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예레미야 14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렘 14: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 "가뭄"이란 말의 히브리 원
어(*           =빠차로-드)는 복수명사(複數名詞)이니, "가뭄들"이란 말이다. 그
것이 복수로 사용된 것은 여러 지방에 한재가 미칠 것을  가리킴이다(Lange).  델리취
(Delitzsch)는, 이 복수 명사가 가리키는 것은 한재의 회수(回數)가 빈번함을  나타냄
이라고 하였다. 옛날부터 파라레스틴에는 한재가 많았다(창 12:10, 26:1, 42:1,2;  신
11:10-17, 28:23,24; 록 1:1; 삼하 21:1; 왕상 8:37). 한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
씀을 무시한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레 26:19; 신11:17, 28:23).

 

  렘 14:2-6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
이 위에 오르도다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
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둘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버리며 들 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들하여 하는도다 - 이 귀절들은, 그 한재가 얼마
나 심한 사실을 묘사한다. (1) "유다(全國)가 슬퍼함". (2)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
여...애통함". 히브리 원문에는, "그 성문들"(*              )이라고 했을 뿐 "무리"
란 말이 없다. 그러나 옛날 유대에서 "성문"은 무리가 모이는 곳이었으니 만큼,  여기
서 "무리"란 말이 보역되었다. (3) "예루살렘의 부르짖음". 이것은 유대 수도(首都)의
아우성치는 소리이다. (4) "귀인들"도 물을 구하지 못함(3절). 이렇게 세력가(勢力家)
들도 물을 구할 수 없었으니, 극심한 한재(旱災)였다. 물을 길러 갔던 "사환들"이 "그
머리를 가리우"는 것은 슬픔의 표이다(삼하 15:30, 19:5). (5) "밭 가는 자가  부끄러
워함"(4절). "부끄러워함"(*        =뽀슈)은 실망함을 의미한다. (6) 짐승들도  기갈
을 당하여 "헐떡임"(5,6). "암사슴"(*            )은 새끼에 대하여 애착이 많은  짐
승이지만(Bochart), 한재가 너무 심하므로 풀을 찾기 갈급하여  "새끼"를  "내어버린"
다. "시랑"이란 말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탄님(*          )인데 흑설에, 악어와 같
은 바다의 괴동물(怪動物)이라고도 번역된다고 한다(Hitzig, Graf). 이런  괴동물들은
물 밖에 입을 넓게 열고 공기를 섭취하려고 애쓴다고 한다. "들  나귀"가  "헐떡이며"
입을 넓게 엶이 이와 같다(Aalders). 위에 진술된 바와 같이, 예레미야는 당시의 한재
의 극심함에 대하여 탄식한다. 이 한재가 그 때 유대 민족의 죄 값인 사실을 늘  밝혔
다. 죄악 때문에 엘리야의 시대에도 하나님은  하늘을  닫으셨다(H.  Lamparter,  Der
Herr hat, wie zur zeit Elias,  den  Himmel  Verschlossen.-Der  Prophet  Jeremia,
p.141).
   우리 본문이 말한 것 같이, 한재로 인하여 모든 것이 타지듯이 말라  버리는  상태
는, 사람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못  얻어  먹어서  타져  들어감을  상징한다(암
8:11). (1)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지 않으면 사람들의 심령이 슬프다(2절). 사도  요
한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울었다(계 5:4). (2)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넘어지며 실망한다(4절). 말 2:7,8 참조.

 

  렘 14:7-9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점죄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시요 곤난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같이, 하룻밤을  유숙하
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
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 이 귀절들에는 한재로 인한 예레미야의 기도
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도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1) 죄를 자복하되 민족과 연대 책임(連帶責任)을 지고, "우리"(*     =누)라는 접
미어 대명사(接尾語代名詞)를 거듭거듭 사용하며 자복함. 이것이, 민족적으로 당한 환
난에 있어서, 어떤 지도자든지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되는 옳은 태도이다.
   (2) 하나님 더러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함(7절). "주의 이름"(*       =쉐
메카)은, 그의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구원자이심을 의미한다(Delitzsch).  혹설에,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의미한다고 하나, 적당한 해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
성을 재앙으로 벌하심이 그의 불명예는 아니다. 8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난
한 대의 구원자"란 성호(聖號)가, 역시, 위의 첫 해석을 뒷바침한다.  
   (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신데, 왜 이스라엘에게 "거류하는 자"(*      =껨=
나그네)나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
같이, 유다가 당한 난관(難關)을 방관(傍觀)만 하시고 단단히 구원하여 주시지 않으시
는가 하며 탄식함(8,9). 이 의문점(疑問點)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답하신다(10절).  10
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4) 유대 민족을,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란 근거에서 버리지  마시기를
구함(9절).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란 말의 히브리어(*                  
              )는, 그의 백성이란 뜻이다. 이것은 남은 백성, 곧, 경건한 무리들만이
자기들에게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당히 사용할 명칭이다.

 

  렘 14: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함으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이 문구의 히브리어(*   
                           )를 직역하면, "그 모양으로 그들이  방황하기를  좋아하
여"이다. 여기 "그 모양으로"(*     =켄)란 뜻은, 위의 8절에 하나님게서 이스라엘 백
성을 일정하게 도와 주시지 않고 지나가는 행인처럼 방황하는 모양과 같다는  뜻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에게 대하여 일정하게 충성하지 않고, 다른 한편 우상도  섬기면
서 머뭇머뭇하는 불확실한 태도를 가지는 고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대하여 확실성
있게 도우시는 자로 관계해 주시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8절에 표시된대로 유대 민족
에게 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확실치 않은 원인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하여 신실
되지 않은데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한데 대한 비례식  보응(比例式報應)을
나타내시는 일이 많다. 그가 그렇게 하시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잘못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비례식  보응에  대하여는,  시
18:25,26도 잘 보여준다. 거기 말하기를,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
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
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라고 하였다.

 

  렘 14:11,12

  여기서는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준다.
   (1) 예레미야더러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고 하심
   (2) 그들의 "금식"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하심. 그들의 "금식"은 외식이고  겸손한
회개(悔改)와 자책(自責)이 아니며, 정욕(情欲)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공로
(功勞)를 세우려 함이니 미신(迷信)이다.
   (3) 그들의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심.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순종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물은 순종과 동반되어야 하나니, 그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이다(삼상 15:2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생활이  있는
자의 드리는 제물만이 유효(有效)하다(사 66:1,2).
   (4) 필경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하심(12절). 하나님께서는,  그
들에게 최후의 살 길을 가르쳐 주셨지만 그들은 순종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남
아 있는 것은 패망 뿐이다.

 

  렘 14:13-16

  이 부분에서는,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들의 소행을 슬퍼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만하게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민중에게 "평강을 주시리라"는 거짓된 약속을 하
기 때문이다.
   (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된 것임을 다음과 같
이 지적하신다(14절). 1) 그가 저들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하심. 2) 그가 저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심. 3) 저들은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
("마음의 속임으로"예언함)을 말할 뿐이라고 하심.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는 말은
모두 다 어두움이다. 복술(卜術)도 그러하고, 인간의 마음의 생각도 그러하다.
   (2) 거짓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라 하심(15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 반대로 선전하기를, 유대 민족에게는 앞으로 전쟁의  화(禍)가  없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죄 값으로 보는 보응은, 그들의 선전과 정반대로 그들 자
신부터 전화(戰禍)를 당함이다.
   (3) 거짓 선지자들의 지도를 받는 "백성은 기근과 칼로 인하여" 망할 것이라고  하
심(16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진리 사랑 여부(與否)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을 그대로 버려 두신다(신 13:1-3). 이 대에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은
거짓 스승을 따르게 되며(살후 2:10-12), 그들은 그 거짓된 지도자들과 함께 망한다.

 

  렘 14:17,18

   예레미야는 패망하는 백성을 인하여 밤낮 운다고 함. 참된 선지자는 남들을 사랑하
는 생활을 그의 자격 증표로 가진다. 그는 남들이 망하는 것을 심히 원통히 여긴다.

 

  렘 14:19-22

  예레미야는 여기서 다시 기도한다. 그 기도 내용은,
   (1) 유대 민족의 참상(慘狀)을 가지고 애소(哀訴)함(19절). 이것은 원망이  아니고
간절한 호소이다.
   (2) 죄를 자복함. 예레미야가 "우리"란 말(19,20,21)을 사용한 것을 보아서,  그가
그 백성과 연대 책임(連帶責任)을 지고 기도한 것이 분명하다. 참된  지도자는,  자기 지도를 받는 자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
   (3) 유대 민족에게는 의(義)가 없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돌아보아 주시기를 구함(21절). 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유대 민족을 돌아보아 주시기 원함.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기도와 동일한 원칙이다. 2) "주의 영광의 위를"위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 원함. "영광의 위"(*                     )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마 하신 성전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3)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원함. "언약"(*           =
뻬리-드)은,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이상, 거기에 해당한 축복 약속을 필결 실현하실 것을 내용으로 한다.
   예레미야가 기도의 근거로 삼은 위의 세 가지는, 외식자(外飾者)들에게는  무관(無關)한 것이지만 남은 백성 곧, 참된 선민(選民)에게는 그대로  의의(意義)를  가진다. 외식자가 아닌 예레미야의 이 기도는 모세의 기도와도 비슷하다(신 9:25-29 참조).
   (4) "비를 내리게" 하실 이는 하나님 뿐이시라고 함(22절).


Articles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