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1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웃시야왕"은 유다 왕 중에 비교적 정치를 잘 한 군주로서 52년
간 다스렸다. 그는, 주전 758년에 죽었는데 그 해가 바로 로마 제국의 창립자 로물러
스(Romulus)가 출생한 해라고 한다. 웃시야왕이 죽은 해부터 유다의 국세(國勢)는 쇠
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때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으니 그 의의(意義)는 무엇인가 ? 그것은 유대인들이 바라보던 인간 왕 웃시야는
죽었다 할찌라도 여호와는 살아 계시어 통치하시니 걱정 없다는 위로의 의미를 가진다
고 할 수 있다. 시 11:3,4을 보면, 말하기를,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여
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
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요 12:41). 그가 "높이 들린 보
좌에 앉으셨"으니 왕이고,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으니 그는 대제사장이시다. 다
시 말하면, 그는 제사장 겸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 겸 왕으로 예언한 성구
는 특별히 시 110편이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될 제사장이었는데 멜리세덱은
실상 그와 같이 두 직분을 겸한 분이었다(창 14:18-20).
신자들이 주님을 왕으로 높이지 않으면 그를 도무지 높이지 않음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마귀의 하고 싶어하는 대로 순
종할 자가 아니니 복되다. 마귀는 현재에 좋은 것으로 꾀이나 실상은 속이는것 뿐이고
장래에는 죄와 사망(지옥)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자아(自我)를 왕으로 삼고 그 하고
싶은 대로 순종해도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 왕이시며 그는 우리에게 영원토록 유익할
것을 명하신다. 그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이고, 세상 임금처럼
백성을 자기의 노예로 이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검으로써 왕노릇 하지 않고 십자
가의 속죄적 희생으로 왕노릇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높
여 순종하노라고 하지만 그의 명령 중에서 우리 마음에 맞는 일에만 순종한다면 그것
은 아직 "나"자신에게 순종하는 정도이다.
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
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 "스랍"이란 말은 불탄다는 뜻인데 불은 성경
에서 주님의 성결을 의미한다. 히 12:29에 말하기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
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이른바 "소멸"한다함은 죄를 소멸하신다는 뜻이다. "스랍들"
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근위(近衛) 천사들로서 저렇게 불타는 성결을 소유하였다.
그들은 저렇게 하나님에게서 유래되는 성결을 가졌고, 독립적 성결을 가진 것이 아니
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결을 보고 말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
호와여"라고 하였다. 이는 마치 사람이 불에 몸을 댈 때에 "뜨겁다 뜨겁다"함과 같다.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더욱 성결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는 밖에 있는 죄를 대적할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죄도 대적한다. 그것이 불타는
성결이다. 거룩한 사람은 죄를 미워하는 뜨거운 마음을 소유하였음으로 남의 죄를 미
워할 뿐 아니라 먼저 자기 죄를 뜨겁게 미워한다.
"모셔 섰는데"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 오메딤 밈마알 로 (* )
는, 그의 위에 서서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옷자락 위의 방면에서 하
나님에게 봉사하는 태도로 서서 있음을 가리킨다(Rashi, Targums). 욥 1:6;왕상
22:19;슥 6:5 참조.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운 이유는, 여호와의 성결하신 엄위 앞에서 감히 대면(對
面)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은 무죄하여도 저렇게 하였다(욥 4:18). 그렇다면 죄 많
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욥 15:15,16)! 이적으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여 주
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성결을 느끼면서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
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눅 5:8). 아담은 범죄한
뒤에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8).
"두 날개로 발을 가리었"다 함은, 그것을 더럽다고 생각함인지는 모르나 발을 가리
움은 겸손의 표이다. 그리고 "두 날개로 날"아 다닌다는 것은 봉사의 표라고 한다.
사 6: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
지라 - "창화". 앞절의 같은 말 해석 참조. "문지방의 터가 요동"함은, 스랍들의 소리
가 초자연적인 힘 있는 것임을 증거해 준다. 사실상 천래(天來)의 음성은 이런 운동력
을 가진 것이다. 여기 있는 말씀은 간접적으로 인간에게 교훈을 주나니 곧, 인간들은
지각 없는 성전 문지방만도 못하여 하나님의 초자연적 말씀 앞에서 아무런 느낌이 없
음을 은책(隱責)한 것이다. "집에 연기가 충만"하다함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이 가
득함을 보여준다(출 33:9). 출 19:18;왕상 8:10;대하 5:13;겔 10:4 참조. "연기"(*
=아솬)는, 하나님의 현림(現臨)을 가리킨다고 하나(Marit, der Rauch erscheint oft
als eine Manifestion der gottlichen Gegenwart Z.B.Ex 14 Hes 10 Ex 40 Jes 4 Apk
Joh 14), 그 보다도 "연기"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시 18:8). 이것은, 그가 장차
불신의 무리들에게 나타내실 심판에 대한 시위(示威)이다. 그가 이제 이사야를 보내어
말씀을 전할 때에 유대인들은 결국 순종하지 않고 멸망을 받고야 만다(9,10). 계
14:11 참조.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들로 하여금 그 자신을 알게 하
시려고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現象)을 보여 주신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말 니드메티(* )는, 과거동사(過去動詞)인데 아직 사실로서
의 성취는 아니나, 선지자의 의식(意識)속에 벌써 자기는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
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사상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출 33:20).
"입술"의 죄악은 모든 죄악의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입술의 죄악을 가
장 작은 것인 듯이 취급한다. 약 3:2에 말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
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였다. 이
것을 보면, 사람의 말은 그 인격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불붙듯한 은혜를 주셨다. "불의 혀 같이 갈
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라고 성경은 말한다(행 2:3). 사람의 말은 중대하다. 말로
짓는 죄가 큰 죄임을 성경은 많이 지적한다. 롬 3:10-18에 기록된 일곱 가지 죄 중 네
가지가 입술의 죄요, 또 롬 1:28-32에 21개의 각이(各異)한 죄악을 논하는 중에 특별
히 입술의 죄악 다섯 가지를 말한다. 마 15:11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고, 마 12:36에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검에 죽은 사람 수효보다 말(言
語)에 의하여 죽은 자들의 수효가 많다"는 격언은 옳은 말이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스랍들의 입술은 생명 세계의 입술이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는 자기의 더러운 입술은 사망에 해당한 것임을, 이사야는 느꼈다. 그리하여 그
는 입술의 죄악이 얼마나 중대한 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기관(器管)이 더
럽혀진 것처럼 중대한 더러움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였다
(엡 5:4). 여기 "감사하는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찬송이 돌아갈 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사야는 자기 민족의 입술이 부정한 것에 대하여 연대 책임(連帶責任)을
느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한다. 그는 자기가 자기 민족 중에 속하는 일원(一員)으로서
민족의 죄악에 대한 공동 책임이 있음을 자백한다. 여기 있는 대로,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라는 히브리 원어(* )
는, 델리취(Delitzsch)에 해석대로 다음과 같으니, "그의 불성결(不聖潔)은 그가 그
불성결한 민족에 속한 사실로 인하여 배가(倍加)된다"고 하였다(The unholiness of
his own person was doubled, in consequence ef the closeness of the natural
connection, by the unholiness of the nation to which he belonged). 민족의 죄악에
대하여 연대 책임성을 느끼는 것은, 죄악을 바로 보는 선지자들의 공통 의식(共通意
識)이었다. 에스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인하여 엎드려 울며 친히 하나님에게 자
복하였고(스 10:1),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을 인하여 40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
드려 금식 기도하였다(신 9:25).
흔히 사람들은 어디까지든지 개인주의적(個人主義的)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
따라서 자기에게 믿음이 조금 있으면 그것으로 교만하고, 남의 약점을 보면 즉시 증오
(憎惡)를 발하며 남을 해롭게 할 방침으로 활동한다. 이렇게 인생은 남들에게 대하여
무책임하다. 그것은 아우를 죽인 가인의 처세(處世)이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도 버
젓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였다(창 4:9). 이렇게 그는
남에게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
우리는 남들의 죄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 우리는 남들의 죄를 비소(鼻笑)나
하고 있지 않는가 ? 롬 12:15에 말하기를,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하였다. 우리가
남들의 문제에 대하여 연대 책임감을 느낄 줄 모르면,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내 책임
을 절반도 못하는 자이며 점점 좁으라와져서 마침내 자멸(自滅)된다. 링컨(Lincoln)은
왜 흑노(黑奴) 해방을 위해서 자기 민족의 피 흘리는 내전(內戰)을 하게까지 되었는
가? 그에게는, 백인(白人)이 흑인(黑人)의 문제에 대하여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옳
고 깊은 진리의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 불란서 사람 라파엘(1757-1834)
은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봉사하였다. 그가 그리 하려 할 때에 자기 나라에서 축
국하지 못하도록 체포되었으나, 그는 도망하여 나와서 두 달 동안이나 배를 타고 미국
에 가서 참전(參戰)하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한 것은, 미국인의 문제를 자기 문제와
같이 생각하는 넓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 6:6,7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
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여기 "단"이란 말은 제단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천래
(天來)의 성격을 상징하기 위하여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 만든다(출 20:24,25).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인조품(人造品)이 아니고 천연적인 것을 그 성격으로 한다. 그리고 거
기에서 하는 일은 희생 제물을 태우는 속죄의 제사를 하나니 그것은 그 구조나 사역으
로 보아 신적 속죄(神的贖罪)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 위의 불도 하늘에서 내려온
불을 존속시킨 것이니 이것 역시 인공으로 말미암지 않고 신적 사역(神的使役)으로 말
미암는다는 것을 가리킨다(창 15:17). 레 10:1,2 참조.
이제 스랍들이 화저(불젓가락)로 단에서 취한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에 댐으
로 그 입술의 악이 제거(除去)되었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의 비의(秘意=sacrament)의
사역이다. 곧, 속죄의 뜻을 가지는 상징적 행동이면서 사실상 사죄의 효과를 가져오도
록 된 것이다.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실물(實物)로 가질 예표(豫
表)에 의하여 구약식 사죄를 실현시킨 것이다. 제단의 불은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근거하고 임한 성령의 불을 상징한다. 성령의 불은 그리스도의 속죄 없이 사죄의 사역
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때에 스랍이 가져오는 숯불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한
제단에 속한 것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 앞에서 사죄를 받는 자는 불 같이 확실하고
뜨거운 죄감이 가져다 주는 성령의 사역으로야 실현된다. 성령님께서는 다른 일을 하
시지 않고 다만 속죄하여 주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연락시켜 주시는 사역을 하신
다. 요 15:26에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 하셨고, 요 16:14에
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한 세례 요한의 말씀이(마 3:11) 역시 그
리스도의 속죄를 우리에게 실시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이름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5절)라고 뜨겁게 회개한 이사야에게는 불과 같이
뜨거운 속죄의 사역이 임하였다. 회개가 뜨거울 때에 사죄의 은혜도 뜨겁게 임하는 법
이다. 고후 7:10,11 참조.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사죄를 받은 이사야의
영의 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 음성은 그를 선지자로 내세우는 소명(召命)
이다. 이와 같은 소명을 받을 때에 이사야는 즉각 순종할 마음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
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화급한 순종은 그가 본 계시와 및 그의 받은 사죄에서 얻어
진 확신에서 온 것이다. 사명에 순종하는 것은, 사명 받은 자의 유일한 과업이다. 그
는 어디든지 가야 된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해야 하며 사람이 듣
든지 말든지 복음을 외쳐야 한다(딤후 4:2). 겔 3:11 참조. 그리고 그가 가는 곳은 세
상이니 양이 이리들 가운데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마 10:16). 이사야는 이것들을 다
각오하고 응소(應召)한다.
사 6:9,10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가 찾아 갈 백성이 강퍅한 자들임을 내어다 보시고 말
씀하신다. 곧, 그들에게 회개를 전파하여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좋은 결과는 별로 없
을 것이라고 하신다. 저희가 말씀을 듣고도 회개(悔改)치 아니하매 저희를 내어버려
두시므로 저희는 더욱 강퍅하여질 것이다.
10절 끝에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때에 회개치 않는 유대인들에게 영적 형벌(靈的刑罰)을 주심이다. 곧, 그들을 강퍅하
게 하여(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강퍅해지도록 버려두신 것 뿐이니 사실상 그 강퍅
의 원인은, 저희 자신에게만 있음), 멸망 받도록 내어 버려 두심이다. 그들은 육체적
으로 바벧론에게 멸망되는 벌을 받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벌을 받는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저희가 불회개를 고집한 사실에 원인을 가지나, 말씀 전파의 결과로
저희가 한번 더 강퍅하여졌으니 저희는,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물론 말씀에 대하여
저희가 잘못했음으로) 멸망하게 되는 자들의 반렬(班列)에 떨어진 셈이다. 사도 바울
이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
명에 이르는 냄세라"(고후 2:15,16)고 하였다.
사 6:11,12
여기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회개가 언제까지 계속하겠는지에 대하여 하나
님께 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그 민족이 다른 나라에게 포로되어 갈
때까지 불회개를 고집할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 관설된 유대 민족의 포로됨은 어떤 것
을 가리키는가 ? 그것은 그들이 바벧론에 포로될 것을 가리킨 것이다. 왕하
24:14,25:12,22 참조. 그러나 아랫절을 읽어 보면 유대인들이 바벧론에서 돌아온 후에
도 또 다시 외국의 침략을 받아 포로될 일이 많이 있으니 그 전부를 여기서 의미하였을 것이다.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곧, 유대인들이 저렇게 남의 나라에 포로되어 가는 비극을 거듭거듭 당할찌라도 택한 백성의 그루터기는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택한 백성이 구원 받을 것을 가리킨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