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1:1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
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 선지자는, 그 민족을 대표하여 그 당면한 고통 중에서 죄
감을 심각히 느끼도록 만드는 환경을 묘사한다. 이제 이 비참한 정경을 묘사함에 있어
서 그는, 머리말에 "슬프다"(* =에이카)로 시작한다. 이 표현은 실상"슬프다"
로 번역되기 보다는, "어떻게"라고 번역됨이 옳다. 곧, 유다 민족의 처지가 저렇게 도
탄 중에 떨어진 것이 웬 일인가 하는 탄식이다. 그런 비참한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
고, 하나님의 징계(懲戒)라고 해야만 바로 해석된다고 암시한다. 사람의 처지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급변되는 것은,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되는 법이다. 이렇게 죄를 생
각하게 하는 참상에 대하여 선지자는 이 아래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애 1:2
본절은 친구들이 다 배반한 참상(慘狀)에 대한 진술이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 여기 "밤새도록"이란 말(* =빠라엘라)을 보니, 그
슬픔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곧, 슬픈 자도 밤에는 잠드는 법인데, 그때에도 애
곡한다고 여기 말한다.
사랑하던 자 - 이것은, 이 아래 나오는 "친구"란 말(* =레이아)과 같은 내용
을 가리킨다. "친구"(* )라는 것은, 유다 민족이 의뢰하던 애굽을 의미하는 것이
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벌하실 때에, 그들이 이때까지 하나님 대신으로 믿
던 모든 것을 없이 하시는 법이다(사 3:1). 의지하던 대상(對象)이 없어진 사실은, 그
로 하여금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믿던 죄악을 생각케 한다.
애 1:3
본절은, 유다 민족이 바벧론에 포로된 사건을 전후하여 당하는 고난들을 묘사한다. 그
것들은, "환난", "수고", "평강을 얻지 못함", "핍박" 등이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
성이 끊임 없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 사실도 역시 그들의 죄를 기억시티는 것이다. 그
런 참상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애 1:4
여기서는 종교적 불경기(不景期)에 대하여 묘사한다. 전에는 유다 백성이 종교적
절기를 지키느라고, "시온의 도로"가 사람들로 찼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
도로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믿는 종교에 있어서 은혜가 없고
적막한 처지에 빠지게 됨도 역시 그들의 죄를 생각케 하는 참상이다.
애 1:5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 이것은, 유다 민족을 주장하는 자가 이제부터 이방인으
로 바뀐 사실을 말한다. 사람이 하필 원수의 손 가운데 떨어졌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그의 죄악을 생각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役使)이다.
애 1:6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 곧, 유다 나라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이다.
유다의 "영광"은 하나님이 그 예배를 통하여 함께 하심이다(시 132:13-14). 하나님이
그 나라와 함께 하심에 따라 "목백"(* =사림, 곧, 지도자들)이 유력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이 유다 나라를 버리시니, 그 나라의 "영광"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무력해진 것이다.
애 1:7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함을 비웃도다 - 유다가, 바
벧론의 침략을 당하여 핍박("군박") 아래 있을 때에 옛날의 좋은 시대를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시 42:3,4 참조. "옛날"은 모세, 여호수아, 다윗의 시대를 가리켰을 것이
다. "그 황적함"(* =미쉬빠테하)은, 그 나라의 모든 행사들, 곧, 업무(業務)
나 사회 활동이나 심지어 예배 행위까지도 폐지된 것을 가리킨다.
애 1:8
유다 민족을 높이던 자들이 이제 와서 그들을 업신여긴다고 함. 전에는 높이던 자
들이 이제 와서는 어찌하여 정반대로 업신여기는 태도를 취할까? 이것 역시 우연한 일
이 아니고 과거의 죄악을 생각케 하는 안타까운 일이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 같이 되니 - 유다 민족이 범죄하는 동안 사
람들에게 불결한 자처럼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자기 변호에
의하여 남들에게 잘 보였다.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필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셨다. 여기에 따라 그들의 비참해진 광경은, 그들의 범했던 죄악의 추태를
남들에게 드러내어 보인 셈이다.
저가 탄식하며 물러 가도다 - 곧, 그들이 이제 벌을 받고야 죄를 깨닫고 수그러진
다는 뜻이다.
애 1:9
유다 민족이 "놀랍게 낮아"졌다고 함. "놀랍게 낮아"졌다 함은, 너무도 갑자기 그
들의 처지가 바뀌어진 사실을 보여 준다. 높던 자가 정반대로 낮아진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이다. 곧,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
함이여"라고 한다. 이것은, 유다 민족의 죄악이 치마에 나타난 것처럼 노골적으로 탄
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 그들이 그 받은 벌을 생각하여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죄와 벌에 대하여 무감각했으며 철면피(鐵面皮)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죄악이 관영(貫盈)한 때에는 벌이 따른다. 그러므로 유다 민족은 필경 "놀랍게
낮아"질 수 밖에 없었다. 곧, 바벧론의 침략을 당했다.
선지자는, 민족을 대표하여 그 받는 환난의 참상(慘狀)이 죄 값임을 이렇게 바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런 처지에서는 진정한 회개가 나오며,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선지자는 이 점에 이르러 그 민족을 대신 표현시킨다.
애 1:10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 이
것은, 예루살렘을 침략한 바벧론 군대가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하여 간 사실들에 대한
말씀이다. 이방인들은 거룩한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법인데, 이제 그들은 기탄 없
이 성전에 들어와 성전 기구들까지 가져갔다. 경건한 신자들에게 있어선 이 이상 더
마음 아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선지자
들은 슬프게 여겨 탄식하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런 슬픈 사실이 발생된 원인이다. 거룩한 것
이 이방인의 침범(侵犯)을 당하게 되는 것은, 어떤 때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들이
그 거룩한 것들을 바로 취급하지 않는데 그 원인을 가진다. 혹 하나님보다도 그 성물
들을 자랑하며 의지하는 것과 같은 그들의 죄악이, 그 원인을 성립시킨다. 유대인들은
그 때에 종교를 외식으로 가져,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은 행치 않고 성전의 외부적
시설을 하나님 대신 신성시(神聖視) 하여, 그것 때문에 외적(外敵)의 침해를 면할 수
있는 줄로 생각했다(렘 7:3 참조).
선지자는 이 말을 하는 가운데도 역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죄악을 무언중(無言中)에
지적하고 있다.
애 1: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 여기서는 선지자
가, 예루살렘성 포위로 인하여 식량이 핍절된 사실을 보여 준다. 모든 백성이 보물로
식물을 바꾸는 사실로 보아서 그 얼마나 기아 상태(饑餓狀態)가 심한 것을 알 수 있
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양식을 없애버리는 재앙을 내리시는 것도, 어떤 때는 특별히
그들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보다도 음식물을 더 사랑하여
그것을 너무 의지하기 때문에(겔 4:16),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벌을 내리신다. 양식
(糧食)이 핍절된 자는 하나님보다 양식(糧食)을 더 좋아했던 죄악을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난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이 말씀을 보아도 선지자가 비
록 극도의 국난(局難)에 대하여 탄식하면서도 낙심하는 것은 아니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신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낙심은 죄악이요, 낙심에 빠진 자는 기도를 못하
는 법이다.
애 1:12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 선지자는, 여기서도
유다 민족을 대표하여 그 당하는 환난이 보통이 아님을 보여 준다. 곧, 다른 민족(지
나가는 자)에게는 그와 긔은 환난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
는가"라고 한 말씀은, 저희에게는 이와 같은 환난은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방 민족들에게도 심한 환난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
던 그들로서 그런 환난을 당할 때에, 여기서 선지자가 놀랜 것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
다. 선지자가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여기서 심히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
랑을 받던 민족이 그런 심한 환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다 민족이 이런 환난을 받은
것은 참 놀랄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하시
는 자를 더욱 징계하신다는 것이다(잠 3:11; 히 12:7). 선지자는 이 진리를 아는고로
본절 하반절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
로다"라고 하였다.
애 1:13,14
여기서는 또 다시 유다 민족을 대표한 선지자가, 그 민족의 환난이 인력(人力)으로
는 막을 수 없는 천래(天來)의 것임을 지적한다. 곧,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라 함은, 그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이고,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다 함은, 유다 민족으로 하여금 어찌할 수 없이 굴
복(屈服)하도록 무적(無敵)의 환난을 "그물"과 같이 폈다는 것이다. "종일토록 고적하
여 곤비케 하셨도다"함은, 그가 환난에 처하여 기쁨이 없고 병들었다("곤비")는 뜻이
다. 이것은, 환난 때문에 심히 쇠퇴하여진 유다 민족의 정지(情地)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이다.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 곧, 유다 민족의 당한 환난
이 그 민족의 범한 죄악을 원인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멍에를 그 목에 얽어 매듯이,
죄악의 짐이 이제 그 민족에게 부담되어 어찌할 수 없이 되었다.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 이것은, 강한 나라 바벧론
의 침략을 당하여 이제 패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 1:15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도다 - 선지자는, 또 다시 유다 민족의 수난을
그들의 죄로 인한 벌로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연출되는
것을 지적한다. 사람들이 믿었던대로 일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전개될
때에, 그들은 마땅히 깨달을 것이 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
었던 되 값으로 그런 안타까운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 용
사들을 하나님보다 더 믿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 용사들의 손으로 능히 갈대아 군
사들을 막아낼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이제 일을 당하고 보니, 사태는 이
미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연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여기서 이 사실을 지
적하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라고 한다. 여기
"성회"란 히브리어는 모에드(* )인데 유력한 학자들은 이것이 정한 때를 의미
한다고 한다. 선지자는, 유다 민족에게 일어난 참사가 결국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실 것을 그대로 이루신 것으로 본다. "소년"은 청년을 의미한다. 이 아랫말, "유
다를 술틀에 밟으셨도다"라는 것도 역시 그 때의 환난이 하나님의 징벌인 사실을 알려
준다. "술틀에 밟"는다는 뜻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 포도를 틀에 짜는 것을 의미
하는데, 이는 심판을 상징한다.
애 1:16,17
여기서는 선지자가 그 때 유다 민족의 당한 전화(戰禍)의 참상을 보고, 심히 애통
하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 "내가"(* )라는 말은 그 민족을 대표하여 사용된 대
명사(代名詞)니, 선지자가 그렇게 슬퍼하는 동시에, 그 민족도 마땅히 그리해야 된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징벌로써 내린 환난 앞에서는 사람들이 마땅히 마
음을 부드럽게 가지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임한 고통이야 말
로 원망과 불평으로 대하지 않는 자에게는 참다운 회개를 이루게 한다. 유다 민족(여
기 "나"란 말이 대표함)이 징벌을 받는 때에 그들을 위로해 주는 자도 없고, 더구나
그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자들(전에는 우호 관계를 가졌던 나라들)까지도 그들의 원수
가 되어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유다 민족이 배신을 당한 셈이니, 그런 일은 말로 형용
할 수 없이 괴로운 법이다. 유다 민족은, 그 때에 열방 가운데 가장 "불결한 자" 와
같이 취급을 당한 셈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그들을 멀리 하기를 원한다.
애 1:18
여호와는 의오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 본절 상반절
에 또 다시 수난자(受難者)의 회개를 진술한다. 고통 중에 있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벌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義)롭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벌하며 하나님의
높이는 귀한 회개의 심리이다. 다윗도 죄를 인하여 징계를 받는 중에서도 말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
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라고 하였다. 여기서 예레
미야는 유다 민족의 회개 심리를 대신 표현시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
역하였도다"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자기의 범한 죄와 관련되
었다는 의미로 또 다시 그 민족의 처참한 수난 광경을 애처롭게 묘사한다. 곧,"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라고 한다.
애 1:19
내가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
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 선지자는, 또 다시 그 당하는 환난
의 참상을 계속하여 진술한다. (1) 유다 민족이 바라보던 맹방(盟邦)의 원조가 그 본
래의 약속대로 실행되지 않았다는 것(상반절). 여기 이른바, "내 사랑하는 자"란 말(*
)은, 유다 민족이 믿었던 애굽을 말함이다. 애굽은 유사시(有事時)에
유다를 돕기로 약속했었으나, 막상 유다가 바벧론의 침략을 당한 때에는 유다를 돌보
지 않았다. 이렇게 유다 민족이 믿었던 대로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도 아픈 사실이다. (2) 바벧론의 침략을 당한 때에 유다 민족은 자기 나라의 지도자도
없이 난관을 당하였음(하반절). 가정에 환난이 임했을 때에, 부모가 없는 고아들이야
말로 측은하기 그지 없다. 나라는 망하여 가는데,진정한 우국지사(憂國志士)나 지도자
가 없는 때에 그 백성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프다. 유다 민족이 바벧론의 침략을 당했을
때에 그 민족의 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이 다만 자기들의 연명(延命)을 위하여 식물(食物)을 구하기에만 급급하였다. 이것
이 거짓 지도자들의 말로(末露)를 잘 말하여 준다. 그들은 본래부터 식물을 구하는 자
들이었을 뿐, 진심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찾던 자들은 아니었다. 평안한 때에는 그들이
이런 흑막(黑幕)을 잘 가리우고 나서서 어디까지나 남들을 위하는 지도자인 듯이 자처
하였다. 또 그들은 그 때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본색이 탄로(綻露)될 한 날은
오고야 말았다.
애 1:20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 "여호와여". 여기서는 선지자는 또 다시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의미에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기도한다. 그의 마음의 괴로움은, 환난 그 자체로 인함보다도 더욱 그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환난을 당할 때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애 1:21,22
선지자는 여기서 그 환난 중에 위로를 받기는 커녕, 도리어 그의 환난 당함을 기쁘게 생각하는 원수들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원수들의 보응 받을 사실을 내다 보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실패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을 벌하신다(잠 24:17). 그러므로 성도는 남의 실패를 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롬 12:19,20), 자기 자신도 그렇게 될까 두려운 마음으로 지날 뿐이다(갈 6:1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