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예레미야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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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 1:1-3

  여기 "아나돗"이라는 지방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한 시간 좀 더 걸려서 가면  있는
곳이다(수 21:18). 예레미야는 제사장족(祭司長族)가운데서 났으니, 이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극히 자유로우신 것을 볼 수 있다. 곧,  선지자(先知者)
아모스는 농민의 집에서 난자임에 비(比)하여,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전무(專
務)하는 제사장의 집에서 났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들을 특별히 세우실 때에 어떤 한
계통의 사람들에게 매이시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라
하였으니, 이는, 예레미야의 전한 말씀이 순전히 외래(外來)의 것, 곧,  하나님으로부
터 받은 것임을 알려 준다. 모든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사상(思想)을 전하지 않고  오
직 여호와의 말씀만 전하는 것으로 그들은 사명(使命)을 생명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
문에 그들의 전하는 말씀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 또 혹
은, "여호와의 말씀이라"(*                )라는 문구가 거듭거듭 사용되었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 삼년. 이와 같이 예래미야의 활동 시기에 대한 연대(年代)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 역시 그릇된 종교에서 가지는 공환(空幻)과 같지  아니
하여 어디까지나 그 계시(啓示) 운동의 역사성에 중점을 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렇게 우리들이 보며, 들을 수 있는 일반 역사(一般歷史)에 명백히 임하여, 역사적  존
재인 사람들로 하여금 틀림 없이 파악(把握)하도록 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이 화육(화육)하시어 낮아지사, 역사(歷史)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체휼(체휼)하신  것
과 같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에게 임한 하나님 말씀도 이렇게 그  영원성(永遠性)을
지니면서도 역사성을 그 성질로 체납(滯納)하였다. "예루살렘이  사로잡"혔다고  하는
말은,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이 보낸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의 많은 주민들을 포로하여
간 일을 가리킨다(왕하 25:8,11). 이 사건보다 조금 전에 유다의 시드기야왕은,  도망
하려다 사로잡혀 림나에서 눈을 뽑히우고 바벧론에까지 수갑을 차고 포로되어 갔다(왕
하 25:5-7).

 

  렘 1:2,3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 여기서는, 유대인들의 외식과 그것에 따르는 강퍅
을 책망한다. 외식(外飾)하는 자는 언제나 강퍅하다. 그 이유는, 외식자에게는 하나님
의 말씀이 명중적(命中的)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한다 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식(禮拜儀式)을  이름
이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예배 의식을 가지기는 하였으나 진실한 신앙은 없었다. 그
러나 여호와께서는 "성실"(진실)을 돌아보신다. 우리 본문에,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
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물음은, 성실을 돌아보신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외식하였으니만큼, 주님의 교훈을 살깊이 받지 못했다.  그
들은, 주님의 채찍을 경험하고서도 교훈을 못받는 정도로 강퍅하였다. 종교적  외식으
결과는, 이렇게 사람의 심령을 강퍅하게 만든다.

 

  렘 1:4,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여기서도 예레미야는 자기의 전하는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임에 대하여  먼저  말해
놓는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선지자로서의 확신(확신)과 소명감(소명감)을 가
지도록 하기 위하여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신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나기 전에,  곧,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예레미야)를 아셨다는 것이다. 여기 "너를 알았고"(*
          )란 말씀은, 단지 객관적 시찰(客觀的視察)에 의하여 예레미야라는  사
람이 어떤 인물인지 예관(豫觀)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예레미야를  자기
종으로 쓰시기 위하여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루돌프(W. Rudolph)는 말하기를, 전 성경
에 있어서 "알았다는 말(*      =야다)은, 단지 지식적 개념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전 인격을 드려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예정하셨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여기 "너
를 구별하였"다는 말씀(*             =聖別함)도, 역시 같은 의미의 것이다.  예레미
야는 이렇게 자기의 사명이 하나님의 예정인 줄 알았기 때문에, 후에 많은 핍박  중에
서도  자기의  선지자적    사명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W.  Rudolph,  Wir
verstehen, warum Jer. spater trotz aller Verfolgung nie ein  Zweifel  an  seiner
prophetischen Sendung kam.-Jeremia, p.5).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의하여 사명을 받은 줄 알 때에 복잡한 이 세상 풍진(風塵)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심에 있어서 임기응변(臨期應變)으로 하신다고 하면, 그
것이 그렇게 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나, 영원 전부터 작정하시고 하시는  일이라
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뿌리 깊은 경륜(經綸)에 의하여 하시는 일이니 이 일로
택(택)함이 된 선지자는 가장 확고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예정(豫定)은, 하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
고, 일반 신자들의 생활에 대하여서도 생각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 신자들도 소
금과 빛으로서 주님을 증거할 일종의 선지자들이다. 그들도 이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
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취는 일을 힘 있게 해야 한다.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를 실제로 모든 다른 나라에도 파견(파견)하실 것이라
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 내용이, 모든 다른 나라들의 장래 심판을
선포하리라는 의미이다. 실제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유대 뿐 아니라 모든 다른 나라들
의 멸망에 대해서도 예언하였다.

 

  렘 1:6,7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
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 여기 예레미야가  말한대로,
"나는 아이라"(*                  )고 한 것은, 그의 연령(年齡)이 어리다는 말인지,
혹은 경험이 어리다는 말인지 알기 어려우나, 자기로서는 선지자의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에게 신속(迅速)한 복종을 하지 않
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부족을 느끼고 말한 것이니 만큼, 그의 이 태
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모세도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많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한 자를 더욱 쓰시기 원하신다. 하나님
께서 여기에 대하여 두 가지로써 문제 해결을 주신다. 곧, (1) 그가 보내시는 데로 갈
뿐이라는 것(7절). 하나님에게서 사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순종할  뿐이
다. 그 뒤에 감당할 것은 하나님이 맡으신 것이다. (2) 그가 주시는 말씀만 전할 뿐이
라는 것(7절 하반). 선지자가 말할줄 모르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 말로써 일할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렘 1:8,9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사명  이행(使
命履行)에 필요한 안전보장(安全保障)과 확신을 주신다. 그가, 국가들을 상대하고  심
판성(심판성)있는 말을 전하는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무릅써야 할  일이
었다. 그 일은, 결단코 육신적으로 평안을 누리게 할 것은 아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명을 받는 마당에서  하
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려워 말라"(*                )는 부탁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으면, 듣는 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그 이유는, "두려
워 말라"하신 이가, 만유를 아시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세한 내용으로 안전 보장과 확신을 주신다. 곧,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하신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일 이
상의 안전 보장은 없다. 그는 이와 같은 안전 보장을 해 주실 뿐 아니라, "나  여호와
의 말이니라"(*                 )라고 하시어 그 약속이 얼마나 견고한 것을  보여주
신다. 성도는, 많은 반대 가운데서라도 자기는 하나님의 고요한  음성(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파악(把握)하고 나아가는 줄 알 때에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  이유
는,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셨다고 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외부적 증표(外部的 證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외부적 증표를  보
여주시지 않고라도 그의 말씀을 그 종에게 주실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때에는
이런 외부적 증표를 보여주시므로 우리의 어린 신앙을 도와주시기도 하신다.

 

  렘 1: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민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
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 이 귀절은, 예레미야의 사명이 어떠할 것을  보
여주는데, 그것은 파괴적인 성격임을 먼저 역설(力說)한다. 그 이유는,  그의  예언의
대부분이 국가들의 멸망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예언 그 자체가  국가들
을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겠는데, 어찌하여 여기서 그렇게 하는 듯이, "너로 뽑으며 파
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라고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
언자가 발언(發言)한 말씀의 위엄(威嚴)이 어떻게 큰 것을 보여주심이다.  결국  그의
예언 대로 사태(事態)가 발생될 것인 만큼, 그 예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위엄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멸망시킬 포부(抱負)가 있다 할지라도, 아직
그 사실에 대하여 예고하시지 않는다면, 그의 그렇게 하실 결정이 성숙(成熟)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종을 세우시고, 그 사실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장면이야말로 그 사실을 성립시키는 최후적 단안(斷案)이라고 볼 수 있다.
   "건설하며 심게 하였"다 함은, 열국(列國)을 멸망시키므로 하나님의 새로운 건설이
나오겠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천국 운동은, 먼저 죄악의 어두운  질서(秩序)를
파괴시키므로만 실시되는 것이다.

 

  렘 1:11,12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
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
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자
기 말씀의 권위가 어떠할 것을, 이상(vision)으로 보여주신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살구나무 가지"를 보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설명하시는 것보다 이
상(異象)을 보여주시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인상 깊이 그 뜻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면, 여기 "살구나무 가지"는 무엇을 비유하는가? 여기에 대하여 12절이 설명해 준
다. "살구 나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솨케드(*      )니 깨어 있다는 뜻을  가진
다. 실상 "살구나무"는, 모든 다른 나무들이 겨울 잠(冬眠)을 계속하는 동안에 일찌기
정월 중에 발화(發花)한다고 한다(팔레스틴에서). 그러므로 이 나무가 깨어 있음을 상
징(象徵)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도 깨어 있어서 때가 되면 실현되고야  만다.  그것
은, 결코 잠든 것과 같이 이룰 것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는 법이 없다.  그것
은 마치, 살아 있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룰 것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보여진다.
   일설에, "살구나무 가지"를 본 이상은 "징계하시기 위한 막대기"를 의미한다고  하
나, 그 해석은 우리 본문 12절과 위반된다. 그것에 대한 12절의 해석은, 분명히, 하나
님께서 그 말씀하셨던 것을 "지켜 그대로 이루"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발
언하신 것을 그대로 지켜 이루시는 것은, 마치 그 말씀 자체가 깨어 있다가 때가 이르
매 실현된 것과 같이 보여지는 것이다.

 

 렘 1:13-15

  여기서도 또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와서, 선지자의 전하는
말씀은 온전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 밖에 다른 것이 없음을 역설한다.  구약이나  신약
은, 이렇게 하나님 말씀 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기독교는, 객관적(客觀的)으로
임한 하나님 말씀 권위로 만족하고, 인간의 주관적(主觀的) 정서(情緖)의  동정(動靜)
에 중점(重點)을 두지 않는다. "끓는 가마"(*                )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설에, 그것은 장차 유대를 공격할 바벧론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끓는 가마"의 물이 재앙이라는 뜻이니, 그것이 북에서부터 유다로 내려와서 그  백성
을 진멸하리라는 것이겠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가마를 달구는 불
은 북에서 내려오는 바벧론을 상징하는 동시에, 끓는 물은 유다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곧, 북에서 내려오는 전쟁의 환난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물 끓듯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
는 의미이다. 이 해석이 이연(梨然)하다. 14절에 있는 말씀이 이 해석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이와 같은 환난이 임할 것을 보여주실 때에, 이상(異象)
으로써 하시고, 또 그것에 대하여 해석까지 하여 주시는 것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그
일을 인상 깊이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중적(二重的)으로 장차 올  환
난에 대하여 알려 주심이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취급하되,  그것을  인상
깊이 가질 줄 모르고 막연한 가운데서 가르치기도 하며 혹은 배우기도 할 때에, 그 말
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인상 깊이 취급하기 위하여 그것을 진실되이 믿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저렇게 확실성 있게(異象과 그것에 대한 설명을 주시므
로)우리에게까지 전해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15절에 설명된 하나님 말씀은, 위에 기록된 전쟁의 환난을 일으키시는 이가,  여호
와 자신(*           )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사람들은 흔히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우연에 돌리고 만다. 환난을 당한 자는,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줄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은혜를 받는다. 다시 말하면, 그런 때에야 비로소 회개의 동기를 가지
게 되고 주님을 사모하게 된다.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 "족속"이란 말은 "족속들"(*              )이라고 번역
되어야 한다. 이들은 바벧론에게 복속(服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
랑하시는 백성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저런 큰 세력을 채찍으로 사용하신다. 유대인들은
저런 큰 세력이 정복하여 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잔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
기들의 죄악이 저런 큰 세력 이상으로 컸다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이 큰 세력의 군대
들이 "예루살렘 성문 어구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유다를 함락시킬 것이라는 의미에서
여기 말하였으니, "자리를 정"한다는 것은, 그들의 승리(勝利)가 확보(確保)되어 있기
때문에 안연(安然)히 거처하면서 전쟁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유대인들
의 강퍅한 마음을 교란(攪亂)시킬만 한 무서운 말씀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당면할
세력은 불가항적(不可抗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렘 1: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
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  "다른  신들"이라는  것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말로써 설명된다. 사람들이 돌이나 나무 그대로를  숭배
하는 미신에 빠지는 일도 있으나, 그보다도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바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을 더욱 숭배한다. 그렇게 되어지는 원인은 이렇다. 곧, 우상 숭배의  심리는  미혹
받은 심리인고로, 사람 모양으로 눈이나 귀와 같은 것이 있는 형상(形象) 앞에서는 사
람들이, 더욱 용이하게 속아 넘어가는 까닭이다. 사람은 이렇게 기분적으로  움직이고
진리를 붙드는 데는 둔한 자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유대인의 죄악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도 우상 숭배의 죄악이 근
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것만을 거론(擧論)한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계시
방법(啓示方法)이 신약 시대와 달라서 외부적 성상을 숭배하는 데로 떨어졌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신자들의 우상 숭배 죄악은, 보이지 않는 심리 현상으로 성립되고  있다.
예를 들면,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바울은 가르친다(골 3:5).

 

  렘 1: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등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
노라 - "허리를 동이"라 함은, 하나님 말씀을 전할 사역의 준비를 비유한 것이다.  유
대인들은 일할 준비로 허리를 동이는 법이다(출 12:11;왕상 18:46; 왕하 4:29,  9:1).
"네게 명한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여기 "다" 자(字)(*     =콜)가 중요하다. 예레
미야는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빠짐 없이 모두 다 전파할 사명을 받는다. 하나님  말
씀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이니 그런 중요한 말씀을 소홀히 취급할 수 없으며, 또한
대강만 전할 수도 없다.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중에 사람의 반대나 핍
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도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중에 사람을  두려워
하면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다. 하나님은 불신앙 하는 자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신
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불신앙을 벌하신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사람을  두려워하면, 그 죄 값으로 하나님의 두렵게 하시는 벌을 받는다.

  렘 1:18,19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 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두려워할 이유 없음을 보여준다. 왕들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그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최대 한도의 위험한 일도 그를 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는 동안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안전 보장이 되어 있음을 여기서 말한다. 그로 하여금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하시리라는 말씀이 그 뜻이다. 그에게 이와 같은 안전 보장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까닭이다.
   오늘날도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안전하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만 하여라. 그리하면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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