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이사야 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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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38: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
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 여기 이른바 "그 즈음"이라는 것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혹
설에 이것은 유다가 앗수르에게 침략을 당하던 시절이라고 한다. 그 시절은  히스기야
가 왕된지 제 14년니라고 생각될 수는 있다. 히스기야가 도합 29년동안  왕노릇했다고
하니(왕하 18:2), 그가 병들었다가 나나서 15년 더 왕 노릇했다면  29년이  되어진다.
그러면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앗수르군이 물러가므로 잠깐  경사(慶事)를
보았으나 뒤 이어 죽을 병에 걸렸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신령한 교훈을 준다. 성도에
게 끊임 없이 환난이 오는 것은 당연하되 평안이 있다면 이는 도리어 예외(例外)요 상
칙(常則)은 아니다. 성도는 자기에게 늘 평안이 올줄 생각하면 안된다.  그에게  잠간
평안이 오는 것은 그가 연약한 까닭이다(Calvin).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이것은 히스기야로 하여금 그의 사후(死後)에 국사(國事)가  바로  되도록
유언하여야 될 것을 가리킨다.

 

  사 38:2,3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
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한 목적은, 하나님께 기도를
전심전력(全心全力)하려는 것이니 곧, (1) 그의 걸린 질병의 문제 해결을 인간 세계에
서 하려는 마음이 전연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해결이 있는줄 알아, (2) 이제부터 기도
를 전무(專務)하려는 것이다.
  그의 기도하는 말 가운데,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중의  목전에
서 선하게 행"하였다고 하니, 그것은 자기의 공로를 알아 달라는 바리새식 기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자기의 공로를 알아 달라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그는  하
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외식함이 없이 진실과 전심으로 하였다는 것이며  그의  행위도
우다의 일반 민중처럼 불신앙으로 애굽을 의지하는 것 같은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의 무죄(無罪)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당면한  문제에
있어서(예컨대 앗수르의 침략과 같은 난재) 처신 방법을 신앙적으로 하였다는 것 뿐이
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공로나 의를 댓가(代價)로 하여 하나님의 은헤를 기
구(祈求)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특수한 문제에 대한 자기의 처신 원리가 하나님의
진리대로 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 해결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
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 문제를 앞두고  하나님이  시키신대로
하였기 때문이다.

 

  사 38:4-6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
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
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 히스기야의 기도 응답으로 여호와의 말
씀이 임하였으니 곧, (1)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여기서 특별히  눈
물을 귀히 여기는 의미에서 그 눈물을 보아 주신다고 한다. 히스기야가  눈물을  흘린
것은 그의 기도가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간절한 기도라야 눈물을 가진다. 눅 11:8; 삼
상 1:10 참조. (2) 히스기야의 수한(壽限)을 15년 더하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3)  앞
으로 앗수르 왕의 손에서 유다 나라를 건지시며 보호하시겠다는 것이다.

 

  사 38:7,8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위의 약속을 믿도록 하시기 위하여  징조를  보이신다.
그것은, 아하스의 일영표의 해 그림자가 나갔던 것이 뒤로 10도 물러가리라고 하신 것
인데 그것이 그대로 되었다.
   "일영표(日影票)" - 는 어떤 학자의 말대로 아하스 궁전에 어떤 계단(階段)에 이나
그늘로서 시간을 알도록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것은  사람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어떤 도구로서 어떤 그림자의 이동(移動)에 의하여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것은 그늘의 진도(進度)에 의하여 시간을  알도
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10도나 뒤로 물러간 것은 하나의  이
전이다. 이것은 마치 여호수아가 기도하여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도록" 한 것과 유
사(類似)한 것이다. (수 10:12-14).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징조를 주시는 일이 있었다(삿 6:36-40).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 속죄가 기도 응답을 성립시키는 것만큼, 기독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
히신 사실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또 그 신앙 때문에 기도 응답이 될 줄을 믿을 뿐이
다.

 

  사 38:9-11

  여기서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 나은 것을 감사하는 의미에서 기록한 글
을 보여준다. 10,11절은 병 중에 있는 그가 품엇던 유감(遺憾)을 회고(回顧)한다. (1)
그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 - 게 된다는 사실이니 곧, 별세(別世)한다는  사실이
다. 그러면 구약 시대 사람들은 다 오래 살기를 원하였던가? 그렇지 않다. 구약에서도
성도는 오래 사는 것보다 별세하여 하나님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을  오히려  찬송한다.
시 17:15, 116:15; 사 57:1, 2 참조.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어찌하여 여년이  빼앗기우
게 됨을 유감스럽게 여겼을까? 그 이유는, 11절 말씀이 설명하여 준다. (2) 그가 그렇
게 중년에 별세하면
   "생존 세계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곗" - 기 때문이다. 생존 세계에서 여
호와를 뵈옵는다는 것은 그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안심하리
만큼 좀더 완전하여 짐을 가리킨다. 성도가 별세하는 것은 좋으나 좀더 하나님으로 더
불어 참다운 교제가 있어 가지고 별세하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성도가 별세
하여 내세에 들어가서 주님으로 더불어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에 대한 안전  보
장으로서, 별세 전에 주님으로 더불어 사귄 생활이 확실하여야 한다. 히스기야에게 이
런 복된 교제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좀 더 큰 욕방이 있었다. (3)
   "세상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 이 말씀도 히스기야의  유
감을 표하나니 곧, 그가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로써 좀 더 다
른 사람들과 접촉을 가지려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하나의 여객과  같
으니, 그는 잠간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에게 최대 한도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사 38:12,13

  여기서는 히스기야가 병중에서 자기의 생명이 불원(不遠)에 떠날 것을  각오하였던
것을 회고(回顧)한다. 그 때 심리로 말하면, 자기의 별세할 것이 마치
  "목자의 장막을 갇음 같아" - 생각되었다. "장막"이란 것은 임시로  사용하는  막옥
(幕屋)인데, 자기의 육체의 생명은 그것과 같아서 그의 별세는 마치 일시 이용하던 장
막을 걷우어 가지고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혹은 그것이 마치 그 짜던
   "베를 걷어 마" - 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비유에 나타난 것은, 히스기
야의 육신 생명은 장막과 같으나 히스기야 자신은 영원히 존속(存續)한다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역시 그의 별세가 주님의 처분에 따라서 되어진다는 의미로,
   "주께서 나를 틀에서(베특) 끊으" - 실 것이라고 한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들여다
볼 것은, 우리의 생사(生死)를 하나님이 주장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끊
지 않으시는 생명을 끊을 자는 전연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
생명을 끊는 한(限)에 있어서는 그 어느순간에라고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믿게 되나니,
   "조석간에 마치리이다" - 라는 말씀이 그 뜻이다. "조석간에" 라는 말이 여기 두번
나온다(12끝, 13끝).
   "거쳐" - (12절 초두)라는 말은 육신 생명을 가리키고,
   "모든 뼈를 꺾" - 는다 함은, 히스기야가 그 질병으로 인하여 모든 뼈가  꺾이우듯
이 고통이 심한 것을 가리킨다.

 

  사 38:14

  히스기야는 여기서, 자기가 병중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부르짖은 사실을  보여준다.
곧, 그가
   "제비" - 나
   "학" - 이나
   "비둘기" - 같이 사람이 알아 듣지 못할 소리로 울부짖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극도
로 사정이 절박해지면, 말 못할 지경이 되어서 말을 이루지 못하면서 부르짖게  된다.
히스기야는 또한 하나님을 바라보되 안력(眼力)이 쇠할 정도로 하였다고 한다.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 곧, 그가 질병으로 압제를  당하
는 것 만큼, 자기를 도와주시며 위로하여 주시기를 구했다는 것이다.  "중보"란  말은
여기서 위로(慰勞)를 의미한다.

 

  사 38:15-17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아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영
혼의 고통을 인하여 내가 중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 주여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 있
고 내 심령의 생명도 은전히 거기 있아오니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
서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
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
다. - 히스기야는, 고난 때문에 울면서도 고난이 유익하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1)
그 고난이 주님 모리시게 온 것이 아닌 것만큼, 할말이 없다고 하면서 그는  순종한다
(15절 상반). 고난은 우연이 아니니 고난 당한 자는 주님께 부탁할 뿐이다, 만일 그가
원망하거나 불평하면 하나님과 변론함이 된다. 욥도 고난을 당하여 침룩  순종하였다.
욥 40:1-4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
자와 다루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
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라고 하였다. (2) 앞으로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겠다"고 한다(15절  하반).  죽을번한
병에서 나은 자는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며 새 생활을  하게  된다.  빼사
(Beza)와 같은 위대한 신자는 질병에서 건짐 받은 뒤에 더욱 훌륭하여 졌다. (3) 고난
이 진정한 살 길이라고, 그는 보았다(16절). 성경에 "종신토록 숙5가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했고(창 3:17), 또한 육체에 고난을 받으므로  죄를  그친다고도  했다(벧전
4:1). 사람이 평안하면 모든 악심에 사로잡힌다. (4) 고통은 진정한 평안을  주시려는
목적이라고도 하였고, 고통을 겸손히 당하면, 몸의 생명을 건지실 뿐  아니라  죄까지
사하여 주신다(17절). 그리하므로 영적 평안도 얻는다. 사죄 받은 행복이  얼마나  큰
가? 우리 하나님을 이렇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미 7:18에, "주와 같은 신이  어
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
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하였다.

 

  사 38:18-20

 여기서 히스기야는, 질병에서 구원 받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하게 됨을 감사
하게 여긴다.

 

  사 38:21,22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한뭉치 무화과" - 를 취하여서 종처에 붙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화과가 약이 되
어서 히스기야의 병을 낫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히스기야의 질병은 하나님의  권능
으로 고쳐진다고 벌써 위의 5절에서 말하였다. 그러면 무슨 목적으로 무화과를 종처에
붙였을까?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무화과는 종처에 해로운데도 불구하고  붙이라고
하였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낫게 하실때에는 그 종처가 낫지 못하도록 하여도 문
제 없이 낫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무화과로
종처를 낫게 하기 위하여 붙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치실
때에 의약(醫藥)을 의뢰하시지는 않으나 무시하시지도 않는다. 그가 의약을 내신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히스기야의 종처를 고치심에 있어서 무화과를  사용하신  것이, 그가 고쳐주시는 사실의 가치를 떨어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께서 무화과를 사용하시지 않고도 고치지 못하실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어느 의견을 취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히스기야의 말이,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뇨" -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가 병이 나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자 하면서 징조를 보기 원한 것이다. 이 말씀은 그가 이사야의 전하여 주는 하나님의 약속(5, 6)을 믿는데 도움이 되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 21,  22절은  순서적(順序的)으로  볼  때에  6절  다음에  있을  듯하나(왕하
20:7-11), 그렇게 되지 않고 이 귀절들(21, 22)이 본장 끝에 기록된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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