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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7:1

  바벧론 왕 벧사살 원년에 - "벧사살"을 "왕"이라고 한 문제에 대하여는 5:1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경 기자(記者)가 그 계시(啓示) 받은 연대를 밝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사람의 상상(想像)이 아니고 확실한 역사성(歷史性)을 가진 사
건(事件)이다. 그러므로 그 나타난 연대를 정확히 가지고 있다.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 다니엘이 본바 계신는, 말 소리를 들음으로 온 것이 아니고,  보
여줌과 보는 것으로 왔다. 이 계시 방법("보여줌"의 방법)이 들음으로 되는 것과 특별
히 다른 점은, 그 계시를 받는 자의 몸에 영향을 준 사실이다. 이런 방식으로  계시를
받은 에스겔이나 다니엘은 엎드러졌다고 한다. 그가 그 때에 그렇게  엎드러진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가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힘이 그 계시 받는 자에게 영향을 준
결과이다(Vos,Biblical Theology, p. 242). 다니엘이 계시 받은 후에 몇 날 동안 병이
났다고도 한다(7:28, 8:27).
   그런데, "이상"(異常)과 "꿈"의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도 말하기  어렵다.  보스
(Vos)는 생각하기를, 이 둘의 차이는 몸에 영향을 주는 여부로 밝혀진다고 한다.  곧,
"이상" 가운데는 몸이 피로하여지는 일이 종종 있으나, "꿈"가운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idem, p.242). 특별히 아람 원문을 보면, "꿈"이란 말은 단수이고  "이상"이란
말은 복수인데, 한역(韓譯)에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둘 다 단수로 번역되었다. 이  단
수와 복수의 이유는, 꿈 하나에 여러 이상(異象)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겠다. 단수와
복수의 이러한 용법은, 2:28, 4:5,10,13에도 나타나 있다.
   다니엘이 받은 "이상"을 가리켜 "뇌 속으로 이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뜻은,  그
이상들이 다니엘의 심리 작용에 기원(起源)을 가진다는 것은 아니다. 이 아래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 꿈의 기원은 초자연적이고 인간적이 아니다. 그러면 "뇌 속으로 이상
을 받"았다 함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가 초자연적 계시를 받되 마음의 명백한  활
동을 가지고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얻은 꿈은 더욱 무게를 가지고  있다.  이런
방식은, 다니엘의 뇌에 어떤 혼잡이 없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알리
고자 하신 것을 그의 맑고 안정된 마음(뇌 속)에 꿈으로 알도록 하셨다(Calvin). 그리
고 다니엘로 하여금 그 꿈을 그의 기억에만 남도록 하시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그것을 기록하도록까지 하신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인간 편에 자주 의식 없이  되어
진다는 소위 입신(入神)과 다르다.
   다니엘이 기록하여 진술한 것은, 우리 한역대로 "그 일의 대략"(*       =레-쉬)이
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영국 왕역, 미국 표준역, 개정 표준역이 지지하는 바이다.  어
떤 비평가들은 이 번역을 받지 않는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말하기를, 이  말(*      
)에 대한 번역은, 차라리 그 이야기의 "시초"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  힛
튼(Heaton)도 몬트고메리(Montgomery)의 의견을 지지하며 생각하기를, 이 말 뜻은, 그
이상(묵시)의 단편적 제목을 의미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인 한국역을
받기 원한다. 이 번역을, 영(Young), 루폴드(Leupold), 카일(Keil)등 학자들이 지지한
다. 이 번역의 의미는 실질(Essence), 혹은 요령이란 뜻이니 곧, 다니엘은 자기  꿈의
골자를 여기 소개한다는 것이다. "시초"라고 하는 번역은 루폴드(Leupold)의  말대로,
요령 없는 것이다. 다니엘이 그 꿈에 대하여 말하면서 왜 시초만 말하였을 것인가? 어
찌하여 모든 체험한 바(적어도 그 "대략"이라도)를 말하지 않았겠는가?

 

   단 7:2,3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 여기 "보았는
데"란 말은 "보는 중에 있었는데"로 번역해야 된다. 이 말이 본장에 여덟 번 나오는데
계속적으로 보는 행동을 말한다. 이 두 귀절은 네 짐승 곧, 네  나라의  기원(起源)을
보여준다.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람 원문에서는 "볼지어다"(*      =아루)란  말
이, "하늘의 네 바람"이란 문구 앞에 나온다.
   "하늘의 네 바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대 주석가들 중 예롬(Jerome)은, 이것들
이 네 나라를 지키는 천사들이라 하였고, 카일(Keil)은,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들을 움
직이도록 세우신 하늘의 세력이라고 하였다. 근년에 이르러 자유주의 학자들 중에서는
고대 신화(古代神話)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찾는다. 예컨대 궁켈(Gunkel)은, 바벧론의
티아맛(Tiamat) 신화에 의하여 이 말을 설명하려고 한다. 힛튼(Heaton)이  그  해석을
지지하여 말하기를, 이 귀절은 바벧론의 창조시(創造詩)를 반영시킨다고  한다.  그가
염두에 둔 바벧론 창조시의 내용은, 바벧론의 신(神) 말뚝(Marduk)이 자기 원수를  잡
기 위하여 네 바람을 붙잡아 두었다는 사실과 또는 그가 후에 일곱 바람으로 무장하고
티아맛(Tiamat)을 죽이고 세상을 창조하려고 나섰다는 사실 등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학자들 중에서도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우리 본문이 이런 신
화적 성격을 띄었다는데 대하여 반대하였고, 보수주의자 영(Young)은 더욱 강력히  반
대하였다. 다니엘이 다신론 사상(바벧론 창조시의 사상)에서 인용하여 글을 썼다는 추
측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독특성과 반대된다. 다니엘의 본바 "꿈"은  계시(啓示)이
며, 그의 기록은 자기의 발명한 바가 아니었다. 더우기 실제에 있어서, 다니엘서의 이
부분 말씀과 완전히 병행되는 고대의 문헌이란 것은 전연 없다. 그러면, 이 문구가 보
여주는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 세상 나라들의 일어남이 하나님이(위에서)  섭리하
심으로 말미암아 되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 나라들은 짐승과 같아서 하나님 나
라와 반대되며 성도들을 핍박한다. 다니엘은, 유대인들이 바벧론에서 해방될 날이  멀
지 않은 때에 이 계시를 보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해방될지라고 또 다시 그들 앞에
는 환난이 접종적(接踵的)으로 있다는 경고이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선 언제나  평안
이 없는 줄 알아야 된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런 험
악한 나라들을 일으키시며 주장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바다"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이 세상을 비유한다. 이 세상 나라들의 흥망성쇠(興亡
盛衰)는, 마치 바다 물결이 일어났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다(계 17:15). 그리고 "짐승"
은 세상 나라들을 비유한다. 짐승들로 세상 나라를 비유한 이유는, 짐승의 잔인무도한
것처럼 이 세상 나라들도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무지하고 성도들을 핍박하기 때문이다.
시 17:12, 74:12-14; 겔 29:3, 32:2 참조. 성도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된다.  곧,  그
나라들이 크고 무서운 것 같지만, 그 나라들도 하나님의 제재 아래 있으므로 필경  그
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 40:12-17 참조.

 

  단 7: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 "사자"는 바벧론을  비유하고(렘
49:19), "독수리의 날개"는 그 군대를 비유한다(렘 49:22). 고고학(考古學)도 역시 우
리 본문의 비유를 지지하여 준다. 날개 돋은 사자의 조각(彫刻)은 바벧론 미술품 중에
서 종종 발견되는데, 날개 돋은 사자가 바벧론 왕궁을 지키도록 한 조각이라든지,  왕
의 행차하는 도로의 벽에 120마리의 사자를 조각한 것 같은 것이  그  실례(實例)들이
다.
   우리 본문의 이와 같은 비유를 보면, 본서의 저작자는 매코비 시대(헬라 시대)  사
람이 아니다. 이러한 비유는 바벧론 색채를 농후하게 보여주고 있나니(Keil,  Young),
결단코 매코비 시대에 팔레스틴의 무명 인사(無名人士)가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학자들 중에서 본서를 매코비 시대의 작품이라고 하니,  그런
이론은 성립될 수 없다.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
의 마음을 받았으며 - 이것은, 바벧론의 국권(國權)이 빼앗긴 뒤에는 그 민족이  보통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Calvin). 사람들이 권세 있는 때엔  짐승처럼  잔인하지
만, 그것을 빼앗긴 다음에는 그 잔인성도 감해져서 사람의 마음을 도로 회복한다.  일
설에 이 말씀은, 느부갓네살의 잔인무도하여 짐승 같았던 성격이 하나님의 벌을  받고
회개한 뒤에는 비교적 겸손해진 것(4 장)을 가리킨다고 한다.

 

  단 7: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들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 "곰"은 사자 다음에 나올 만큼 크고 사나운 짐승이다. 이 두 짐승은 성경
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는 의미로 종종 함께 나온다(삼상  17:34;  잠  28:15;  호
13:8; 암 5:19). "곰"은 사자만은 못한 짐승으로서 여기 둘째번으로 관설된다. 그것은
마치, 제 2 장에서 느부갓네살의 꿈 가운데 은으로 비유된 나라가, 금으로 비유된  나
라 다음 가는 것으로 묘사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곰"은 실상 둔한 짐승으로서 사자만
못하다. "몸 한편을 들었다"함은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이것은  뒷발로만  섰다는
의미도 아니고 그 몸 한편쪽을 낮추었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 말이 두 발로  선  것을
의미한다는 학자들이 있다(Young,Keil,Montgomery). 그 짐승의 이와 같은  자태(姿態)
는, 먹을 것을 덮치려고 대기(待機)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메대 바사가 바벧론  왕국
을 정복하려고 움직임에 대한 비유이다.
   "잇사이에 세 갈빗대가 물렸"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 문구에 대한 해석들  중에는,
로울레이가 지적한대로 모순된 것이 많다(D.M. pp. 151-154). 이 "둘째" 짐승을  메대
바사로 보는 학자들은, (1)"세 갈빗대"는 메대 바사가 정복한 세  나라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 세 나라에 대한  그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다.  카일(Keil)과  퓨세이
(Pusey)는, 이 세 나라를 리디아(Lydia)와 바벧론과  애굽이라고  하였다.  (2)  루터
(Luther)는, 이 "세 갈빗대"를 바사의 세 왕들 곧, 고레스, 다리오, 석세스라고  하였
고, 클리에포드(Kliefoth)는, 이 말의 뜻이 메대 바사의 영토 확장이  두루  사방으로
뻗혀 가지 못하고, 다만 세 방면으로만 되어 있음을 비유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곰"
을 메대 바사로 보는 학파의 해석이 "세 갈빗대"에 대하여 확정된 견해를 가지지 못한
다. (4) "곰"을 메대로만 보는 자유주의 학파에서도 역시 이 문구에 대해서는  해석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로울레이(Rowley)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D.M.  p.154).  (5)
어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한다. 곧, 여기 "세 갈빗대"로 상징한 바는, 그  짐승
의 탐욕을 강조한 것이다. 곧, 그 짐승은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셋을 탐할 정도로  마
음껏 차지하기를 원한다. "세 갈빗대"란 말은, 역사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의  정복욕(征服慾)의  큰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Montgomery, Young, Calvin). 이것이 이연(理然)이다. (6) 여기서 또 한가지  참고로
생각할 만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세 갈빗대의 셋이란 수효를 비유로 보는 동시에
(위의 다섯째 해석과 같이), 세 지방의 의미도 겸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본장에서
네 짐승의 사수(四數)도 네 나라를 의미하는 것인만큼, 여기 삼수(三數)도 세  지방을
의미하였을 수 있다. 위의 해석들 중에 다섯째나 여섯째가 채택될 만하다.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이것은 그 짐승이 벌써 그  입으로  붙잡은  것을
"먹으라"는 명령이라고 한다(Keil, Young).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이 이미 잡은 것만
먹으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명령은, 그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가 앞으로  더
욱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여야 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면, 이 지시자는 누구인가? 학자
들은, 이 지시자가 하나님이라고 한다(Calvin, Young).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 일도
관할하신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 정복자들의 잔인성을 만드신다는 것은 아니
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가 많은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기뻐하
시지 않는다. 그는, 많은 피를 흘리는 독재(獨裁)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행동을 명령하셨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감사하지 아니함과 거기에 반역을 가(加)한 죄악들을 벌하시기 위한  것이다
(Calvin).
   그러면, "둘째 짐승"곧, "곰"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전통적  해석가들은  일치하게
이것을 메대 바사라고 한다(따라서 그들은 "네째 짐승"을 로마에  대한  비유로  해석
함).자유주의 학자들(그들은 "네째 짐승"을 헬라에 대한 비유로 봄)은, 이 둘째  짐승
에 대하여 해석이 일치하지 않다. 그들 중에서 로울레이(Rowley)는 이 둘째 짐승을 메
대로 해석한다. 이 해석이 19세기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그들은  "네째
짐승"을 헬라라고 함).
   벌써 제 2장에서 우리는 둘째 나라가 메대 바사라는 전통적 해석에 동조한  바  있
다. 이 둘째 나라가 2장에서는 신상의 은 가슴으로 비유되었고, 7장에서는 곰으로  비
유되었다. 이 둘째 나라가 메대 바사라는 주장이 정당하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곧, 퓨세이(Pusey)와 영(Young)은, 7장에 곰으로 비유된  나라가
메대 바사라고 하는 것이 더욱 합당한 해석이라고 한다. 로울레이(Rowley)는 이  해석
이 "세 갈빗대"의 불분명한 문구를 근거로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자기의 주장하는
바(둘째 나라가 메대라는 주장)도 이 문구로써는 성립될 수 없다고 한다(D.M. p.153).
그러나 우리는 로울레이(Rowley)의 사고방식을 찬동할 수 없다. 왜 그는,  하필  뜻이
분명치 않은 "세 갈빗대"비유만 근거점으로 하여 둘째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알아보고
자 하였던가?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갈빗대 비유 이외에 해석하기  가능
한 문구를 가지고 이 둘째 나라가 메대 바사임을 판정할 수 있다. 그 해석하기에 가능
한 말씀이 사실상 이 귀절의 중추가 되어 있다. 해석하기 어려운 갈빗대 비유는  실상
그 중심적인 문구가 아니다. 로울레이(Rowley)는 이 중심적인 문구를 파악하지 못하였
다. 그러면 이 중심적인 문구는 무엇인가? 영(Young)은 "그것이 몸 한 편을 들었고"란
문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이 둘째 짐승이 메대 바사라고 한다. "그것이 몸 한  편을
들었고"란 말(다른 한 편도 있음을 암시함)은, 그 왕국이 양면(兩面)을  갖추어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는데 진행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그 나라가 양면을 갖춘 사실에  대하
여 제 8장도 지지하고 있다. 8:3의, "두 뿔 가진 수양"이란 말이 그런 의미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메대 바사 왕국이, 메대라는 나라와 바사라는 나라의 양면  세력으로  된
사실을 잘 비유하여 준다. 메대 바사는 이렇게 양면을 가졌는데,  카일(Keil)에  의하
면, "그 하나는 메대로서 세계 국가를 세우는데 있어서 그 근거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사인데 후에는 메대보다 커지면서 새로운 침략을 위하여 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라
고 하였다. 이렇게 이 귀절의 중심 사상은 "곰"으로서, 메대보다는 메대 바사의  합방
된 것을 비유한다. 다시 말하면, 이 귀절의 중심사상은, "곰"으로 비유된 나라가 많은
영토들을 정복한다는 것이다. 메대 족속 혼자서는 이러한 정복국가의 특징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만일 본서의 저자가 "곰"으로써 메대만을 의미하였다고 하면, 그  사상이
8:3,20의 의미한 바와 충돌된다. 거기서는 바사가 메대 뒤에 일어나서(메대와  합병하
고) 주권을 가질 것을 보여준다. 과연 메대 바사는 많은 영토들을 정복하였다. 퓨세이
가 메대 바사의 무서운 침략성에 대하여 진술한 바는 다음과 같다. 곧,"그 나라는, 언
제나 적을 이길 만한 대군(大軍)을 가지고 움직였다."고 하였다. 메대 바사는 군사 동
원에 있어서 그 소규모가 30만~100만까지였다. 다리오의 군대가  70만으로  계산되고,
게다가 600척의 배와 12만명으로 된 해군을 가졌다. 그리고 헬라를  대항한  석세스의
원정군(遠征軍)은 250만으로 추산(推算)된다. 전쟁을 싫어하였던 바사의 최후 왕도 이
써스(Issus)의 전투에는 50만~60만을 파견했던 것이다. 거기서 패전한지 2년 후에  그
다음 패전 때까지 100만명의 군대를 사용하였다. 그만한 군력(軍力)을 가지고, 바사는
고레스의 건국 때(B.C. 539)부터 헬라의 알렉산더에게 정복될 때까지(B.C. 333)계속하
였다. 그 전성 시대에는 동편에는 인도, 서편에는 헬라, 북쪽  국경으로는  다뉴브강,
또는 흑해, 그리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까지 영토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 나라
의 길이는 거의 3,000마일이나 되었으며, 폭이 1,500마일로서, 면적이 200만 평방마일
이나 되었던 것이다. 유다 지도(성경의 地名地圖)를 살펴 보면, 그 때 그 나라의 크기
와 넓이는 바벧론의  2배나  되었던  것이다.(Westminster,Historical  Alas  to  the
Bible,Westminster,1945,p71). 그러므로 탐욕이 강한 "곰"으로 비유된 나라는  역사적
으로 보아 메대 바사와 동일시되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

 

  단 7: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 여기서  "내가"란
말은 다니엘 자신을 가리킨다. "또 다른 짐승"(세째 짐승)은 "표범과 같"다고  하였으
니, 그 짐승의 특징은 동작이 빠른 것으로 성경에 진술된다(렘 5:6; 호 13:7;  합1:8;
계13:2). 다니엘도 여기서 그와 같은 성격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의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을 가졌다고 한다. "등"이란 말을 "곁"이란 말로 번역하는 학자
가 있다(Leupold). 그는, 이런 번역으로써 그 날개가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것이고,
도망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특별히 바벧론의 조각
(彫刻)에서 짐승들이 그 곁에 날개를 가진 사실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력한
학자들은, 그 말이 "등"을 의미한다고 계속  주장하였다(Calvin,  Montgomery,  Keil,
Young). 어쨌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 날개가 넷이나 된다는 점으로 보아,
그 짐승의 행동이 신속함을 알 수 있다. 첫째("사자")도 날개를 가졌으나 둘  뿐인데,
이 짐승("표범")은 넷을 가지고 있다. 이 점으로 보아 "표범"으로 비유된 나라가 얼마
나 다른 나라들을 정복함에 있어서 급속함을 알 수 있다(Young).
   그러나 이 짐승의 가진 가치가, 위에 벌써 나온 첫째나 둘째보다 우수하다는  의미
는 아니다. 제 2장에서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신상의 각부분으로 비유된 나라들의
가치가 점차 떨어진 것처럼, 여기서도 그러하다. 이 세째 짐승의 날개는,  첫째  짐승
("사자와 같은"것)의 날개같은 독수리 날개는 아니고 보통 날개이다. 이것을 보아  이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의 빠른 정복(征服)은 바벧론의 그것처럼 무게 있고 고상한 것은
아니다.
   이 짐승은 또한 "머리 넷"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말은 해석하기  어렵다.  로울레이
는, 이 문구에 대한 많은 해석들이 상충된 사실을  지적하였다(D.M.pp.154-160).  (1)
어떤 학자들은, "머리 넷"은, 헬라의 알렉산더(Alexander)제국이 네 부분(헬라,  서부
아시아, 애굽, 바사)으로 나뉜 것을  비유한다고  하였다.(Jerome,  Luther,  Calvin,
Leupold, Wright, Keil). (2) 그러나 자유주의 학자들은, 여기 "머리 넷"이 11:2에 있
는 네 왕과 같다고 한다(Ewald, Prince, Bevan, Charles, Farrar). 이 해석은  자연스
럽지 않다. (3) 얼핏 보면  그럴듯한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Montgomery,
Rowley,Young). 그 해석은 보수파에서나 자유주의에서나 다  함께  그럴듯하게  본다.
곧, "머리 넷"은, 이 짐승("표범과 같은것")으로 비유된 나라가 그  영토를  사방으로
차지한다는 것이다. 곧, "네 머리"는, 실상 땅의 사방을 비유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
의 정당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한다고 한다.   "넷"이라는 숫자는 7장 다른  귀
절에 나오는 동일한 숫자의 용법과 같을 것이라고 함. 곧, 2절의 "네 바람"이란  것도
역시 사방을 의미하였고, 6절의 표범이 가지고 있는 "네 날개"도 역시 최대의  속력으
로 두루 미침(普遍性)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넷이라는 숫자는 가장 넓게  두루미침
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머리 넷"이, 알렉산더(Alexander)의  후계자들이  여럿으로
갈린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알렉산더(Alexander)의 왕국보다 그 후계 왕국에 대한
말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로울레이의 말과 같이, 그 해석은 이 귀절의 내용과  부합
하지 않는다고 함.   "머리 넷"이 사방을 의미한다는 해석은, 이 비유의 중심  사상과
잘 부합한다고 함. 이 비유의 중심사상은, 표범으로 비유된 나라의  정복력(征服力)이
빠르다는 것이다. 빠른 정복력은 영토를 사방에서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첫째 해석도 이연(理然)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머리"란
말은 방위(方位)보다 왕국을 의미한다(계 17:9). 그러므로 우리 본문의 "머리  넷"은,
알렉산더(Alexander)대왕 이후에 헬라가 분렬되어 형성된 네 왕국을 의미하였다고  생
각된다. 그 나라들은,  (1)탈레미(Ptolemy)왕국,(2)리시마쿠스(Lysimachus)왕국,(3)캐
산더(Cassander)왕국, (4)실루커스(Seleucus) 왕국이다. 그렇다면, 여기 세째  짐승은
헬라를 비유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학자들은, 세째 짐승이 바사에 대한 비
유라고 한다(그들은 둘째 짐승을  메대  나라의  비유로  봄),  그들  중에  로울레이
(Rowley)는 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본문의 중심 사상
을 근거하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
복함에 있어서 매우 신속하다는 것이다. 힛튼(Heaton)이란 학자는, 역시 이와 같은 이
론으로 이 세째 짐승을 바사라고 하였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도 이와 같은 이론을
하였다(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Daniel, p.289). 물론 바사의 고레스
왕이 다른 나라를 정복한 것은 매우 신속하였다. 그는, 주전 549년에 바사 민족을  통
일하였고, 메대를 정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메대 바사의 왕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영토는, 서쪽으로 메소포타미아를 거쳐서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주전
546년에 그는, 다시 리디아(Lydia)왕국과 크루서스(Croesus)왕국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므로 그의 나라는 에에게(Egean)바다까지 이르렀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주전
539년에 무난히 바벧론을 정복하였으며, 주전 525년에는 애굽도  점령하였다.  이렇게 그는, 25년 동안에 동방의 문화 지대와 인도를 점령하였다(F.F.  Bruce,  Israel  and the Nations, Eerdmans,1962,Chapters 12-14;OP.Cit,pp.69-70). 그러나 보수주의 학자들은, 이 세째 짐승이 헬라를 비유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위에 관설된 이  귀절의 중심 사상에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이 귀절의 중심사사은 신속한  정복(征服)인데, 바사보다 헬라가 더욱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는데 신속하였다. 바사가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기에는 25년 동안 걸렸으나, 헬라의 알렉산더(Alexander)는  13년  동안에 더욱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알렉산더(Alexander)대왕은, 그의 부친 필립(Phillip)이 죽은 후에 마게도니아와 헬라를 자기 통치하에 잘  단속하였고, 주전 334년에 소아시아로 건너가서 바사로 더불어 전쟁한 결과 이써스(Issus)에서바사 왕 다리오의 대군을 패배시켰다. 그 뒤에 그는 수리아, 팔레스틴, 애굽도 정복하였다. 주전323년에 그가 죽으므로 헬라를 중심한 세계적 왕국을 꿈꾸던 그의 계획은 끝난 셈이다. 이 사실을 볼때에 그의 성공이 매우 신속하였으니, 우리 본문의 중심 사상과 잘 부합한다.
   "또 권세를 받았으며", 루폴드(Leupold)는, 헬라의 알렉산더(Alexander)에게서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바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 알렉산더(Alexander)가 그 왕국을 자기 힘으로 성취한 것이 없이 그저 받았다고 함은 잘못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알렉산더(Alexander)는 전쟁에 의하여 그의 영토들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우리 본문의  말씀이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고  할  것은  없다.  알렉산더(Alexander)가 전쟁에 의하여 그 많은 영토를 얻었지만, 실상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나라들을 정복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지 때문에, 그가 그 모든 전쟁에 있어서 승리했던 것이다.

 

  단 7:7,8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
슨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
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 다니엘은 네째  나라(무
서운 짐승으로 비유된)에 대한 자세한 계시를 보았다. 곧 이 부분에서는, "네째 짐승"
곧, 네 짐승들(3절)중에 가장 주목되는 짐승이 묘사된다. 다니엘은 그것을 가장  많이
주목하고 있다. 그가 그것을 특별히 주시(注視)한 사실은, 그것에 대한 진술이 유달리
머리말을 가지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알려진다. 그런 머리말은 위의 세  짐승에  대한
진술에는 없다. 첫째에 대해서도 없었고, 둘째에 대해서는 아람 원어에서  "볼지어다"
란 말이 있을뿐이며, 세째에 대해서는 그보다 조금 더 말하였을뿐이다. 그런데,  네째
에 이르러서는 그 머리말이, 이 부분(2-8)에 나타난 계시(啓示)전체에 관한  머리말(2
절)과 비슷하다. 그것은, "내가 밤 이상 가운데...본"이라고 한 말이다. 이렇게  머리
말의 특별한 점으로 보아서, 여기 진술된 "네째 짐승"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짐승의 독특성은, 또한 그것이 어떤 짐승과 같다는 말이 없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
다. 위의 세가지 짐승에 대하여는, "사자"(독수리),"곰","표범"등과 같다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그런 유비(類比)를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만 "네째 짐승"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위의 다른 짐승들에 대하여 각기 특징을 강조한 것처럼, 이 "네째 짐승"에  대해서
도 그리한다. 이 "네째 짐승"의 특징은 그 강렬한 파괴적 성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
리 본문은 말하기를,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라고 한다. 이 같은 점으로 보
아서 이 "네째 짐승"에 대한 비유는 동물계에서 찾아볼 수 없다. "큰 철 이가 있"다고
하였으니, 그것도 그 파괴적 성품을 잘 묘사한다. "철"은, 제 2 장의 신상  계시(神象
啓示)에 있어서도 파괴적 성질을 표시하였다.(2:40). 그 뿐 아니라, 그 짐승이 "그 나
머지를 발로 밟았으며"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극히 잔인한 침략 국가를 비유한다.  이
런 의미에서 루폴드(Leupold)는, 이것이 로마를 비유한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로마는 나라들을 정복하기에 쉬지 않았다. 칼타고도 로마 앞에서는 파괴될  수  밖에
없었다.  로마는 정복된 국가를 발달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pp.297-298)라고  하였
다. 그 짐승이 "열 뿔"을 가졌다고  하였는데,  성경에서  뿔은  권세를  의미한다(신
33:17;  삼상2:1; 왕상22:11; 시 18:2; 암 6:13). 한 뿔도 권세이거든 "열뿔"이야  얼
마나 큰 권세이랴. 그런데, 이렇게 많은 뿔들이 한 짐승에게 있었다. 그 많은  권세들
은, 부숴뜨리며 또 갈아버리고 마는 권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이 뿔들에 대
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말하기를,"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가 그 뿔을 보는 중에, 그것들 외에 다른 한 뿔("작은 뿔")이 돋
아났으며, 그 "작은 뿔"이 벌써부터 있었던 세 뿔을 멸망시켰다. 다니엘은 특별히  이
"작은뿔"을 더욱 주목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작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드라이버
(Driver)는, 그것으로 비유된 나라가 작은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Young)은 이 작은 뿔이 제 8장에 나오는 작은 뿔과 달라서 크게 자라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작은 뿔"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작으면서도  말은
"큰 말"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8절에 있는대로 그것은,"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는데, 실상은 그가 그 말과 같이 큰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람 뿐이면서 초자연적인 존재인 듯이 교만하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실상 이 명칭으로써 그것을 정죄한다. 곧, "작은 뿔"이  교만하게(하나님인  듯이)"큰
말"은 하지만, 실상 사람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네째 짐승"은 무엇이며, 그 "열 뿔"은 무엇이며, 또 "작은 뿔"은  무엇
인가?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다.
   (1)로울레이(Rowley)는, "메대 사람 다리오"라는 책(Darius the Mede)에, 이에  대
한 여러가지 해석을 소개하여 준다(pp. 70-137). 그의 결론은, 이 "네째 짐승"으로 비
유된 나라는 헬라요, 로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해석을 따르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많다. 우리는, 로울레이(Rowley)의 해석을 반대함에 있어서 자세히  말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벌써 제2장에서 "종아리와 발"로 비유된 네째 나라가 로마라고 하였는데,  그
이론은 여기서도 유력하다.
   (2)"네째 짐승"에 대한 진술은 헬라에 적합하지 않고 로마에 적합하다.  이  "네째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가 로마라는데 대하여는 반대하는 이론들도 있다. 그러나 그 반
대 이론은 성립될 수 없다. 이제 그 반대 이론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드라이버
(Driver)의 반대. 그는, 이 "네째 짐승"을 로마라고 하는 이론이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한다. 곧, 그는, 로마는 주후 476년에 망했는데, 그 뒤에 일어나는 어떤  나
라들을 "열 뿔"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 그것이 난제라고  한다.    로울레이의  반대.
"네째 짐승"을 로마라고 하는 학설은, 이 아래 소개함과 같이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데
로울레이는 그것들을 모두 다 반대한다.   "열 뿔"과 "작은 뿔"은 벌써 과거에 성취된
예언이라고 하는 학설. 이 학설은 칼빈(Calvin)의 주장하는   바이다.  칼빈은  "작은
뿔"을, 로마 황제 쥴리어스 씨저(Julius Caesar)와 또는 그  후계자들이라고  하였다.
로울레이는, 이 해석이 로마 제국을(헬라의 자리로) 앞당겨 잡는 셈이니, 그것이 역사
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한다(D.M.,p.90). 그는 이밖에 여러가지 이유로  이  학설을
반대하였다.   "네째 짐승"을 로마라 하고, "작은 뿔"을 로마 법왕이라고 하는  학설.
특별히 이 학설은 종교 개혁 시대에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현대에는  루폴드
(Leupold)가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1948년에 책을 내었다. 로울레이(Rowley)는 이  학
설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이 해석은 우리 본문에 나타난 계시(啓示)와 전
연 관계 없는 말을 한다. 그 이유는, 이 '작은 뿔'이 네째 짐승에서 나와서 네째 짐승
이 권세를 썼다고 하며, 그 '작은 뿔' 때문에 네째 짐승이 망하였다고까지 하는데, 어
떻게 법왕주의가 로마를 멸망시키고 그 왕권을 잡았다고 할 수 있는가?"(p.90)라고 한
다.    미래파. 이것은 "네째 짐승"을 로마라 하고, "작은 뿔"을 세계 종말에  나타날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하여는 그들 중에서도 일치하지 않
는다. 그 뿐 아니라, "열 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들의 의견은  나누인
다. 그런데, 이 해석에 대해서도 로울레이(Rowley)가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만일 이 '네째 짐승'을 로마라고 하면, 로마는 벌써 망했는데 어떻게 세계의  종
말에 나타날 '작은 뿔'이 로마를 멸망시킨다는 말이 성립되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로울레이(Rowley)의 이같은 이론은 옳지 않다. 제 2장의 신상 계시(神象啓示)에  나타
난 네째 나라도 벌써 옛적에 망하고 그 때에 있지  않았던  나라들(바벧론,메대  바사
등)을 멸망시켰다고 하지 않았는가(2:40)? 그러면,거기서도 그렇게 말한 것이  모순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네째 나라가 먼저 있던 모든 나라들의 후신국가(後身國家)
를 멸망시킨다면 바로 그것은, 그 모든 나라들을 멸망시킨 것과 마찬가지이다.   네째
나라를 로마라고 하는 설에 대한 로울레이의 반대 이유 또 한가지는, "열 뿔"로  상징
된 로마의 후신국들을 역사적으로 지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
에는, 해석가들이 그 후신국들을 지적하기 어렵다고 하여, 그 후신국들 자체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네째 나라를 헬라라고 하는 로울레이(Rowley)자신은  그
열 뿔이 헬라의 어느 왕들인지 확실히 지적하는가? 우리는, 차라리 "열 뿔"의 십수(十
數)를 상징적으로 생각한다(Keil,Pusey,Leupold,Calvin,Young). 다시 말하면,  그것은
칼빈(Calvin)의 말한 바와 같이 다수를 의미한다. 본장에서 사수(四數)가 상징적 의미
를 가졌을 뿐 아니라, 또 10절에 있는 "천천이요  만만"이란 말도 역시 그러하다.  계
시록에서도 숫자가 상징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다. "열 뿔"이 비유한 나라들을 성경
적 근거 없이 세상 역사(歷史)에서 확정적(確定的)으로 지명(指名)하려는 것은,  무리
한 일이다. 일설에, 로마 제국이 망한 후에 그 영토(領土)에 다음과 같은 열개의 후생
국가(後生國家)들이  있었다고  한다.  곧,  반달족(Vandals),  알란족(Alans),쉐비족
(Suevi),헤룰리족(Heruli), 프랑크족(Franks),비시고드족(Visigothes),오스트리고드족
(Ostrogoths),불군디안족(Burgundiands),롬발드족(Lombards),부리톤족(Britons)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이 얼마나 확실성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또 한 가지 연구할 제목은, "열 뿔"로 상징된 나라들이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
다. 이것이 난제이다.
   (1)세대주의 학파에서는, 그 초창기의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한 답을  하
였다. 이 학파의 대표자 게이블라인(Gabelein)은 제 7 장의 "열 뿔"을, 제 2 장의 "발
가락"들과 동일시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 두가지 상징이 반드시 로마 제국  자체
안에 있어야 할 것인데, 실제로 역사상 로마 제국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나라들이 없었
다. 그러니만큼 이 '열 뿔'로 상징된 나라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재생(再
生) 로마 제국 안에 있을 나라들이다. 그 시대에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땅에서  공중으
로 데려가시고, 땅에는 이렇게 열 나라로 된 재생 로마 제국이 주장한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세대주의 학자들의 해석에 대하여 동조하는 것 몇 가지가 있다. 그들이, "작
은 뿔"을 세계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한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들이, 제 7 장을 가지고 바벧론부터 이 세상 나라들의 종말까지의 역사라고 한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세대주의  학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십수(十數)가 제  7
장에서는 뿔과 관련되어 명백히 기록되었지만, 제 2 장에서는 그것이 발가락과 관련되
어 나타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제 7 장에서는 뿔들에 대하여 역설한바  있
으나, 제 2장에서는 발가락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  2
장에서는 나라들에 대하여 중점을 두고 말했으나, 제 7장에서는 왕들에 대하여 그리한
다는 것이다.    제 2장에서는 세계 역사를 일반적으로 묘사한 반면에, 제  7장에서는
작은 뿔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역설한다.    제 2장에서는 발가락을 가지고  그
나라의 약점을 표시하되, 제 7장에서는, 뿔들을 가지고 그 나라의 강력한 권세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제 7장의 "열 뿔"과 제 2장의 "발가락"을 가지고 두 번  다
꼭 같은 사건을 의미하였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대주의 학자들은,
두 기사(記事)가 꼭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고 하면서 재생될 로마 제국설(帝國說)에 대
한 근거를 삼는다. 그러나 "열 뿔"을, 재생될 로마 제국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
이다. 그 이유는, 그 "열 뿔"이 그 네째 짐승(로마)의 망한 뒤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살았을 때에 나오기 때문이다.
   (2) 영(Young)은, 우리 본문을 가지고 "네째 짐승"의 역사에 있어서 세 시대를  생
각하였다. 첫째 시대는 짐승 자체의 시대(7절)인데, 바로 예수님시대와 그 후에  있던
로마 제국 시대라고 하며, 둘째 시대는 "열 뿔"로 비유된 나라들의 시대인데,  그것은
로마 제국 멸망 후부터 "작은 뿔"로 비유된 적그리스도에 이르는 어간이며, 그 시대야
말로 로마 제국의 후신 시대라고 한다(M.P.D. pp.41-42). 그리고 세째  시대는  "작은
뿔"의 시대인데, 그 때는 적그리스도의 시대라고 한다.
   (3) 우리는, 위의 영(Young)의 해석과 동조하면서도 그 해석에 만족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본다. 영(Young)은, "네째 짐승"에서 "열 뿔"로, "열 뿔"에서 "작은 뿔"로  계
승되는 역사를 생각하였다. 물론 여기 "작은 뿔"과 "열 뿔"과 의 관계는, 역사적 계승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작은 뿔"은 모든 다른 뿔보다 추후에 나오는  것
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8절). 그러나 "네째 짐승" 자체와 "열 뿔"과의 관계는,  어
떤 역사적 계승을 보여준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열 뿔"이 그 "네째  짐승"에게
서 추후에 나왔다는 말이 없고, 다만 그 짐승과 함께 "열 뿔"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7절 하반). 영(Young)의 견해는 퓨세이(Pusey)의 것과 같은  것이다(퓨
세이의 다니엘서 연구, pp.78-79). 이들의 해석은, 물론 24절에 의하여 나온 줄로  생
각된다. 거기 말하기를,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
가 일어나리니"라고 한다. 여기 일어난다는 아람어(      =쿰)는 역사적 계승을  의미
한 듯이 보인다(2:39,7:17). 그러나 여기(24절)서는 반드시 그렇다고 할  것은  없다.
24절에 처음 나오는 "일어날 열왕"이란 말은, 역사상 계승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
다. 그것들이 벌써 짐승과 함께 일어나 있는 것이로되, 그것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자
가 편의상 순번적으로 말한 것 뿐이다. 2:44에도 같은 말이 하늘 나라에 대하여  사용
되었는데("설 것이라"고 번역되었음.) 거기서는 물론 역사상 계승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늘 나라는 영원히 있다. 또한 이 말이 7:10의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란 문구
에도 사용되어 있으니, 그것(*            )이 "시위"란 말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그것도 역사적 계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 말이 24절의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란 문구(작은 뿔이 일어난다는 뜻)에 있어서는, 시간적 계승을 표시한  것
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똑 같은 말(일어남)이 "열 뿔"에도 사용되었은즉, "열  뿔"도
그 짐승의 후계자(시간적 계승을 의미함)란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본문이 보장하는
대로 "작은 뿔"은 역사적 계승자로 확실히 생각되니만, "열 뿔"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
는다. 다만 그 "작은 뿔"이 먼저 있던 "열 뿔"가운데 몇을 "뿌리까지 뽑"는다는 것은,
확실히 시간적 계승의 의미를 생각케 한다. 7:7이 말한대로 그 "네째 짐승"은  처음부
터 "열 뿔"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그 "열 뿔"은 그 짐승과 일체(一體)이다. 퓨
세이(Pusey)도 이점에 있어서는 같은 해석을 가진다. 그러므로 "열 뿔"의 시대가,  로
마의 멸망부터 "작은 뿔"시대에 이를 동안이라고 할 것은 없다. "열 뿔"의 시대는, 바
로 로마제국부터(로마의 멸망부터가 아님) "작은 뿔"의 일어날 때까지라고 생각된다.
 위에 말한 몇 가지 견해를 아래와 같은 도표로 살펴 보자.
+--------+-------------+-----------+------------------+------------------------+
|        |네 째 짐 승  |           | 열         뿔    |    작      은      뿔  |   
+--------+-------------+-----------+------------------+------------------------+
|세대주의| 역사상 로마 |네째   짐승|                  |                        |
|        |             |과 열  뿔과|  재생될 로마     |    재생될 로마의 한 왕 |
|        |             |이의 공백기|                  |                        |
|        |             |를 생각함  |                  |                        |
+--------+-------------+-----------+------------------+------------------------+
|칼    빈| 역사상 로마 |           |역사상 로마의     |   쥴리어스  씨저와     |        
|        |             |           | 여러 지역들      |   그 후계자들          |
+--------+-------------+-----------+------------------+------------------------+
|영과    | 역사상 로마 |           | 로마 멸망부터    |    적그리스도          |
|  퓨세이|             |           | 적그리스도까지   |                        |
+--------+-------------+-----------+------------------+------------------------+
|  칸    |역사상 로마에|           | 역사적 로마부터  |                        |        
|        |서 그리스도  |           | 적그리스도까지   |    적그리스도          |
|        |재림 때까지  |           |                  |                        |
+--------+-------------+-----------+------------------+------------------------+
   (4) "네째 짐승"의 "열 뿔"에 대한 로울레이(Rowley)의 해석은 성립될 수 없다. 로
울레이(Rowley)의 학파에서도, "열 뿔"이 무엇을 상징(象徵)하였는지 말하기 곤란하기
는 마찬가지이다. 로울레이(Rowley)는 그의 저서(著書)에, 모든 해석가들의  주장들을
열거하고 그 약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열 뿔"들 중의 일곱 뿔은 실루코 왕조의 처음
일곱 왕들 곧,      실루코(Seleucus)  1세,    안티오코(Antiochus)1세,    안티오코
(Antiochus)2세,    칼리니코스(Callinichus),    세라우노스(Ceraunus),    안티오코
(Antiochus)3세,    휠로파토르(Philopator)라 하고, 제 8왕  안티오코(Antiochus)  3
세,     휠로파토르(Philopator)라   하고,   제    8왕     안티오코     에피파네스
(Antiocho-Epiphanes)를 "작은 뿔"이라고 한다. "네째 짐승"을 헬라라고 하는 많은 학
자들이, 로울레이(Rowley)의  해석과  유사하게  말한다.(Eichorn,  Maurer,  Stuart,
Ewald, Delitzsch, Montgomery, Farrar). 로울레이(Rowley)는 또한 "작은 뿔"이  뽑은
세 왕을 가리켜,   데메트리오스(Demetrius)1세,    안티오코(Antiochus:데메트리오스
의 피살된 동생),    필로메터(Philometer)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많은 난관에
봉착한다(Young)역사에 의하면  데메트리오스(Demetrius)1세는  안티오코  에피파네스
(Antiocho-Epiphanes)의 죽은 후에 왕이 되었는데, 어떻게 "작은 뿔"로  비유되었다는
안티오코 에피파네스가 데메트리오스(Demetrius) 1세를 뿌리 뽑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시대는 "작은 뿔"이전이 아니고 그 후였다. 그리고 로울레이(Rowley)가 위에  관
설한 바 데메트리오스(Demetrius)의 동생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난제가 있다. 그는  실
루코 왕조(수리아)의 왕이 아니었으니, 실루코 왕조에 속하는 안티오코  에피파네스가
그를 "반역하여 뿌리 뽑았"다는 말도  성립될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로울레이
(Rowley)의 이 해석은 본장 비유의 내막과 잘 맞지 않는다. 그것은, 로울레이(Rowley)
는 "열 뿔"을 서로 계승한 왕통으로 말하지만, 실상 우리 본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
고 "열 뿔"이 동시에 존재할 것을 말한다. 또 그 뿐 아니라 로울레이(Rowley)는, 안티
오코 에피파네스를 "작은 뿔"로 보면서 나중에(열 한째 왕으로)나타날 것이라고는  말
하지 않는다.  그의 해석에 있어서는 "작은 뿔"이 , 여덟째 왕으로 관설된다.  그러나
우리 본문은,"작은 뿔"을 열 한째 왕으로 말한다.
   우리는, 다니엘서 자체를 떠나서 또 한 가지 이유에 의하여 로울레이(Rowley)의 해
석("네째 짐승"을 헬라라고 하는 해석과 "열 뿔"에 대한 해석)을 반대한다. 그것은 신
약의 증거에 근거한다.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하셨는데(요 12:33;
눅9:26; 막 8:38), 그것은 그가 단 7:13에 근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다니엘
서를 염두에 두신 그가, 마 24:15에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단 12:11)을, 로마  시대
에 될 성전 파괴와 관련시키셨다. 바울도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때에,  다니엘서
(7:25)의 말씀을 사용하였으며(살후 2:3-4), 계시록도 로마시대에 있었던 일과,  또는
그 후에 있을 세상 정권에 대하여 말할 때에, 단7장의 상징들을 사용하였다. 다시  말
하면, 우리 본문(단7:7-8)에 대한 신약의 해석은, 그 말씀이 로마와 및 그 후에 될 일
들을 예언한 것으로 본다.
                                                                                


  단 7:9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예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
가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
며. - 하비 칸(Harvie Conn)의 해석은 이렇다. 곧, 이 귀절부터 14절까지에는, 성경에
있는 가장 놀라운 심판 광경 중 하나가 묘사된다.(Leupold). 9-10절은 심판주에  대하
여 말하고, 11-12절은 심판을 말하고, 13-14절은 인자(人子)께서 나라를 받으심에  대
하여 말한다. 인자께서 나라를 받으심에 대한 이 계시(啓示)는, 그 날 밤 계시의 절정
(絶頂)으로서 모든 역사의 최후 목표를 보여준다.
   이 부분 계시는 가장 아름다운 통일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네 짐승으로 비유
된 나라들과 천구과의 대조가 나타나 있다. 바람이 맹렬하고 괴이한 짐승들이  나오는
큰 바다와의 대조로, 하나님의 장엄한 심판 광경이 나타난다(Montgomery). 이렇게  여
기에,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와의 대조가 묘사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9절부터 나타나는 말씀은, 그 윗말씀과 관련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윗말씀의 연속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동일한  계
시의 또 하나의 새로운 방면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이것은  게이블라인(Gabelein)의
말한바, 위에 벌써 나온 계시와는 아주 다른 "세째 밤 계시"라고 할 수 없다.
   "왕좌가 놓이고". 아람 원문에서는, 여기 "왕좌"(*          =카르사완)란 말이 복
수(複數)로 되어 있다. 그러면 그 뜻은,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을 위한 보좌 외에 그와
함께 심판을 위하여 앉을 회중의 자리도 있다는 것이다. 이 보좌들 위에 앉을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많은 논쟁이 있다. 거기 앉을 자들은, 세상을 떠나 구원의 영광
을 얻을 사람들이라고도 하고(Hengstenberg),혹은 천사들이라고도 하고(Keil, Young),
에녹서(Enoch)는 인자의 앉으실 자리라고도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몬트고메리(Montgomery)와  힛튼(Heaton)과  루폴드
(Leupold)의 해석을 받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은, 다른 보좌들에 앉을 자들에  대하
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말하기를, "여기 '보좌'란 말
의 복수는 중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오직 한 분만이 자리에 앉으셨기  때
문이다"라 하였고, 루폴드(Leupold)는 말하기를, "이 '보좌'란 말의 복수는 심판의 뜻
을 강조하기 위한 것 뿐이다"라고 하였고, 힛튼(Heaton)은 말하기를, "이 많은 보좌들
은, 큰 임금을 수행(隨行)하는 자들이 많을 것을 생각케 한다."라고 하였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이  말의  아람  원어  아틱요민(            
      
)이, 한역에서는 이렇게 영원하신 자라는 내용을 가진 말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스튜
아트(Moses Stuart)의 해석과 동일하다. 그러나 오늘날 주석가들은, 이와 같은 번역을
찬동하지 않는데 있어서 거의 일치한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모두  다  이
말을, "세월이 오랜 자"란 뜻으로 번역한다.(Leupold,Keil, Young,Heaton,  ASV,RSV).
그렇다면 그 뜻은, 연령이 많은 자란 뜻이다. 다니엘은 여기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관
설하기보다는, "노인을 관설하여 장엄하신 하나님을 대신 나타낸 셈이다"(Keil). 심판
장면에서는, 실상 영원하신 자보다 장엄하고 존경할  만한 이가  적합하다.  그러므로
노인(老人)이란 말이 우리 본문의 내용일 것이다. 연령이 높은 것은 존경의 대상이 된
다. 장엄한 심판을 위하여 앉으실 이는 존엄한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인상
은, 그 심판주의 입은옷이 눈 같이 희다는 말씀도 보여준다.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희다는 것은, 구약에 있어서 죄로 더럽힘이 없는  순결
을 비유한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사 1:18)란 말씀
과,"우술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
다"(시51:7)란 말씀들이, 모두 그런 뜻을 보여준다. 신약의 계시록에서도 역시 그렇다
(계 3:5,4:4,19:8). 그리고 그 심판주의 "머리털은 깨끗한(흰) 양의 털"로 비유되었는
데, 이것도 역시 그의 성결을 비유한다. 계 1:14 참조. 성결은 심판주의 자격인  것이
다.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은, 성경에서  주님의  임재(臨
在)와 함께 나타나곤 하였다. 그가 가시떨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출3:3)도 그리
하셨고, 그가 시내산에 내려 오셔서 그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에도  그리하셨다(출
19:18). 출 20:18 참조. 그리고 주님 자신을 가리켜 삼키는 불로 비유하기도 하였는데
(신9:3; 겔1:4,13,27), 신약에도 역시 그렇게 말한다(히12:29). 그것은  그의  성결과
심판을 상징한다. 카일(Keil)말에 의하면,"불"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실  뿐아니
라, 자기 백성을 깨끗케 하시려는 불타는 열심을 비유하기도 한다. 심판주께서 앉으신
보좌는, 수레와 같은 내용을 가졌으니, 그것은 에스겔서(1:15-28)에 묘사된 바와 유사
하다. 루폴드(Leupold)가 말한 바와 같이, 옛날에 임금의 보좌들은 어떤때에 바퀴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여기서 "바퀴"는, 하나님의 심판이 한 곳에만 있지  않
고 어디든지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불붙는 바퀴는, 하나님의 심판이 온 땅 위에  시행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Kliefoth,Keil,Leupold).

 

  단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
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 곧, 이 문구의  내용은  계
4:5과 유사하다. 어쨌든 이 두 곳에서 다 하나님의 임재를 "불"과 관련시켰다. 왕이요
심판주시요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불"과   같은   능력의   근원이시다.   시
21:9,50:3,104:4 참조. 카일(Keil)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불'이,  하
나님에게서부터 이 세상을 향하여 '강처럼 흘러' 나왔다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을  반
대하는 이 세상의 모든 원수들과 죄악을 소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순결케 하
고 또는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다니엘이 처음에
는 네 짐승만 보았는데, 그 뒤에는 그의 시야(視野)가 하나님의 보좌를 볼만큼 넓어졌
고, 이제는 더 넓어져서 그 보좌 앞에 있는 무수한 무리를 보게 된다. 그 무리는 너무
많아서 세어보기 어려운고로 "천천이요  만만"이란 많은 숫자로 묘사되었다. 여기  이
른바 "수종하는"이란 말이라든지, "시위한"이란 말은, 임금에게 시종(侍從)함에  대한
술어들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볼 때에 우리는, 하늘의 수종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
심으로 섬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여기 "심판을 베푼"다는 말은,  심판정(審
判廷)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책들이 펴 놓였"다고 하는데 이 책들은 무슨  책들
인지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다. 힛튼(Heaton)은, 이 말씀이 바벧론의 창조 신화
(創造神話)에 있는, 운명의 서판(Tablets of fat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곧,  바벧
론의 창조신 말뚝(Marduk)이, 그 배우자 티아맛(Tiamat)에게서 운명의 서판을 얻어 가
지고  그것을 자기 가슴에 붙였다는 말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운명의 서판
은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말뚝(Marduk)은 그것을 가지고 모든 신(神)들 가운
데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힛튼(Heaton)은 또 말하기를, 운명의 서
판은 매년 바벧론 신년제(新年祭)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데, 그때에 새  해의
운명을 정하는 의식이 거행되고 그 모든 운명이 정해지는대로 기록하는  신(神)  느보
(Nebo)가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힛튼(Heaton)의 이와같은 해석은, 여러가지 이유
로 우리 본문에 합당치 않다. 그 해석은, 여기 진술된 계시(啓示)의 근원을 매우 잘못
취급한다. 이 계시의 근원은, 다니엘의 어떤 부요한 상상도 아니고, 혹은 그가 처하여
있던 곳의 문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계시였다. 다시 말하면, 이 계시
는 다니엘의 조작한 바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다니엘에게  주셔서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다니엘이, 그런 추잡한 바벧론의 다신론(多神論)사상으로 엮
어진  창조  신화를  그의  문원(文源)으로   사용하였을리는   만무하다(M.   Unger,
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Zondervan, 1954, Chapter  II,  "The  Biblical
and Babylonian Account of Creation).
   그 뿐 아니라, 단 7장은 심판을 말하는 반면에, 바벧론의 창조 신화는 미래에 대한
전재적 결정(轉載的決定)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의 이 말씀은, 인간들의
죄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판정과 관련되어 있고, 바벧론의 서판은 미래에 대한 운
명론적 결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게 양자는 서로 다르다. 그러면, 이 "책들"은 무슨
책들인가? 칼빈은 이것이 복음 전도를 상징한다고 하였다(Commentaries on Daniel II,
p.36).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카일(Keil)과 영(Young)은, 구약 사상에 부합
하는 대답을 하고 있다. 곧, 그들은 이 책들이, 인간들의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
이라고 한다(출32:32; 시69:28, 139:16;  사65:6:  렘17:1;  말3:16;  눅  10:20;  계
20:12). 루폴드(Leupold)는, 이 책들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해  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그 책들이 심판 사무의 시작과 관련된 것 뿐이니,
우리는 그 이상 더 나아가서 그 책들의 목적을 결정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
다.

 

  단 7:11,12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
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바 되었으며 그 남은 모든 짐
승은 그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
더라. -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곧, 이 두 귀절에서 우리는, 네 짐승에게  심판
이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사이에 "란 문구에서, "인하여"(*    =민)란 말은,  다니엘이  주목하여
보는 이유를 보여준다. 곧,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 때문에 다니엘이 주목하
여( 그 작은 뿔의 받을 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클리에 포드(Kliefoth)와 몬트
고메리(Montgomery)와 영(Young)은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으니, 곧, "그  뿔
의 큰 말하는 음성이 나는 때부터 나는 주목하여 보았노라"라고 한다. 이 번역은,  그
작은 뿔의 큰 말하는 동안 다니엘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를 쳐다보는  모습을  계속
취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작은 뿔의 교만하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  동시
에, 심판의 광경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적인 광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은 뿔"과 및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의 사이에 적대 행위(敵對行爲)가 있을  듯
이 바라보는 기대가 나타나 있다(M.P.D. Young, pp.43-44).                                    
                      
   "그 시체가 상한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바 되었으며". 짐승의 멸망이 너무도  급속
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돌연한 사변이라고 하는 학자가 있다(Montgomery). 그러나
우리 본문의 어투는, 그 멸망이 아주 완전할 것을 보여주나니, 그것은, 그  "네째  짐
승"을 아주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우리 본문이 말한대로 처음에는 그 짐승을 죽였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그 시체를 파상(破傷)하였다고 한다. 몸을 파상한 것은 멸망의  둘
째 계단이었다(Leupold). 이를테면 그것은, 그 짐승의(죽은 다음에)시체의 모든  부분
을 절단(切斷)하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시체가 "불에 던진바 되었"다
고 한다. 이렇게 네째 짐승은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파멸되고, 다시는 그 짐승이  권
세를 쓰는 일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이다. 그는 죄악의  정
도를 따라 공평히 심판하신다. 네째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의 죄악이 가장 크기 때문에
그 멸망도 가장 비참하게 되어진다. 살후 1:5-9; 계18:6-8,19:20-21참조.
   여기 "불"은 지옥불을 의미한다는 주석가들이 있다. 카일(Keil)과 루폴드(Leupold)
에 의하면, 이 문구는, 악한 자가 사후(死後)에 받을 불 가운데 고통을 말하여 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관설된 "불"이 주로 그런 뜻을 가지지 않고 심판의 완전
한 승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 해석이 여기 사용된 상징의 내용과 잘  통한다.  여기
사용된 상징은, 개인들의 멸망보다도 국가들의 멸망을 관설한다. 이 해석이, 다니엘서
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불의 의미와도 잘 통하는 것이다(11:2). 그 뿐 아니라, 여기 이
"불"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나오는 것(10절)인 만큼, 그것은 심판의 불이다. 그러나
우리는 힛튼(Heaton)말대로 지옥의 사상이 여기에 전연 없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다
만 우리의 주장하는 바는, 여기 "불"의 주요한 의미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는 것
이다.
   위에 말한바와 같이, "네째 짐승"의 멸망의 완전성은 또 한가지를 생각케 한다. 그
것은,   "네째    짐승"을   헬라라   하고   "작은   뿔"을   안티오코   에피파네스
(Antiocho-Epiphanes)라고 하는 해석이, 이 점에서도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일 이 예언이 헬라와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를 가리켰다고 하면,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에 의하면, 안티오코 에피파네스  이후에
도 다른 왕들이 유다 민족을 괴롭게 하였다(그러므로 완전히 멸절된 이  네째  짐승은
헬라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앗겼으나". 짐승들의 멸
망에 대하여 말하는 다니엘서 저자(著者)는 ,어찌하여 네째 짐승의 멸망을 먼저  말하
고  그보다 앞서 나왔던 다른 짐승들의 멸망에 대하여는 이제야 말하는가? 이것은, 순
서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역사적 사실로 말하면, 처음 세 짐승(세 나라) 이 네째 짐승
보다 먼저 망하였다. 이 난제(難題)를 해결함에 있어서 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다르다.
   (1)몬트고메리(Montgomery)의 학설. 이것은, 네째 짐승이 멸망한 뒤에도 그보다 먼
저 있었던 세 짐승이, 어떤 잔존 형태로 계속하다가 이제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네째 나라가 망한뒤에 그 앞에 있었던 세 나라도 망한다고 하는 우리 본문의  말씀은,
제 2장에 나타난 신상 계시(神象啓示)에 있어서 신사의 네째 부분(네째 나라)의  멸망
에 따라, 모든 다른 부분들(다른 나라들)도 함께 부숴뜨림이 된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상 계시에 있어서는, 네째 나라가 망함과  함께 앞에 있던 세 나라도 망한 것이 단번에 된 일이다. 그런데 제 7장에서, 네째  나라가 망한 뒤에 다른 세 나라는 별도로 망하도록 되어 있으니, 어떻게 양자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2)칼빈(Calvin)의 학설. 그는 말하기를, "먼저 나온 세나라는 벌써 망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 풍속대로 뒤에 망한 나라(네째 나라)가 먼저 관설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풍은 기록에 있어서 종종 시간적 순서를 살피지 않고, 뒤엣 것을  먼저 말하고 앞엣 것을 추후에 말하는 일이 있다."라고 하였다.
   (3) 영(Young)과 루폴드(Leupold)의 학설. 그들은 말하기를, 이  문장에는  시간적
순서를 문제시할 필요 없다고 하며, 여기서는, "네째 짐승"의 멸망을 강조하기 위하여 미리 당겨 말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네째 짐승"의 아주 없어질 정도로 망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것을 먼저 말하고, 그 뒤에 네째 짐승보다는 덜 교만하며  그것보다 먼저 나왔던 세 짐승의 멸망에 대하여 말한다. 물론 그들의 멸망은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다.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 앞서 나왔던 세 짐승의 멸망은,네째 짐승의 그것보다 심하지  않은 점이다. 네째 짐승은 속히 망하였으되, 이 셋은 얼마 동안 존속되다가 멸망에  들어간다. "정한 시기"란 말은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케 한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생명의 기간을 정하여 주셨다(Keil).

 

  단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
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하비 칸(Harvie Conn)의  해
석은 다음과 같다. 곧, 다니엘이 열국(列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 뒤에, 여기
서는 하늘 나라의 임재를 진술한다. "내가 밤 이상중에 보았더니". 이 문구는, 본장에
서 중대성 있는 말을 할 때에 사용된다. 본장 계시 전체의 머리말로도  씌였고,  또한
네째 짐승에게 특별히 주의(主意)를 끌기 위해서도 오히려 "인자"(人子)라는 인물에게
더욱 주의를 끌기 위하여 이 말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의도(意圖)는, "인자"
의 "나라"에 중점을 두어, 그것과 네째 짐승(네째 나라)과의 대조를 보여주려고 한다.
   "인자"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여기에 많은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위에 벌써 관
설된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9절)에 대한 기록과 같은 찬란하고  장엄한  진술이,
여기"인자"에게는 붙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루폴드(Leupold)가 말한 것  같이,  이런  
간소한 기록의 결과로 근본적인 진리는 밝히 드러나 있다. "인자"란 말은 아람 원어로
빠르 에나쉬(*           )이다. 다니엘이 이상(묵시)중에 본 인물은 사람과 같은  분
이다. 여기서 나타내려는 것은, 위에 벌써 나온 짐승들, 특히 네째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와 사람으로 비유된 자의 나라의 대조(對照)인 것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처
럼, 이 다섯째 나라는 그 영광에 있어서 탁월한 것이다. "인간에게  속하는  좋은것과
고상한 것과 탁월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나라에  표현된다"(Leupold).  그런
데, "인자"란 말에 "같은"이란 접속사(  =케)가 붙어서, 그 인물이 사람과 유사하면서
도 사람과는 다르다는 의미도 가진다. 여기 같다는 말은, 꼭 같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
른 점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인물은 사람이면서도 역시 그 이상
(以上)이란 것이다. 그러면 그 인물은 누구인가? "다니엘서에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알기 어려운 문제이다. 특별히 이 말이 신약의 그리스도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
렵다고 생각된다"(Montgomery).
   "인자"란 말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로 갈린다. (1)메시야 개인을 가리키며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의미한다고함(Ewald,Orelli,Cornill,Wright,Boutflower,Calvin,Leupol
d,Young,Hengstenberg).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이 해석을,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의 가장 고전적(古典的)해석이라고 부른다. (2)상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는   해석.   이   해석은   오늘날    자유주의     학자들이     취하는     것이다
(Hitzig,Bevan,Prince,Montgomery,Rowley,Heaton,Charles,C.H.Dodd).          모빙켈
(Mowinckel)은, 그들 중 대표라고 할 수 있다. (3) 신화적(神話的)해석. 이것은, 다니
엘서의 배후에 "인자"라는 인물의 근원이 되는 신화가  있었다는  것이다(Gunkel,Hugo
Grasman). 이 해석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데, "인자"라는 칭호가 백성에 대한  집합
명사(集合名詞)가 아니고 개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인자"란 말이 백성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어떤 신화에 근원을  가졌다
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에게 하나
님 나라가 대표되어 있으며, 그의 오심에 따라 그 나라가 임하도록 된 것이다.
   위의 세 가지 해석 중에 특별히 "인자"를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해석은, 18,27
절에 논거(論據)를 가진다고 한다. 그 귀절들에, 성도들이 나라를 얻는다는 것은,  인
자가 나라를 얻는다는 14절 말씀의 해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18,  27)는,
"성도들"을 인자와 같은 뜻으로 해석하여 바꾸어 넣은 것이 되어진다.  그러니  만큼,
"인자"란 말은 바로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18,27절에 성도들이 나라를 얻
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얻는다는 말이 아니고 인자에게서 얻는다는 뜻일  것
이니, 성도들을 인자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다니엘이 이 계시(啓示)를 해설함에 있어서, "짐승"들로 나라들을 상징한다고 밝혔
지만(17,23,24), "인자"에 대해서는 백성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없다. 그  뿐  아니라,
이 계시에 있어서 짐승들과 인자가 대조되었는데 그 대조의 내용은, "짐승"은  하나님
께 복종하지 않는 세상 나라들을 상징하는 반면에, "인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 복
종하는 자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자"는, 성도들이라기보다  메
시야라고 할때에 그 대조의 내용이 성립된다. 메시야께서만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하신
다. 성도들은 신이 아닌 것만큼, 하나님에게 대하여 그런 완전한 복종을 가지지  못한
다. 성도들이 불완전하고 죄가 많다는 것은, 다니엘의 기도에도 나타난다(9:5).  거기
서 다니엘은, 그들의 죄와 반역에 관하여 많이 말한다. 그러므로 "인자"란 말은, 불완
전한 성도들을 의미하지 않고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 점에 있어서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같은"이란  말(   =케)이다.
여기 같다는 것은,사람과 같은 반면에 또한 다른 면도 있음을 암시한다.  곧,  그것은
그 인물이 인간 이상이란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  이상이  될
수 없다. 영(Young)은 말하기를, "만일 '같은'이란 말이 신성면(神性面)으로 지시되는
어떤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그 인물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반대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Daniel's Vision of the Son of Man, p.20)
   그러므로 우리는,이 귀절들(13-14)을 해석하는 가운데서 "인자"(人子)란 말이 메시
야를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한다.
   (1)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 한역(韓譯)은, 이 문구의 아람 원문(*              =
임 아나네)보다 70인역(LXX)을 추종하여 "구름 위에"란 뜻을 취한 셈이다. 아람  원문
대로는, "구름과 함께"라고 번역해야 한다(ASV,RSV). "구름과 함께"라는 번역은, 자유
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다          함께            지지한다
(Keil,Leupold,Young,Montgomery,Heaton,Rowley). 이 어귀가 "인자"란 뜻을 밝혀 내는
데 있어서 요긴하며, 따라서 많은 학자들의 토론의 대상이 된다. 이점에 있어서는  영
(Young)의 해석이 가장 완전한 것 같다(DVSM,pp.10-16). 이것은 이 아래 차차  소개된
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어귀가 역시 "짐승"들과 "인자"와의 대조르 보여주는데  있
어서 일부 역할을 한다고 본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말하기를,"구름은,  짐승들
이 나온 바다와 대조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와 이 세상 나라의 대조를 성립시킨
다"하였고, 로울레이(Rowley)도 같은 뜻으로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바다 곧, 아래
서 생겼으나 하늘 나라는 구름 곧, 위에서 온다"라고 하였다(D.M. p.62).
   그런데, "구름과 함께"란 말과 "구름 위에"("구름을 타고")란 말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중대시(重大視)해야 되는가 함이 논쟁점이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말하기
를, "구름 위에(구름을 타고) 온다면 그것은, 그 탄자가 신성(神性)의 소유자라는  것
을 상징(象徵)하게 된다(사 19:1; 시 104:3). 그러나 다니엘이 여기서 그렇게  말하지
는 않았으니, 이 '인자'(人子)란 말도 메시야 개인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영(Young)은 말하기를,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이  어귀들
('구름위에'란 말만이 반드시 인자의 신성을 보여준다고 할 것은 없다. 이 어귀는, 구
름이 인자의 오신는 것과 관련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람 원문이  보여주려는  것
은, 인자의 오심이 구름과  관련되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있다"라고  하였다.(DVSM.
p.12).
   "인자"의 오심이 "구름"과 관련되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 표
현은, 구약의 상징 어법(象徵語法)이다. 구름은 종종  하나님과  관련되어있다.구름은
하나님의 좌소(座所), 그의 임재(臨在)의 표,그를 가리우는 것, 그의 능력의  표상(表
象)등으로 되어 있다(삼하 22:12; 욥22:14). 출 13:21 이하, 19:9  이하;  왕상8:10이
하;시 18:10-18,104:3;사 19:1; 렘 4:13; 겔 10:4; 나 1:3 참조. 구름이 이렇게  하나
님과 관련된 사실은, 유대인 해석가들도 인정한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메시야는
구름과 함께 계신 분이라고 하고, 구름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다.  로울레이(Rowley)는,
단 7:14의 "인자"가 메시야 개인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메시야께서  구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해석이 옛날에 발달되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가경(假經)(에녹 1
서 46:2 이하, 48:2)을 가지고 이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구름이 신성(神性)과 관련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논증은 신약에 있다. 그런 말을 그
리스도께서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하늘의  구름
을 상징으로 사용하여 재림의 초자연적(超自然的)성격을 강조하셨다(마 24:30, 26:64;
막13:26, 14:62).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인자"(人子)라고 하시고, 그가 구름과 관련되
어 오실 것을 말씀하시는 신약 귀절들에 있어서, 영(Young)은, 거기에 "구름  위에"란
말이 사용되지 않고 "구름과  관련되어"(함께)란  말이  사용된  사실을  지적하였다(    
막 13:26, *        막 14:62, *      마 24:30,26:64).
   "구름과 함께"란 말보다 "구름 위에"란 말 자체가 인자의 신성을 보여 준다는 몬트
고메리(Montgomery)의 사상과 같은 것은, 예수님의 염두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귀절
들에 있어서 예수님은, 구름과 관련된 그의 재림이 하나님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권위
(權威)로서 오실 것을 의미 하였다. 다시 말하면, 단 7:13의 구름과 관련된  "인자"의
오심은, 바로 "인자"라는 인물이 신(神)이신 메시야 개인인 것을 확증한다.구름과  관
련되어 오시는 것은, 인자의 초자연적 기원(起源)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자의
신성(神性)을 보여준다. 인자를 이스라엘 백성(곧, 성도들)으로 보는  해석이  여기서
난관을 만난다. 인자를 백성이라고 하는 해석은, 그들이 구름과 관련된  것을  가리켜
다만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의미로 볼 것이다. 그러나 구름과 관련되어 오는 것
은, 그 오는자의 신성을 가리키나닌 그 오는자는 신(神)이신 메시야일 수 밖에 없다.
   (2)옛적부터 항상 계신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 그가 이와같이 인도된 목
적은, 14절에 있는대로 왕위(王位)를 받기 위함이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는,  세
상 국가들의 멸망과 함께 끝나지 않고 영원한 하늘 나라를 세우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위의 네 나라들의 멸망은, 바로 하늘 나라를 위한 준비이다. 이제 메시야로 말미
암아 천국은 임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 이 말씀이 해마다 바벧론에서 거행된 왕의 즉위식 기념연(卽
位式記念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힛튼(Heaton)은, 그의 작은 책에 이와 같은 학설
을 암시하였다(다니엘서 주석, p.183). 그는 벤첸(A.Bentzen)의 학설을 추종한다.  벤
첸(A.Bentzen)에 의하면, 단 7장은 옛날 왕의 즉위식 기념연을 말세론적으로 연출시킨
것이라고 한다(King And Messiah, London. 1955 p.75). 그가 본 말세론은  다음과  같
다. 곧, "세계국가들은 각기 시대가 있고, 필경은 인자로 대표된 유다 민족이  세계를
통치하는 것으로 마감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단 7장에는, 왕의 즉위식 기
념연이라고 하는 바벧론 풍속에서 유래된 증거가 전연 없다. 그러한 주장은, 단 7장의
강조하는 바를 오해한 것이다. 단 7장은, 그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啓示)인 것을 강조
한다. 물론 여기에 "인자"께서 왕위를 받는 광경이 묘사된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순전한 계시이다.
   (3)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 이 말씀은, "인자"(人子)가  신성(神性)의
소유자인 사실을 반영(反映)시킨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느부갓네살도 "권세와  영
광과 나라"를 받았다(2:37). 그것들이 하나님에게 속한 사실은 분명하다.  느부갓네살
이 이 사실을 무시하고 그것들을 자기가 만든 듯이 말했을때에  그는  징계를  받았다
(4:30-33). 그가 후에 그것들이 하나님께만 속한 줄 인정하였을 때에는 그 받았던  징
계가 해제되었다(4:34). "권세와 영광과 나라"는 하나님께만 속하였다고,  다리오왕도
인정하였다. 그것은,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찬송하는 그의 말  가운데
나타나 있다(6:26). 이렇게 이방 임금도 "권세와 영광과 나라"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理想的)인 의미에서 이것을 받을 "인자"는, 신(神)이신
메시야 개인인 것이 또 다시 증명된다.
   (4)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 이 말씀을  보
아도, "인자"의 나라와 네 짐승의 나라들 사이에 뚜렷한 대조(對照)가  나타난다.  네
짐승의 나라들은, 지역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였던 것이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되어진  것은  아니다
(7:5-6). 그러나 여기 "인자"의 나라는 지역적으로 무제한하다는 의미에서, 우리 본문
은 말하고 있다. 이런 보편적 국가를, 이 세상 나라들이 이루어 보려다가 실패한 것이
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신 이는 신(神)이신 메시야이시다. 여기 이른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란 문구에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도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를 섬긴"다는 말에 있어서, "그"란 말은, "인자" 곧, 메시야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섬긴"다는 아람 원어 펠라(*      )는 생각해 볼 만 하다. 영
(Young)은 카일(Keil)과 동조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대해서만  쓴
다고 하였다. 이 말이 구약 전체에 다섯 번 사용되었다(3:12,  14,17이하,  7:14;  스
7:19). 단 3:12, 17에 있어서는 이것이 느부갓네살의 세운 우상과 관련하여 종교적 숭
배를 의미하였고, 스 7:19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이, 종교적 숭배
만 의미한다는 것을 반대한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말하기를, 이  말은  인간을
섬기는 것에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마찬가지로 사용되는데, 단 7:27에서는 성도들을
섬긴 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문맥을 보아서, "모든 권세 있는  작가
다 그를(성도들을) 섬겨 복종하리라"란 말이, 성도들을 섬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서 성도들을 섬긴다는 것은, 성도들 자신에게 종교적 숭배를 하였다는 의미는  아
니다. 그것은, 그들의 머리 되시는 주님을 종교적으로 높이는 의미에서 그들을 섬긴다
는 뜻이다(Young, DVSM, p.24). 느부갓네살도 다니엘의 하나님을  숭배하는  의미에서
다니엘에게 절한 바있다.(2:46) 사 45:14을 보아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절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말하였는데, 그것은 그들(하나님의 백성)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숭배할 목적으로 그리함이다. 그러므로 단 2:27에 있는 "섬긴"다는 것도  궁극적(窮極
的)으로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 "인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면, 이 부분(13-14)에 있어서 "인자"의 나라가 보편적인 것을 생각해  보든지,
또는 섬긴다는 말의 대상이 누구이겠는지를 생각할 때에, "인자"는 신(神)이신 메시야
개인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다.
   (5)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
니라 - 이 말씀을 보아도. "인자"(人子)의 나라와 위의 네 나라들과의 뚜렷한 대조(對
照)가 나타난다. 네 나라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  의미에서는
"영원"하다고 하였고, 소극적 의미에서는 "폐하지아니"한다고 하였다(2:44,4:34).  이
런 나라는 세상 나라일 수 없고 메시야의 나라이다. 이 예언은 역사상 성취를 보게 되
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사역(使役)에서 그 깊은  뜻이  실현(實
現)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아라는 의식(意識)을 가지셨던  것이  명백하고,
또 친히 자기에게 대하여 "인자"란 칭호를 사용하셨다. 보스(G. Vos)박사는, 이  칭호
가 4복음서에 81차례나 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자기를 계시(啓示)하시는
칭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서 7장에 예언된 초자연적 인물이 바
로 자기라고 생각하셨다. 구약에서 오시리라고 한 "인자"는 그에게서 성취를  보았다.
그리고 "인자"란 말은, 다니엘서에서든지 예수님에게서든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칭호의 강조점은, 초자연적인 메시야의 영광과 권세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칭
호를 사용하실 때에는, 모든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만한,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의  성
격을 밝히 드러낸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 있어서 "인자"라는 칭호는, 영원 전부터  계
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성격을 포함한다(Geerhardus Vos, Self-Disclosure  of  Jesus,
Eerdmans,1954, Chapter 13).

 

  단 7:15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뇌속에 이상이 나로 번민케 한지라. -  다니엘은,
자기의 받은 계시로 인하여 "근심하며  번민"하였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고민한 이유
는, 단지 그 계시에 대한 무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계시에 대한 설명을  받은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고민하였다(28절). 그러므로 그의 고민의 이유는, 주로 계시의 내용 때
문이었을 것이다. 그 네째 짐승의 무서운 모습, 하나님의 놀랄만한 심판,  보좌에서부
터 나오는 불, 이 모든것은, 그 일들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다니엘의  마음에  고민과
공포를 가져올 만하였다.
   그 고통은, 육체에도 관련되어 있다. "중심"이란 말이나 "뇌"란 말이 사용된  것을
보아서, 그 때에 다니엘은 심리적, 정서적 격동을 받은바 있었다. 영(Young)은,  다니
엘의 고통의 육체적 방면에 대하여 주시(注視)하고(MPD. pp.49-50), 다음과 같은 의미
로 말하였다. 곧, "하나님의 계시는, 종종 그것을 받는자의 육체에도 영향을  끼친다.
발람은 눈이 감겨 넘어졌다고 하고,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할  때  종일종야
벌거벗고 누웠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바벧론의 제사장들과 같이 인간의 어떤 솔선적
수단이나 훈련에 의해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 행위의 압도적  능
력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MPD.)라고 하였다.


  단 7:16

 그 곁에 모신 자. -  이것은,  왕궁에서  왕을  모시는  자를  생각케  하는말이다
(Montgomery). 바벧론 왕에게 수종든 세 청년에게 대하여, 역시 이런  말을  사용하였
다.(1:5). 이것은, 물론 하늘의 왕 하느님을 수종드는 천사를 가리킨다. 내가    나아
가서 이 모든 일의 진상을 물으매 - 이 말씀을 보면, 다니엘 자신이 계시를 받음에 있
어서 능동적(能動的)으로 활동하는 자로 생각된다. 여기 그와 천사 사이에 담화가  열
리고 있다. 다니엘 자신이 먼저 천사에게 말을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되는지 우리
로서는 알기 어렵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을 뿐이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다니엘의 실례(實例)를 보고, 우리는 모든 이상(Vision)을 배척할 것이 아
니라 그대로 받아야 된다. 우리는,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해석을 구해야 한다. 우리 시
대에는 하나님의 해석을 구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상을 주시지  않으
시고 다만 우리로 하여금 성경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어
두워져서 성경을 알지 못하나니, 다니엘처럼 배우기를 원해야 된다. 그러나  천사에게
배움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친히 배우기를 힘써야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세우
신 교역자들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신다"라고 하였다.

 

  단 7:17

  이 귀절과 다음 귀절은 위에 나온 계시(啓示)의 의미를 간단히 촬요(撮要)하고, 19
절 이하에서는 "네째 짐승"과 및 "작은 뿔"에 대하여 길게 말한다. 이 귀절에  천사가
해석한대로,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라고 한다. 이것을 보아도 제 2장의 신상(神象)
계시에서는 왕국을 취급하였으나, 제 7장에서는 왕들(개인들)을 취급한 것으로 드러난
다. 물론 이왕들이, 왕국의 건설자요 대표자인 것만은 사실이다(E.J.Young, MPD. pp.
50-51).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 앞에 3절에서는 "바다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는 "세상"(땅)이라고 하니, 모순된 것같다. 그러나 이것은, 바다가 세상을 상징한다는
하나님의 해석이다. 세상은 바다와 같아서 하나님을 거스려 요동한다. 이 세상 임금들
은 저렇게 "인자"와 반대된다. "인자"는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를 가지며, 하늘에서 오
신다. 그러나 이세상 임금들은 땅에 속하여 하나님을 거스린다. 여기 "일어날 것"이라
는 말이 미래서(未來詞)이므로 어떤 학자들에게는 문제가 된다. 힛지키(Hitzig)는, 이
것을 근거로 하여 첫째 나라도 다니엘 시대에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을,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다 같이 배척한다. 여기 "일어날 것"이란  말
은, 시간적으로 미래를 의미하지 않고,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destined to arise)란
뜻이다(Kliefoth, Keil).

 

  단 7: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
하리라. - 여기서 천사는, 다섯째 나라 곧, "인자"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  나
라는, 먼저 나온 네 나라와 대조되었는데 두가지로 특이하다. 첫째는, 먼저 나온 나라
들이 지나가고 없어지는 반면에 이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먼저 있던  나
라 왕들은 땅에 속한 반면에 이 나라는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속한 것이다.  이  나라
왕은 하나님 자신이신 "인자"(메시야)이시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란 어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자유주의 학자들의 해석. 이 학파에서는, 이 어귀가 13절에 나온 "인자"란  말
의 설명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자"란 뜻은 성도들 곧, 유다 민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기   제7장의   "작은   뿔"은   안티오코   에피파네스
(Antiocho-Epiphanes)이니만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은 신실한 유대인들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신앙을 타락시키려는 안티오코 에피파네스의 핍박을  당한  자들은
그들(유대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해석을 이미 반대한 바 있다. 이런  해
석은 우리 본문을 바로 취급하지 못했다. 제7장에 있어서 이 "성도들"은 물론 작은 뿔
의 역사와 관계되어 있다. 작은 뿔이 그들로 더불어 싸워 잠간 이겼으나(21,25)  필경
은 성도들이 작은 뿔을 이기고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22절). 만일 제7장에 있는  작
은 뿔이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라면, 이 "성도들"은 유대인들일것이다. 그러나 제 7장에
있는 "작은 뿔"은 안티오코 에피파네스가 아니고, 제 8장에 있는 것이 안티오코  에피
파네스를 가리킨다.
   (2) 세대주의 학자들의 해석. 이 학파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란 말
이,신약 시대 말기에 남아 있을 유대인 성도들(Jewish remnant saints)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학파에 속하는 게이블라인(Gabelein)은, 이 들을 가리켜 "장차 큰 환난을 통
과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누릴  경건한  유대인들"이라  하고,  뉴엘(Philip
Newell)도 같은 견해를 가진다(Daniel,Moody Press,1962, pp. 93-95). 좀  더  자세히
그들의 견해를 소개한다면, 다니엘서는 신약 교회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유대인의  역
사만 말하기 때문에, 본장의 "성도들"은, 신약 교회의 신자들이 아니고  유대인들이라
는 것이다(세대주의 학파에 의하면 다니엘서에는 신약 교회가 언급되지 않고 공백으로
보류되어 있다고 함). 그들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이 유대인들이 재생 로마 제국의 왕
(곧, "작은 뿔")의 핍박을 통과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간다고 하였고, 교회의 성도들(유
대인 성도들이 아님)은 환난 전에 공중으로 데려감이 된다고 하였다.
   세대주의 학파의 견해에 대하여는, 9장 해석에 이르러 더욱 충분히 생각해  보려고
하나, 위에 관설된 이 학파의 견해를 여기서도 비판하려고 한다. 그 학파의 견해는 성
립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제 7장에서는 그 "성도들"의 받을 나라가 천년 왕국이라
는 말이 전연 없고 영원한 나라라고만 하기 때문이며,   세대주의 학파가  주장한대로
다니엘서에서 "신약시대가 공백기(空白基)로 보류되었다"고  함(다니엘서는  유대인의
역사만 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신약시대 곧, 이방 교회 시대는 뛰어 넘어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끝에 유다의 장래를 말한다고 함)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잇어서 알리스(Oswald Allis)는, 그의 저서 "예언과 교회"(Prophecy and the  Church)
란 책에 이 문제를 잘 밝혔다. 위에 관설된 성도들이 교회 성도들(일반 교회의 성도들
곧, 신약 교회의 성도들)을 의미하는지, 혹은 유대인 성도들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세
대주의 학파가 가르치는 "신약시대 공백설"(The parenthesis theory)의  가부(可否)에
달려 있다. 만일 신약 시대가 다니엘서에 있어서 뛰어넘기움(공백기로 취급됨)이 되었
다면, 그 "성도들"은 교회 성도들이 아니고 유대인 성도들일  것이다(p.126).  그러나
우리가 제2장에서도 논하였거니와 "신약시대 공백설"(The parenthesis theory)은 받기
어려운 학설이다.
   (3)우리 본문(18절)의 "성도들"이란 말이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설. 이 학설에 의하면, 그 "성도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물론하고 모두  참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Leupold). 카일(Keil)은 말하기를 , "여기 '성도들'이란
말은, 유대인과의 대조로 이방인들을 말함도 아니고, 회개하고 천년왕국에 들어갈  이
스라엘을 말함도 아니고, 출 19:6과 신7:6의 말씀과 같이, 새 언약의 모든 참된  백성
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 있는 진실한 신자들로 성립된다"라고  하였다.
영(Young)도 이 해석에 동조한다.
   물론 이 해석은 세대주의 학파의 해석보다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해석에도  난제
는 있다. 7:21,25을 보면, 작은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우리라고 하였으니, 작은  뿔
과 성도들은 같은 시대에 속한다. 그런데, 작은 뿔이 주님의 재림직전에 나타날  적그
리스도인 한(限), 이 성도들도 그 제한된 시점(時點)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성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성도들"
을 가리켜 모든 시대의 참된 신자들을 의미한다는 해석은 성립될 수 없다.
   (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직전에 있을 진실한  신자들(유
대인이나 이방인이나)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들이 장차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괴로움
을 당할 것이다(7:25). 마 25:22-23 참조.
   나라를 얻으리니. 윗절(17절)에서 네 짐승을 관설하여 그 큰 권세와 두려움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 귀절에 이르러서 천사는, 그 짐승들(세상나라들)의 일어남에  대하
여 염려할 것 없음을 암시한다. 그런 위험함 세상국가들이 일어날지라도 결국은  성도
들이 이긴다는 것이다. 여기 "얻으리니"란 말은, 우리가 생각할 만하다. 네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들은, 인간의 힘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얻을 나라는,  그
들(성도들)외에 다른 이 (하나님)로 말미암아 건설된다. 그 성도들은 그 나라를  받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인자(人子)에게 주시고, 인자께서는  성도들에게  주실
것이다. 그들이 그 나라의 통치자로 노력한 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그 나라
를 소유함에 있어서 실속 없이 피상적(皮相的)으로 얻는다는 것은 아니다. 곧, 그들의
나라를 얻음을 괴뢰(傀儡)의 행사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  다
스리는 자가 된다.(Leupold)

 

  단 7:19,20

  이에 내가 네째 짐승의 진상을 알고자 하였으니 곧 그것은 모든 짐승과  달라서 심
히 무섭고 그 이는 철이요 그 발톱은 놋이며 먹고 부숴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으며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 빠졌
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
라. - 이 부분에서 다니엘은 또 다시 의문을 가지고 "알고자"한다. 그는, 특별히  "네
째 짐승"(더우기 "작은 뿔")에게 관심을 가진다. "네째 짐승"의 독특성은 다니엘의 주
의(注意)를 끌었다. 일설(一說)에, 다니엘이 "네째 짐승"에게 이렇게도  크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것으로 대표된 나라의 핍박을, 그와 그의 시대(다니엘의  시대)사람들이
겪어야 하겠기 때문이라고 한다(Heaton).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네째 짐승"을  헬
라로 생각하고, 본서의 저자를 헬라 시대의 유대인으로 보는 자유주의 학파의  견해이
다. 이와 같은 해석이 잘못이라는 것은, 이미 "네째 짐승"이 헬라를 비유하지  않는다
는 주장에서 밝힌바 있다. 7절 해석 참조 이 "네째 짐승"에 대하여  다니엘의  관심이
깊어진 단서(端緖)는, 19절 기록된대로 그 짐승의 유달리 무서운 사실에 있다.
   7-8절에도 벌써 이 짐승에 대한 묘사가 있으나, 이 부분(19-20)에서는 그 것에다가
두가지를 더하였으니, 그 하나는 "그 발톱은 놋"이라는 것과(19절), 또 하나는 "그 모
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다(20절). "강하여 보인"다는 말은, 아람 원어 라-브
(*    )란 말의 번역인데, 루폴드(Leupold)의 해석(Sturdier)도 위의 한역과 같은  뜻
을 지지한다. 그런데, 아람어 라-브(*    )는 강하다는 뜻보다  크다는  뜻을  가진다
(Young,Montgomery,RSV). 이 크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
이 20절에 두 번 나오면서 강조하는 바는, 그 "뿔"로 비유된  적그리스도가  교만하게
자기를 크다고 생각하며 선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의 자기 과장으로서 다른
뿔들보다 자기를 높이는 것을 가리킨다.

 

  단 7:21.22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
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
라. - 위(19-20)의 다니엘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있기 전에, 계시(啓示)는 잠간  동안
더 계속된다. 그것이 이 부분(21-22)말씀이다. 이 부분 말씀은, 천사의  해석도  아니
요, 다니엘의 의문의 한 부분도 아니다. 이것은 계시 자체의 한부분이다. 이렇게 생각
되는 이유는, 21절 초두에 "내가 본즉"이란 말 때문이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소개될 때마다 이 문구가 나오곤 하였다(2,4,6,7,8,9,11,13). 그러므로 이 부분은, 계
시의 계속이다. 이 부분을 가리켜 앞에 나온 계시의 간단한 촬요(撮要)라고 하는,  힛
튼(Heaton)의 학설은 잘못이다.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이것은 벌써 나왔던  계시에는  없던
것인데 지금 처음 나온다. 다니엘이 이와같은 계시를 전에도 보았지만 이제 처음 말하
는 것인지, 혹은 그가 그것을 보는 것이 지금 처음인지 알기 어렵다. 어쨌든 여기  나
타난 것은, 그 "뿔"이 교만하게 하나님의 "성도들로 더불어" 싸우는 사실이다. 그  뿔
의 미워하는 대상은 성도들이다. 여기 "성도들"이라는 아람 원어(*             =카띠
쉰)가 관사(冠詞)를 가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거룩한 성질을 뚜렷이 지적하는  어투
라고 한다(Leupold).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의 미워하는 것이  바로  성결(聖潔)이라는
뜻이 여기 나타나 있다. 그 "뿔이" 성도들을 "이기었"다고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악한
권세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허락하시는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가, 자기  힘으
로는 사단의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의 전략과 힘을 이기지 못한다"(Young). 그러나  그
뿔의 승리는 잠간이니, 필경 승리는 교회에 돌아온다. 22절은 이것을 보여준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교회가 자력으로는 적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신원하여 주실 때 영원한 나라를 받는다. 교회가 봉착한 가장 어두
운 시점(時點)에, 하나님의 간섭이 임하여 구원을 주시는 법이다.  "성도들을  위하여
신원하셨고"(*                            )란 말은, 헹스텐벌키(Hengstenberg)에 의
하면, "성도들에게 심판을 주셨고"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심판권을 주신다
는 뜻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우리 한역이 옳다. 앞에 9-11절을 보면,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은 불법한 핍박에서 구원을 받는다. 영(Young)은, 본장에 기록된 심판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곧, 11, 26절의  것은, 세상 국가들에 대한 심판이고, 22절의 것은 세상 끝날에 있을 대심판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장에 기록된 심판들을 모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11,22,26절에 있는 심판들은, 모두 다 종말론적(終末論的)사건들과  관련되었다고  본다. 특별히 11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최후적 승리와 네째 짐승의 최후적  실패가  역설(力說)되어 있다. 26절의 심판도 역시 그러하다. 22절에 있는 심판 묘사는, 실상 11절(26절에 재설됨)에 있는 심판 묘사의 확대된 표현이다. 이 둘은 같은  심판을  취급한다.

  단 7:23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네째 짐승은 곧 땅의 네째 나라인데 이는 모든  나라보다 달라서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숴뜨릴 것이며. - 이 말씀은, 다니엘의 의문하였던 것(19-20)을 풀어주는 천사의 대답이다. "모신 자"란 말의 아람원어는 "그가"라고  번역해야 합당하다.
   여기서는, "네째 짐승"으로 비유된 나라의, 그 앞의 모든 나라들보다 다른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 나라가 온 세상을 먹으리라는 것이다. 그 나라는 말할 수 없이  잔인하다. "삼키고"라든지, "밟아"라든지,"부숴뜨릴 것"이라는 표현들은, 그 잔인한  파괴력을 잘 나타낸다. 헬라보다도 로마가 이와 같은 나라였다.

 

  단 7:24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먼저  있
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  "열 뿔"에 대해서는 앞의 7절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십수(十數)는 만수(滿數)를 의미하고 문자적으로 열을 의미하지 않
는다. 네째 짐승에게서 나온 "열 뿔"은, 역사상 로마 제국시대부터 적그리스도에 이르
기까지 나올 인간 정권의 총체(總體)를 비유한다(Leupold).
   그러면, 여기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란 말로 표현된 "작은 뿔"(8절)은 무
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여기에 대하여 세가지  해석이  있
다.
   (1)자유주의 학파의 견해 . 그들은, 이 "작은 뿔"을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라고  한
다.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는, 주전 2세기 경에 유대인을 무섭게 핍박한 실루코 왕조(수
리아)의 폭군이었다. 에피파네스는 "빛난다"는 뜻인데 신성(神性)의 칭호에 가까운 명
칭이다. 유대인들은, 에피파네스를 고쳐서 에피마네스(미친 사람)로 불러주었다. 그는
아덴에서 출생하여 12년 동안 인질(人質)로 로마에 있으면서 세계를 휩쓸만한  권력을
높이 보고 탐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필경 팔레스틴도 자기 수중에 넣어 그 땅을  이교
화(異敎化)하려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歷史)가 있은 이후, 안티오코의  압제하던
때야말로 가장 암흑한 시대중의 하나였다. 그가 명령을 내려 성전에서 제사 의식을 멈
추게 하였고, 성경을 파상케 하였고, 안식일과 모든 절기를 지키지 못하게 하였고, 어
떤 음식물에 대한 율법의 금령을 폐지케 하였고, 할례를 중지시켰다. 특히 주전 167년
12월에는, 성전의 번제단  자리에 새 제단을 세워 제우스 신(神)을 숭배케 하였다. 제
우스에게 제사할때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더럽게 여기는 동물들의 고기로 제
물을 삼게 하였다. 그는 제우스 신당(神堂)을 팔레스틴 각처에 세우도록 하고  거기에
제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극형을 가했다. 그리고 어린 자식에게 할례를  행하는   자
나, 또는 돼지 고기 먹기를 거부하는 자나, 율법책을 가진 자를 사형하도록 명령한 것
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때, "작은 뿔"을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라고  하는
자유주의 학파의 해석도 그럴 듯하다.
   그러나 본문 해석상 위의 견해는 합당치 않다.   "작은 뿔"은, 분명히 종말관적 의
의(終末觀的意義)를 가지나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오셔서 심판하심으로 이 작
은 뿔이 멸망 당하자 영원한 하늘 나라가 임한다.(7:11-14,26-27). 이 작은 뿔이 망하
므로 세계의 역사는 끝난다. 그러므로 헬라 시대에 있었던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를  그
런 종말관적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작은 뿔"은 ,"인자"와 및 "옛적부터 항상  계
신 자"와 역사상으로 접근되어 있다. 인자가 나라를 받기 직전에 되는 일이, 작은  뿔
의 멸망인 것이다.   "작은 뿔"을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라고 하기보다  적그리스도라고
해야 될 것은 , 그 작은 뿔이 세계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뿔은 네째  나라
와 관계되어 있는데, 이 네째 나라야말로 극히 보편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온세상을 삼킨다고 하는데, 헬라보다는 로마가 이와 같은 나라이다. 그러므로  헬라의
안티오코 에피파네스를 작은 뿔이라고 할 수 없다.   "작은 뿔"이 안티오코  에피파네
스가 아니라는 가장 강한 이론은, 신약의 말씀이다. 바울이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술
할 때에 단 7장의 말씀을 반영시켰다. 보스(G.Vos)박사는, "바울의 종말관"(Pauline E
schatology, Eerdmans 1952)이란  책, 제 5장에서 이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바울
은, "불법의 사람"(죄악의 사람=적그리스도)을 묘사할 때에(살후2:4) 다니엘서의 술어
들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7:8,20,21,11:31,36,40참조.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작은
뿔에 대한 다니엘의 사상이 바울의 적그리스도론에 반영되었다.
   (2)보수주의 학파의 견해, "작은 뿔"을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
고 한다. 이 견해는, 클리에포드(Kliefoth),카일(Keil),영(Young),루폴드(Leupold) 기
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3)세대주의 학파의 견해.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보수주의 학파의 견
해와 공통되는 점이 많다. 두 학파가 다 함께 이 작은 뿔을,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올 인물이라고 한다. 세대주의 학자들 중 대다수가이 인물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한다(Philip Newell, Coleman Luck). 그러나 그들의 학설 내용은, 일반 보수주의 학자
들의 그것에 비하여 특이(特異)한 점들을 지니고 있다. 곧, 이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의 재림 직전에 재생될 로마제국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 재생 로마  제국으로  말하
면, 사단이 친히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그 임금(적그리스도)이 7년 동안 권세를  잡는
데, 교회의 성도들은 7년 벽두에 공중으로 데려감이 되고, 땅에서는 불신  유대인들이
이 적그리스도로 더불어 3년 반 동안 계약하고 잘 지내다가, 후 3년 반은  적그리스도
에게 핍박을 받는데, 그 끝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적그리스도를 멸하고 천년  왕국을
세우신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 재생설은, 앞에 7절에서 말한바와 같이 믿기 어려운  해석이다(7
절 해석 참조). 그 뿐 아니라 세대주의 학자들의 학설은, 7:23과 24절 사이에  장구한
세월의 공백기(Great parenthesis)를 생각하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23절은  본래의
역사상 로마 제국을 말하고, 24절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
을 재생 로마제국을 진술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열
뿔"은, 그 네째 짐승의 죽은 다음에(로마가 망한 뒤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살았을
적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재생 로마설을 성립시키지 않는다. "열 뿔"
은 로마의 후신 국가(後身國家)들을 대표한 세력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있다.
   우리는 차라리 앞에 소개된 보수주의 학파의 견해대로, 바울과 함께, 이 "작은 뿔"
이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뿐이다. 이 주장에 있어서 우리는, 하필  세대주의(世
代主義:dispensationalism)학파의 주장한 재생 로마설을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

 

 단 7:25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
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  이 귀절은, 작은 뿔의 하는 일에 대해  집중적
으로 진술한다. 작은 뿔로 비유된 적그리스도가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여  말할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은 물론 적그리스도의 악한 내용을 가리키는데, "대적"한다는 말
의 내용이 그것을 드러낸다. 우리 한역의 "대적"한다는 말은, 아람 원어의 한  부분만
나타내고 있다. 아람 원어 레차드(*      )는 "옆에서"(at the side of)란 뜻인데, 하
나님과 동등의 자리에 올려 놓고 말함이니,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제외시키고 자기를
그 자리에 높이는 참람된 말을 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살후 2:4의 내용과 같이,  그
가 하나님에게만 속한 권위를 외람되이 자기에게 붙이는 행동이다. 이 때문에, 신약에
서 그를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한다. 또한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함은 그의  그리스도
를 반대하는 이유만이 아니고, 그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광을 자기에게 붙여  그리스
도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왕권을  폐하고자
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대직(對
敵)인 동시에 하나님 백성의 대적이니만큼, 큰 적대자이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주
관하려고 운동하는 시기(時期)가 바로 성도들에게는 큰 환난의 때이다.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교만한 행동이 여기 나타난다.  그
는, 자연계(自然界)까지 주장하며 변동시키려고 한다. 이 말씀에 대하여 클리에포드(K
liefoth)는 말하기를, "적그리스도는 자연질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본래 정하신 법을
인정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의 좋을대로 제도를 내어 인생의 법을 변경시킨다.  그는
이렇게 하므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간주한다"라고 하여싸. 그는 하나님의  백성
을 주장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 질서까지도 반역적으로 주장하려고 교만하게  덤
빈다.
   "때와 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네째 짐승을 헬라로 생각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말씀이 유다 종교를 가리킨다고 하며 그것을 변개코자 한것이 안티오코 에피파네스
의 행동이라고 하였다(Heaton, Montgomery). 힛튼(Heaton)은 말하기를, "여기  '때'란
말은, 유다의 종교적 절기를 가리키고 '법'이란 말은 포로 후 시대의 기초를 이룬  모
세의 율법이다"라고 하였다(Daniel,p.188).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그런 제한된 뜻
을 가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때"란 말이 일정한 종교적 절기를 가리킨다고  할  것은
없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도 그것은 인정한다. "때"란 말은 차라리 하나님이 정하
신 절기들을 가리킨다(창 1:14,17:21,18:14). 그리고 "법"이란 말은 아람 원어로 따드
(*    )인데, 종교적 율법을 의미한다고 할 것은 없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법칙들을
의미하는데, 다니엘서에만 이 말이 여덟번(2:9,13,15,6:5,8,12,15,7:25)나오는 중, 한
번(6:5)만 종교적 율법을 의미하고, 그밖에는 일반적 법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
"때"와 "법"은, 하나님에게서 난 인생의 근본 원리들과 규례를 가리킨다(Calvin,  Kei
l, Leupold, Young).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인생의 근본적규례들을  변경시키고자  한
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이 말씀을 보니 성도에게 소망이 있다. 적그
리스도의 행동은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하나 결국  그일이
유산(流産)된다. 그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권세도 하나님에게서 받았으니("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그는 하나님의 장중(掌中)에서 관할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소망을 가진다. 사단의 도구(道具)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 그로 말미암은 큰 환난도 필경 성도들을 위하여
단축된다(마24:22).
   그러면,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환난의 시기(時期)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것이 헬라 시대  안
티오코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핍박의 가장 혹독한 시기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예를  들
면,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이 시기가 주전 168년에 유대인의 예배  행위  금지로
시작하여 주전 165년에 유다 매코비(Judas Maccabees)가 성전을 중수한 때까지라고 하
였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난제가 많은데, 몬트고메리(Montgomery)자신도 그것을 인정
한다.
   (1) 그 해석이, "한 때"와 "두 때"는 해결하나 "반 때"는 해결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때"란 말을 1년으로 잡아 "한 때와 두 때"를 합하면 3년이  되는데,  그것은
위에 관설된 안티오코 에피파네스의 심한 핍박 기간에 알맞는다. 그러나 "반 때"에 대
한 해결은 없다.
   (2) 위의 몬트고메리(Montgomery)의 학설은, 매코비 1서에 의하여 계산된  것이다.
매코비 1서는 안티오코 에피파네스의 혹독한 핍박기간이 3년 동안 이라고 한다.  그러
나 매코비 2서는 그 기간이 2년동안이라고 한다(2 Macc. 10:30). 그러므로 이것은  난
제이다.
   (3) 몬트고메리(Montgomery)의 해석에 있어서 또 한가지의 난제는, "때"를 1년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4:23의 "때"도 1년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
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9:27에 있는 "이레의 절반"(半週間)과 같다 하고, 8:14
에 있는 "이천 삼백 주야"와도 대략 같다고 하였다. 그는, 1세기의  계시록  저작자도
이와 같은 해석으로 말하였다고 한다(계11:2, 12:14, 13:5). 세대주의 학자들도  이와
같이 "때"를 1년으로 잡는 해석을 따라간다. 우리는, 카일(Keil)과 함께 이 문제를 취
급하고 싶다. 그는 말하기를, "4:23의 '일곱 때'를 7년으로 해석하는 것은 확실한  근
거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12:7이나 계시록에 있는 '한 때 두 때'의 의미도  그렇다
고 할 수 없다. 한 날을 한 해로 생각하는 것도 확실한 근거 없는 일이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8:14의 '이천 삼백 주야'와 같이 보는 것도 근거 없는  해석이다"라
고 하였다(p.242). 이점에 있어서, 몬트고메리(Montgomery)와  세대주의(世代主意))학
자들은 다니엘서의 비유를 바로 취급하지 않는다.
   (4) 몬트고메리(Montgomery)와 세대주의 학자들의 해석에 대한 또 한가지  난제는,
만일 다니엘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써 3년 반을 의미하였다면, 왜 그가 단순하
게 3년 반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는 3년 반이라고도 하지 않았고, 세 때 반이라고도
하지 않았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하여 세부분으로 나누어 말하였다. 그러므
로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현법에는 반드시 상징적 의미를 내포했다고 생각한다. 곧, 이
것은 적그리스도 활동의 세가지 단계를 가리킨다. 이 상징에 있어서 다니엘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핍박 행위가 점점 강하여가다가 끝나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 영(Young)
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란 것은,  환난의  기간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필경은 단축되고 말 것을 가리킨다. "한 때"는 하나님의 은밀
한 계획 가운데 끝을 가지고 있는 기간이고, "두 때"는 그때("한 때")의 계속을  의미
한다(Calvin). 저렇게 적그리스도가 한 때 권세를 얻고 그것이 점차 강화된다는  의미
에서 "두 때"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한 때"는 그 핍박행위의  시작을  의미하고,
"두 때"는 그 핍박행위의 강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 때"는, 그 핍박 행위
가 절단(絶斷)되고 말 것을 상징한다. 적그리스도의 환난에 대한 주님의 말씀도  이와
같은 해석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끝은 아직 아니니라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하신 뒤에 (마  24:6-8),
많은 재앙을 말씀하시고,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
4:22)라도 하셨다. 마 24:6; 막 13:7; 눅 21:9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날들
을 감하시리라"란 것은, 계속되는 환난의 날들을 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 7:26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 앞의 25절
은 적그리스도의 핍박 시기(時期)가 갑자기 단축되는 태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이
제 이 귀절의 내용이 나올 것은 자연스럽다. 이 귀절은 적그리스도가 받을 최후  심판
을 진술한다. 물론 그 "멸망"은, "끝까지"의 멸망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도  살
후 2:8에 밝혀준다. 곧,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
나심으로 폐하시리라"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때에  적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다 멸절되고 만다. 다니엘서나 바울은, 함께 적그리스도의 멸망의 완전성을  강
조한다. 바울의 더욱 놀랄만한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적그리스도)
를 죽이신"다는 말씀이다.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 시작되자마자 적그리스도는  완전히
멸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되어진다.
   이 점에 있어서, 윌리암 헨드릭슨(Williadm Hendriksen)의 "내세의 생명에 대한 성
경의 교훈"(The Bible on the life Hereafter)이란 책과 보스(G.Vos)의 "바울의  종말
관"(Pauline Eschatology, 1952)이란 책은 읽을 만 하다.

 

  단 7:27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 하여.  -       
이 귀절에서는, 특별히 성도들이 받게 되어지는 영원한 나라의 성격을 보여준다. 네째
짐승의 나라가 보편적이었으나(23절) 그것은 성공 못하고, 필경 성도의 나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성을 띤다. 그것은, "온 천하 열국의 위세"란 말이 보여준다. 성도들은, 자기에게 어떠한 권세나 의(義)가 없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영원한" 왕들이 되어진다. "모든 권세"는, 그들의 발 밑에 속한다. 그들이 많은 환난을 겪었으나 필경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

  단 7:28
  그 말이 이에 그친지라. - 힛튼(Heaton)은, 이 귀절 말씀이 제 7장의 결론이 될 뿐
아니라, 다니엘서 전체의 결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이론은  본서의 단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잘못된 견해이다. 이 귀절 말씀은, 차라리 제7장  계시(啓示)의 결말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심이 번민하였으며 내 낯 빛이 변하였으나 - 15절에도 그가 "번민"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여기서는 그의 "낯빛이 변하였"다고까지 말한다. 과연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일을 마음에 감추었느니라 - 이것은, 다니엘이 그 받은바 계시를 깊이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된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말하기를, "이 귀절이 가르치는 것은, 선지자들이나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마음에 저장하고 새김질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입에 두는 것은 필요에 의하여 하지만, 마음에 간직하기는 항상 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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