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이사야 6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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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63:1

  어둠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능력으
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  여기서
부터 6젊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장차 교회의 모든 원수들을 진멸하시고 그 백성의 구원
을 완성하실 사실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진술한다. 선지자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최
후적 승리를 내어다 본 후 7절부터(특별히 10절부터) 그 백성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참상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그는 현실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미래의 소망을 마음  가
운데 간직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초후적 승리에 관한 말씀을 앞세운다.
  "애돔에서 오며"라는 말씀은, 애돔을 하나님 백성의 원수에 대한  상징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의 활동 무대(活動舞臺)를 에돔으로 비유한 것은,  합
3:3에도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그 원수들 가운데서 싸워 이기고 나오는 개선  장군
으로 비유하는 말씀이다. "홍의를 입"었다 함은, 이 아래 모든 말씀에서 보여주는  대
로 원수들의 피 묻는 옷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보혈을 흘려  그  백성을
구원하셨지만 이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교회의 모든 원수들을 진멸하실 사실에 대하여
는 저들(원수들)을 죽이는 전사(戰士)로 비유된 것이 역시 계시록의  말아므과  같다.
계 19:15, 17-21 참조. 이렇게 원수를 진멸하시는 일을 포도즙틀을 밟는 것으로  비유
한다(3절). 계 14:18-20 참조. 일설에 "홍의"라는 "홍"자(字)(      =카무츠)는, 다만
번쩍번쩍하는(            )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보스라"는 애돔의 도시이니  곧,
교회의 원수되는 자의 땅이다. "그 화려한 의복". 이것은 위의 "홍의"(紅衣)를 가리킨
다. "걷는 자"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초에(    )이니 흥분되어 행진(行進)하는  자를
의미한다.

 

  사 63:2-6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중에 나와  함
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두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르 밟았고 분
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
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
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었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팡리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
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
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 교회의 원수를 지멸하시는  그리
스도에 대한 진술이 여기 여러 가지 나온다.
  (1) 그는 포도즙틀을 밟는 자로 비유됨(2절). 이것은 원수를 진멸하는 자라는  뜻이
다(계 14:19,10, 19:15).
  (2) 그는 이와 같은 심판을 홀로 행하심(3,5). "호롤"(      =레받디) 행하신다  함
에 대하여, 마르티(Marti)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의 신학 입장이 다 올흥다 것은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일고(一考)를 요한다. 그는 말하기를, "마지막 심판 때에는,
고레스도 협력할 일이 없고 앗수르나 갈대아 같은 민족이 도구(道具)로  사용될  일도
없다. 마지막 심판을 여호와께서 홀로 실행하시고 어느 민족(  =암밈)이든지 그  심판
의 대상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Kein Cyrus war jetzt dabei  und  kein  Volk  hat
eingegriffen, wie etwa fruher die Assyrer und Chaldaer seine Werkzeuge waren;das
Endgericht vollstreckt Jahwe allein und das Objekt sind  die  Volker        vgl.
v.6).
 (3) 그의 이와 같은 최후적 승리는, 그의 의로운 진노의 나타나심으로  성립됨(3절하
반,5절하반-6절). 이 진노의 나타나심은, 그의 공의대로 되는 것이다.  그를  "붙들어
주는 저도 없었으므로 이상히 여긴"다 함은, 온 세상은 다 심히 부패하여 최후 심판하
는 일에 협력할 수 없이 된 것을 탄식하심이다. 이 심판은 그가 친히 하신다는 의미에
서,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라고 하신다. 사실상 심판은 하나님의 권리 남용이  아니
고 그의 공의와 성결을 유지("나를 구원함")하기 위한 최후의 부득이한 일이다. "내분
이 나를 붙들었"다 함은, 그의 공의(公醫)의 분노가 그의 공의를  보존시키기  위하여
역사하였다는 뜻이다. 그와 같은 분노는,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
의 부득이한 분노이다. 그가 그런 분노를 나타내지 않으신다면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상실함과 다름 없을 것이다. 6절에 있는, "노함", "분함"도 이와 같은 의미의  거룩한
의분(義憤)이다.
  (4) 그가 이렇게 원수를 진멸하시는 행위는, 그 백성의 구속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
임(4절). "원수 갚는 날"(      =욤 나캄)이나, "구속의  해"(               =쉐나드
깨울라이)는, 주님께서 그 백성을 완전히 구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때를  의미한
다(눅 18:8).
  (5)  "그들의 취케"한다는 것,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망하도록 한다는 것이다(6절하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사역은, 얼핏 보면 그의  사
랑과 반대되는 일 같이 보인다.그러나 하난미의 사랑이 공의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기역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같이 사랑이시나(요일 4:16),  그 사랑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 곧, 죄악 자체와 같은 악인들을 용납히시지 않는다. 그는 필경 심판하신다. 어린양도 진노하신다(계 6:16). 그 진노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사랑 자체의 진노이기 때문이다. 사랑자체에게도  용납될 수 없는 악인이야말로 악(惡) 자체와 같은 자로서 영원히  진멸(지옥에  버림)되어 아까울 것이 없는 자들이다.
  위의 1-6절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으로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된다. 거기 나오는 표현들은, "선혈(鮮血)이 내 옷에 뛰어"라는 것(3절), "만민을  밟았으며"라는 것,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하였다는 것 등이다(6절).  이러한  표현들은 이 세상 전쟁에서 복 수 있는 전사(戰士)에 대하여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최후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으실 것이라고 여자적(如字的)으로 생각하지 말고 영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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