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예레미야 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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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 33: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 하나님의 사람은 옥중에 있고,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나 하나님은 그를  찾
아 오신다. 시 69:33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
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라고 하였고, 시 79:11에는 말하기를, "갇힌 자의  탄
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
서"하였고, 시 102:20에는 말하기를,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라고 하였다.

 

  렘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 여기서는, 유대인을 바벧론의 손으로 징계하여 새롭게 만들 수  있
는 참된 구원자가 여호와 라는 의미에서,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라고 한다. 특별히 여기 "여호와"(*         )라는 이름이 세 번 나오면서  우
리로 하여금 그 이름의 뜻을 생각케 한다. 그 이름 뜻은, 그의 주권(主權)대로 그  백
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그 계약대로 성취해 가시고  변함이  없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이 성호는 영원 자존자(永遠自尊者)로 번역되었는데, 그  의미
는, "나는 나대로 있고 나대로 간다"라는 영원 불변자요, 절대  자주자(絶對自主者)라
는 의미로서, 하나님은 구속(救贖) 사업의 임의적 종국적(終局的) 완필자(完畢者)라는
의미이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이 때에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서 기도하는 중에 있었을  것이
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권장하는 의미에서 말씀하시기를, "부르짖으라"
(*       =케라)고 하셨다. "부르짖음"은, 특별히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의문을 풀어 주시기 위하여 벌써 길게  말씀하신바  있으나
(32:26-34), 이제 또 다시 기도 응답의 형식으로 그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계속하신
다. 신자가 신령한 진리를 연구에 의하여 깨달을 수도 있으나, 그런 때에는  교만해지
기 쉽다. 그러나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응답에 의하여 받는 깨달음은 그로 하
여금 비교적 겸손하게까지 만들어 준다. 기도 중에 얻은 깨달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 명백하니 만큼, 그것을 받은 자로서 교만할 수 없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 아래 말씀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유다 민족이
바벧론 군대로 말미암아 패배를 당한 후에, 장차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복된  재건(再
建)이 있을 것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일은, 벌써 예레미야에게 여러 차례 계시된  바
있고, 그가 이미 예언한 바도 있는데, 왜 이것을 예레미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라
고 하였는가? 예레미야로서도 이것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그도 아직 그 사실을  실
제로  완전히  체험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특별히   "비밀한   일"(*           
=베추로-드)이라는 히브리 원어의 뜻이 잘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 원어 베추로-드(*
          )는, "단절된"것, 또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사람이  자
기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렘 33:4,5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이 침략하여 온 바벧론으로더불어 항전(抗戰)하는 것이 헛
되며, 필경 많은 희생자가 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패전 원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 때문에 저희를 돌아 보시지 않는데 있다고 하신다.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 - 이
문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갈대아인의 흉벽(*
          =우리가 자세히는 알 수 없는 그 당시의 무기)과 칼로 말미암아 헐리운  이
성읍의 가옥들과 유다 왕궁들에 관하여는"이라고 한다(Calvin, Delitzsch).
   "싸우려 하였으나"란 말은, 유대인들이 갈대아 군대 곧, 바벧론 군대로 더불어  항
전하려 함을 의미한다. 그들이 항전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인하여 돕지  않
으실 것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여호와의 참된 종교가 모든 이방 종교와 달
라서 탁월한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이방 종교는 그 종교를 가지는 민족의 윤리  문제
를 불문에 붙이고, 그 국운(國運)이 위태할 때에는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신(神)의  도
움이 임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교를 가지는 백성이  악
을 회개치 않는 때에는 그들을 외국의 수중에 붙인다고 하신다. 이렇게 진정한 종교는
어디까지나 종교 윤리를 그 생명으로 가진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은  성결
(聖潔)이니, 윤리적 정결을 가지지 못하고(혹은 죄를 회개치 않으면서) 여호와의 이름
을 부르는 자들은, 하나님께 아첨하는 자 밖에 되지 못한다.

 

  렘 33:6,7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
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 이 말씀을 보면, 위에 벌써 진술된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유다 민족의 패망이 결코 영원히 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재건되기 위한 것이다. 이 부분에 기록된 말씀은, 인간의 어두운  마음
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때로 말하면, 바벧론의 무서운 군대의 세력이  유
대 땅을 점령하였고, 유다 민족의 부패상은 더할나위 없는 것이었으니 만큼, 그  민족
의 장래는 여망(餘望)이 없을 것으로만 보여진 것이다. 이런 캄캄한 가운데서  어떻게
장래의 소망을 확언할 수 있으랴? 그러나 우리 본문 6-26절 까지는 유다 민족의  광복
에 대하여 5,6차례나 역설체(力說體)로 확언하였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  아
니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주신 말씀이다.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징계하신
것이 그들을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사랑하는 자에 대한  그의  파괴
행위는, 언제나 새로운 건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욥 5:17-19은 말하기를,  "볼지
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
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
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
지 않게 하시며"라고 하였다. 사람이 곤난을 받되 하나님의 수중에서 징계를 받는  의
미의 것이라면, 아무리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을지라도 소망이 있다. "인간이 할  수
없이 되어진 후부터는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Veldkamp, Maar van de  mens  is
het begin van God.-Een Dubbelleven, p. 148).
   "성실함"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에메드(*       )니, 견고함  또는  국가적으로
견고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벧론에서 놓여나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이룬 사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나, 특별히 장차 신약 시대에 있을 영적 생활의 견
고함을 비유한다.

 

  렘 33:8-11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매 행한 모
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 그들을 "죄악에서 정하게"하심은 사죄하여 주심으로만  성립
된다. 그러므로 8절 하반절의 내용은 그 상반절의 약속을 성립시키는 방법론이다.  하
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언제나 사죄를 그 열쇠로 사용하신다.  바이젤
도 말하기를, "소망 없는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 근거는 하나님의 용서하여  주
시는 사랑  뿐이다"라고  했다(Die  vergebende  Liebe  Gottes  ist  der  alleinige
Ankergrund der Glaubenshoffnung in einer hoffnungslosen Situation.-Das Buch  des
Prtpheten Jeremia, pp. 304-305).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 곧, 예루살렘(택한  백
성의 상징)이 하나님에게 기쁨의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자신들도  기쁨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기쁨)을 그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을 이름이다. 여기서
는 두 가지 중요한 은혜의 사실이 진술된다. 곧,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사해  주
심이 그 하나이고(8절), 그 결과로 그들에게 임한 기쁨과 찬송이 또  하나이다(9-11).
캄벧 몰간은, 이 두가지가 서로 원인 결과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기쁨을 보게 하려
는 것을 최후 목표로 가진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들에게 눈물이 있음을 말하
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최후적 진리는 기쁨이다. 그것은 계 7:17이 말한 것과  같
이,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영적 즐거움에 도달케 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생활을 정화시키신다. 사람은 죄
악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기쁨이  없다"-(意譯)(Studies  in  the  Prophecy  of
Jeremiah, p. 240).
   여기(8-11) 기록된대로 기쁨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니, (1)  이  성읍(예루살
렘) 자체가 세계 열방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름이 됨(9절). 예루살렘은 여
기서 신약 시대의 참된 교회를 상징한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에게도 기쁨이 되고 모든
민족에게 영생의 복음을 참되이 전하는 복의 기관이니 만큼, 열방에게도 기쁨이  될만
하다. 그들이 이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되나니, 우리 본문의 "모든 복을 들을 것
이요"란 말씀이 그 뜻이고,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란  말
씀이 역시 그 뜻이다. 복음을 듣는 자는 기뻐하되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
로 기뻐한다. 그러므로 시 2:11에 말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
워할지어다"라고 하였다. (2) 사회적으로 기뻐함(10,11 상반). 사회 생활에  있어서도
진정한 기쁨은 복음을 믿는 세계에만 있다. 여기 이른바,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들은 사회 생활에 관계된 것이다. (3) 종교
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10,11 하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참으로 종교 생
활이 목표한 열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적보다
귀한 것이다.

 

  렘 33:12,13

  여기서는, 죄 사람 받아 기쁨을 얻는 신자들의 사회에 물질적 축복도 많은 것을 보
여 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다(마 6:33). 사람들은 영적 축복보
다 물질적 축복을 우선적으로 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시작하시지  않는
다. 죄를 깨끗케 함이 없이 소율힌 물질적 부요는, 실상 오래 가지 못한다. 유명한 웰
링톤(Wellington)공은 교육 문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말하기를, "만일 당신들이 종교를
떠나서 아들을 교육시키면, 그들은 민첩한 마귀들이 된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먼저
영적 축복을 받아야만 건전한 물질적 축복도 받는다.
   양 무리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 이것은, 평안하고 생활이  안
정된 때에 목양 사업이 순조롭게 되어 목자가 양들을 "계수"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렘 33:14-18

  여기서는,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다.  이것
은, 삼하 7:12-16; 왕상 2:4, 8:25, 9:5 등에 약속된 메시야 예언을 다시  말한  것이
다.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한 때로 말하면, 다윗의 왕통이 아주 끊어지고 마는 비참한
때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서 장차 다윗 왕통의 계승자가 탄생할 것을 예언
한다. 이런 예언은, 사람에게 있는 어떤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다. 오직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만 이런 예언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
은, 비참한 폐허에서도 영화로운 건설을 하실 수 있으며 예언하실 수도 있다. 여기 이
른바, "의로운 가지"(15절)란 말의 히브리 원어(*                =체마크 체다카)는,
메시야의 명칭이다(사 4:2; 렘 23:5; 슥 3:8, 6:12). 다윗의 왕통에 속하는 모든 임금
들이 다 악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만은, 영적으로  다윗의  왕  위를  받은  자로서(눅
1:32)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함은,
그가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그 백성을 다스리심에 대한 예언이다.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 - 주님의 이름이 그의 백성(예루살렘 성으로 대표됨)과  관련된
일들은, 성경에 종종 나타난다(렘 14:9, 15:16, 25:29; 단 9:18,19;  대하  7:14;  사
63:19; 암 9:12).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그 백성에게 붙이는 목적은,  주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임한다는 뜻인 동시에(민 6:27), 그들이 주님께 속했다는  뜻이다(계  3:12,
22:3).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주님과 교회가 일체(一體)라는 의미도 된다. 주님과 교
회가 일체인 사실은,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신약의  교훈
도 잘 보여 준다(고전 12:27; 엡  1:22,23,  4:12,15,16,  5:23,28-32;  골  1:18,24,
2:19).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라고까지 말한 바도 있다(고전 12:12).  물
론 이 말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아니고,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의미이다. 교회는 주님에게 대하여 이와 같은 긴밀한  관계
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이 주님을 믿을 때에 주님의 의(義)가 교회에  전가(轉嫁)된
다.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다윗의 위(位)를 받으실 것과 그 위가 영원하실 것을  예
언함이다(눅 1:21-33).
   내 앞에서 번제로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
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이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 제사의  효과가
영원 무궁할 것을 예언한다. 히 7:15-25 참조. 이런 말씀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왕권과 제사 제도를 진술함에 있어서 구약식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예언은  언제나
그 예언 당시의 역사적 재료를 가지고 나타나고 있으나, 해석자가 그것을 풍유화(諷諭
化)하지도 말고, 오직 예언적 의미를 취해야 된다.

 

  렘 33:19-22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창조 질서에 있어서도 변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약
1:17에 말하기를,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니니라"라고 하셨다.
그와 같이 구원 질서에 있어서도 그는, 계약하신대로 성취하사 다윗의 후손으로서  그
리스도께서 오시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운동은  자초지종
(自初至終) 계약 운동(契約運動)에 의하여 실행되어 간다. 그는 말씀하신대로  실행하
시는 참되신 신(神)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하신 계약을 그대로 성취하셨
다.
   하나님께서 구속 사업을 계약적으로 이루어 가심에 대하여, 우리들이 받는  혜택은
다음과 같다. (1) 그가 계약하신대로 독생자를 보내시어 구속 사업을  이루시는  것만
큼, 우리는 그 계약 성취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된다. 구속  사업에  관련되어
있는 계약 성취는 현재 뿐 아니라, 미래 또는 영원토록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축복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믿음과 소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2)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약 성취의  사건들
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으며, 그 말씀을 통하여 거룩하여지는 은혜를 받는다.
벧후 1:4에 말하기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
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계약 성취의 말씀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된 것인만큼, 그것을 믿는 영혼이 성령님의 성화(聖化)시키는 역사를 받는다. 이교(異
敎)에서는 그 경전을 천래(天來)의 약속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교도들은  그들
의 경전이 어떤 영력(靈力)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불교와 같은  종교가 그러하다. (3) 계약 성취로 성립된 구원은 신자들에게 위로를 준다. 곧,  환난의 시대나 시험의 시기에 우리의 심령을 기쁨으로 충만케 하여 끝까지 견디게 하여 준다. 그 이유는, 그 구원 축복들은 너무 크고 하나님께서 친히 계약하신 진실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것들이 다 아멘(*       )이 되어 확실히 성립 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약하신 바는 변하는 법이 없거니와, 어떤 우연적 사태로  인하여 방해를 받을 이유도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조건에 따라 좌우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필경 완성시키셨고 또 완성하실 것이다.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 - 삼하 7:12-16; 왕상 2:4, 8:25, 9:5 참조.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 - 이는, 위의 17절에 말한 것과 같이  메시야를  가리킨다.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 - 18절 말씀 해석을 참조하여라.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수효가 많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대로이다. 창 22:17; 롬 4:18 참조.

 렘 33:23-26
  이 귀절들은, 그 때에 유다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망할 줄 생각하여 낙심하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말씀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또 다시, 위의 20절에 언급한 것처럼 계약원리(契約原理)에 의하여 택한 백성을 버리시지 않을 것에 대하여 논증하신다. 계약 원리에 대하여는, 19-22절 해석을 참조하고, 또 나의 사도행전 주석에 있는 설교들("기독교의 구원은 계약  성취이다": pp. 81-85, "하나님의 약속": pp. 301-303)을 참조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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