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이사야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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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10:1,2

  이 귀절들은 유다 나라의 재판장들과 관원들의 불의를 지적한다. 그들은,  (1)노골
적으로 불의한 법령을 제정함(1절). (2)실제로 재판할 때에 배후 세력(背後勢力) 없는
불쌍한 자들을 억울하게 하며 착취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련한 자들을 누구보다도
도와 주시는데, 저희는 그와 반대로 이들을 억울하게 하니 하나님이 진노하실 수 밖에
없다.

 

  사 10:3,4

   "멀리서 오는 환난"은, 앗수르가 먼 거리에서 내침(來侵)할 것을 염두에 둔 말씀이
다. 이것은, 그 윗말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이 무엇임을 해석한  것이다.  "벌하시는
날"(*              =욤 페쿠따)은, "찾아옴(Visit)의 날"을 의미하나니 곧, 이스라엘
을 벌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날을 가리킨다.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
냐". "영화"라는 말은, 유다 민족의 지도자들이 쌓아 둔 보화나 재물을 가리킨다.  그
들은 필경 사로잡혀 가며 전쟁에서 비참스럽게 죽을 것이다(4절).
   여기 "구푸리며"란 말의 히브리 원어(*      =카라)는 단수 동사(單數動詞)로서 많
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통털어 말하면서 그들을 업신여기는 어법이다(Delitzsch).

 

  사 10:5,6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의 분수를 알았어야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
기의 사랑하시는 백성에 대하여 노하시기도 하시고, 탈취와 노략을 당하게도  하시며,
심지어 진흙 같이 짓밟히우게도 하신다. 그것은 은(銀)에 찌끼가 섞여 있을 때에 그것
을 불도가니에 녹여서 연단하여야 됨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백성을  연단
하시기 위하여 앗수르를 몽둥이로 쓰시기 원하셨다. 그런데 앗수르는 이 뜻을 알지 못
하고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가졌으니 그것이 교만이다. 다음 귀절 말씀을 보아라.

 

  사 10:7

   앗수르는, 침략주의(侵略主義)를 가지고 얼마든지 다른 나라들을  취하려고  한다.
나라든지 개인이든지 탐심 때문에 자기의 분수를 넘어가면서 죄를 범한다. 다윗은  이
와 같은 탐심을 경계하였다(시 131:1-3).

 

  사 10:8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 앗수르는 만왕의 왕으로  자처한다.  그
나라가 억지로 다른 나라들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 나라들을 압제하는  것이요,  그
나라들이 진정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1)남을 억지로 주장하는
죄악이며, (2)자기도 사람 뿐이고 사람보다 높지 못함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오
직 하나님만이 사람보다 높으시다.

 

  사 10: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
섹과 같지 아니하냐 - "갈로"는 시날땅(바벧론이 자리  잡은  땅)에  있는  도시요(창
10:10), "갈그미스"는 유브라데강 위에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하맛"은 수리아의  도
시인데 오론테스(Orontes)강 가에 있었다. "아르밧"은 "하맛"에서  멀지  않았다(왕하
18:34). "사마리아"는 북국 이스라엘의 도성이었고,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首都)
였다.
   그러면 앗수르가 이 도시들을 가리켜 저렇게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 그것은,  아
무리 저 강한 도시들이라도 다 마찬가지로 저희 힘으로 정복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앗수르는 이렇게 자기 힘을 가리켜 무적(無敵)의 것이라고 호언 장담(豪言壯談)한다.

 

  사 10:10,11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
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 이 말은, 랍사게가 히스기야와  유대인을  모욕한
말과 비슷하다(사 36:18-20;왕하 19:12). 이 말 가운데는 두 가지 외람된 사상이 나타
났으니, (1)그 자신이 모든 신들보다 우수하다는 것, (2)참된 신(神)과  거짓된  신을
혼동한 것이다. 이렇게 교만한 것은 누구에게든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언
제나 자기를 내세운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믿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참된
신(神) 곧,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섬기지 않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한다
(빌 3:19). 가령 신자들이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을  제물(祭物)
답게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행위이니, 그들은 물질
을 섬기는 자와 같다(마 6:24). 이렇게 그들은 물질을 하나님과 혼동한다. 블레셋  사
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곤 신당에 두었을 때에 그들이 받은 재앙이 얼마나 컸던가?
삼상 5장 참조.

 

  사 10:12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
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 이 말씀 뜻은, 하나님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곧, 유다)을 벌하신 뒤에도(1-4절 참조), "앗수르"를 벌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하여 유다를 벌하셨으나, 앗수르가 그 벌을 시행하는  도구(道
具)로 사용되는 동안 교만해졌으므로 그 자신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된다. 비록  하
나님에게 사용되는 자라도 교만하면 별 수 없이 벌을 받는다.

 

  사 10:13,14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교만을 벌하시겠다고 하시면서 그의 교만이 어떠
함을 다시 진술한다.
   (1)그 교만의 한 방면은 그의 말에, "나"라는 말(혹은 "내")이 다섯번이나  나타난
것이다. 교만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며, "나"라는 것 밖에 모른다. 사람이 자기 자신
을 주장하는 동안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잘못된다. 사해(死海)는 왜 사해인가 ?
그것은 물을 받기만 하고 흘러 내어 보내지 않는 개인 주의(個人主義)의 표상(表象)이
다. 따라서 생명이 없고 그 바다에는 염분(鹽分)이 너무 많아서 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는 "나"라는 것을 버려야 참으로 산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다.
   (2)그가 약한 나라들의 재산을 용이하게 탈취한 행위를 자랑함. 그가 약한  나라들
의 재물을 탈취하기를 새의 보금자리를 취하듯 했다고 한다(14절). 곧, 그가 취하여도
대항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사람이 새의 보금자리에서 알을 취할 때에 어미새가 대
항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앗수르 왕의 권력은 강하여 그 때의 소약국(少弱國)들이  대
항할 수 없었다. 앗수르 왕은 저렇게 침략의 죄를 지으면서 도리어  그것을  자랑하였
다. 약자들을 압박하면서 자랑하는 것은, 잔인성을 겸한 교만이다.
   13절 끝에 있는 "용감한 자"(아삐르=*        )는 황소(Bull)를  의미하는데  그것
은, 앗수르에 있어서 충성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국가의 유력한 인물들을 가리
켰다. 뚬(Duhm)은 이것을 재라는 뜻을 가진 말로 읽고 여기서 앗수르 왕이 열국의  도
시들을 재와 같이 함락시켰다고 말한다고 생각했다(Ich liess niedersinken in  Asche
die Stadte...). 그러나 이것은 억해(臆解)이다.

 

  사 10: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 이 말씀은, 앗수르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이 얼마나  어리석
음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가르친다. 하나님께 사용되는 도구(道具)는 언제나 수동 상태
(受動狀態)에 있으며 그와 같은 상태를 면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도구가,
제 스스로 동작이나 하는 듯이 생각함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언제든지 교만이란 것은
겸하여 어리석음이다. 그 죄악은, 너무도 그것이 진리에서 탈선된 것이기 때문에 멸망
을 초래(招來)하기에 급한 것이다. 잠 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
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였고, 잠 11:2에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라고  했
으며, 잠 29:23에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라 하였다.

 

  사 10;16-19

  이 귀절들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어떻게 멸절시키실 것을  비유로  말한다.  곧,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영화"로운 것이 화재를 만난 듯이 잘못 되리라고 한다
(16절). "파리하게 하시며"란 말(*                   =예솰라크...라존)은,  폐병(肺
病)을 보내시겠다는 뜻이다(레 26:16;신 28:22). 그리고 "영화"는, 히브리 원어로  카
보드(*      )인데,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앗수르의 군대를 가리킨다고 하나, 이것은,
앗수르의 모든 자랑 거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빛"과 같아서
그들을 형통하게 하시는 반면에 앗수르에게는 "불꽃"과 같아서 저희를 소멸시키시겠다
고 하신다(17절). "형극과 질려" 곧, 그들의 하류 계급(下流階級)도 불타 소멸되지만,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 곧, 상류 계급(上流階級)도 쇠멸(衰滅)하리라고 한다.  그
리고 그 "소멸"되는 정형은, (1)병인(病人)이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18절)임.
(2)"삼림(森林)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稀少)하여"진 것과 같음(19절). 산헤립의 군
대 18만 5천명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왔다가  모두  다  죽었으니(사  37:36;왕하
19:35), 돌아간 자들이 없었다.

 

  사 10:20,21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파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한
명칭이다.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유다 민족 중에 이제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과거에 범하던 죄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이 귀한 일이다. 하나님 밖에 다른 것(앗수르)을 의지하다가 형
벌을 받았으니(10:1-4), 어찌 그것을 더 믿으랴 ?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 밖에  무엇
이든지 의지하면, 반드시 의지했던 그것 때문에 실패를 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로서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의지한다는 것은 애당초 거절해야 된다. 그것을 의뢰하다가 그
것 때문에 해를 당한 경우(으례 해를 당하는 법임), 그것을 다시금  의뢰한다는  것은
물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해야 된다.

 

  사 10: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
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로 임하기는 하나, 택한 백성들만
이 그것에 참예하고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멸망한다는 진리가 여기 명백
히 나타났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자랑하는 외식자들로 하여금 그런 어리
석은 자신(自信)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환난 중에서 오래 참아 기다리게 한다(Calvin).

 

  사 10:23

  이 귀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완전히 이루시고야  만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가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의 멍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앗수르를 멸절하시기로 정하셨다는 말이라고 한다.

 

  사 10:24-27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더러 "앗수르"의 침해를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앗수르"도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거꾸러지겠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렇게  거꾸러지
기는 다음과 같이 된다. (1)하나님께서 그의 분노를 이스라엘에게서 앗수르에게로  옮
기심(25절). 하나님은 공정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죄인들을 벌하시되, 그 시벌(施
罰)하는 자들이 과도히 그들을 괴롭게 하면, 그는 그의 분(忿)을 그 시벌하는 자들 측
으로 옮기신다. 이 사실을 누구든지 두려워해야 한다. 잠 24:17,18에  말하기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
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고
하였다. 잠 17:5에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하
였다. (2)유다 민족을 억울하게 한 앗수르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에 의하여 징벌을
받음(26절). 그렇게 됨이 이스라엘의 침략자  "미디안"  족속의  당한  일과  같고(삿
7:25), "애굽"이 당한 것과 같다. (3)"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짐"(27절). 앗수르가
유다 민족에게 종으로 삼는 멍에를 씌우나, 유다 민족은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
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그 멍에가 부러진다.

 

  사 10:28-31

  이 귀절들은 앗수르 나라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해 들어오는 광경을  말한다.  그
군대가 저렇게 접근(接近)할찌라도, 필경은 하나님의 간섭  때문에  패망한다고  한다
(33,34).
   "아얏"은 예루살렘 동북에 있는 "아이"라는 땅이고(수 7:2), "미그론"은  벧엘에서
8분 동안 걸으면 도착되는 "벌그마그란"과 같다(Delitzsch).
   "믹마스"는 예루살렘 동북쪽으로 9마일 거리에 있다. "치중을 머무르"게 함은,  차
량(車輛)을 머무르게 한다는 뜻이다. "게바"는 "믹마스" 아래있고, "라마"는 "게바"와
"기브아" 사이에 있다. "사울의 기브아"라는 곳은, 사울의 출생지 "기브아"라는  뜻이다(삼상 11:4,15:34;삼하 21:6). "갈림"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데 그것을 "딸"이라고 한 이유는, 그곳이 아름다운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Barnes).  삼상  25:44  참조. "라이사"는 예루살렘 부근에 있고(1 Mac.IX.9), "아나돗"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한  시간 15분 쯤 걸으면 발견된다(수 21:18). "맛메나...게빔"은 어느 곳인지 알기 어렵고, "놉"은 예루살렘 동북쪽으로 감람산맥(橄欖山脈)에 있다. "손을 흔들리"라 함은, 예루살렘을 쉽게 정복할 수 있다는 표시이다.

  사 10:33,34
  이 귀절들은 앗수르로 말미암아 유다 나라가  황폐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하나
(Calvin), 그보다도 앗수르 군대가, 삼림의 나무들이 찍히우듯이 여호와의 권능에  의하여 파멸될 것(사 37:36)을 가리킨다(J.A.Alex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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