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마태복음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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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14:23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5절을  보면,예수님께서 밤중 제 사경에야
제자 들의 배에 도착하셨다고 하니,  그는 이 산중 기도로 거의 철야하신 것이다. 혼자있어서  기도하는 새오
할은 우리 주님께서  좋아하신 것이다.(막1:35-45) 고요히 홀로  기도하며 마음을 닦음은 우리들에게도  절대
필요하니, 그것이 없이는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님께 집중하여 영교할 수 없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그 위
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예수님도 이렇게 유수를 필요로 하셨거든 하물며  우리들이야 말할것이 무엇이랴? 이런
유수가 없이는 경건의 능력을 얻기 어렵다. 이런 유수 끝에는 우리의 생활에 능력이 나타난다.

 

  마 14:24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예수님께서 계시지 아니하니  어찌 역경이 아니랴? 예수님
이 계시지  않은 심령에도  이렇게 평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이 폭풍에 불린  교회        
(배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의 비유)를  버리신것이 아니다.  그는 이  교회를 위하여  하늘에서 기도하시낟.  비록          
파도에 몹시 부대끼지만 예수님의 기도가 있는 한 무슨 염려가 있으랴?
 식물학자는 말하기를 과실은 수목의 그 자라나는 힘이 막히어 뭉친 부분이라 한다.  그처럼 인간은 역경으로
인하여 전진 대신에 여물어지는 영적 과실을 가지게 된다.

 

  마 14:25

   예수께서 바다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위험중에 빠지매 예수님은  바다위로 걸어서라
도 급부하실 사랑과 열성이 크시었다.  그의 이적보다는 그의 애정이 앞선 것이다. 이 때에  에수님은 바다라
도 성큼성큼 들어서리 만큼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에 불타셨다. 그런  사랑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 초자연적 이적이 나타난다.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시니 우리가 염려할 것이 무엇이랴?

 

  마 14:26

   여기  바다 위 라는 것은, 해변을  의심하지 않고 바닷물 위를 의미한다. 물 위로 걸어 온다는  것은, 사
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보고 놀라 유령이라  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자연계의 모든것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아들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권능으로 이와같이 하신  것이
다.

 

  마 14:27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이 말씀은 그가 인류의 구주이신 주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인류에게 진정한 안심을  
주는 이는,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아들 밖에 없다. 그 분만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낟. 그러므로 우리 본문에     
도  내니 란 말씀이 두드러지게  나와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흔히  부탁하
시는 말씀이다. 성경에 이 말씀이 도합 365번 있다고 한다.

 


  마 14:28

   베드로는 여기서도 자기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누구보다도 솔선하는 행동을 취한다.  그가 말하기를,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우로 오라 하소서  할 때에 신앙으로 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주님
이 그를 도와주실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 신앙은 순간적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을 지속하기 위한  모든 연단
이 우리에게 절대 필요한 것이다.

 


  마 14:29,30

    베드로는 주님을  보고서 그 놀라운 능력을  의뢰하고 또 그를 반갑게  생각하여 물로 성큼 내려섰으니  그것은    
과단성 있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예수님에게 대한 애모는 과단성 있는 신앙행위를 나타내기 쉽다.  과단성은 지
속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침내 일어나는 바람을  보고 공포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그로하여금 실패케 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 때에 바람을 제압하시고 걸으시는 에수님을 보지  않고 바람만을
본 고로 그만 공포심에게 사로잡힘이  된 것이다. 신앙의 지속은, 세상을 보지 말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보는 심령이라야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영적으로 보는 방도는 항상 기도함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으가
묵상함에 있다.

 

  마 14:31

   베드로가 예수님의  오라 는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 물위에  내려선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바람을
보고 무서워 한 것은 사소한 일로 동요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모순된 일이다.  크게 움직인 자가 작은 일로
도용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인간성의 결함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믿음은 적은 믿음이다.

 


  마 14:32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친  것은 뜻 있는 일이다. 그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  평강이 있
을 것을 보여주는 신령한 교훈도 된다.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에, 예수님은 자연계(물결이나 바람)를  지배하시는 자니 만큼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이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다. 요10:31-33, 5;18 참조

 


  마 14:34

   게네사렛 땅.- 이것은 갈릴리 서북방 곧, 가버나움이 있는 지방을 가리킨다.

 

  마 14:35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영적 욕망 보다도 육적  욕망 때문에 그들은 눈이
밝아서 예수님을  알아본다. 이렇게 인간은 육체적 소망에 대하여는 민첩하다.

 

  마 14: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이 말씀은 몇가지 사실을 생각케 한
다.  곧, (1) 그 때에 무수한   사람들이 따르므로  일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서  극도로 분망
하시게  다니셨다는 것.  그는 그  많은 사람을 하나하나  만나볼 겨를이  없으셨다. (2)그 모여  
온 무리들이 신앙이  간절한 사실.   병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의 옷가에라도  만지기 원하는 것
은,  무식한 믿음이라고  할지는 모르나 간절한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무식한 믿음이라고  해
서 반드시 다  미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예수님의 옷가라도 만진  것은, 그 옷을  숭배
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극도로  숭배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숭배를  상칙
으로 가지거나  교리화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을 교리화 하게  되면, 사람들이  실제
에 있어서 예수님과  직접 관련 없이,  그저 관념적으로만  에수님의 이름을  붙인 어떤  물체나
형상에게  숭배하려는 미신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비록 어떤  
사람의 간절한 믿음의  표현이라도 어떤것을 그  사람에게 있어서만 합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법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느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숭배하여  그렇게 한 것이니 만큼 지극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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