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잠언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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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 여기  이른
바 "악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이고,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성립된다.

  잠 28: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
하게 되느니라 - 곧, 나라에 당파(黨派)가 많은 것은 그 나라에 벌써  있었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예를 들면 솔로몬의 우상 섬긴 죄값으로 그의  사후(死後)에
그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과 같은 것이다(왕상 11:29-36, 12:15-21). 이 점에  있
어서도 그 나라의 분열이 하나님의 벌(罰)로 되었다는 사실이 두 차례나 지적되어  있
다(왕상 12:15,24).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든지 내란이나 당파가 일어나서  평안하지
못할 때에는 통치자를 위시하여 모든 국민은 그 나라의 죄악을 깊이 반성하고  회개해
야 된다. 옛날에 니느웨성도 거족적 회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지 않았는가! 요나서 3
장 참조.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여기 "사람"이란  말(*     
)은 반드시 임금을 의미한다고 할 것 없다. 그 이유는, 성경 말씀에 의하면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의인의 지도를 받음에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인은  선지자일
수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평민(예컨대 요셉이 애굽을  도와줌)일  수도  있다(전
9:13-16). 통치자들이 의인의 교훈을 받아 들일 때에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축복하여
주심으로 그 나라가 복을 받아 잘 된다. 이런 사고 방식은 신본주의(神本主義)의 국가
관(國家觀)이다.
   동양의 주역(周易) 철학에서는 임금이 철학적 지혜를 정치에 적용할 때에 그  나라
가 잘 될 것으로 말한다. 거기서는 하나님을 염두해 두지도 않고 다만 인간적  지혜에
국가의 소망을 둔다. 이것은 인본주의 국가관이다. 예를  들면,  천화동인괘(天下同人
卦)에 의하면, 유순하고 온화한 인격자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문명과  강건(强健)
을 중정(中正)의 원리에 의하여 조절함으로 나라를 잘 되게 한다고 주장한다(同人柔得
位得中而應乎乾  文明以建中正而應). 여기에서 문명함과 강건함을 문인(文人)과  무사
(武士)라고 생각한다면, 임금은 그 두 종류의 사람을 중용적(中庸的) 위치에서 조절하
여 문명함을 현명한 지성(知性)으로, 강건함을 과감한 실행력으로 각각 적당한 위치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나라에 당파가 생기지 않고 통일이 성립된다고 한다.
   그러나 주역의 이와 같은 철학이 인간의 수준에서 국가에 유익을 줄지는 몰라도 하
나님 경외를 지혜로 삼는 신본주의의 생명 있는 정치의 참된 열매를 거둘 수는  없다.
잠 21:30에 말하기를,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이른바 지혜와 명철과 모략은 인간의 지혜를 말함이다.

 

  잠 28:3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  곧,
빈천한 자리에 있던 자가 혹시 집권(執權)하게 되어 학정(虐政)을 행하는 경우에는 아
주 극단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빈천한 자리에 있던 자로서는 과거의 빈곤하였던  쓴맛
있는 체험을 회상하고 무산자(無産者)들을 동정해야 될 것이다(그렇게 바로 행하는 사
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와 정반대로 행하게 된
다. 일이 이렇게 되는 원인은, 인류는 다 아담의 부패성을 받았으므로 그 어떤 처지에
있든지 악을 행하는 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빈천하던 자가 집권하게 되면  과거
의 빈곤한 처지를 회상하여 극단적 이기주의로 흐르기도 쉬운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가 다시는 빈곤한 처지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현재의 권세를 극도로  이용하려  든다.
근대의 공산주의  정치로 이렇게 기울어진 경향이 있다. 곧, 무산자로서 집권하여  무
산 계급의 대중을 구원한다고 일어섰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집권한 다음에는  민중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고 사람들을 기계 취급하며 공산주의의 노예로 삼는다. 결국  공산
주의는 무서운 독재주의요, 전제주의로 나타나고 말았다. 이것을 보면 우리 본문의 말
씀은 일종의 예언적 진리이다.
   프랑스 혁명 때에도 하류배들이 고위층 관리로 많이 활동하게 되었다. 그 때에  그
들의 압제와 포학은 말할 수 없이 극단적이었다. 프랑스가 이런 환란을 당한 것은  하
나님의 징벌이었다. 곧, 그 나라에서 유구노파라는 많은 신교도(기독자)들을 학살하였
던 죄값으로 프랑스 혁명이 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들을 벌하시기  위하여
어떤 때에는 다스릴 자격 없는 하등 비루배(卑陋輩)들로 하여금 갑자기 권세를 잡도록
허락하신다. 사 3:4-6에 말하기를,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
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
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잠 28:4,5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악인
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 여기  "율법"이
란 말(*       )은 여호와를 경외(경외)하는 진리의 체계를 말함이다. 곧, 그것은  하
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을 버린 자는 결국 어두워져서 악을 선이라고 하는 심리
로(사 5:20) 악인을 칭찬한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어서 혹 악인과 같이 행동한  것도
죄악인데, 그를 칭찬하며 따르는 것은 악마적(惡魔的) 행동이다. 그가 이렇게 악을 좋
아하게 됨은, 진리를 떠난 죄값으로 받은 벌이다(살후 2:10-12). 그가 하나님의  말씀
을 버렸으니만큼, 하나님도 그를 버리셨다.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한 자(롬 1:24,  26,
28)가 이렇게 행한다. 롬 1:32에 말하기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하였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여기 이른바 악인을 대적한다 함은 그
들과 대립하여 분투함(zealous against them)을 가리킨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중립
(中立)은 있을 수 없다.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불의(不義)
와 투쟁해 왔다. 에녹은 자기 시대의 부패한 사람들을 꾸짖었고(유 1:14-15),  노아도
역시 그리하였다(히 11:7; 벧후 2:5).
   의로운 주장이 불의한 주장과 함께 평화적으로 공존(peaceful  coexistence)할  수
있다는 것은, 선과 악이 이율 배반(二律背反)의 원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오착이다. 그
것은 선과 악이 타협의 길을 지녔다는 그릇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모든 것이 근본에
있어서는 일반이라는 진화론(進化論) 사상이며, 인의(仁義)를 주장하기  위해  다투지
말고 우주를 혼연 일체(渾然一體)로 알아서 은허 자연주의(隱虛自然主義)로  돌아가라
는 노장(老壯)의 철학 사상과도 같다. 노자는 말하기를, "성인은 도무지 다투지  않는
다. 그런고로 천하가 그와 맞서서 다툴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휘어지는 나무는 안전
하다 한 것이 어찌 빈 말이겠는가?" 하였고(道德經, 第22章), "성인은 마음에 집념 없
는 무심의 상태로 천하를 위하여 그 마음을 혼연 일체하게 가진다"고  하였다(道德經,
第49章). 노자(老子)는 이와 같이 대립(對立) 없는 생활을 가리켜 어린 아이 같이  사
는 생활이라고 하며, 그런 생활을 장려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덕을  풍부하게  가진
사람은 비유한다면 어린 아이 같아서, 벌도 전갈도 쏘지 않고, 뱀도 물지 않으며,  맹
수도 덤벼들지 않고, 움키는 새도 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道德經, 第55章). 이 철학
을 본받아 살던 노(魯)나라 사람 단표(單豹)는 평생 바위 속에서 살면서 사람들과  함
께 지내지 않았다. 그는 나이 칠십에도 어린이의 모습을 지녔었다. 그러나 그는  주린
호랑이를 만나 먹히우고 말았다(莊子, 第七卷, 達生 第19). 이 사건 한 가지만 보더라
도 노자의 교훈이 틀린 것이 드러난다. 노자의 교훈은, 인류의 조상이 타락한 것과 인
류가 전적으로 부패한 사실을 알지 못한 무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
과 맞지 않는 하나의 공상론(공상론)이다.
   신자들은 영적(靈的)으로 악인을 대적해야 된다. 물론 그것이  영적으로  대적하는
투쟁인만큼 혈기나 악독이나 폭력으로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도와 하나님  말
씀 전파와 핍박 받음과 선(善)으로 이루어지는 투쟁이다(롬 12:21).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5절).
이 말씀은 4절의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다. 왜 저렇게 율법을 지키는 자와 율법을 지키
지 않는 자의 행동이 서로 달라지는가? 그 차이는 그들이 율법을 깨닫는 여부에  원인
을 가진다는 뜻이다. 율법(공의)을 버린 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율법을  지
키는 자(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비결은, 사람
이 연구에 의하여 깨닫는 것보다는 순종에 의하여 참으로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
리 본문은 율법을 깨닫는 방법으로써 "여호와를 찾는" 생활(순종 생활)을 말한다.

 

  잠 28:6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
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진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두 길로 속이는  부자보
다 나으니라." 여기 "두 길"이란 말의 히브리어(*         )에 대하여  빌데부얼(D.G.
Wildeboer)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두 길로 행함은, 실상 그가 악한 길로 행하
면서 선한 길은 가는 체 하기만 한다."(Der Verkehte in Bezug auf die Zwei Wege  d.
h. den schlechten Weg, den er wirklich wandelt,  und  guten,  den  er  zu  gehen
geuchelt.)라고 하였다(Kurzer Hand-Commentar, Die Spr che, 1897, s.80).
   진실하고 가난한 자는 몇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으니, (1) 그는 신앙과 도덕이  있
음. 사람이 가난하면 보통으로는 겸손하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 (2) 현세에서도  그의
생활에는 만족이 있음, 전 5:12에 말하기를,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맣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고 한다. (3) 내세(來世)에 기업이
있음. 그가 "성실"(*   )히 행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의인의
심령이다. 그는 죽을 때에도 소망이 있다(잠 14:32).
   그와 반면에, 이중 인격으로 행하는 거짓된 부자에게는 몇  가지  단점들이  있다.
(1) 그는 재물을 믿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 눅 12:16-21 참조. (2) 그는 재물을  더
탐하여 근심하며, 또 그것을 지키노라고 근심함(딤전 6:9-10). (3) 그는 천국에  들어
가기가 매우 어려움.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다(마 19:24).

 

  잠 28:7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 여기 "지혜로운 아들"이란 말은 하나님을 알고 또 두려워하는 아들이란 말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일반 과학적 지혜를 가리킴이 아니
고 영적 지혜,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잠 1:7). 잠언에서 지혜
란 말이 이렇게 사용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신학 체계가 다른 근대의 신학자들도 이
렇게 해석한다. 그들 중 칼 바르트(K. Barth)는, "잠언과 전도서에서 '지혜'는 지혜로
운 인물로 인격화(人格化) 되어 어리석은 자와 대조되어 진술된다. 그의 지혜는  실제
적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die  jenem  in  der  Gestalt  des
Weisen,  des  Klugen,   des   Verst ndigen,   des   Gottesf rchtigen   ebenfalls
Personifiziert gegen bersteht.-Dogmatik  IV/2,  1955,  s.  478),  가야츠(Christa
Kayatz)는, "잠언에 기록된대로 지혜를 찾는 자는 결국 여호와에 대한 경외를 찾게 된
다."(Wer Weisheit sucht, findet  Jahwefurcht  und  Gotteserkenntnis)라고  하였다
(Studien Zu Proverbien 1-9, 1966, s.66).
   그러면 지혜로운 아들이 그렇게 지혜로워진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본문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지킴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계시(啓示)된  하나님
의 말씀 곧 율법을 지킴이다. 그것을 읽거나 연구하는 것만으로 족한 것 아니고  지켜
야 된다. 그것을 지키는 자만이 그 목적대로 열매를 거둔다. 약  1:2-25에  말하기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
법을 들여다보고 잇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여기 "탐식자"란 말(*           )은 방탕하여 재산을 없애버리는  자를  가리틴다
(잠 23:20-21). 이런 자들로 더불어 사귀는 아들은 마침내 방탕한 자식이 된다.  사람
은 결국 그 사귀는 친구와 동화(同化)된다. 그런 아들은 물론 하나님을  배반한  자요
따라서 그 부친에게 영구히 부끄러움을 끼쳐 준다. 이렇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은  그
가정에 큰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잠 19:13). 재앙은 사람의 마음대로 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들에게도 불량한 아들이 있은 것이다. 예컨대 아론의  두  아들(레
10:1), 엘리의 두 아들(삼상 2:12), 사무엘의 두 아들(삼상 8:3), 다윗의 아들들(삼하
13:1-14, 15:1-6)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크기  때문
에 살아있는 동안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
도 회개시키실 수 있다.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 3:9).
유명한 백스터(Richard Baxter) 목사의 손자는 오래 동안 불량자로 있었으나,  마침내
회개하고 외국 선교사가 되었다.

 

  잠 28:8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나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
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 옛날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난한 동포에게 돈을
빌려주되 이자(중한 변리)는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출 22:25;  레  25:35-37;신
23:19; 느 5:7, 10; 시 15:5 참조. 돈을 꾸는 자는 가난한 자인데 그에게서 중한 변리
를 받는 자는 재물을 탐하는 자요, 또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하는 자이다.  하나님께
서는 재물을 의지하는 자에게 재물을 오래 동안 맡겨두지 않으신다. 사  3:1을  보면,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겠다
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서 그 재물을 취하여 가실 것을 말함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평안히 쉬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도로 찾아가실 수 있다
고 하셨다. 재물을 소유한 자는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부자는 그것을 의지하고 평안히 쉬겠다고 한다. 그러
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심판을 내리신다. 눅 12:18-21 참조.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곧,  불의
(不義)하게 모은 재산은 그 소유자 자신이 쓰지 못하고 마침내 가난한 자를 잘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쓸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이 재물을  모으되
정당하게 모아야 그것이 자기에게도 유익이 된다. 정당하게 모은다는 것은 선한  노력
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재물을 받게 됨을 말함이다. 혹 사람들이 불의한
수단으로 재물을 모으려고 할 때에 일시에 크게 횡재(橫財)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러나 횡재가 사람에게 유익이 없고 도리어 화(禍)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
을 만큼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감동으로 기록되지 않은 옛글
에도 말하기를, "아무 까닭 없이 천금을 얻으면 큰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큰
화가 있으리라"(無故而得千金 不有大福 必有大禍)고 하였다(明心寶鑑,  省心篇,  71).
중한 변리를 받고 대금(貸金)하여 갑자기 큰 돈을 모으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므로
그것 역시 까닭 없이 천금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 "귀를 돌이
킨다"는 것은 반역의 심리를 가지고 순종하지 않음이니, 그것은 일시적 실수가 아니고
고의적(故意的) 범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제사보다  나은데(삼상  15:22),
반역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  뿐이겠다.  시  66:18;  사
1:11-15; 마 15:8; 약 2:14-26 참조.
   가증하게 기도함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의 앞에 죄가 되며(시
109:7), 그를 노엽게 하는 위험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뻔뻔스럽게
반역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위한 기도조차  금지되어  있다(렘
7:16, 11:14). 잠 15:8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잠 28:10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
을 얻느니라 - 여기 이른바 "정직한 자"(*         )는 의인들을 의미한다. 그들로 하
여금 죄악에 빠지도록 유인하는 공작은 마귀적 행동이다. 마귀는 언제나 극도로  악하
기 때문에 그 자신이 어김 없이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그 악인은 자기의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식으로 교묘하게 해를 당한다. 시 7:15, 9:16 참조. 그와 동시에 그 악
인의 유인 대상이었던 의인은, 어김 없이 하나님의 특수 간섭으로 구원을 받는다. "성
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그러므로 무죄한 자가 악인의 궤계에 의한 침해를 받을 경우에 그느 두려울 것  없
다. 그런 때에 그는 멀지 않아 하나님의 특별 간섭이 있을 것을 내다보고 기뻐해야 된
다. 그는 미구(未久)에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특이한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시
23:5 참조.

 

  잠 28:11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겨도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를 살펴 아느니라 - 곧,  명
철한 가난한 자가 지혜에 있어서는 교만한 부자보다 낫다는 뜻이다. 그의  눈  앞에는
교만한 부자의 어리석은 것이 환하게 드러난다. 곧, 부자가 자기의 소유한 많은  물질
때문에 교만하여 스스로 지혜로운 줄 생각하니, 그것이 그의 어리석음이다. 교만은 지
혜가 아니다.
   "명철한 가난한 자"가 이렇게 사람을 잘 식별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명철한" 자,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Christa  Kayatz,  Heisst
das nicht, dass Jahwe suchen und die Weisheit suchen dasselbe  ist,  weil  Jahwe
Herr der Weisheit ist, wahre Weisheit nur bei  ihm  zu  finden  ist?-Studien  Zu
Proverbien 1-9, 1966, s.66).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신자는  진리를  안다(고전
2:10-16). 그 뿐 아니라 그는 가난하기 때문에 고난을 많이 체험한다. 그 체험으로 말
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시 119:71) 따라서 사람을 잘 안다(잠 20:5).

 

  잠 28: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 여기  이른바
"득의함"(*     )은 기뻐함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시므로 그들이 기뻐
한다는 뜻이다. "큰 영화"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국가  혹은  교회에
크게 임한다는 의미이다. 악인이 "일어난다"는 말(*     )은 그들의 교만함과 압제 행
위를 가리킨다.
   "사람이 숨느니라." 아합왕 시대에  많은  의인들이  숨었고(왕상  17:2-3,  18:4,
19:3-4), 또 다른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히 11:38). 이 점에서 우리가 명심할 것
은, 핍박 시대에 성도들이 숨어서도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곧, 그들이  그  때에
생명을 바치고 기도하며 지하 운동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것이  하늘의
생명을 받은 자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한다(딤후
4:2).
   유교의 주역(周易)에 있는 돈괘(??) 처세(處世)도 소인(小人)들의  세력이  팽창한
때에 군자(君子)는 숨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거기에 숨을 필요성을 많이 말한다. 곧,
(1) 물러가 숨는 데 뒤떨어져 위태하다는 것(初陰). (2) 세속적인 연고 관계에 얽매어
서 물러가 숨지 못하니 위태하다는 것(三陽). (3) 높은 지위도 버리고 즐거운  마음으
로 물러가 숨어야 되는데 군자라야 할 수 있는 일이고 소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四
陽). (4) 그 물러가 숨어 변심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五陽). (5) 만족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물러가 숨어 변심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上陽)이다.
   위의 주역의 돈괘 처세의 다섯 가지 해설은 진리를 위함보다 개인의 안전을 위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친바 피신은, 신자들로  하여금  피신해서도
거기서 진리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초대 교회는 핍박 때문에 흩어졌으나 그
로 인해 각처에 복음이 전파되었다(행 8:4). 유럽에서는 한  때  왈도파(Waldensians)
신자들이 핍박 때문에 피해 다니면서 각국에 복음을 전하였다.

 

  잠 28:13,14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 이 부분 말씀은 회개의 복을 역설한다(13절). 이런 복된 회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14절)라야 할 수 있고 강퍅한 자는 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화를  자취하
는 셈이다. 이 말씀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이 아래 설교에 포함되었다.
   그러면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  씻음
을 받음이다. 요일 1:9에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다.

 

  잠 28:15,16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무지한 치
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 이  부분  말씀은
포학한 통치자(혹은 관원)와 청렴한 통치자를 대조시킨다. 사자가 부르짖는 것은 주려
서 먹을 것을 찾는 행동이다(벧전 5:8). 사자도 포악하고 곰도 그렇지만 그것들이  주
렸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포학한 통치자들을 이런 주린 짐승들로 비유한  저작자의
의도(意圖)는, 그들 역시 탐심 때문에 포학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물론
그 탐심은 물질에 대한 욕심, 오랫동안 권세를 잡으려는 욕심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
면,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여 무죄한 자를 죽였고(왕상 21:1-16), 사울은  장
기 집권(長期執權)을 위하여 다윗을 여러번 죽이려고 하였다(삼상 18:6-19:1). 그들은
누구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어서 권세를 잡고 많은 물질을 소유하였지만은  누구보다도
더 탐심을 부렸다. 이렇게 사람은 탐심을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욕구  불만을  느끼고
짐승 같이 덤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은, 탐심을 만족시키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탐심을 죽이므로 된다. 탐심을 부리던 많은 왕들은 저렇게 짐승과 같이 타락하
였고 오랫동안 권세를 잡지도 못하였다. 사울도 그 왕권을 빼앗겼고,  세속  역사에도
폭군 진 시황은 만세토록 집권을 꿈꾸었으나 그 정권은 무너졌다. 우리  본문에  이런
폭군의 집권이 짧으리라는 말씀은 없으나, 16절 하반에, 청렴한 통치자가  장수하리라
는 말씀의 대조로 그것이 암시되어 있다. 곧, 탐욕을 미워하는 통치자의 그 통치 기간
이 긴 것이 그 특징이라면, 탐심을 부리는 통치자의 집권 기간은 짧은 것이 분명하다.

 

  잠 28:17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죄감  때문에  눌리운
사람은 함정에 이를 때까지 도망하나니 그를 붙들지 말지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  빌
데부얼(Wildeboer)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17절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기  위하여
는 이 귀절 끝에 있는 '그를 막지 말지니라'는 말의 뜻을 바로 알아야  된다.  우리가
그것을 '체포하지 말지니라'란 뜻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는 보복하지 말라는 의미가  된
다. 곧, 그 살인자의 양심의 불안이 사형 대신으로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의미이겠다.
그러나 '그를 도와주지 말지니라'란 의미로 생각될 때에는 그것은 위의 해석과 정반대
되는 것으로써 살인자는 죽어야 된다는 의미이겠다. 위의 첫째 해석이 옳다고  생각된
다. 그 이유는, 잠언 저자는 보복의  원리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
20:22, 24:17, 29, 25:21 참조."라고 하였다(F r das richtige  Verst ndnis  von  17
Kommt alles auf die Bed. von  *       in  V.  17   an.   bersetzt  man  greifen,
aufhalten, so bezweckt der Vers  die  Beschr nkung  der  Blutrache:  die  Unruhe
seines Gewissens ist f r  den  M rder  Strafe  genug.  Aber  *        Kann  auch
"aufrechthalten, st tzen" sein, Ex 17:12; Ps. 41:13; 63:9; Jes. 41:10; 42:1. Ist
das Wort hier in dieser Bed. gemeint, so besagt unser Vers das reine  Gegenteil.
Aber die erstgenannte Bed. passt am besten in den Satz. Unsere Weisen sind keine
Anh nger des  strengen  jus  talionis,  vgl.  20:22;  24:17,  29;  25:21.-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ie Spr che, 1897, s.81. 意譯).
   그러나 위의 해석은 다 잘못된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살인자의 양심 가책으로
써 사형을 대신하라는 의미도 아니고, 또는 살인자를 보호하지 말고 사형을 받도록 하
라는 의미도 아니다. 이 귀절의 의미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곧,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죄로 양심에 눌리운 자는 도망한다고 해도 마침내 함정에  빠지고야
말 것이라는 뜻이다. "그를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의 과장법  표현(Huperbole)이
다. 곧, 그 살인자를 체포하려고 하지 않아도 잡힐 것이니, 구태여 잡으려고 할  필요
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과장법 표현은, 실제적으로 관원이 그를 체포하기 위한  노
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잠언 저자는 어떤  때에  역설(力
說)하기 위하여 과장법 표현을 사용한다.
   저자가 이 귀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남을 살해한 자는 별 수 없이 그 자신이  역시
죽임을 당하는 형벌(刑罰)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포함하여 가르치는  것은,
남을 해하는 모든 다른 죄악도 마침내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
람이 범죄한 후에는 자기가 친히 죄책을 지고 회개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문제  해결을
받아야 된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찾아 내어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가 그
렇게 하지 않고 도피하는 경우에는 그의 범한 죄가 그를 따라잡아 함정에 빠지도록 만
든다. 하나님께서 살인한 가인에게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
4:7)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킨다.

 

  잠 28:18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순전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
이나 이중(二重)으로 속이는 자는 한번 넘어지리라." 여기 이른바 "순전하게"란 말(*
      )은 하나님을 모시고 마음 속에서부터 진실히 옳게 행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자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생활을 가리킨다(창 17:1).  이렇게  사는
자는 현세와 내세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나니, 그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이  곧  신자의
구원이시다. 그에게는 일시 동안의 실패도 마침내 유익이 된다. 그는 그 실패로  인하
여 자기의 어두움과 부패성을 발견하고 하나님 밖에 믿을 데가 없는 줄 알고 다시  신
앙 생활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이중 인격으로 행하는 자는 두 주인을 섬기는 자니, 그는 마침내 아주 실패
할 수 밖에 없다(마 6:24). 그가 현세에서 그의 속임수로 제법 오래 동안 성공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을 보는 신자들이 실족하기도 쉽다. 곧, "왜  거짓된  자가  성공할
까?" 하는 의문이다(시 73:1-16).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이 점에 있어서 신자들을  경
고하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였다(시 37:1-10). 잠 24:16에  말하기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
러 지느니라"고 하였다. 곧, 악인이 오래 동안 악을 쌓으면서도 잘 되는 것 같으나 그
의 넘어지는 한 때가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우리 본문(잠 28:18 끝)의 "한 번"(*   
    )이란 말이 그 뜻이다. 서장(Tibet) 격언에도 말하기를, "표범의 가죽을 입은  나
귀가 일 년 동안 내내 남의 밭곡식을 다 뜯어 먹은 뒤에 다른 짐승에게  잡혀  먹히웠
다."고 한다. 곧, 나귀가 표범의 가죽을 입었으니 만큼 짐승들이 그것을 표범으로  잘
못 알고 오래 동안 다치지 않았다. 그 동안 그 나귀는 마음 놓고 맹수들이 많은  지역
의 밭에서 곡식을 뜯어 먹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맹수들이 그 나귀의 정체를 알고  드
디어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거짓된 수단에 의하여 오랫동안  잘  되는
것 같이 나아가다가도 그가 아주 망하는 한 때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잠 28:19-22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
으리라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사람
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가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
니니라 - 이 귀절은 탐심을 경계한다. 이 귀절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분해된다. 곧,
   (1) 사람이 자기의 산업을 힘써야 잘 되고 투기 사업을 따라 다니면  궁핍해진다고
함(19절). 여기 이른바 "토지를 경작하는" 것은 그 시대의 일반적 산업이었다. 그러므
로 이 말씀은 역시 다른 시대 사람들의 다른 산업들을 장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
기들의 건실한 직장을 잘 지켜야 물질적으로도 궁핍함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투기 사
업(投機事業)을 일삼으면 궁핍해진다. "방탕을 좇는 자"란 말의 히브리어(*          
        )는 "헛된 것들(vainities)을 따르는 자"라고  개역되어야  한다(Delitzsch).
"헛된 것들"은 투기 사업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므로 토이(C.H. Toy)는 이것을 "헛된
영업"(Vain Pursrits)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사람이 급속히 부자되려고 택하는 투
기 사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2) 사람이 충성되이 직업을 힘써야 산업에 축복을 받을 것인데, 속히 부자 되려고
하면 벌을 받는다고 함(20절).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건실한 업체(業體)도 거
짓된 수단으로 잘못 운영하기 쉽다. 그는 모든 죄를 범한다(딤전 6:9-10). 그렇게  행
하는 자는 그의 죄에 해당되는 벌을 받는다.
   (3) 공의(公義)를 어기도록 만드는 탐심을 경계함(21절). 사람들이 흔히 물질의 욕
심 때문에 공의를 팔아 먹는다. 예를 들면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편벽되이  처사함과
같은 것이다. 물질이 귀하다 해도 그것은 공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
에서 잠언 저자는 "한 조각 떡"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것으 분명히 그  둘(공의와  물
질)을 비교하는 심리에서 표현된 문구이다.
   (4) 탐심을 품은 자의 눈은 악하다고 함(22절). 그의 눈은    물질을 얻으려는  지
나친 열심을 반영시키고 있다.    더욱이 그의 심령의 눈은 어두워져서  죄를  분별할
줄 모르며, 따라서 그의 저지르는 죄(딤전 ^:9-10; 골 3:5)의 값으로 그 자신이  곤궁
해질 것도 내다보지 못한다. 그 뿐 아니라 물질은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잘못 보고 덤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물질을 많이 모아서 그것으로 사리사복(私利私福)만 채울 때에 하
나님은 그들에게서 그것을 빼앗으신다. 그 때에 그들의 받는 화(禍)는 비참하다. 그들
은 마땅히 그 소유한 물질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해야 되며
,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된다. 그들은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행  20:35).
하나님의 것은 우리가 소유한 뒤에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는 언제나 냉정해야 되며, 그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된다
(마 6:33).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면 받고, 주시지 않으면  그
것이 없는 처지에서도 만족할 줄 알아야 된다(딤전 6:7-8). 욥 1:21, 2:10 참조.

 

  잠 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  여기
이른바 "경책"은 옳은 말로 꾸짖음을 말함이다. 그런 꾸짖음이 귀를 거스리기는  하지
만, 나중에는 그것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와 반면에 "아첨하는 말"은 거짓된  것
으로 판명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양심적인 사람은 자기를 책망해  준
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베드로는 자기를 책망해 준 바울을 끝까지 사랑하였다(갈
2:11-14; 벧후 3:15)(Charles  Bridges).  하나님을  믿지  않은  철학자  피타고라스
(Puthagoras)도 말하기를, "네게 아첨하는 자보다 책망하는 자를 택하라, 아첨하는 자
를 너의 가장 악질적인 원수로 여겨라."고 하였다(S.C. Malan, Notes on the Proverbs
  , 1893, p.487). 아첨하는 자의 말을 잘 듣다가 망한 자들이 이 세상에는 많기 때문
에 심지어 철학자도 이렇게 경고하였다. 더욱이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은  아첨
(阿諂)에 대하여 얼마나 더 철저하게 경계하는가? 잠 27:5-6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
라.
   현대의 타락한 기독교인들은 아부자를 친구로 삼고 책선하는 자를  도리어  원수로
안다. 그들은 책선해 준 사람에게 대하여는 사랑을 끊고 또 멀리 한다. 이것이 의(義)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는(마 5:6) 참된 신자의 처세이겠는가? 아니다.  그
것은 아합과 같은 악인의 행동이다. 아합은 책선하는 엘리야를 가리켜  "괴롭게  하는
자"라고 하였다(왕상 18:17). 참된 성도 다윗은 말하기를,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
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
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고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라고 하였다(시 141:5).

 

  잠 28:24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 - 다
른 사람의 것보다 부모의 것을 도적함은 더욱 큰 죄이다. 자식으로서는  부모의  것을
보호하려는 효심이 있어야 된다. 부모의 것을 도적질하는 아들에게서는  그런  효성이
깨어졌다. 이와 같은 그의 도적 행위는 불의(不義)에다 배은 망덕의 죄를 첨가한 것이
다(Charles Bridges).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부모의 것을 도적하고도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까지 하니, 그는 너무도 철면피이다. 그런 자는 멸망케 하는 자,  곧  마귀의 친구하고 할 수 있다.

  잠 28:2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 탐심이 있는 사람은 늘 만족을 못 느낀다. 그는 그 사회에서 불평을  하기  때문에(민 11:4), 거기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그와 반면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늘 여호와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 마음 속에 평안이 있다. 여호와 한 분을 자기의  목자로  모시고 만족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였다(시  23:1). 시 4:7, 27:4, 131:1-3; 합 3:17-19 참조.

 

  잠 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니(렘 17:9), 그것을 믿는 자는  미련
한 자이다. 사람은 마땅히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 마음의 지도를 받지 말고 하나님 말
씀의 지도를 받아야만 된다. 더욱이 신앙 문제, 곧 하나님을 바로 믿어야 할 일에  있
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학자들 중에도 인간의  자
율주의(自律主義), 곧 마음을 표준으로 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유감이다. 사람의 마음
을 표준하는 사고 방식은,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나왔다.
   (1)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존재 추론(analogia entis). 아퀴나스는 아리스토
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과 타협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형상을 신(神)이라
고 하고, 그것은 자신이 동하지 않고 질료(質料)로 동하게 만들기(마치, 磁石이  쇠를
움직이는 것 같은 동력) 때문에 만물이 형성되었다고 한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1, 1895, p.326).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형상(곧, 그의 신)이  의지적으로
만물을 창조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신은 피조물의 성격으로 쌓아  올린
결정체에 불과한 것이다. 로마교 신학자 아퀴나스는 이 체제대로 신을 말하였으니  잘
못이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신은 그 자신 속에 피조물의 모든 속성들을 지니고 계
시다. 그 사실이 신의 보편적 완전성을 말해준다."라고 하였고, 역시 그와 같은  존재
추론의 학자 보나벤추라(Bonaventura)는 말하기를, "우리가 신을 잘 알려면  피조물들
의  모든  이름들을  신에게  옮겨  생각함이  필요하다."라고  하였다고,  바빙크(H.
Bavinck)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위의 존재 추론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타협하고,  신(神)을  피조물
속성들의 집적체(集積體)인 듯이 말한다. 그것은, 신을 피조물로 여기는데 가까운  그
릇된 사고 방식이다.
   (2) 철학자들 중 유명한  칸트(Kant)의  제자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한계  개념
(limiting concept)으로만 인정한다. 한계 개념은 현상 세계(과학  세계)에  대치되는
규정 개념(regulative concept)이다. 인간의 지식은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있으나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주의  구상자(God  as  constitutive
creator and interpreter of the facts of the universe)로 아는 구성 개념과  반대된
다. 버틀러(Butler)의 추론에서 만족하지 못 하는 자들이 칸트의 사상에서 하나님  신
앙의 사상적 위치를 재건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불가능하다. 칸트가  생각한대로  과학
세계를 신앙 세계에서 분리시켜 보존시켜 보려는 이같은 사고 방식을, 다른 말로 해서
현상주의(phenomenalism)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참 하나님을 믿도록  도와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칸트가  만들어  놓은  규정  개념  곧,  비경험적  개념
(noumenon=nonempirical concept)은 하나의 불합리(irrational)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의 성품은 합리(rationale)이시다. 물론 그 합리는 인간의 합
리를 초월한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많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게
된 것은, 조상 때부터 범죄하여 양심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고전 1:21). 그러므로 옛
날부터 지능(知能)의 수준이 높은 철학자들도 참 하나님을 모른 것이다. 비록 천재(天
才)라도 성경 말씀을 진실하게 받아 그대로 순종하여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현재 화란에 크라세란 사람이 있는데, 경찰을 도와서 400여명의 실종된 어린이들을
찾아 내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실종된 어린이가 사고로 죽었었는데, 크라세는   시
체의 묻히운 곳까지 찾아내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가 15세 때에는 자기 아버지의
별세한 것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인
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을 신기하게 아는 그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였다고 해서,  참
으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누가 보통 사람 이상으로 비상한 지
혜를 가졌다고 하여 반드시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문
제는 인간의 두뇌에 속한 것은 아니다. 두뇌가 아무리 명민하여도 죄 있는 사람인  이
상, 그는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게 된 원인은  이렇
게 다른 차원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사람이 무엇을 비범하게 알아낸다고 하여 그가 반
드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가 된 것은 아니다. 군대에서는 적군을 찾기 위하여 군견
(軍犬)을 사용한다. 적군들이 내왕한 곳이나 그 숨은 곳을 그 개들은  잘  찾아낸다고
한다. 그 점만은 군견들이 사람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개들이
사람의 아는 높은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지식이란 것은  엄격하게
종별(種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어떤 점에 있어서는 놀랄만큼 명민하나,  하나님을
아는 종교적 지식에 있어서는 우준하기 그지없다. 롬 1:32 참조.
   사람은 누구든지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믿게 된다. 이것을 전제적 논법
(前提的論法)이라고 한다. 이 논법에 있어서는 우리가 만물을 해석함에 있어서 처음부
터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은 계시다."라고 전제하고 언론한다. 그런 논법이 처
음에는 권위주의(authoritarian)의 성격이 있다고 하여 거부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논법이 마침내 참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 이유는, 사람은 피조물이고 또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자율적(自律的)으로는 창조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식 면
에서도 창조자의 초자연적 말씀(성경)에 부종(附從)해야만 자기 환경과  경험을  바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태양 빛 가운데 있을 때에 촛불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더욱
이 그 때에 우리가 태양빛이 있는지 증명하려고 촛불을 사용할 필요는 더욱 없다.  그
때에 태양빛의 존재는 자명적(自明的)으로 드러나고 만다. 성경 말씀은, 비유켠대  태
양빛과 같이 자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啓示)
해준다.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곧, 상반절 해석에서 말한 것 같이 자기 마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성경 말씀)대로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지혜를 가리킨다.

 잠 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으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 잠 14:31, 19:17, 21:13에 대한 해석들을 참조하여라.

 잠 28:28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 앞에 있는  12절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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