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3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 여기서도 "여호와가 말하노라"(* )로 시작하면
서, 선지자가 예레미야의 특징을 또 다시 나타낸다. 그는, 자기의 말이 여호와의 말씀
밖에 없음을 언제든지 역설한다. "그 때에"(* )란 말은 앞장 끝에 있
는 "말일"(* )을 가리키나니, 곧, 바벧론에서 유다 민족이 해
방되어 돌아올 시기로 예표된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모든 가족"(*
)이란 말은, 여기서 남쪽 나라 유다나 북쪽 나라 열 지파나,
모두 다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바벧론에서 해방된 사건으로 다 성취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해방 때에 열 지파가 완전히 다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유다 민족이 바벧론에서 해방된 사건을 가지고, 장차 신약
시대에 이루어질 세계적 새 이스라엘 운동, 곧,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 운동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택한 백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라에취(Laetsch)는,
이것이 믿는 유대인들과 모든 이방 그리스도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니 정당하다
(Bible Commentary, Jeremiah, p.244).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란 말씀(*
)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구원이 복된 이유를 성립시킨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받을 구원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
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은 왜 우리에게 복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
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서 참되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계를 벗어
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구약은 이 구원을 내어다 보고 예언했는데(창 17:7; 출
29:45,46; 레 11:45, 22:33, 25:38, 26:12,45; 민 15:41; 신 26:17,18, 29:12; 렘
7:23; 겔 34:30),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사 이 예언을 성
취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저희 하나님으로 모시게 되고,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것의 대종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
미암아 나타난다(계 21:3). 이렇게 생각될 때에 우리 본문은, 실상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젤(A. Weiser)은 이 말슴을 가리켜, "계
약 형식의 말씀"(Die Bundesformel)이라고 하였으니 지당하다(Das Buch des Propheten
Jeremia, p. 274).
렘 3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 본절에서도 또 다시, 말씀하시는 이가
여호와이심을 강조한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함은, 이스
라엘이 애굽에서 환난을 피하여 광야로 나오게된 사실을 가리킨다고 하나, 이 해석은
받기 어렵다(G. Ch. Aalders). 이것은, 유다 민족이 바벧론의 침략 전쟁으로 인하여
죽을 뻔하고 필경 바벧론으로 잡혀 갔다가 거기서 그들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해방될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은,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아직 미래에 속한 일
이다.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안식을 얻게" 하려고) 출동(出動)하시리라는 의미이
다. "갈 때에"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할록(* )인데, 라에취(Laetsch)는 이것
을 "이스라엘은 갈지어다"(Lde Israel go)라고 번역하였으나, 칼빈(Calvin)과 기타 학
자들은 하나님께서 가신다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 귀절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라고 하였으니, 근근이 명맥을 보존하는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
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야와 같이 의지할데 없는 거치른
환경에 처한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귀하다.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능력으로 나타나시지 아
니하시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없는 것 같이 무시하며 의심하는 것으로 일관하여 나아
간다.
렘 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
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 이 문구에 있어서 칼빈(Calvin)
은, 탈굼(Targum)에 있는 해석대로 다음과 같은 뜻을 찾았다. 곧, 어떤 불평하는 자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으니, 오늘날은 구원하실 수 없
다"라고 함에 대하여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리하여 대답하기를, "내가 옛적에 이스라엘
에 나타나 사랑을 베풀었으나, 그것은 영원한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 사랑이 영
원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귀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이스라엘에 나타나 계
약하신 대로, 그는 "무궁한"(* =영원한) 사랑으로 그 백성을 사랑하시어 앞으
로도 변함 없이 그들을 바벧론에서 인도하여 내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여기 "인도"
한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마솨크(* )니 계속한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
(Delitzsch). 그러므로 "인자하므로 너를 인도하였다"는 말은, "너에게 인자를 계속하
리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약은 옛날에 되었으나, 그것이 영원한 계약인 것
만큼, 그의 구원하여 주시는 사랑이 영원토록 계속한다. 이 영원한 사랑은 옛적부터
"나"를 지향하고 움직였으니,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 우리 본문
의, "이스라엘에게"란 말이 실상 히브리 원문에서는 "나에게"(* =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택한 백성 전체를 위하는 동시에, 역시 그 중에 하나인 "나"개인
에게도 그만큼 뜨겁게 나타난다.
렘 31: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
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 여기서 "이스라엘을 가리
켜 "처녀"(* =빼툴라)라고 함은 주목할만 하다. 실상 이스라엘은 처녀의 자
격을 상실하였던(우상을 섬겼으므로) 자이다(18:13,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
을 옛날에 순전한 "처녀"(2:2,3)였던 그대로 보아 주신다. 그가 이스라엘을 용서하심
으로 그같이 좋게 보신 것이다(34절). "다시 너를 세우리니". 이것은, 바벧론에 잡혀
갔던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귀환시켜 국세(國勢)를 회복하도록 하실 것을 가리킨다.
이런 말씀은, 포로된 비참한 처지에 있는 그들을 낙심하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약
속이다. "소고로...장식하고...춤추"는 것은, 근동 지방(近東地方)의 처녀들이 기쁜
축하의 때에 행한 풍속이었다(삿 11:34; 시 68:25). 이런 기쁨의 축하는, 유다 민족이
바벧론에서 해방됨으로 인하여 거행될 것이다.
렘 31: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
다시 침략자가 오지 아니하므로, 사마리아 산들의 포도가 군대의 노략거리가 되지 않
고(사 62:8) 그 심은 자들의 식물이 된다. 여기 "먹으리라"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킬
렐루(* )니, 속용(俗用)으로 사용함을 의미한다. 율법(레 19:23-25)에 의하
면, 어떤 땅에 과실을 심으면 그 열매를 3년 동안은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내버
린다. 그리고 제 4년째의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째의 열매라야 그 심은 자가
먹는다. 다시 말하면, 제 5년째의 열매가 속용(인간의 사용)에 제공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바벧론에서 돌아와서는 평안히 시간 여유 있게 농사하며 살게 된
다는 것이다.
렘 31:6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 이것은, 유다 지
파 뿐 아니라, 열 지파(북쪽 나라)도 돌아와서 이제는 유다와 연합할 것을 예언한다.
복쪽 나라가 갈라진 후 여로보암 왕이 그 백성을 금하여 남쪽 나라, 곧, 유다에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 나라의 종교를 따로 시설하기까지 하였다(왕상 12:29-31).
이렇게 장벽이 막혔던 두 나라의 기막히던 사정도 이제는 해제되고, 북쪽 나라 이스라
엘 사람들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참되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리라고 한다.
이 예언은, 유다 민족이 바벧론에서 해방됨으로 그 부분적 성취를 보았고, 그 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으로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라에취(Laetsch)는 말하기
를, 시온에 올라감은 그리스도 교회에 참예함을 가리킨다 하고,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
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은 사실은 이 예언의 성취라고 하였다(Bible Commentary,
Jeremiah, p. 246).
코닐(Cornil)은 이 귀절의 순정성(純正性)을 부인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영
적으로 이스라엘의 종교를 생각하는 예레미야가 이런 말("시온에 올라가")을 할 수 없
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옳지 않다. 이스라엘 종교의 영적 성격을 고
조하는 예레미야로서도 이런 구약식 용어(舊約式用語="시온"이란 말 같은 것)를 쓰지
못할 것은 없다.
렘 3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 "야곱"은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명칭이다. "기뻐 노래함"은,
그 민족의 해방될 것을 확신하는 의미에서 기쁘게 그 소망을 만방에 알림이다. 하나님
의 예언은 사실과 같이 참되기 때문에, 그것을 만방에 알리기에 부끄러울 것 없고 도
리어 기뻐해야 된다.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뻬로쉬 하
꼬임(* )인데, 칼빈은 이것을 "만국의 머리에서"(at the head of
the nations)라고 번역하였다. 곧, 만국 앞에서 공개적으로 유다 백성의 해방에 대하
여 전파하며 기뻐하리라는 뜻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델스(G. Ch.Aalders)는
이것이 이스라엘(유다 민족)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 민족은 본래 신정 국민(神政國民)
인고로 만국 중에 뛰어나는 자이다(Orelli). 신 4:7, 26:19; 암 6:1 참조. 그 민족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바벧론에서 돌아오게 되므로 신정 국민이 권위를 다시 발
휘한다. "남은 자"(* =쉬레이드)란 말은, 택한 백성으로서 회개하는 자들
(슥 12:10-13:1)이다. 그들의 수효는 적어도 유다 민족 전체를 대표한다(Aalders, in
beginsel en naar het wezen is het wel het geheele volk dat gered wordt maar het
getal is het toch slechts eene minderheid.-Korte Verklaring, Jeremia, 2. p. 80).
하나님게서 여기에 명하신 기도는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필경은 구원히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다. 이것이 기이한 말씀이다. 그가 으례 이루실 것이로되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기도
를 요구하시나니, 그것은 그의 오묘한 경륜(經綸)이다.
렘 31: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
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준다. 곧, 포로된
유다 민족을 "북편 땅"(바벧론)에서 인도해 오시며, "땅 끝에서"(먼 곳에서)도 인도해
오시리라고 한다. 이런 일은 이적스러운 일이니,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여행하기에는 불가능한 자들("소경, 절뚝발이, 잉태한 여인"등)이, 그 먼 길을
여행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리라고 하니, 이것은, 그 구원 운동이 전연 하나님의 능력
으로 될것을 비유한다. 주님 앞에는 장애물(障碍物)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라에취
(Laetsch)는, 여기 이 말씀이 신약 시대에 큰 무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예언한다(엡 2:11-22; 행 15:7-17). 여기 "무리"란 히브리 원어 카할(* )은 조
직(組織)된 회중(會衆)을 의미하는바, 교회도 이 말로써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카할
(* )은 교회 곧, 에클레시아(* )에 해당하는데, 예수님도 자기(예수님)
중심하고 모인 회중을 이 말로 표현하셨다(Bavinck, Het was trouwens Christus zelf,
die het eerst het woord * , toepaste op de gemeente welke Hij
rondom zich vergaderde, Mt. 16:18,18:17.-Geref. Dog. 3. 299, Kampen, 1911). 그러
므로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고 하신 말씀은, 신약 시대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예언한다.
렘 31: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
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 "울며 올 것"이라(* )함은, 기쁨의 눈물과, 또한 과분한
은혜 때문에 감격하여 회개하는 눈물로 돌아온다는 의미이다(Delitzsch, with tears
of joy, amd with contrition of heart over favour so undeserved, they come). 슥
12:10-14 참조. 구원 받을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때에도 마음이 부드러
워지지만, 벌을 받는 때에도 부드러워진다. 그러나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와 반대이다.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란 문구(*
)는, "그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리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Laetsch).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포로된 유대인들은 바벧론에서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였다(시 127:1-). 언제나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간절한 기도자들에게
임한다(출 2:23-25). "하수"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나할레 마임(* )이
니, 사막이나 광야의 메마른 땅에 혹시 있는 흐르는 물(stream of waters)을 가리킴인
데, 바벧론에서 돌아오는 사막 여행자(沙漠旅行者)에게 말할 수 없이 귀한 것이다(시
84:6). 사막에서 바른 길이란 이런 물 있는 데로 경유(經由)해 가는 길이다. 이것은
또한 신약 시대의 복음을 비유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라 함은,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보호하시는 신(神)이심을
가리킨다. "에브라임"은 북국(이스라엘) 열 지파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장자"라고 하심은, 그를 바벧론에서 구원하심에 있어서 유다 민족과 마
찬가지로 하실 것을 가리킨다.
렘 31:10,11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 유다가 장차 바벧론에
서 놓인다는 예언을 "열방"더러 "전파하"라는 것은, 그 예언이 진리임을 세계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힘껏 장담함이다. 바이젤(A.Weiser)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세계(世界)
의 주님이시므로 그가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은, 세계 열방(열방)들에게도 의의(意
義)를 가진다"라고 하였다(Weil Jahwe der Herr der Welt ist, darum, hat das was er
an Israel tut, auch fur die Volker Bedeutung.-Das Buch der Propheten Jeremia, p.
278).
"섬"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이임(* )이니, "섬들"이라는 뜻인데, 그 때
에 알려진 이방 나라들, 특별히 지중해(地中海)의 건너편 나라들을 가리킨다. 칼빈
(Calvin)은 이것들이 이태리(Italy), 서바나(Spain), 헬라(Greece), 프랑스(France)
등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 신 30:4 참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
다 민족을 바벧론에서 풀어 내올 수 있다는 것을 믿음직하게 해설한다. 곧, 이스라엘
을 "흩으신"(벌하신) 이가 능히 그들을 "모으실"(解罰하실) 권위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벌 받은 자는, 그 벌이 하나님에게서 온 줄 깨닫는 것
이 귀하다. 그가 그것을 알면, 그를 다시 회복하여 주실 힘이 하나님께만 있는 줄 알
고, 회개하며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 그는 생각하기를, "나를 파상(破傷)하신 이가 나
를 치료하시지 못하시랴 그는 넉넉히 나를 치료하실 수도 있다"라고 하며 기뻐하게 된
다. 욥 5:17,18 참조.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로다 - 목자가 "양"을 지킴이 영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지키심"이 그러하시다. 우리 구원은, 영원토록 주님이 함께 하
여 주시는 임마누엘(* )의 은혜에 달렸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든든
하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 "야곱"
은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구속"한다는 히브리 원어는 까알(* )이니,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신 남의 생명을 내어 주심이다(사
43:1-4).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바벧론에서 구출하시기 위하여 바벧론
사람들로 메대 바사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하실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그 백성을 "구
속"하시는 사랑이 그들에게 감사하는 믿음을 준다. 또한 강한 자의 손에서 그들이 놓
이도록 하시는 그의 권능도 그들에게 믿음을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
원은 이런 것이다.
렘 31: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 유다 백성이 바벧론에서 돌아올 곳은
그들의 본토인데, 거기에는 물질적(物質的)으로 풍부할 둣이 여기에 진술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묘사(描寫)는, 하나님을 모신 신령한 은혜에 대한 구약식(舊約式) 비유인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신약 시대의 교회)에 관하여
말할 때에 그때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외형적 비유(外形的比喩)의 표현들을 사용
하였다"고 하였다(They describe the kingdom of Christ in a way suitable to the
comprehension of a rude people, and hence they set before them external
images.-Commentaries, Jeremiah, 4. p. 82).
예레미야의 이 부분 말씀은, 신약 시대에 있을 복음적 은혜의 부요(富饒)를 예언한
다. 라에취(Laetsch)는 말하기를, 여기 "곡식"은 생명 떡을 비유하고, "포도주"는 복
음을, "기름"은 성령의 은사(恩賜)를, "양의 떼와 소의 떼"는 모든 다른 신령(神靈)한
은혜들을 상징한다고 했다. 우리가 라에취(Laetsch)처럼 이렇게 풍유식(諷喩式) 해석
을 취함이 옳을지는 몰라도 확실히 여기 이 말씀이 비유인 것만은 사실이다. 둠(D.
B.Duhm)도 말하기를, 이 말씀은 사람들이 시온에 와서 곡식이나 육류(肉類)를 받게 되
리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없고, 다만 그들이 시온에 와서 여호와에게서 받은 은혜를
즐기게 되리라는 뜻이라고 하였다(意譯)(Die Strophe kann nicht sagen wollen, dass
man auf dem Zion Korn und Rinder emfangt, sondern nur dass man auf dem Zion uber
die von Jahwe an den grossen Festen jubult.-Marti, Hand Commentaar 3.Das Buch
Jeremia, p. 247).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 사 58:11 참조.
여기 "심령"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영혼이란 말(* =네페쉬)이다. 그들의 영혼
이 "물댄 동산 같"다(* )고 했으니, 물이 마르지 않는 동산에는 모든 좋
은 수목(樹木)이 풍성함과 같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늘 점령되어 있는 영혼은 생
명이 풍성하다. 이런 말씀을 보아서, 이 부분의 예언은 신령한 은혜가 풍성한 신약 시
대를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 이 말씀도 또 다시 신약적(新約的)인 신령한 은혜로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롬 5:3; 요 16:20-22).
렘 31:13,14
이 귀절들에는, "기쁨"에 대한 말이 네 번("즐거워하겠고, 즐거워하리니, 즐겁게
하며, 기쁨을 얻게") 나오고, "흡족", "만족"이란 말이 뒤따르는데 모두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 결과를 보여 준다. 이렇게 은혜 받은 현상은 심령에 관계되어 있으니, 역시
신약 시대에 복음을 믿는 자들의 심리 현상이다.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유다 민족이 주전 586년 경에 바벧론으로 잡혀 갈 사건을 예언한다. 선
지자 예레미야는 이 사건에 대하여 시적(詩的)으로 말한다. 곧, 베냐민 지파의 조상
"라헬"이 그 잡혀 가는 후손들을 애곡한다고 한다. 라헬은 이미 죽은지 오래 되었는데
어떻게 애곡할까? 이것은 시적 표현(詩的表現)이니 문제될 것 없다. 시는 가상적(假想
的)으로 표현하는 일이 많다. 이런 가상적 표현은, 유다 민족에게 장차 임할 고통이
매우 극심(極甚)할 것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라마"(* )는 베냐민 지경에 있는 지방인데, 거기 라헬의 무덤이 있다(창
35:19). 일설에, 여기 "라마"는 지명이 아니고 "높은 곳"이란 뜻뿐이라고 한다
(Targum, the Sinatic and Alexandrian codices of LXX, Aqila, the Vulgate,
Calvin). 마태는, 헤롯의 베들레헴 영아 학살(瓔兒虐殺) 사건을 가리켜 이 귀절 예언
의 성취(成就)라고 하였다(마 2:17,18). 예언은 미래의 일들을 압축(壓縮)시켜 한몫
표현시키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예언은 한 가지 이상의 사건들로 성취된다. "자
식이 없으므로". 곧, 라헬의 자손들이 바벧론의 침략 때문에 많이 죽고. 또 사로잡혀
간 사실을 가리킨다.
렘 31: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
의 말이니라 - 이 말씀도 시적 표현의 계속으로서 라헬을 가상적(假想的) 대상(對象)
으로 한다. 여기서 그의 받을 하나님의 위로에 대하여 말한다. 이 귀절은, "나 여호와
가 이같이 말하노라"(* )란 말씀으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말이
니라"라는 말씀(* )으로 끝맺는다. 이렇게 하므로, 그 위로의 약속은
인간의 상상(想像)이 아니고 거짓 없으신 하나님이 주신 것임이 보장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 값으로 사정 없는 고생과 애통을 당하는 것도 사실이지만(히 12:5-13; 렘
31:15), 그 뒤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만족하게 임하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므로
애 3:30-32에 말하기를,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
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하였고, 미 7:8,9에는 말하기를,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
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
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
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라고 하였다.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이것은, 유다 민족이 구원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이
바벧론에서 고생한 댓가(對價)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이 바벧론에서 고생해야 할 순
서를 지냈으니 만큼,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해방의 광복(光復)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렘 31: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
로 돌아오리라 - 여기서도 유다 민족에게 소망의 위로를 기억시킴에 있어서 또 다시
여호와의 말씀 권위로 하기 위하여,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란 말씀(*
)으로 시작한다. "너의 최후"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아카리덱(* )이
니, "너의 마지막 끝"(your latter end)이라는 의미이다. 신자가 자기 현재의 보이는
형편을 척도(尺度)로 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하여 주시는 여부(與否)를 측량하지 못
한다(Calvin). 신자에게 더 좋은 복은 미래에 온다. 하나님께서 현재엔 신자를 기뻐하
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신자는 회개만 진실히 하면서 참아 기다려야 된다.
렘 31:18-20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
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
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
애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
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
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 부분 말씀
은, 북국 이스라엘("에브라임"은 북쪽 나라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대표하는 명칭)로
유다 민족 전체를 대표시켜, 그 회개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16,17)은 그 회개를 전제로 한다.
렘 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울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 "이스라엘"백성을
"처녀"(* =뻬들라)라고 함은, 그 백성이 주님을 신랑과 같이 모셔야 할 자
이기 때문이다(고후11:2).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들로 하여금 바벧론에서 유다로 돌
아올 소망을 가지도록 주의 시킨다. 곧, 그는, 그들더러 돌아올 길을 기억하라는 의미
에서, "길표를 세우며...표목을 만들"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범죄할 때에 징벌하심은, 그들로 낙심케 하려는 것이 아니고
새 소망을 가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징계를 받는 중에 소망을 잊어버리기 쉬우
니 이것을 경계해야 된다. 우리 민족이 38도선 문제로(막힌지 오래된 것으로) 인해 낙
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이 아니다. 우리는 장차 돌아갈 소망을 단단히
가지고 힘써 기도하며 믿고 회개할 따름이다. 그것(믿고 회개하는 것)은 비유컨대,
"길표를 세우며...표목을 만드"는 운동이다.
렘 31:22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
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방황"한다(* =티드캄마킨)함은 불확
실한 태도로 주저함이다. 신자는, 신앙의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면서 심령의 평안
을 가져야 한다.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이것은, 이스라엘을 바벧
론에서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사
43:19 참조.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이다. (1) 동정녀 마리아가 남자 예수님을 잉태하여 해산할 것을 의미한다고
함. (2) 교회(여자로 비유되었음)가 하나님(남자로 비유되었음)을 찾으리라는 뜻이라
고 함. (3) 바이젤(A. Weiser)은 말하기를, 이 문구의 의미는, "부부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 것으로서 자손을 번식하라(창 1:28; 렘 31:27)는 창조 축복을 찾아 누림인 듯
하다"하고 하였다(Dann lage vielleicht in dem Satz das Weib umgibt den Mann eine
Andeutung der Erneuerung des Schopfungssegens der Furchtbarkeit, 1. Mose 1,
28;vgl. Jer. 31:27.-Das Buch des Propheten Jeremia, p. 282). 그러나 이 해석보다
다음의 것이 이연하다. (4)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바벧론으로 갈 때에는 여성(女性)과
같이 약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여성 같았던 이스라엘이,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서 남자 같은 바벧론 사람들을 이기고 해방 되리라는 뜻이라고 한다(Calvin, Henry,
Blayney). 이 네째 해석이 옳은 이유는, 여기 "남자"란 히브리 원어 까베르(*
)가 일반적으로 남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고, 국방(國防)을 위한 용사나 역사
(力士)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문구에 있어서의 대조(對照)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성(異性)의 대조가 아니고, 약자와 강자의 대조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의 의미는,
약한 이스라엘이 강한 바벧론을 이기고 나오게 될 것을 예언함이다. "안으리라"란 말의 히브리 원어 소베브(* )는, 전쟁에 있어서 원수를 포위(包圍)하여 잡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렘 31:23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 이 말씀은, 윗 귀절에 이어서 이스라엘이 바벧론에서 해방되어 귀국할 것을 예언한다. "다시 이 말을 쓰리니"(* )란 말은 이스라엘이 포로되기 전 그 전성 시대(전성시대)에 말하였던 것과 같이, 이제 국운(국운)이 회복되어 또 다시
그런 축복의 말을 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 축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예루살렘을 "의로운 처소" 또는 "거룩한 산"이라고 부름. 그 곳은, 일찌기 황폐되어 하나님이 떠나신 곳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계시무로 저런 고귀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의로운 처소"(* =네웨체덱). 23:6; 사 1:21 참
조. "거룩한 산"(* =하르학코데쉬). 시 2:6,48:2; 사 11:9, 27:13 참조.
황폐하고 적막하여 하나님의 버리신바 되었던 곳도 하나님께서 다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처소로 삼으신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교회의 모습이 전연 없던 곳, 이를테면 지옥과 방불(彷佛)한 곳에도 하나님의 능력은 교회를 일으키실 수 있다고 하였다.
(2) 그들은,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고 함. 이것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축복을 받음직하기 때문에 나오는 기원(祈願)이다. 따라서 과연 이 기원대로 될 것이다. 이런 기원의 대상이 될만하고 또 이런 기원자들이 살고 있는 그 사회는 복되다. 이 복의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신 사실 그것 뿐이다.
렘 31:24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 함께 거하리니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개역(改譯)돼야 한다. 곧,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들과 양떼를 인도하는 자들이 함께 거하리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벧론에서 돌아온 뒤에 유다와 모든 성읍들이 평화로울 것을 보여 준다. 칼빈(Calvin)은 이 말씀이 역시 교회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교회 시대를 전적으로 포함하는 예언이라고 하였다(Jeremiah, 4.p.117).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교회의 영적 평안(靈的平安)을 가리킨다.
렘 31:25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하시기로 - 이 말씀은, 히브리 원어 키(* =왜 그런고 하면)로 시작하여 윗절 말씀의 이유를 보여 준다. 왜 그들이 평안히 거하는가(24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벧론에서 해방시켜 돌아오게 하시어, 그들로 심령의 만족을 얻게 하시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하여 주시는 은혜로 신자들이 영적으로 만족하게 됨을 예언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예언의 성취자로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셨다(마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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