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3,4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유다는 예수님께서 무죄하게 죽으시게 된 것
을 알고 이제 후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 스스로의 후회니 만큼 참된 회개는 아니었다. 따라서, (1)그가 사람 앞에
죄를 고백하나 하나님 앞에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는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찾아 갔으나 저희는 그를 동정할 수도 없고 도와 줄 수도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유다에게 대하여 아주 냉대하였다. 그들은, 은 30을 도로 가지고
온 그에게 말하기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4절)고 하였
다. 주님을 버리고 밤중을 향하여 나간(요 13:30) 그 길은, 이렇게 끝까지 광명없는
쓸쓸한 곳으로 끝없이 향하고 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자는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니었다. 그는 영원히 쓸쓸한 자이고 암흑의 포로이다. (2)그에게는
베드로에게 있었던 참회의 눈물이 없었다. 그는 그의 허물을 뉘우치기는 하였으나 그
의 영혼에는 아무런 변동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픈 눈물이 없었다.
마 27:5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행 1:18을 보면 이 사건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이 있다.
거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고 하였다. 유다가 목맨 후에 그 노끈이 끊어져서 몸
이 떨어지면서 그의 창자들이 흘러나온 듯하다. 어떤 학자들은 말하되, "유다가 목매
어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창자가 흘러 나온 원인은 너무 마음 고통을 당한 까닭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마 27: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이것은 신 23:18에 있는,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이 전에 가져오지 말라..."고 한 말씀에 의지하여 지어 놓
은 규칙인 듯하다. 대제사장들은 이 때에 외식만 숭상하고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면
서 아무런 마음 고통을 느낄 줄도 모른다. 그들은 외식 주의에 아주 굳어지고 말았다
. 그들과 회개와의 사이에는 너무도 먼 거리가 있다.
마 27:7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여기 "토기장이의 밭"은, 무덤
들이 있고 더러운 물건들을 내어버린 힌놈의 골짜기의 동남편에 있은 듯하다. 이 장
소는, 불결한 곳의 대표이다.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다 함은, 크리소스롬(Chrysos
-tom)이나 어거스틴(Augustinus)이 생각한 것과 같이 비유의 뜻도 가진 듯하다. 이
비유의 뜻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교회를 산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마 27:9,10
이 두 귀절은 슥 11:12,13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면 9절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가장 오래된 사본(B)에 "예레미야"란 말이 있고, 후대 사본(수리아 사본)에는 "
스가랴"라고 하였다. 유명한 주석가 라이트푸트(Lightfoot)는 말하기를, "마태의 시
대에 구약의 제 3부 곧, 선지서 전집(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12 소선지)이 예레미
야가 기록하지 않은 선지서의 말씀도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인용된 일이 있다"(B. Bath
-ra, D. Kimchi)라고 하였다.
(2)벴겔(Bengel)은 바라하되, "이 귀절에 있는 '예레미야'란 말은, 본래 사도 원본
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대인이 써 넣은 것 뿐이라"고 하였다.
(3)우리가 아는 대로 후대 선지가 그 전 시대의 선지의 글을 인용하는 일은 확실하
다. 한 예를 들면, 슥 1:4은 렘 18:11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유대인의 전
설에 말하기를, 예레미야의 정신이 스가랴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슥 11:1
2,13은 기록하지 않았던 예레미야의 예언이었는데 후에 스가랴가 그것을 기록하여 전
한 듯하다.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이것은 금요일 저녁이었는데 쓸쓸한 저녁이다. 이제부터 예수님
의 죽으신 것을 안 사람들이 고요히 구슬픈 생각을 가지며 회개할 거룩한 밤이 이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마대.- 이곳은 베냐민 지방과 라마 지방의 사이에 있는 곳을 의
미하였다고 하는 의견이 있고(수 18:25), 에브라임에 있는 라마 지방을 가리킨다는 의
견도 있다(삼상 1:19).
요셉...그도 예수의 제자라.- 그는 일찌기 예수님을 나타나게 따르지는 않았지만 역
시 은밀히 그를 사모하던 제자였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봉사한 사람들 중
에 "요셉"이란 사람들을 뜻있게 본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로 게실 때에도 "요셉"이
란 사람이 그를 보호하였는데 이제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또 "요셉"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 봉사한다.
그런데 이 요셉이 나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한 일에 대하여 몇 가지 생각할 교훈
이 있다.
(1)감추인 의인. 엘리야는 자기만 하나님의 선지자로 남은 줄 알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천을 남겨 두었다고 하심에 대하여 놀랐을 것
이다. 의인은 악한 시대에 낙심할 필요는 없다. 그도 알지 못하는 중에 그와 공명하
는 자들이 있다.
(2)평시에 친밀하지 못한 듯하나 환난 때에 친밀해지는 은인도 있다.
(3)처음에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하고, 오직 전에는 알려지
지 않았던 자가 어려운 때에 제자로 가까이 와서 섬긴다. 이것은, 이 세상에 한편 배
신도 많지만 다른 한편 기대 밖에 충성된 자도 나타나는 원리를 보인다.
(4)아리마대 요셉은, 그 무서운 환난 중에도 담대히 나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하
였다. 이 용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5)예수님의 장례는 가장 쓸쓸하고 적막한 것이었다. 그것도 역시 고난의 메시야의 성격을 보인다. 그의 많은 제자들 중 아무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채근하는 자 없었고, 다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한 산헤드린 공의회 곧, 그의 원수들의 회중에 숨었던 한 사람이 나와서 그이 시체를 장사한 것이다.
마 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 사 53:9 참조. 이 말씀은 그의 장례의 또 한 가지 적
막한 방면을 가리킨다. 그는 묻힐 곳도 없었으므로 남의 무덤을 빌리게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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