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30:1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여
기 "야게"(* )는 누구며, "아굴"(* )은 누구인가? 벧돌드트(L. Berthold-
t)는, "야게"란 말이 집합자(集合者), 곧 제자들을 모으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면서,
솔로몬이 그사람이라고 하였다(Der name "Sammler" sei dan symbolisch aufzufassen
und bez ge sich auf keinen anderen ais den Salomo selbst.-Historisch-kritische
Einleitung in S mmtliche kanonische und Apokryphische Schriften des Alten und
Neuen Testaments, 5. Theil, Erlangen, s. 2193).
그러나 "야게"나 "아굴"은 역사에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지혜의 사람들이라고 함이
정당한 견해이다. "이디엘"과 "우갈"은 그의 제자들이다. 아굴이 누구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옛날부터 유대인의 엄격한 전통이 그를 지혜의 사람으로 알아왔고, 또 그의 말
씀이 영감(靈感)된 말씀이라고 전승되어 내려왔다.
잠 30:2,3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 이것은 아굴의 겸
손이다. 그는 자기를 다른 사람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로 안다. 곧, 그는 자
기를 짐승과 같이 부족한 자로 간조한다. 그가 이렇게 겸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우셔서 참된 지혜(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선생으로 사용하셨다. 그는 자기에게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한다. 곧, 그가 그의 육적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뜻이다. 이것은 계시 의존 사색(啓示依存思索)이며, 성경이 강조하는 사상이
다. 고전 2:14에 말하기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
이니라"고 하였다. 고전 2:10-16.
모든 위대한 성도들은 이렇게 특별한 겸덕(謙德)을 소유하였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가리켜 "티끌과 같은 나"라고 하였고(창 18:27),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만삭되지 못
하여 난 자" 같다고 하였으며(고전 15:8), 또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다(딤전
1:15).
잠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
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 진리에 대한 이런 질문식 교수법은 욥
에게 도전(挑戰)하신 하나님의 교수법과도 같다. 그것은 욥 38:1-41:14에 수다한 질문
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도 우주 만물의 구조의 신비를 취급한다. 특별히 욥
38:4-6, 9-11, 18, 22, 25의 말씀은 실질에 있어서 우리 본문의 말씀과 유사한 내용이
다. 우주의 신비는 하나님만이 아시고 사람은 모른다. 사람은, 그 앞에서 자기의 무식
한 사실과 또 아무 것도 아닌 사실을 자백할 것 밖에 없다. 그가 입이 막혀 겸손해 질
때에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된다.현대인은 과학에 의하여 만물에 대한 지식이 많이
진보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식의 분량이 적어 지겠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아는 지식의 분량에 비례하여 미지(未知)세계의 분량이
더 많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교만해질 수 없고 도리어 우주의 신비를
더 느끼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과학 발달에 따라서 더 교만
해지고 인본주의와 자율주의로 미친 듯이 덤빈다. 개인들의 신앙은 타락하고 교회들은
어두워진다. 그러나 현대인들 앞에서 아굴의 질문(잠 30:4)은 아직도 도전하고 있다.
현대인들도 그 질문을 궁극적(窮極的)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우주의 신비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류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만이 그것을 해결해주기 때문에 아굴은 5-6절에 하나님 말씀의 위대하심을 보여준다.
이런 사고 방식은 계시 의존 사색(啓示依存思索)이다.
잠 30:5,6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
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
여기 기록된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느 부분이나 순결하지 않은 것이 없고 모두 다
순결하다. 곧, "순전하다"는 말(* )은 은이나 금을 녹여 불순물을 제하고 순
수하게 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 말씀에 불순물(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 12:6이 이 뜻을 더욱 밝혀준다. 거기 말하기
를,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하였다.
딤후 3:16 참조.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이 문구의 히브리어(*
)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결하며"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알게 한다. 또 그렇게 알려진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신 것
은, 그에게 피하여 숨는 사람들마다 보호를 받는 사실로 증명된다. 우리 본문의 "의지
한다"는 말(* )은 숨는다(to hide oneself)는 뜻이다. 어렵고 위태한 때에 하나님
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을 가리켜서 하나님 속에 숨는다(혹 피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은 시편에도 있다(시 2:12 하반, 11:1). 그러므로 히 6:18에는, 신자를 가리켜 '피
하여 가는 자'라고도 하였다. 언제든지 역경 가운데서 진정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그렇게 믿는다고 한 자로서도 혹시 구원을 받지 못한다
면, 그것은 아무래도 그의 불신앙 때문이다.
그러면 이 점에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아굴 자신을
위시하여 인류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알 만한 지혜가 없다(2-4). 그러나 인류는 하나
님의 말씀(성경)에 의하여 그를 알게 되는데, 그렇게 알려진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마
다 그 목적(그의 보호를 받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진정한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및 그 말씀대로 믿는 신앙에 의하여 알려진다는 것이다. 위의 질문(4절)
에 대하여 슈트락(D.H.L. Strack)도 말하기를, "아굴은 대답한다. 곧, 우리가 하나님
에게 대하여 어느 정도 알게 되기는, 첫째로 그의 명백하고도 참된 말씀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관계된 그의 역사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Agur antwortet: Wir wissen wohletwas von Gott und Zwar erstens
durch sein Klares und wahres Wort, zweiten durch sein Verhalten gegen ner denen,
die an ihn glaunen.-Kurzergefasster Kommentar, Die Psalmen und Die Spr che
Salomos, N rdling, 1888, s.387).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이 문구를 보면, 아굴이 여기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계 22:18-19 참조.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
라." 곧,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 자리에 가담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된 주장이다.
잠 30:7,8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주기 전에 주기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
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 그가 "죽기 전에" 그의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구함
은, 그가 그 기도를 오래 동안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기도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
림을 보여준다. 그는 죽기 전에 기어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지기를 소
원한다. 그것이 그의 평생 소원이다. 그가 그런 사람이 되려는데 방해되는 것은, (1)
"허탄"(* )과 "거짓말"(* )임(8절 상반). 이것들은 이 세상과 및 속이
는 정욕이다(요일 2:15-17). (2) 물질 문제임(8절 하반). 물질이 너무 많으면 보통으
로는 그것이 신앙 생활에 거치는 것이 되고, 그것이 너무 없으면 시험을 받기 쉽다.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여기 이른바 "필요한 양식"(* )이
란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여 주신량의 양식이니 적당한 분량을 말함이다(D.G.
Wildeboer). 그가 이렇게 기도하는 목적은, 9절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는 생활을 위함이다. 그의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 중심한 것이고, 자기의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아굴의 기도와 유사
한 점을 가지고 있다. 마 6:9-13 참조.
잠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덕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 이와 같은 기도를 하
는 이는, 다른 것은 염려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할까 두려워하
는 자이다. 그는 육신의 행복보다도 성결(聖潔)을 구하는 자이다.
잠 30:10
너는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 누구든지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면, 그것은 그에게 대한 상전의 사랑
을 끊어주는자 악한 짓이다. 종의 생계(生計)가 그 상전에게 달려 있는데, 만일 그 상
전이 그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는 비참해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그 상전 앞에서
퓌방함은, 훼방으 죄만 아니라 약자를 닛밞아 버리는 잔인의 죄까지 범함이다. 신
23:15-16을 보면, 주인을 피하여 도망해 온 자도 보호해 주고 압제하지 말라고 한다.
(1) 사람들이 부주의하면 권세 있는 삶들의 허물은 가리워주고 약자들의 적은 허물은
과장하여 훼방하기 쉽다. 약자의 대항하지 못하는 처지를 엊빠신여기어가 그를 압박한
다는 것은 악독한 행동이다. 그런 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잠 22:22-23). (2) 더
욱이 까닭 없이 다만 개인 감정 때문에 남을 훼방함은 얼마나 악한가? 까닭 없는 저주
는 그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고(잠 26:2), 그를 훼방한 자가 도리어 하나님의 벌을 받
을 것이다.
11-14. 이 부분에는 네 가지 죄악이 진술된다. 곧, 부모 거역과 스스로 의롭
다고 생각함과 교만과 탐심이다. 이 네가지 죄악이 각각 한 세대(* "무
리"라는 말로 번역되었음)에 속한 것이다. 이렇게 죄악은 어떤 때에 유행병과 같이 한
세대(世代)와 대중을 지배하는 일이 있다. 위의 네가지 악인들의 무리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미워하신다. 잠 6:16-19 참조.
잠 30:11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 여기 "무리"란 말(*
)은 세대(generation)를 의미한다. 이 말이 이 부분(11-14) 말씀에 네 번 나온
다. 부모를 저주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노를 발할 만한 큰 죄악이다. 부
모의 권위를 무시함과, 그들의 교훈을 업신여김과, 그들을 잘 봉양하지 않고 천대하는
것과 같은 것은, 무언 중에 부모를 저주함에 가까운 되악이다. 이것은 배은망걱의 죄
악이며, 또한 반역의 죄악이다(사 45:9-10).
잠 30:12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
라 - 이것은 종교적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말함인데, 바리새인의 무리와
같은 자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1) 종교의 외부적 규례에 치중하고 심령 상태를 등한
히 하며(마 23:25-27), (2) 그들은 한 두 가지 잘 한 것을 가지고 자기들의 인격 전체
가 완전해진 듯이 높아지며(눅 18:12), (3) 그들은 남들을 자기만 못한 자로 여기고
차별하며(눅 18:11), (4)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만하여져서 속죄하
여주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한다는 말씀
이 그 뜻이다.
잠 30:13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 이것은 교만한 자들에
대한 진술이다. 그들은 낮은 자리에 겸손히 처할 줄은 모르고 언제나 높아지기를 원한
다. 그것이 "눈이 심히 높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시 101:5 참조.
잠 30:14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이 말씀은 탐심을 채우는 자들의 착취 행위를
비유한다. 그들의 이빨이 "장검"(長劒)이나 "군도"(軍刀)와 같다는 것은, 그들의 잔인
성을 비유하는 시적 표현(詩的表現)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종교인들 중에도 시대적으
로 나타난다. 곧, 진실한 성도들을 무정스러이 헤치는 교권자(敎權者)들이다. 시 14:4
은 그런자들을 가리켜 "떡 먹듯이 내 백성(성도들)을 먹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15-16. 여기서 저자는, 위의 14절에 기록된 바 탐심을 채우려는 자들의 불타는 탐
욕에 대하여 다시 비유로 해설한다.
잠 30: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 "거머리"란 말(* )이 지옥을 상징하는 명칭이라
고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거머리란 동물을 의미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
다. "두 딸"은 거머리의 혀의 갈라진 두 조각을 의미한다고도 하고(Guotius), 혹은
"다고다고"라고 두 번 거듭 한 것을 비유한다고 한다(C.B. Michaelis). 우리는 그 의
미를 확정하기 어렵다. 어쨌든 이 귀절은, 만족할 줄 모르고 달라고만 하는 탐심을 비
유로 진술한다. 탐심이란 것은 이렇게 위험한 것이다. 누구든지 탐심으로 말미암는 멸
망을 피하려면, 그 소원을 들어줌에 있지 않고 그것을 제재하며 죽임에 있다. 그것의
소원을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그것은 불만을 느깨며 더 일어난다. 골 3:5; 약 1:15 참
조.
잠 30:16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음부"는 죽은 자를 삼키고 또 삼켜도 차지 않고, "아이 배지 못한 태"는
늘 잉태하기를 원하고, "땅"은 물을 붓는대로 다 스며들고 , "불"은 연료를 계속 공급
해도 그것을 다 연소시키며 더 일어난다. 이것들이 인간의 탐심을 비유하는데 적합하
다. 저자가 이렇게 탐심을 비유로써 진술하려는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의 위험
성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잠 28:16 하반에 말하기를,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
하리라"고 하였다.
잠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이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이 아래 있는 설교로 대신한다.
잠 30:18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 여기서 "기이히"여
긴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모순이라는 뜻이다. 요 9:30절을 보면, 예수님의
권능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눈이 열린 소경되었던 자가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이상하다"고 하였는데, 이상하다는 말은 사람들의 행동의 모순성을 지적하는 데도 사
용된다. 잠언 저자는 여기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범죄와 자취를 잘 숨기는 것이 이상
하다고 한다. 그렇게 숨길 바에야 왜 범죄한는가? 다시 말하면 왜 그들은 부끄러운 짓
을 하는가? 다시 말하면 왜 그들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가? 그것이 기이하다는 것이다.
19-20 여기서 잠언 제자는, 범죄의 자취를 감쪽 같이 숨기는 것을 지적함에 있어서
몇 가지 비유로 진술한다.
잠 30:19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
하면 다음과 같다. 곧, "하늘에 독수리의 길, 반석 위에 뱀의 길이니, 남자가 처녀와
함께 한길 또한 그러하니라." 저자의 마음에는 여기 맨 나중의 것, 곧 네째가 요점이
고, 그 위의 세가지는 이 요점(남자가 처녀로 더불어 음행한 사실이 감쪽 같이 숨겨진
것)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 뿐이다. 잠언 저자는 여기서 박물학(Naturalogy)이나 역
학(力學)을 가르치는 처지에 있지 않고, 종교 윤리적 사실을 가르치는 처지에 있다.
그는, 남자가 처녀로 더불어 음행한 죄가 숨겨진 한 가지 대표적인 실례를 들어서, 인
류가 무슨 죄를 죄든지 범하고는 그렇게 그것을 잘 숨기는 것을 지적한다. 특별히 음
행죄는 영적 음행(우상 숭배)을 비유하는 것이 구약 사상이다. 신약에서도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위하고 사랑하는 행위를 영적 음행이라고 한다(약 4:4). 골 3:5 참조.
많은 기독자들(특별히 지도자들)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좋아하는 죄를 범하면
서도 그렇지 않은 듯이 자신들을 경건한 자로 나타낸다. 그들의 경건한 모양은 충분하
다. 그러나 그것은 회칠한 무덤과도 같다(마 23:27).
잠 30:20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 이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그가 먹고 자
기 입을 닦은 후에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 하였다 하느니라. 이 귀절의 히브
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그가 먹고 자기 입을 닦은 후에 말하기를 내가 악
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이 말씀은 19절 끝에 있는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란 문구를 해설하는 것 뿐이다. 이 부분(18-20)에 있어서 그 문구가 요점이다.
부릿지스(Ch. Bridges)가 인용한대로 암브로스(Ambrose) 교부(敎父)는 이 부분(18-20)
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하늘에 독수리의 자취는, 승천하신 그리스도
를 비유하고, 반석 위에 뱀의 자취는 마귀가 그리스도를 시험한 것을 비유하고(그리스
도가 승천하셨기 때문에 그의 시험한 흔적이 없다는 것), 바다 가운데 배의 자취는 교
회가 세상에서 핍박받은 것을 비유하고(교회가 핍박을 이기기 때문에 아무런 자취도
없다는 것), 남자가 처녀와 함께 한 자취는 (70인역과 같이 소년 시대의 남자라고 번
역해 가지고) 소년 시대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라고 하였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607).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우리 본문의 문맥을 잘 살피지 못한 억해이다. 잠언의 저
자가 15-16 절에서 한 가지(곧 탐심의 위험성)를 지적하기 위하여 다른 것들(거머리,
음부, 아이 배지 못한 태, 땅, 불)로써 묘사한 것 처럼, 여기서도 한 가지(사람이 범
죄한 후 그것을 숨기는 것)를 지적하기 위하여 다른 것들 (하늘에 독수리의 자취, 반
석 위에 뱀의 자취, 바다에 배의 자취)로써 설명한 것 뿐이다.
잠 30:21-23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 여기서는, 인류 사회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거리 네 가지를 말한다. 그것
은, (1)종이 임금된 것, 요셉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소년 시절에 남의 종으로 있다가
후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높임이 된 것은 예외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언제나
남의 지도를 받을 자로서 실상은 자격이 없는데 국가의 혼란으로 인하여 왕이 된 것을
가리킨다. 일이 이렇게 된 때에는 그 나라에는 고통이 더하여 진다. 사3:4-5 참조.
(2)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 이것은 미련한 자가 부자된 것을 가리킨다. 그는 물질이
풍부하기 때문에 더욱 교만해지고 방탕해진다(Delizsch). (3)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
집간 것. 어떤 학설에, "꺼림을 받는 계집"이란 말(* )은 "미움을 받는 여자"
란 뜻이라고 하면서, 그런 여자가 남편을 얻은 경우를 말함이라고 한다. 그가 미움을
받는 이유는, 그가 반드시 여성답지 못하여 온유하지 않고 싸우기를 잘하는 말장이이
기 때문이겠다. 그런 자가 시집가면 그의 남편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고, 그의 처한 사
회도 불안할 것이다. 또 혹은, 어떤 도덕적인 허물 때문에 시집갈 수 없는 자가 시집
간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4) 계집종이 주모를 이은 것, 곧, 계집종이 주모를 내어쫓
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함이다. 계집종으로서 주모의 자리를 취한 사건 자체가 벌써
그의 부도덕함을 증명한다.
위의 네 가지는 모두 다 무자격자가 높은 지위에 앉음을 비유한다. 이것은 질서가
거꾸로 된 상태이다. 이 네 가지는, 이 밖에 무자격한 일군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대표적으로 가리킨다. 곧, 무자격자로서 교회의 여러가지 봉사직(교사, 집
사, 장로, 전도사, 목사)을 맡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적재 적소(適材適所)의
원리는 인물 등용에 있어서 무엇보다 귀하다.
잠 30:24-28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
에 예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만 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 이 부
분에서는 미약(微弱)한 것들도 하나님이 주신 본능적 지혜에 의하여 잘 사는 것을 지
적한다. 이 세상에서 호랑이나 사자 같이 강한 것들만 살도록 된 것이 아니고, 미약한
것들도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살도록 되어있다. 미약한 것들은 도리어 많이 퍼지며 살
아간다. 그러나 강한 것들은 그렇지 못하다. 코끼리 같이 큰 짐승은 평생 새끼 한마리
밖에 생산하지 못한다고 한다. 인류 중에도 강한 민족만이 생존하는 것은 아니다. 옛
날의 아낙 족속(巨人族屬)이 지금에 와서는 찾아 볼 수 없이 다 멸절되었다. 미약한
민족들도 지혜 있게 살면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개미 같이 근면하고(25절),
사반과 같이 위험을 내다보고 거처를 견고케 하고(26절), 메뚜기 같이 단결하고(27
절), 도마뱀 같이 재빠르고 꾀있게 행하면(28절) 잘 살 수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구원은 미약한 자들이 더 잘 받을 수 있는 여건을 지니고 있다. 고전 1:27-28 참조.
잠언의 이 말씀(30:24-28)은, 미약한 사람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사반"(* )이란 짐승은 벼랑 오소리(cliff badger)라고 한다(Celitzsch). 그리
고 "도마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를 "거미"(spider)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델리취(Delitxsch)는 이것을 도마뱀이라고 번역하였다.
잠 30:29-31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
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수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 여기서 지도자(왕)의 자격을 가르치기 위하여 동물 중에서 세 가지 실례를 든다. 지
도자는 이 아래 세 가지 짐승들의 장기(長技)로 나타남과 같이 당당하고 위엄있는(*
=Stately) 덕(德)을 소유해야 된다. 우리 본무의 "위풍"이란 말이 이것을 가리
킨다. 지도자의 당당함과 위엄은 그의 얼굴이나 신체의 모습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그
의 신앙과 덕행으로 말미암는다. 곧, 그는 "사자"와 같이 후퇴하지 않는 투지(鬪志)를
지녔어야 하되, "사냥개"와 같이 솔선적으로 앞장 서서 문제를 파악해야 되며, "수염
소"처럼 선두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해야 된다. 31절 끝의 "왕"이란 말은 이 부분 교훈의 목적을 드러낸다. 곧, 영도자(왕과 같은 일군)는 위의 세 가지 동물에서 배울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의리(義理)를 굳게 파수하여 당당하고 위엄 있음이 영도자적 아름다움이다.
잠 30:32,33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 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 여기서는, 스스로 높은 체하는 생각(미련한 생각)을 품었던 사람도 즉시 마음을 돌이켜서 미련하게(자존심으로) 말을 토할 번한 입을 막으라고 한다. 스스로 높은 체하여 토하는 그 말은 언제나 일을 저지른다. 곧, 그것은 분쟁을 가져온다(잠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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