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1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지 삼 년에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루
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 이 말씀에 연대(年代)가 기록된 것을, 우리가 무심히 읽으면
안된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事件)들이 엄격한 역사성(歷史性)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단 1: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
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 "주께서"(*
=아도나이). 많은 사본(寫本)들이 이 말 대신에 "여호와"(* )란 말을 가지
고 있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다니엘서에서 제 9장을 제외하고는 "하나님"(*
= 엘로힘)이란 성호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여기서도 본래는 "하나님"(*
=엘로힘)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다.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사로잡아 가고, 또 성전 기구를 가져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붙이신 까닭이다. 성전 기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거룩한 것이지
만, 유대인들의 종교적 외식(外飾)에만 이용된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이라도 폐지
시키셨다. 그는, 종교적 외식을 무종교(無宗敎)보다 더욱 싫어하신다. "시날 땅"(*
), 이곳은, 수멜 땅(mat Sumeri) 곧, 남쪽 바벧론이었던 곳이라고 생
각되어 왔으나, 지금은 바벧론의 옛 이름이라고 간주된다(창 10:10, 11:2, 14:1; 사
11:11). "자기 신"은 , "벧"(* )이나 "말뚝"(Marduk)이란 신(神)을 의미하였을 것
이다. "그 신의 보고"(* )란 말은, "신의 집"이란 뜻일 수도 있다.
이 말이 70인역(LXX)에는 없으나 히브리 원문에는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문구가 그
윗문구 "시나 땅"(* )에 대한 동격어(해설 문구)라고 한다. 곧,
"시나 땅"이 "그 신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합당치 않다.
단 1: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 "환관장"(* ). "환관"은 고자(鼓子)를 의미하기도 하나, 고관(高
官)을 의미하기도 한다(E.J.Young).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 미브네 이스라엘). 이 문구는,
특별히 "유대인"이란 민족 칭호와 달라서, 신정 국민(神政國民) 곧,택한 백성을 가리
킨다. 이렇게 본서의 저자는, 우상의 나라 바벧론에서 하나님 백성의 특이(特異)한 처
지를 새삼스럽게 느낀다.
단 1:4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 "학문"(* =세페르). 70인역
(LXX)과 데오도숀역(Theodotion)은, 이것을 문학(* )이라는 뜻으로 번
역하였고, 윌겟역(Vulgate)도 역시 문학(literas)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천문학(天文學), 점상학(占相學)과 같은 것도 가리켰을 것이다. 그것은 미신(迷信)도
포함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미신을 반대하기
위하여 그것에 대한 지식을 가짐은 잘못이 아니다(Chrysostom).
단 1:5
자기의 진미와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 일설(一說)에, 느
부갓네살이 그들을 이와 같이 대우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조국을 잊어버리게 하려느
는 것이었다고 한다(Calvin). 그러나 그보다도 그들로 하여금 왕궁에서 수종들만한 건
강과 아름다움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Barnes).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 - 유다 소년들이 사로잡혀 가서 왕궁의 환관이
됨은, 이사야의 예언 성취이다(사 39:7).
단 1:6,7
이 부분에 기록된대로 네 소년의 이름을 바벧론식으로 고친 것은, 그들을 바벧론에
동화(同化)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
리라 하고 -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하여 "뜻을 정하"였다
고 한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1) 그 음식이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규(레 11장)에 맞지 않는 까닭이었다고 한다. 만일 다니엘이 그 음식을 먹으면, 구약
시대의 성결(聖潔)을 더럽힐 것이었다. 그 뿐 아니라, (2)그 때에 이방인들이 음식을
만든 후 먹기 전에 먼저 그들의 신(神)께 얼마를 제물로 바치던 풍속이 있었기 때문
에, 다니엘이 그 음식을 먹지 않기로 뜻을 정하였던 것이다.
단 1:9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
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 "구하니"(* =예바케쉬). 이것은 강한 청구(seek
demand)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하는 태도였으니 대립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는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어서 문제 해결을 보게 마련이다. 비록
신앙의 절개 문제로 마음은 사자(獅子)와 같이 굳센 다니엘이었지만, 인간 관계에 있
어서는 매우 온유하였다. 이것이, 무서운 시험을 잘 이기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단 1:10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 "환관장"은 다니엘의
청원을 들어주지 못할 것으로 말했으니, 그것은 "왕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다니엘
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니, 환관장은 왕을 두려워하였다. 내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
하게 되리라(* ) - 70인역(LXX)은 이 문구를,
"내가 내 머리로 모험하게 되리라"(I will run the risk of my head.)라고 하였고, 수
리아역은, "임금께서 내 머리를 베리라"란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어떤 번역들
은, 이것을 그저 어떤 사건에 책임진다는 뜻으로만 생각하였다(J.A.Montgomery). 그러
나 느부갓네살과 같은 폭군 앞에서는 사소한 일로도 사형을 받는 일들이 있었으니, 여
기서 이 문구는 사형을 의미했을 것이다.
단 1:11
감독하게 한 자 - 이것은, 히브리 원어로 멜찰(* )이라고 하는데, 관직(官
職)의 명칭인지 혹은 사람의 이름인지 알기 어렵다. 게세니우스(Gesenius)는, 이것이
왕궁에서 술이나 떡을 맡은 관직을 의미한다 하고, 또 다른 학자는 재정을 맡은 관직
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윌겟역(Vulgate)과 수리아역(Syriac), 70인역(LXX)등은, 이것
을 사람의 이름이란 뜻으로 번역하였다. 다니엘이 말하되 -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
와 뜻이 같았기 때문에 자기와 그들을 위하여 동일한 청원을, 그들을 대표하여 말하였
다. 그는, "우리"란 말(13절)로 자기와 그 세 사람을 대표하였다. 신앙자는 사람을 의
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세우신 사람들을 즐거워하기는
한다. 다윗도 말하기를,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하였다.(시 16:3). 이런 즐거움으로 뭉친 동지(同志)들로 인하여 더 큰
좋은 일이 성취된다. 그러나 이들의 몽침은 결코 육적(肉的)의 것이 아닌 것만큼, 교
만하게 움직이지 아니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성결한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 뿐이다. 다
시 말하면, 그들은 어떤 인간적인 야욕으로 뭉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
려는 동기로만 뭉친 것이다.
단 1:12,13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
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 "청하오니". 다니엘은 거룩되게 살려
고 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사실이 여기에 드러났다. 그것은,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청
원하는 형식으로 말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고(8 절), 자기들을 가리켜 "종들"이라
고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12 절). 참으로 성결을 따르는 자들은, 남들을 자기
들과 아주 딴 종류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남들을 높인다.
"시험하여". 다니엘의 이와 같은 제안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용감스러운 도전
(挑戰)이다. 신자들은 세상을 향하여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어야되고, 또 그 결과로 하
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된다. 하나님의 성결을 파수하는 자는 이런 신앙 도전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편이 되시기 대문이다. 다니엘은, 채소와 물만
먹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길이라면, 건강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줄 믿었다.
중국의 어떤 촌에 메뚜기 재앙이 임하여 곡식을 모조리 먹어 버릴 때에 모든 사람
들이 메뚜기를 없애 달라고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때에 기독 신자 한 사람은 제
사하기를 거부(拒否)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메뚜기가 없어진다고 단언하였다. 과연
그가 기도하였더니 메뚜기가 다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신앙적 도전이었다. 노
바 스코티아(Nova Scotia)란 지방에 화재가 났다. 그 도시에 은퇴하였던 목사가 예배
당에 들어가 그 건물이 불 붙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 도시가 점점 불바다로
화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기도를 계속하였다. 그의 친구들이 찾아가 빨리 나가자고
권했지만, 그는 기도를 계속하였다. 그의 친구들이 찾아가 빨리 나가자고 권했지만,
그는 끝까지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때에 불길이 예배당 가까이까지 와서는
갈라지면서 예배당은 태우지 않고 지나 갔다고 한다. 이런 것도 신앙적 도전(挑戰)의
결과이다.
단 1:14-16
이 귀절들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먹었으니, 그들의 얼굴이 더 아름다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그들의 승리를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담대히 믿고 서는 자에게 권능을 보여주신다. 열대 지방(熱帶地方)의 어떤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질병 때문에 어름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옛날에 열대 지방에서 어름을 구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그 때에 갑자기 우박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모아 어름으로 대용(代用)하였다고 한다.
단 1:17-20
여기서는, 승리한 소년들에게 새로이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세 소년들에게는 "지식"과 "명철"을 더하시고, 다니엘에게는 "이상(異常)과 몽조"(夢兆)를 깨닫는 은혜를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