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이사야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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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22:1

  "이상 골짜기"는, 이상(異常)과 묵시(默示)로 많이 가르침이 되던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킨다. 이런 도시도 그 받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된다. 그보다도,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는 원리가 "이상  골짜기"에  실현될
수 밖에 없다. 눅 12:47,48에 말하기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
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
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
이니라"고 하였다. "경고"란 말에 대하여는 13:1에 있는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지붕에 올라감"은 피난하기 위한 것이다.

 

  사 22:2,3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은 역시 예루살렘을 가리키는데 그  도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향락주의로 흘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거기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여 많은 사람이 전쟁 포로가 되리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본문에  말하기
를,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것도 아니요...결박을 당하였고"라 한다.  여기
사용된 과거사, 곧, "도망하였다...결박을 당하였고"는 미래 사건의 확실성을  표시하
기 위한 것이다. 일설에 이것은, 바벧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에 이루어질  것
이라고하나(왕하 25:4;렘 39:4;애 4:17-20), 그보다도 예루살렘에 대한 앗수르의 침략
을 예언한 듯하다.

 

  사 22:4

  이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찌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찌니라 - 이 말씀은  선지자가
유대 민족이 패망하는 것을 보고 친히 슬퍼하는 것이다.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함
은, 자기의 슬픔을 보존시키기 위함이다. 그는 슬픔이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만류
(挽留)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그만큼  슬픔을  계속시키고자   한다.   렘
13:17,14:17;애 1:16,2:11;미 1:8,9 참조.
   참된 전도자는 남들의 불행에 대하여 슬픔을 가장 많이 느끼는 자이다. 보다도  그
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거룩한 백성이 불행을 당할 때에 견딜 수 없이 슬
퍼한다(롬 9:1-3). "내 딸 백성"이라는 말은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리하는 처지에서 하
나님 백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비참한 전쟁을 당할 백성은 그(선지자)의 정서(情緖)
를 일으킬 연약한 여성(女性)과 같이 생각되었다. 곧, 백성을 "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백성의 연약하고 가련한 처지를 생각케 하는 것이다.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
찌니라"고 한 것은, 선지자가 패망하여 가는 유대 민족을 향하여 슬픔을 금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사 22:5-7

  "이상의 골짜기"란 말에 대하여는 1절에서 설명한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여
기서도 이 전쟁의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의미에서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이르
는 분요와 밟힘과 혼란의 날"이라고 하였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라는 말의 히브
리어(*                              )는, "주 만군의 여호와께 속하는"이라고  번역
해야 된다. 이것은 물론 그 환난의 날이 여호와의 정하신 것임을 이름이다.  땅  위의
사람들이 이런 큰 사건을 우연한 것으로 돌리고 단지 죽는 것만을 두려워하는  생각에
서, 살기 위하여서는 범죄하는 것도 기탄 없이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
은 마땅히 그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되는 줄 알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생각으로 범사에 대처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회개
와 신앙으로 산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와 같은 전쟁 때에 있을 수 있는 모든 두려운 현상을  거듭거듭
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해야 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두려운  현상들이
하나님에게서 유래(由來)되었으니 만큼(5절 상반절), 그것들을 인하여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여기 보여주는 두려운 현상들은,  "분요...밟힘...혼
란...무너뜨림...부르짖는 소리...전통을 졌고 병거 탄 자와 마병...방패를 드러냄...
병거는...골짜기에 가득함...마병은 성문에 정렬(整列)됨"과 같은  것이다.  "엘람"은
바사를 가리키고, "기르"는 메대를 가리키는데 다 함께  앗수르의  속방(屬邦)이었다.
유다를 대적하는 앗수르의 군사 행동에 있어서 이런 속방 사람들도 가담하게 될  것이
다.

 

  사 22:8-11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곧, 하나님께서 유다의  요새지(要塞地=히브
리 원어 마삭(*      )은 "덮였던 것"이라고 번역되었음)를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빼앗
기도록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달리 해석하여 말하기를, 하나
님께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약점을 보게 하였다는 뜻, 혹은 앗수르  사람들이
유대의 처녀들을 욕보이도록 두셨다는 의미라고 한다. 어쨌든 이것은 유대인들로 하여
금 최후를 각오하고 나서도록 하는 어떤 견딜 수 없는 사건이다.
   "수풀 곳간의 병기"는 솔로몬왕이 시설한 병기 창고이다(왕상 7:2). 그것을  "바라
본"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무력(武力)을 바라본데 대하여  섭
섭히 생각한 말씀이다. 이 아래 말씀들도 역시 그와 같은 섭섭한 마음으로  진술된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는 않고 인간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수비(守備)하려 한
다는 것이다. "너희가 아래 못의 물도 모으며". 곧, 저희가 물을 아래 못으로 인수(引
水)하여 성 안에서 급수량(給水量)이 부족하지 않도록 마련함이다. "아래 못"은  야파
(Jafa)문 가까이 있는 골짜기 아래쪽 못을 가리킨다(대하 32:4). "또 예루살렘의 가옥
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 곧, 그들이 적병을 막기  위하여
가옥을 헐어서까지 건축 재료를 취하여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리라는 것이다.  "너희가
또 옛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여기  "옛못"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어 오는 아래 못을 가리킨 듯하다. "두 성벽 사이"라는 것은  성
안에 벽을 다시 쌓아 만든 간격(間隔)을 가리켰다.
   위의 모든 수비 행위(守備行爲)는 침략을 당한 민족으로서 취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 행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겠다. 그러나 우리 본문이 밝히 가르쳐 준 것과 같이
(11절 하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대신 저런 수비 행위를 철석 같이
믿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흔히 하나님보다도 눈 앞
에 보이는 인간적 수단 방법만 전적으로 의지하기 쉬운 것이다. 이  때에  유대인들이
그런 과오에 빠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그러나  너희
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이른바, "이 일을 하신 자"라는 말은, "그 환난을 보
내신 이"라는 뜻이다.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란 말에 있어서  "옛적부터"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메라코크(*          )이니, "먼 거리에서부터"라는 뜻이다. 곧,  사람
이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멀리서 그 환난을 경영하여 보내신 듯이 보내신다는  뜻이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멀리 계신바 아니나, 사람들은 그가 멀리 계신  듯이
부주의하고 문제시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그와  같은
실수를 미리 경고한다.
   사람들이 환난 중에서는 환난을 보내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시 50:15에  말
하기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
고 하였다.

 

  사 22:15-18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는 그 때에 유다 나라를 해롭게 하는 간신(奸臣) 셉나를 꾸짖
는다. "셉나"는 일설에 친애굽주의자 라고도 하고, 또 혹은 앗수르에 아첨하는 자라고
한다. 어쨌든 그는 외국 세력을 믿고 유대 나라의 당면한 환난을 문제시 하지 않는 간
신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에게 대한 이사야의 책망하고 지적한 죄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곧,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
여 묘실을 팠느냐"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셉나가 묘실을 판 그 곳에 관계할만한 아무
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 곳은 생각건대 왕족들이 묻히우는 곳인듯한데 간신 셉나
는 거기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셉나는 자기를 위하여 거기에 묘실을  파
고 왕과 같이 잘 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그런 자의 계획과는 정반대로 외국으로 추방하실 것이다. 17,18절은  그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나 민족을 상대하고 예언하실 뿐 아니고 이렇게 개인에 대해서도
자세한 계획을 가지시고 예언하셨다. 그는, 모든 개인의 장래도 하나하나 수중에 잡으
시고 계획하시며 경영하시며 처사하신다. 그는 단체의 하나님이 되실 뿐 아니라  개인
의 하나님도 되신다.

 

  사 22:19-22

  간신 셉나는 그 지위에서 쫓겨나고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 대리로 거기 서게 된
다.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한다는 것은  그에게  직권
(職權)을 준다는 것이다. "유다 집의 아비"란 것은 유다 민족의  보호자를  의미한다.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함은 그의 권세가 그 나라에서 최고
인 것을 가리킨다. 물론 그의 위에는 임금이 있겠으나 그의 맡은 권세가 이렇게  크다
는 뜻이다.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곧, 그의 가문에 제일  가
는 영광의 소유자가 되리라는 뜻이다.

  사 22:24,25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곧, 그의 가문(家門)의 영광은  엘리아김 자신이라는 뜻이다.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 "종지"는  장종지 같은 작은 그릇이다. 여기서 "종지"와 "항아리"를 가지고 엘리아김의 가문의 모든  작은 인물들을 비유한다. 그러면 이 귀절에서 가르치는 것은, 엘리아김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됨에 따라 그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둘러 붙어서 뜯어 먹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그의 지위는 사리사복(私利私服)을 위하는 편으로 기울어져서 그도 역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나니 아래 귀절이 그것을 밝힌다. 곧,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간신 셉나도 유다 나라에 해로운 사람이었으나, 처음에 충성스러웠던 엘리아김도 후에 타락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이것을 보면,  권세라는  것이 사람을 변질(變質)시켜 화를 받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권세를 받은 자는 엷은 어름 위를 걷는 듯이 조심하여야 된다(如履簿永). 그러므로 옛날의 어떤 성인(聖人)들은 권세 받기를 회피하였다. 옛날에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천하를  맡으라는 요임금의 말을 듣고 귀가 더러워졌다고 하여 시내에서 귀를 씻고 있었다. 그  때에 소부(巢父)라는 사람이 소를 끌고 와서 소에게 물을 먹이려 하다가 귀를 씻는  이유를 물었다. 허유가 그 사유(事由)를 말하니, 소부는 그런 더러운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이지 않겠다고 하여 상류로 가서 물을 먹였다. 그 때에 시냇물 주인이 와서  그  사유를 듣고 시냇물이 더러워졌다고 하여 오아수(汚我水)라고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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