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27:1,2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
라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 - 이것은 자랑과 교만을 금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이 아래의 설교로 대신한다.
잠 27:3,4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들보다 무거우니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 "분노는 이 돌보다 무
거우니라." 이것은, 그 분노를 품은 사람이 오래 동안 상대방을 유쾌하지 않게 만들며
견딜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 특별히 미련한 자의 분노가 그렇다.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여기서 압살롬과 다윗을 대조시켰으니, 곧, 다윗은 나발에게 큰 분노를 발
하였다가 얼른 그쳤는데(삼상 25:32-33), 압살롬은 2년 동안 분노를 계속하였다는 것
이다(삼하 13:22, 23-29). 사람이 분을 오래 동안 품으면 반드시 죄를 범하게 된다.
엡 4:26-27에 말하기를, "분을 내어고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
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기독 신자들 중에 일시 동안 작은 충돌로 일
어났던 분을 평생토록 품고 풀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압살롬과 같은 자들이다.
분노를 품는 자는 그 자신의 심령 속에 살인독(殺人毒)을 품은 것이니, 자기 심령이
먼저 망한다(요일 3:15).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서야 누가 서리요." "창수", 곧 홍수는 잔인하다.
분노가 잔인하지만 "투기", 곧 시기(猜忌)는 더욱 잔인하다. 아 8:6에, 투기는 음부
(陰部) 같이 잔혹하다고 하엿다. 이것이 분노보다 잔인하다고 할 만한 이유는, (1) 분
노는 보통으로는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갈아 앉을 수가 있다. 그러나 시기는 그보다
끈덕지게 계속한다. 그것은 영구히 상대방을 따라다니며 해하기 때문이다. (2) 사람의
분노는 보통으로 상대방에게서 침해를 받았다는 생각에서 일어나지만, 시기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이 상대방의 번영(繁榮)을 보고 좋아하지 않거나 방해하는 생트집이
다. 그것은 상대방의 패망을 보고야 그치기 때문이다. 잠 6:34, 14:30 참조.
잠 27:5,6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 여기 이른바 "면책"이란 말(*
)은 노골화 된 책망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공중 앞에서 꾸짖음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만 내놓고 책선함이다(마 18:15). "숨은 사랑"이란 것은, 사람이 어
떤 친구를 어느 정도 중심으로 사랑하기는 하면서도 행동으로 돕지 못하는 연약한 사
랑을 말함이다. 그러나 "면책"은 그것을 달게 받는 자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인만큼
그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친구의 면책을 달게 받는다(시
141:5). 동양의 옛글에도 "충고하여 벗을 선히 인도하여라"(忠告而善悳之)라고 하였고
(論語, 顔淵 十二, 23),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믿음성있는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
름다운 말은 믿음성이 없다"(信言不美 美言不信)라고 하였다(道德經, 81). 곧, 친구에
게 책선함이 아첨하는 식의 아름다운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공자나 노자가 성령의 감
동으로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인류의 경험적 지식을 통하여 친구 관계는
충고로만 참되이 성립된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여기 이른바 "자주"(* )
란 말은 풍성히 함을 의미한다. "입맞춘다"는 것은 모든 다른 아부 행위의 친절도 가
리킨다. 사람들은 친절을 좋아하고 책망은 싫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한 인류의 근
성이다. 인류는 조상 때부터 범죄한 죄인이므로 마땅히 책선을 환영해야 된다. 베드로
는 바울의 책망을 받았으나(갈 2:11-14), 끝까지 그의 친구로 머물러 있었다(벧후
3:15).
잠 27:7,8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본향을 떠나 유
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 이 말씀은, 언제나 교만하여
불만을 가지고 소명(召命)이나 천직(天職)이나 또는 하나님이 주신 위치에서 떠나 돌
아다니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계함이다. 이것은, 신령한 사명에 충성하지 않고 불만
으로 세상 것을 찾아 다니는 교회 지도자나 목사도 경계하는 말씀이다. "배부른 자"란
말은 교만한 자를 비유하는 것인데, 그런 자는 "꿀"과 같이 단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
한다. 그와 반면에, "주린 자", 곧 겸손한 자는 "쓴 것", 곧 고난도 달게 받는다. 시
119:71에는 말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겸손하여 주리고 목마름 같이 의를 사모하는
성도(마 5:6)의 찬송이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인간의 의(義)로 배부른 줄 착각하고
(눅 18:9-12),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 그와 같이 오늘날 소위 신학자란 이름으로 성
경을 취급하는 많은 사람들도 스스로 자기의 지식으로 의(義)를 삼아 그것으로 교만해
지고 말았다(고전 8:1). 그들은 영적으로 주림을 느낄 줄 모른다.
우리는 겸손을 생명과 같이 지켜야 된다. 겸손한 자만이 모든 것을 바로 보며, 고
난 속에 잠재(潛在)한 진리를 발견할 줄 안다. 겸손한 자는 누구에게든지 진심으로 배
운다. 독일 격언도 우리 본문을 설명해 준다. 곧, "주린 것이 최선의 요리사"(Hunger
ist der beste Koch)란 말이다.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 이것은 윗절의 말씀과 같이 교만과 불만으로 자기
천직이나 위치를 떠난 사람을 비유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것이만큼 그렇게
유리하며 돌아다녀도 평안을 얻지 못한다. 그는 마치, 보금자리, 곧 둥지를 떠나 떠도
는 새와 같다. 부릿지스(Ch. Bridges)는 이 점에 대하여 중요한 해석을 붙였다. 곧,
"(1) 언제나 자기의 이미 받은 사명을 떠나서 무엇이 되려는 사람은, 가상적(假想的)
난관에 봉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Always wanting to be something or somewhere
different to what and where he is, he only changes imaginery for real troubles).
성경적 근거 없이 자기의 천직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남과 마찬가지이다. 요나는
자기 사명을 떠나 도망가다가 바다에서 큰 환란을 당하였다(욘 1장).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끝까지 해야 된다. (2) 영적으로 확신(確信) 없
는 신학자들과 신자들도 보금자리를 떠난 새와 같다. 그들은 옛날부터 전승되는 신학
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사상적으로 유리하고 있다. 그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딤후 4:3)."라고 하였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p.508-509). 고전 15:58
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
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였다.
잠 27:9,10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
우니라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란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 여기 "충성된 권고"란 말의 히브리
어(* )는 "영혼의 권고"란 뜻이다. 참된 친구의 권고는 말 뿐이 아니고
영혼으로(간절하게) 권면하는 사랑이다. 그것을 받는 자는 기름과 향처럼 즐겁게 받아
야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며 멀리 한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 이 말의 히브리어의 뜻을 해설하면, "네 친구, 곧 네
부친에게 신실히 행한 친구"란 뜻이다. 그는 부친 때부터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아들 된 자는 그를 귀히 여겨 버리지 않아야 된다. 빌데부얼(Wildeboer)도 말
하기를, "옛 친구("아비의 친구"), 곧, 그 신실성에 있어서 시험을 통과하고 인정 받
은 친구는 좋은 이웃이요 먼 친척보다 낫다."(Ein alter erprobter Freund, ja ein
guter Nachbar, ist besser als ein ferner Blutsverwanter)라고 하였다(Kurzer
Hand-Commentar Zum Alten Testament, 1897, s.78). 이부분 말씀은, 친구와 형제를 비
교하여 친구의 우수한 점을 드러낸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사회 생활에 있어서 우리
는 사람들을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혈연 관계보다 도
의적 생활로 발전하라는 형상인만큼 종족주의(種族主義)를 초월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서 뭇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로 하여금 혈족보다 가까워지도록 해야 된다. 사실상 도
의(道義)는 혈통보다 강한 것이다. 그런고로 도의적으로 사는 사람은 환란날에 형제에
게 의탁하지 않고 도리어 친구들 가운데서 고상한 생활을 가진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10절 하반). 이것은 지방의 원근(遠近)을
말함보다는 피차간 인연의 원근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도의적으로 사는 사람, 더욱
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형제나 친척보다도 뜻이 같은 친구들과 더 가까운 법
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혈연을 초월해야 할 의리의 생활을 버리고 혈
통 중심으로 일생을 지낸다. 이와 같은 생활에 있어서는 보다 고상한 의리와 신앙이
희생된다. 이와 같이 가석한 일을 경계하기 위하여 잠언 저자는 말하기를, "가까운 이
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고 한다.
잠 27:11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
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 이것은, 부모 된 자가 그 자식더러 지혜 있게 행하므로(여호
와를 경외하므로) 부모를 기쁘게 하라는 말씀이다. 자식이 그렇게 할 때에 그 부모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부모로서 할 말이 있게 된다. 이것은, 시 127:5에 말한대로
부모가 그 의로운 자식으로 말미암아 원수들 앞에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씀과
같다.
우리 본문의 말씀은 하필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에 국한 될 것은 아니다. 스승과
제자들의 관계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제자들이 의롭게 발전할 때에 스승된 자의 기쁨
이 크고 또 자랑스럽게 된다. 빌 4:1; 살전 2:19 참조.
잠 27:12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
니라 - 이 귀절에 대하여는, 앞에 있는 22:3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잠 27:13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
잡힐지니라 - 여기 이른바 "옷을 취하라"고 한 말씀이나, "볼모 잡힐지니라"고 한 말
씀은, 남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가 마침내 쓴 잔을 받아야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경제적 실력 없이는 남을 위하여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경고가 여기에 있다. 잠 6:1-5
해석 참조.
잠 27:14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 여
기 이른바 "축복한다"는 것은 칭송함(adulation)을 가리킨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칭송하는 것이 왜 저주가 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그
것은 지나친 성의를 가지고 아첨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지 못 한다는 것이다. (2) 신(神)이 아닌 한개의 사람에게 지나친 칭송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고 하셨다(눅 16:15). 영광은 오직 하
나님께만 돌려야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다(사 48:11).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들은 무슨 일에 있어서나 자기 자
신이 영광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시 115:1에 말하기를,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
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헤롯왕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받았으므로 그 몸
에 충이 먹어 죽었다(행 12:22-23).
잠 27:15,16
다투는 부녀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
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 이것은 가정 생활에 관하여
가르친 말씀이다. 곧, 가정에서 남편을 대항하여 다투는 아내의 말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대항하는 말은 방지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바람을 제어하기 어
렵고 기름을 붙잡기 어려움과 마찬가지이다. 그의 이와 같은 행동은 여성으로서 지녀
야 할 온유와 순종(딤전 2:11; 벧전 3:4)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행하
는 것은 그를 여성으로 지으신 하나님을 거역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서 주의할 것이 있다. 곧, (1) 여성은 불의(不義)에 대하여 언제나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하는 것. 여기서 금하는 것은 그 대항의 방법에 있어서 혈기에 끌려 격분
한 마음으로 다툼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것 뿐이다. 그는 그 남편으로 더불어 의견이
충돌되었을 때에 마땅히 여성으로서 지켜야 할 온유의 덕으로 일시 동안 말을 멈추고
덕화(德化)에 의하여 점차 그 남편을 설득(說得)하도록 해야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악처(惡妻)들은 끝까지 말다툼으로써 이기고자 한다. (2)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곧, 우리 본문의 말씀이 가정 불화에 있어서 남편에게는 언제나 잘못이 없
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점에 대하여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 것 뿐이다. 성경에는
책망의 대상으로써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많다. 특별히 가정 불화에 있어서 남편은
마땅히 아량있게 아내를 관용(寬容)해야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약한 그릇인 아내
(벧전 3:7)를 억압하기만 하는 무지한 남편들도 많다. 잠 19:13, 21:19, 26:21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잠 27:17-20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무화
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물
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미련한 자를 곡물과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부분 말씀에 대한 해석은 이 아래에 있는 설교로 대신한
다.
잠 27:23-26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
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며 여종의 먹을 것이 있느니라 - 여기서
는, 사람이 마땅히 부귀와 권세를 의지하여 살지 말고 다만 자기의 실업(實業)에 부지
런히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라고 한다. 이 말씀 가운데는 물론 개인의 직장 문제에
있어서 그 시대의 특수한 실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그 시대에 흔히 있었던 목축
업이다. 그런 관계로 여기 양이나 염소를 치는 일에 대하여 많은 표현들이 나왔다. 그
렇다고 하여 이 말씀은 후대인들의 다른 직업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의
사람들에게든지 이 교훈은 그들을 상대한 것이다.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 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24절). 여기
이른바 "대저"란 말(* )은 "왜 그런고 하면"이란 뜻을 가진다. 이것은 그 윗 말씀의
이유를 보여준다. 곧, 부귀 영화는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인만큼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생산하는 실업을 부지런히 힘쓰라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성경이 일관성 있게 말
하는 노동 신성의 교훈이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창 3:19)란 말씀
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한 말씀(살후 3:10)은, 인류중 한 사람도 제외됨이 없이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경 말씀은 놀고 먹는 자를 정죄한다. 전 5:10-12에 말하기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25절). 이 말씀은,
사람의 노동(그 시대에는 목축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곧, 풀을 벤 후에 새로 움이 돋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목축을 장려하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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