다.
눅 1: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 이것은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출생하는 때까지 있다가 나사렛 집으로 돌아갔다는 뜻이겠다. 다시말하면, 그는 세례 요한이 출생된 것을 본 듯하다. 그 것은 다음 귀절이 우리로 하여금 추상하게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눅 1:57
해산할 기한이 차서 - 세례 요한이 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늙은 부부에게 허락되었으나 그 출생의 기한은 보통 아이들과 같다. 하나님의 기적은 자연 법칙을 초월하나 그것을 멸시하지는 않는다. 옛날 어떤 영웅은 날 때에 그 어머니의 옆을 터뜨리고 나왔다고 한다 . 이런 것은 자연 법칙을 멸시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이적은 아니다.
눅 1: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 여기 "친족"들 가운데는 마리아도 들어 있을 듯하다. 56절의 해석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 때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해산한 것을 본 뒤에 나사렛으로 돌아간 듯하다. 그들이 즐거워한 것은 매우 귀하다. 그들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은 것을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라고 옳게 본 까닭으로 기뻐하였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은 무엇보다 행복스러운 일이다.
눅 1:59
사가랴 -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고 함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들의 이름을 짓는 풍속은 유대인들 중에 보통이었다.
눅 1:60,61
요한 -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은혜"라는 것이다.
눅 1:62
형용하여...물으니 - 우리는 이 말씀을 보아서 사가랴의 벙어리만 된 것뿐아니고 귀머거리까지 된 줄 알 수있다.
눅 1:63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 그들이"기이히 여긴"이유는 그 가문에 일찌기 없었던 이름인 "요한"을 두 부모가 일치하게 채용하기 때문이었다. 그 부모가 그렇게 주장하게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실이 있었다. 그 때 "이웃과 친족들"은 이 사실을 생각하고 기이히 여겼을 것이다.
눅 1:64
이에 그 입이 곧 얼리고 - 그는 벙어리되어 있던 중에 회개하고 믿읊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 받았던 징계는 해제되어 떠나가므로 말하게 되어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 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까지 하게 되었다.
눅 1:67-69
사가랴의 이 예언시는 마리아의 것과 대조된다. 마리아의 것은 왕적이고 사가랴의 것은 제사적이다. 이 예언은 구약의 최후 예언이다.
이 예언시의 이름을 옛날부터 베네딕터스(benedictus)라 한다. 이것은 죄인 구원에대한 것이니
(1)그 구속의 방법은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심이다. "뿔"은 힘을 가리키는데 하니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능력이다.(롬1:6) 뿔에 대하여 삼상2:10, 삼하22:3,시75:10을 참조하여라. 이 뿔에 나타난 5것은 구약 예언대로 나타난 일이니 (71-73), 우리의신앙을 끄는 신실 무의한 사실이다. 예언 성취로 나타난 일의 내용은 우리에게 아주 믿기 쉬워진다.
(2) 구원의 목적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한다는 것이다. 여기의 두려움은 노예적인 공포를 가리킨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죄를 받은 고로 이제는 종이 아니고 그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친자 관계의 융통성을 가진다. "성결과 의로움으로두려움 없이 섬김"은 위로 하나님에게 헌신하고, 아래로 인간에게 바로 행하는 자격으로 하나님을 섬김이다. 우리가 구속받는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봉사를 더 잘하게 하려 함이고 쾌락한 생활을 얻으려 함이다.
(3) 이 구원의 성격은 의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시상식의 것이 아니고 죄를 사함으로 구원하시는 은혜와 긍휼이다. "내가 의인을 불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그 뿐아니라 가장 불행한 계급의 인생들 곧,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주시는 구원이다.(마4:14-16)
우리 본문에 있는 "돋는 해"란 말은 진리를 주시어 인생의 갈 길을 알게 하시므로 영생을 얻게 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