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이사야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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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32:1,2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또 그 사
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 여기 "보라"(*    )는 말은 장래에 될 일을  내
어다 보라는 뜻이다. 여기 "한 왕"은 히스기야를 의미하나, 먼 장래에 오실  그리스도
의 모형이다. 이 부분 말씀(1-5)은 메시야 시대의 일 밖에 다른 것을 가리킨다고 하기
에는 불가능하다(Ridderbos, del geheele teekening van vs. 1-5 van dien aard,  dat
ze moeilijk op iets anders  dan op het Messiaansche tijdperk kan zien;en dan  is
dus de koning van vs. 1 de Messias). 여기 있는 말씀은, 위에 관설된 왕에 대한  비
유인데 그가 민중(民衆)의 보호자요 구원자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에
게 적합한 묘사이지만 그의 모형인 히스기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세상  임금들은,
흔히 백성을 압제하는 "광풍", "폭우", "마른 땅", "곤비한 땅"과 같다고 할 수  있는
학정(虐政)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선한 임금 히스기야는 그런 학정에서  백성
을 건져 낼 것이다. 특별히 이와 같은 선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특별히 "그  사
람"(*      )이란 말은, 개인을 가리키는 뜻으로서 메시야를 힘있게 지적하는  것이다
(Alexander).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라는 것은, 사막 지방의 여행자를  생각케
한다. 그 메마른 땅, 뜨거운 날 여행자에게 있어서 더위를 피하게 하는  바위  그늘은
말할 수 없이 반가운 것이다.

 

  시 32:3,4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조급한  자
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 이  두
귀절은 신령한 은혜 곧, 하나님을 알게 되는 지혜와 및 그 전파에 대하여 말한다.  사
람들에게 먼저 있어야 될 것은 신령한 은혜이다(마 6:33). 그들을 바로 지도하는 정치
가 시행(施行)되는 곳에는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 귀한 은혜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된다.
   "보는 자"(*        =로임)라는 말은 선지자를 의미한다는 학설이 있으나,  그보다
도 일반인(一般人)을 의미한다고 함이 옳다(Alexander).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마음눈
이 밝아져서("감기지 않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진"다 함은,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순종한다는 의미이다. "조급한 자"(*    
       =님하림)는 미련한 자라고도 번역된다. 그 이유는, 조급한  자는  부주의하며,
부주의하는 자는 결국 어리석기 때문이다.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 아는  지식을
깨닫게 되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
명히 할 것이라" 함은, 어떤 특종(特種)의 어눌한 자에 대하여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대하여 말할 줄 모르는 일반 인류를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든지 죄로  어
두워져서 하나님에게 대하여 확신 있게 말할 줄 모른다. 그러나 메시야 시대에는 하나
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확신 있게 말하게 되어진다. 그
렇게 되어진 혀는, "불의 혀"로 비유된다(행 2:3). 진정한 기독교인일수록 하나님에게
대하여 할 말이 많으며, 그들의 세계에서 사실상 죄인들을 살리는 말이  강수(江水)와
같이 흘러 나온다.

 

  사 32:5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칭하지 아니하겠고 궤휼한 자를 다시 정대하다  말하
지 아니하리니 - 의로운 정치가 실시되는 세계에는 사람이 바로 등용된다. 그러나  불
의한 정치가는, 공의를 중심하지 않고 자기를 중심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
들만을 옳게 보고 등용한다. 아첨하는 자들은 실상 "어리석은 자"요 "궤휼한 자"이다.
그 이유는, 아첨하는 자는 자기와 및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옳은 말을 버리고 자
기와 남들을 망케 할 거짓말로 자기 위에 있는 군왕들을 속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리스도의 복음대로 사는 세계에는 국가의 질서도 공정하게 성립된다. 그 이유는, 그리
스도의 복음처럼 불의를 시정(是正)시킬만한 광명과 순결을 제공하는 것이 다시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세계에서도 부정과 불의가 성행(盛行)하는  원인은,  거기
집권(執權)하는 신자들이 사실상 외식(外飾)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
이 집권하고도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하면, 그 집권자들의 죄가 큰 것이다. 우리  본
문에 이렇게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공정할 것을 말함은, 의미 심장하다. 그 이유는,
의로운 정치 라는 것은 사람을 바로 등용하는데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바로 등용하는 것이 선정(善政)의 열쇠이다.

 

  사 32:6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의로운 임금이 "어리석은"자와 궤휼한  자를
등용하지 않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것은 이렇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연출시
키나니(어리석은 것을 말함) 곧, 그 마음에 품은 불의를 간사하게  행함이다.  "간사"
혹은 거짓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 자신도  속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여호와를 거스린다. 거짓된 자는 언제나 참이신 하나님과 반대
된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을 불
쌍히 여기는 사랑은 참된 경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는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한다. 곧, 주린자의 생명("심령"이라는 히브리 원어 네페쉬=*    
는 생명도 의미함)을 먹여 살려 주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양식을 빼앗아 간다.  "목마
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한다는 말씀도 역시 이 뜻이다.

 

  사 32:7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빈핍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찌라도 그리함이어니와 - "궤휼한 자"도 위에 관설된(1절)
의로운 임금에게 등용되지 못하는(5절) 이유가, 여기 진술된다. 그들은  악한  계획과
거짓된 말로 가련한 자 곧, 세력 없는 자를 망케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재판을 공
정하게 하지 않나니, 가련한 자 곧, 빈핍한 자의 옳은 말이라도 들어주지 않는다.

 

  사 32:8

  "고명한 자"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나디-브(*        )이니 관후(寬厚) 곧,  남들
을 봉사하기 좋아하는 정신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말(言)로  출세하는  자들이
아니고, "고명한 일에 서리라" 곧, 존귀한 봉사의 실천으로 의로운 임금에게  임용(任
用)된다("서리라"). 이렇게 되는 것이 메시야 시대에 있을 참된 교회의 현상이다. 곧,
신약 시대에 참된 봉사자가 교회의 선정(善政)에 채용됨과 같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선한 일을 하는 자가 자동적으로 직분을 가지도록 되어야 한다. 딤전 3:1에 말하기를,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라고 하였다.

 

  사 32:9-14

  이 부분 말씀은 안일주의(安逸主義)를 경고하심이다. 여기(9절) "부녀들"(*       
=나쉼)이라는 말은, 도시(都市)들을 비유한다고 하지만, 문자 그대로 여자들이다.  여
자들은 특별히 "안일"을 위주하는 죄가 많다. 마르티의 신학 체계는 우리가 받지 않으
나,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의견은 일고(一考)를 요한다. 그는 말하기를, "이 부분 말씀
이 안일주의를 경계하는데, 여자들이, 그 죄악을 특징으로 한 세속주의자들의  대표이
다. 세속 주의자들은 거짓된 안전감(安全感)을 가지고 심판을 믿지  않는다"(K.Marti.
Sie gehoren  wohl  zu  den  Weltmenschen,  Ps.123:4,die  in  ihr  vermeinlichen,
Sicherheit an das Kommen des Gerichtes nicht glauben.-Hand Commentar, III.p.234)
라고 하였다.
   선지자들이 특별히 여자들을 지명(指名)하여 경고한 이유는, (1)여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받는데 책임감을 못느끼는 까닭이다. 선지자가 가르친 모든 다른  경계도
그들(여자들)을 상대하지 않은바 아니지만, 그들은 그것을 남자들만 책임지고  들어야
될 듯이 잘못 생각하는 일이 많다. 그들은 교회 일에나 사회 일에 있어서  무책임하게
지내는 일이 너무 많다. (2)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에 있어서 남자를  의
지하고 피하는 일이 많은 까닭이다. 그들은 남자들보다 더욱 안일주의를 즐긴다.
   9-14절에, "안일"이라는 말고 "염려 없는"이란 말이 모두 다섯번이나  사용되었다.
이사야 때의 여자들이 이 세상 안일을 좋아하며 또 거기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 하였
던 것이다. 이사야는 그들더러 그것을 회개하라고 한다. 과연, (1)이  세상을  즐기는
안일 주의는, 모든 악덕(惡德) 곧, 거짓과 외식과 교만의 온상(溫床)이다. 거짓도  하
나님의 원수요, 외식도 그러하고, 교만도 또한 그렇다. 사람은 괴로워서 망하는  것보
다 안일하여 망하는 일이 더 많다. (2)이 세상을 즐기는 안일주의는 사람의 마음을 빼
앗아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마음에서부터 그를 믿어 드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롬 10:10에 말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라고 한다.  여
기 "마음"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칼디아(*            )이니 그것은  애정(愛情)의
근원되는 부분이다. 스펄죤은 말하기를, "마음을 빼앗는 자가 그 사람을 빼앗은  것이
다" 하였고, 또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지어 주신 바니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했다(Choice Sermon Notes,p.56). 잠 23:26에 말하기를, "내 아들아 네  마음
을 내게 주며"라고 하였고, 마 22:37에는 말하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우
리의 마음을 원하심은 그의 사랑이다. 우리 같이 낮은 자들의 사랑을 구하시는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표이다. 그런 사랑은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사랑이다.  하나
님은 우리 신자들의 마음을 원하신다. 그러나 안일 주의자는 실상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보다 더 함"이다(딤후 3:4). 사실상 쾌락이란 것은 언제나 위험하니 사람을 그
런 범죄의 자리 곧,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자리로  끌어간
다. 딤전 5:6에 말하기를,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하였다. 그
러므로 안일은 고난보다 위태하다.
   안일한 자들의 살 길은,
   (1)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9절) 떨며 베로 허리를 동이고 회개함이다(11,12).  이
것은 범한 죄에 대하여 심히 아프게 여겨 슬퍼함이다. 성경에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
였으니(롬 6:23), 죄를 회개하며 떠나는 자는 죄를 죽음과 같이 추하게 보며, 또 그것
과 같이 있음을 죽음과 같이 꺼려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자는 생각하기를, "나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심리 고통(心理苦痛)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떤
죄악을 범한것에 대하여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자기가 범한 어떤 죄악에  대하여는
고통을 못느낀다. 그 이유는, 물론 그가 그 죄악의 불의함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가 알아야 할 것은, 그가 그런 죄악에 대하여 슬퍼하지 못하는 것
이 잘못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범죄한 일에 대하여 슬퍼해야 된다. 그것이 회개이
다. 성경은 회개를 가리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케 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슬퍼함"을 이름이다.
   (2)이사야는 그들의 회개를 촉구(促求)하되 그들로 하여금 장래의 환난을 생각하여
회개하라고 한다. 사람은 현재 받은 은혜도 못느끼지만 장래의 심판도 인식할 줄 모른
다. 그러므로 그는, 유다 나라의 당할 심판과 환난이 어떻게 비참할 것을 자세히 진술
한다. 곧, "포도 수확이 없"을 것(10,12), 국토와 성읍이 페허 같이 될 것이라고 한다
(13,14). 사람은, 자기 죄 값으로 앞날에 환난이 올 것을 내어다 보고, 떨며 회개해야
된다. 짐승은 현재의 쾌락으로 안심하나 인간은 미래의 화복(禍福)에 관심이 많다. 사
람이 죄 값으로 당할 미래의 참상을 눈 앞에 놓고 본다면 회개하지 않으랴  ?  미래는
너무도 중대하다. 심판을 내어다 본 촬스 피니(Charles Finny)는 하루 종일 산중에 들
어가 기도하고 큰 은혜를 받았다. "심판이 사실이라면 런던 거리의 구석구석을 기어다
니면서라도 전도하겠다"고, 어떤 무신론자가 말할 때에, 윌리암  부드(Wim.  Booth)는
그  말을  듣고  전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유명한  눈물의  전도자  맥쉐인(Murray
McCheyne)은, 사람들에게 흠잡힐 것 없었던 경건한 사람으로서 학교에 갔다가  자기의
경건한 형님의 부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형의 시체를 혼자 들여다  보고
생각하기를, "내가 저렇게 되었으면 내 영혼이 어디 갔을까 ? 멸망하였을 것이다"하고
그 때부터 결심하고 자기의 경건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만
의지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사 32: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
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 이 말씀은, 앗수르의 침략이 지나간 후 유다  나
라에 임할 복지 사회(福祉社會)의 건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나(진정한 복지사회는
성령님의 힘으로야 됨), 그보다도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뒤따라 임할 오순절(五
旬節) 성령님의 사역을 가리킨 듯하다. "위에서 부터"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밈마롬
(*          )이니, "높은데서부터"(하늘에서부터)를 의미한다. 성령님을 물붓듯이 붓
는다는 사상은 성령님을 물로 비유함에서  채용되는  표현이다(사  44:3;겔  39:29;욜
2:28;눅 11:13).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는 말씀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의 종교 윤리가 크게 변동될 것을 가리킨
다. 광야 같이 열매 없던 층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리어 아름다운  밭
과 같이 열매 많은 신자가 되고, 아름다운 밭과 같이 열매 많은 신자들은 그 이상  더
좋아져서 삼림과 같이 우거질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신령한 은혜의  사
역이 어떻게 고도(高度)에 이를 것을 보여준다.

 

  사 32:16-18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
는 곳에 있으려니와 - 이 부분에 "공평"(*        =미쉬파트)이라는 말과 "의"(*     
=체테크)라는 말이 모두 네번 나온다. 이것은  이  시대(그리스도의  시대)의  터전이
"의"(義) 곧, 그리스도의 공로(功勞)일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를
터전으로 하고 성립되는 것이니(롬 3:26), 믿음으로 그 의를 받는 자들이, 그 일을 전
연 받지 못하였던 광야 같이 열매 없는 죄인들에게도 있고, 또한 그 의를  벌써  받은
자들("아름다운 밭")도 더 풍성히 받도록 되어 있다(요 10:10).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받은 세계에는 "화평", "안전", "안식"이 소유되어 진다.
우리에게 있는 영적 평안이 곧, 그것이다.


  사 32:19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 이것은 이사야에게 흔히  있는 사상인데 곧, 택한 백성이 받는 축복에 앞서 그들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먼저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수난(受難)하고 그 뒤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한다.

  사 32:20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  이것은 앗수르 침략이 지니간 후에 유대인들이 평안히 농사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평화의 상징으로서 실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들의 영적 생활  상태를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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