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2: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대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
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 "쟁변"
이란 말(* )은 변론함을 의미한다. "주는 의로우시니이다"라고 한 말슴(*
)이 히브리 원문에서는 본절 초두에 나왔으니, 그것은 역설체(力
說體)이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이 점을 역설한 이뉴는, 그가 비록 이 아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문(疑問)하기는 하지만, 주님의 의(義)로우심을 믿는 그의 신앙
에 있어서는 의심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사(行事)에 대하여 알아 보고
저 할 때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와야 된다. 곧, 그의 옳으심에 대하여는 어떤 경우
에서든지 믿을 것을 전체(全體)로 하고 나와야 된다. 그러므로 욥 9:3에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라고 하
였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팩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이런 질문
은, 시 73:2-16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시(詩)를 슨 성시인(聖詩人)은, 그 난제
(難題)를 성소(聖所)에 들어갈 대에 깨달았다고 한다(시 73:17). 그 깨달음은 이것이
니, 곧,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악인들이 있기는 있으나 그들은 반드시 멸망 당할 때가
있는 반면에,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재앙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여
주시며, 필경 그는 하나님을 영원한 분깃으로 모시게 된다는 것이다(시 73:18-28). 시
17:14,15 참조.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기 발표한 의문(疑問)도 불신앙으로 한 것은 아
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의로우심을 믿는 처지에 있다. 1절 상반 참조. 선지자
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도 난제에 대하여 의문하는 방식으로 말한 이유는, 겸손히 알
고자 하는 동기에서 그리한 것 뿐이다. 시 13:1-3 참조.
렘 12: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를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 여기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악인들을 수목
(樹木)에 비유하였다. 이것은 흔히 나오는 성경적 비유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나무
와 같이 심으시고 왕성하게 하셨다는 의미의 말씀은,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도 우연히 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로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당 위
에서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들
이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시어서 된다고 한다. 하나님
께서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형통하도록 하시는 것은, 그들의 분깃이 이 세상 뿐
이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이다. 시 17:14, 49:14,15,19; 마 5:45; 눅 16:25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이 땅 위에서 형통하는 것을 볼 대에 도리어 하나님이
게신 사실을 믿어야 된다. 우리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악인들을 대대
손손(代代孫孫)이 형통케 하시는 일도 있다고 한다. 곧,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
하여 열매" 맺게 하신다는 말씀이 그 뜻이다. 여기서 "열매"란 말로써 자손을 의미한
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이 말슴은, 위에 말한 악인들이
어더한 자들임을 보여준다. 그 악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여기 "그 마음"(그들의 마음)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킬레요데헴(* )이라고 하는데, 감정(感情) 혹은 정서(情緖)의 부분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 대하여 외모(外貌)나 지식으로만 관계하고, 정서로써 하나님에
게 대한 느낌이 없는 자들은 흔히 외식자들이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있어서 정서면을 많이 고조한다. 위의 예레미야의 말씀을 보면, 가장 악한 죄인들이
종교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 있다. 그들은 하
나님에게 대하여 느낌이 없는 외식(外食)하는 자들이다. 진실한 신자들은 정서면에서
도 신앙의 움직임이 있다. 구약 시대 신앙의 사람들은 언제나 정서면에 신앙적 활동이
컸다. 신앙의 사람 다윗은 눈물의 사람이었다. 시 6:6, 56:8 참조.
렘 1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
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 냄과 같이 그들을 글어 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옷소서 -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자기의 선지직(先知職)을 완수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한다. 특별히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더
함을 감찰하시오니"란 말씀이 이 뜻이다.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
오니"란 말씀이 이 듯이다.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이라는 히브리 원어(*
=리삐 아타크)는, 예레미야의 마음이 주님으로 더불어 관계되어 있는
상태를 이름이다. 이것은,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절실한 사명감(使命感)을 가지
고 예언한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선지자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만큼, 그의 말을 듣
지 않고 끝까지 반역한 유대인들에 대하여는 이제부터 멸망이 선포될 뿐이다. 선지자
의 말을 듣지 않은 죄악의 결과는 이렇게 크다. 선지자의 예언이란 것은, 듣는 자들이
회개치 않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작정을 대언(代言)하는 것이니 만큼,
그것이 그렇게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이 때에 예레미야의 사역에 있어
서, 그의 예언을 들은 자들이 순종치 않았음으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멸망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이제 하나님의 작정대로 그들에게 임할 멸망을 확신하고 주님의
작정대로 시행(施行)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없던 방침을 새
로이 시행하시도록 권유함이 아니라, 예언자로서 할 일을 다 해 보았으나 그 백성이
회치 않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본래의 작정대로(회개치 않으면 멸망시킬 작정) 하실
수 밖에 없다는 부득이한 결론이다. 저 강퍅한 유대인들을 바벧론 군대에 의하여 처벌
하심이, "양을 잡으려고 끌어 냄과 같"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
명할 수 있다. 곧, 하나님게서 저 강퍅한 유대인들을 당장 없애 버리지 않으시고, 그
의 자비에 의하여 이 세상에서 육신의 복을 누리도록 하셨으니, 그것은 마치 사람이
양을 기름과 같은 것이다. 이제 그들을 벌하시게 되는 것은, 결과적(結果的)으로 사람
의 보기에 기르던 양을 잡으려 함과 같다는 것이다. 나의 공동서신 주석에 있는, 약
5: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렘 12: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
리라 함이나이다 -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의 죄악 때문에 무죄한 "채소"와 "짐
승"들가지도 "멸절"됨에 대하여 하나님께 애탄하는 질문을 가진다. 채소나 짐승들이
재앙을 받는 것도 인간들의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들은 이런 재앙을 볼 때에도
죄감을 더 깊이 가져야 된다. 그 때에 이런 재앙이 임하도록 한 유대인들의 죄악은 무
엇이었던가? 그것은 하반절에, "이는"(* )이란 이유 접속사로 소개되었으니, 곧,
그 땅 거민들이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함이라"함이다. 그들의 이 말
은, 예레미야가 그들의 멸망하는 것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예레미야가 그들의 멸망하는 것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예
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한 죄악이다. 예레미야는 벌써 유대의 멸망을 예언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무시한 것은, 땅의 채소나 짐승에게까지도
재앙이 내리도록 하는 큰 죄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말씀을 폐기(廢棄)하는 것은,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에 재앙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암 8:11 참조).
렘 12: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당
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 이것은, 예레미야가 예
언 사역을 하는 중에 자기 고향 아나돗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아 괴로움을 발표한 때
에 임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다. 이 위로의 내용은, 앞으로 보다 더 큰 고통이 임
할 것을 알려줌으로 그 현재의 고통을 잘 참도록 함이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앞으로 죽을 고통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할 대에
는, 그 당면한 괴로움을 참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의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
가 그 고향 아나돗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것은 가가운 친구들에게서 배신을 당함
과 같은 것이었으니, 실상 괴로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요단의 창일함"(*
)이란 말은, "요단강의 넘치는 수재"(水災)를 의미한다고 하나,
그보다도 "요단의 자랑거리"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한다(Delitasch). 요단의
자랑거리란 말은, 요단강 가에 숲이 우거져 사자가 거처하게 된 위험 지대를 의미한
다. 이것이야 말로 앞에 나온 "평안한 당"(* )이란 말과 대조되어
극히 위험한 환난을 비유한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이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현재의 난관에서 낙심치 말
고 미래에 있을 더 큰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할 각오를 가지라는 것이다. 사
람은 언제든지 앞으로 더 큰 환난과 고통(죽음)을 당하게 될 것인데, 그것을 잘 통과
하기 위하여는 현재의 그 보다 작은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연단 받는 기회로 삼
아야 된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완성하시는 방법은 환난과 고통이다. 신자가, 현재에
당하는 환난과 고통을 박대한다면, 미래에 반드시 있을 더 큰 환난과 고통(예컨대 죽
음)을 유익하게 받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렘 12:6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
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 이 말씀은 윗절의 계속이니, 예레미야의 장차
당할 환난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준다. 예레미야가 당하는 현재의 환난은 고향 사람들
에게서 배척 당하는 정도이지만, 앞으로 있을 것은 "형제와 아비의 집"에서까지 배척
을 당할 큰 환난이다. 이런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국가적인 핍박을 받는 그에게 대하여 형제와 가족들까지도 그를
싫어하고 배척하게 되어지는 비참한 일인 것 같다. 하나님 편에 선 자는, 어떤 때에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서 박해와 축출을 당하는 일이 있다. 여기 말한대로 예레미야의
형제와 아비의 집은 그를 속일 뿐만 아니라, 그를 도적 잡듯이 그의 뒤에서 소리치며
핍박할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가장 심한 고통은 그들의 배
신 행위(背信行爲)이다. 우리 본문에, 그들이 "너를 속이며",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라고 한 말씀은 그들의 배신 행위를 의미한다. 마
10:34-39 참조.
렘 12:"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 "내 집"(* =뻬티), "내 산업"(* =나칼라디), "내 마음
의 사랑하는 것"(* =예드두드 나프쉬) 등은, 하나님의 성전과
및 유대 땅과 유대 민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믿음과 사랑은 가지지 않고, 다만 종교적 외형만
을 가지고(종교적 儀式과 禮典 같은 것)자랑하며, 외국의 침략이 저희 나라에는 범접
할 수 없는 줄로 잘못 생각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여기 있으
니 누가 감히 우리 나라를 침략하라!" 하였다(7: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교 의식
(그것도 하나님이 주셨지만)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믿음과 사랑을 참 종교
의 생명으로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외형만 붙잡고 거기에 피신(避身)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바 종교적 외형을 저렇게 그릇되이 사용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원수의 손에 붙이시기를 아까와하지 않으신다. 비록
그것들에게 당신님의 고귀하신 이름이 관계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들을 아가와
하지 않으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본문에, "내"라는 글자가 세 번이나 강조된다.
흔히는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외형에 충성하며, "더 중한바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등한히 하는 폐단이 많다(마 23:23). 여기 이른바, "의와 인과
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에게 행할 의리(義理)와 사랑을 포함한다.
렘 12:8
내 산업이 삼림 중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고로 내가 그
를 미워하였음이로라 - 여기 이른바, "내 산업"(* =나칼라디)이란 것은 유
대 민족을 의미한다. 그 대에 유대 민족은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을 고집하여 그의 말
씀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런 자들을 가리켜, "삼림 중의 사
자 같"(* )다고 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사자
같"다는 것은, 우리의 명심할 바이다. 불신앙은 하나님과 투쟁함이니, 이는, 사우려고
달려드는 사자의 행습과 같다. 그러므로 시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신앙한 것은 하나님을 대항한 죄와 같다고 하였다(시 78:19, 40, 56). 하
나님게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
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을 뿐 아니라, 세상의 무수한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믿는
다. 이는, 하나님을 제쳐 놓고 그 대신으로 무수한 우상을 가짐이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에게 대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멸시와 배척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하나님
이 원하시는 것과는 정반대로 투쟁적으로 움직인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다
고 하면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사자"(獅子)와 같은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싸우는 자들이다.
렘 12:9
내 산업이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 여기서는, 유대인들을 "무의
있는 매"(* )와 같다고 한다. "무늬 있는 매"라는 것은 얼룩진
육식조(肉食鳥)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비둘기 같은 순한 새가 아니다. 유대 민족을 이
런 육식조에 비유한 이유는, 그 민족이 여호와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 육식조에 비유한
이뉴는, 그 민족이 여호와를 믿는 믿음에서 더나 육식조와 같은 이방 나라들을 본받았
으며, 이방의 풍속대로 자신을 물들였기 때문이다.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
냐". 이것은, 이방 모든 나라들이 위에 말한바 "무늬 있는 매"와 같은 유대 나라를 침
략하리라는 말씀이다. 유대 민족은, 이방과 타협함(예컨대 애굽을 의지하여 그 풍속을
따름)으로 덕을 볼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민족이 저렇게 될 때
에,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의 침략을 당하게 하신다.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
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라고 한 말씀이 역시 이 뜻이다. "들짐승들"은 하나님을 모
르는 이방 나라들을 비유한다.
유대 민족은 신약 시대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
지해야 형통하게 될 처지였다. 그런데 그 민족은, 비일비재로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
을 의지하는 이방 나라들의 행동을 취하였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 없이
이방을 통하여 그 민족을 징계하셨다.
렘 12: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
었도다 - "많은 목자"(* )란 말은 우리들의 주의를 끈다. 이것
은 이방 나라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만을 유일한 목자로 알고
그에게 순종했어야 할 터인데, 그들이 그리하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잔인무도한 이방
나라의 폭군(暴君)들에게 속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이방의 폭군들이 그들
의 목자(牧者)인 셈이다. 이렇게 그들의 처지는 불행하게 바뀌어졌다. 이런 것은 하나
님께로부터 온 벌이 아닐 수 없다.
본절에, "내 포도원"(* ), "내 분깃"(* ), "나의 낙토"(*
=나의 기쁜 분깃)라는 세 가지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
하여 있는 유대 민족을 비유하는 말씀이다. 이 세 가지 표현에는 역시 "내" 혹은 "나
의"라는 소유격 대명사(所有格代名詞)가 붙어 있어서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역설(力說)한다. 특별히 이 점에 있어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외식
(外飾)하는 신자들이, 비록 하나님의 소유로 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
지 아니하시고 벌하신다는 것이다(7절 해석 참조).
렘 12:11,12
이 부분에는, 유대 나라가 얼마나 비참하게 이방 군대에게 유린 당할 것이 묘사되
었다. "황무"라는 말이 세 번 있고, 거기에 있어서 "훼멸", 또는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킴", "평안치 못함" 등 비참스러운 표현들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것을 볼 대에, 유대 민족이 전화(戰禍)로 인하여 얼마나 여지 없이 파멸될 것을 생
각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 민족의 죄악이 얼마나 참혹하였
고, 도 심각하였다는 것을 생각하게도 한다. 자연계의 참상은 인간들의 죄악을 반영시
키는 것이다. 사실상 인간의 죄악상(罪惡相)은 자연계의 참상(慘狀) 이상이다. 죄악의
참상은 영적 안목으로야 밝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생활 환경의 참상
은 어느 정도 느끼지만 그보다 심한 자기 죄악의 참상은 못 느낀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자연계가 저주를 받은 것은, 벌써 인간 죄악사(罪惡史)의 초두에 나왔다(창
3:17,18).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이것은 시적 표현(詩的表現)이지만, 사시
랑 자연계가 받는 재앙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계 자체가 무언 중에 하
나님을 향하여 호소하는 모습을 가진다. 이를 개의하는 자가 없음이로다(*
). 이 말씀은, 유대 민족이 무서운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 비참한
사실 때문에 회개하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렘 12:13
무리가 밑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 즉 그 소산으로 인하여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를 인함이니라 -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
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 즉". 이 말씀 뜻은, 사람들이 기대하였던 대로
수확(收穫)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그 노력에 비하여 역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 기대하던 바와 정 반대의 결과를 거두는 것은 범죄의 결과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고 자기가 놓은 올무에 자기가 걸리게 되는 식으로 일이 묘하게 전개되는 것은,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간섭 때문이다.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어떤 때에는 좀 먹는 듯이 은밀하여 범죄가 자신이 깨닫지 못하도록 되나(호 5:12), 어떤 대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양식이, 그 범죄자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되어진다. 그것은 우리 본문이 말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이와 같은 종류를 가리켜, 성경은, 사자(獅子)와 같이 임하는 벌이라는 의미로 말한다(호5:14).
렘 12:"14-17
이 부분에 예언된 것은, (1) 유대 민족을 침해한 이방 나라들을 징벌하시겠다는 것(14절). (2) 포로되었던 유대 민족을 돌아오게 하시리라는 것(14절 끈, 15). (3)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종교를 배우게 되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이것은 여호와를 공경한다는 뜻)하게 하시리라는 것(16,17). 이 세 가지는, 유대인들이 바벧론에서 놓여나 본토로 돌아오게 된 사실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종교를 배우게 된다는 점으로 보아, 이 예언은 보다 더 고차적(高次的)인 미래의 사항을 가리켰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이 예언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이스라엘 운동을 가리킨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사실이다.
선지서(先知書)에 나오는 메시야 예언들은, 종종 여기서와 같이 유대인이 밥마론에서 돌아온 일과 함께 예언되어진다. 이것은 얼핏 보면 이상스럽게 생각된다. 그 예언 중에는, 유대인들이 바벧론에서 놓여날 사건을 명백히 예언하면서도, 그 사건 이상의 일들이 거기 섞여 있다. 많은 해석가들이 이 점에 대해서는 말이 막힌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이상스러운 현상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곧, 유대인들이 바벧론에서 놓여 나오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신약 시대 메시야의 구원 운동을 예언하는 것이고, 역사적 사건은, 독립적으로 의의(意義)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 운동에 있어서, 메시야로 말미암은 신약 운동을 그 궁극적(窮極的)인 목표로 가지시나니, 신약 시대 이전(以前)의 하나님의 구원 운동들은 모두 다 이 궁극적 목표를 지향하고 움직여진 것이다. 그러니만큼 예언자들은, 신약 시대 이전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 운동(이스라엘의 구원 운동)을 내다 보면서, 겸하여 그 종점(그리스도의 구원 운동)까지 보게 된다. 이 현상이 저렇게 예언자들로 하여금 신약 시대 이전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재료를 사용하면서, 겸하여 그 사건에는 잘 들어 맞지 않는 고차적(高次的)인 재료들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