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25:1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한 것이니라 - 여기서
부터 29장까지는 또 하나의 특수한 잠언집(箴言集)이다. 그것은 물론 솔로몬의 작품인
데, 히스기야왕의 지도 하에서 그의 신하들이 편집해서 낸 것이다. "히스기야"는 주전
720년에서 692년까지 다스린 유다 왕이었다. 왕상 4:32에 의하면, 소로몬이 3000 잠언
을 지었고, 또한 1005수의 노래도 지었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하여 이 모든
것들을 작성한 것이다.
잠 25: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 이 점에 있
어서 신 29:29을 참조하여라. 거기에 말하기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역시 두 가지
를 보게 된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과 및 그의 하시는 일은 숨겨져 있는 사실, 곧 오
묘하다는 것(상반절)이다. 둘째는,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댜 할 율법의 말씀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첫째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된 것이고, 둘째는, 임금으로 말미암
아 실시되는 것이다.
(1) 하나님 자신과 및 그의 직접 하시는 일은 가리워져 있음. 하나님의 은익(隱匿)
에 대한 말씀은 성경에 많이 있으니, 사 45:15, 55:8; 왕상 8:12; 롬 11:33-34 등이
고, 그의 이름을 기묘라고도 하였다(삿 13:17-18). 하나님이 이와 같이 은익되어 계신
사실은 우리의 신앙 대상이 될만하다. 우리 눈에 본이는 것은 만물의 근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이가 만물의 근본이시다(히 11:3). 인간의 영혼은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
음 받았기 때문에(전 3:11),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둔다(롬 8:24).
(2) 임금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행위 표준이 실현됨. 우리 본문에 이른바, "일을 살
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고 한 말씀이 이것을 보여준다. "일을 살핀다"는 것은, 이상
적(理想的) 군왕이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친다는 의미이
다. 그 뿐만 아니라 그가 백성의 문제점들을 잘 알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거기에
관한 하나님의 지시를 말하여준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칭호는 받지 않
았으나 그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사역한 것만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뜻은, 그를 통
하여 이스라엘 국민 생활의 자세한 방면에까지 계시되었다. 민 36:5 참조. 솔로몬도
역시 유다 민족의 모든 문제들을 자세히 알고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백
성들을 다스렸다. 이상적 군왕들은 이렇게 백성의 실정을 자세히 알고 하나님의 지혜
대로 부지런히 다스리는 자이다.
동양에 있어서 옛날 중국의 성스러운 임금이었던 순(舜)은 살피는 사람이었다. 그
가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 섬긴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민정(民政)을 깊이 살핀 왕
이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그를 가리켜 위대한 지혜의 사람이었다고 칭찬하였다.
공자는 말하기를, "순은 참말로 대지(大智)였다. 순(舜)은 묻기를 좋아했고, 쉬운 말
에 대하여서도 자세히 알아보기를 원하였다"(舜基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信)라고 하
였다(新譯四書 1, 玄岩社, 大學中庸, p.167). 이와 반대로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끓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治大國若烹小鮮,
道德經, 第60章). 그가 이렇게 말한 의미는,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서두르지도
말고 가만히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정치 경쟁심이 생겨 모두 욕
구 불만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基政民民 基民淳淳 基政察察 基民缺缺)라고 하였다(道
德經, 第58章). 이것은, 노자가 은허주의(隱虛主義)를 그의 정치 철학에 적용한 말이
다. 중국의 정치 철학에 잇어서 소위 법술론(法術論)이란 것은, 임금을 숨겨두고 행동
자로 나타나지 않게 하여 백성의 숭배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것인데, 그것이 노자의
정치 철학에서 유래되었다. 동양에서 군주(君主)를 신화(神化)시킨 폐단이 역시 은허
주의의 사상에서 나왔다. 어떻게 지도자가 행동 없이 남들을 바로 인도할 수 있게는
가? 성경은, 지도자가 친히 모범이 되고 힘써 다스려야 할 것을 가르친다. 롬 12:8에
말하기를,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것이니라"고 하였다. 잠 12:24 참조.
잠 25:3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
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하늘은 높은데 속하고 땅은 깊은데 속하며 왕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한역에 있는 "같이"란 말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여
기서 저작자는 왕의 마음을 하늘의 높이와 땅의 깊이에 비교해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의 말은, 다만 인류 가운데 있어서 왕의 마음은 깊다는 것 뿐이다. 이것은 특별히 이
상적 군왕의 자격을 말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주장하신 다윗이자 솔로몬 같은 군
왕들의 자격이다. 이상적 군왕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인만큼(잠 21:1), 사
람들이 얼른 그의 마음을 판단할 수 없다. 사실상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자의 마음이
그 많은 민중의 마음보다 깊은 지혜를 지녀야만 된다. 일반적 통치자들도 직접 하나님
의 계시(啓示)를 받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경 말씀을 배워
서 깊은 지혜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잠 25:4,5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
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 왕들은 간신(奸臣)
들을 제거(除拒)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하므로 모든
사람의 양심의 지지를 받는 것인만큼 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간신들
을 등용하는 왕은 그들의 죄악의 결과를 자기 자신(왕)이 받을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간신들을 신임하는 것은 왕으로서 어리석게 택하는 자살(自殺) 행위이다. 옛날 동양의
성스러운 임금이라고 불리운 순(舜)임금도 관직에서 크게 잘못한 사람 넷을 좌천(左
遷)시켰다(書經, 虞書??典). 다윗도 옳지 않은 관리들을 아낌없이 숙청하였다(시
101:1-8).
잠 25:6,7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 여기 이른바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며"란 말씀은, 관직에
있는 자로서 왕으로 더불어 경쟁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관리로서
모든 동료들 중에 높아지려고 하는 것을 금하는 것 뿐이다. 사람이 자기 직분에 충성
하는 것은 바로 사는 방법이 되지만,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은 교만이요 자신에게 해
로울 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므로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
인이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들은 도리어 지위적으로 높은 대접만 받기를 원한다. 그
렇다고 그들의 앞길이 그 원하는대로 다 형통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겸
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하였다(잠 15:33). 예수님께서도 우리 본문과 같은 교훈을
주셨다(눅 14:7-11).
사람이 겸손하므로 그 자신이 오히려 잘 된다는 것은 너무도 뚜렷한 경험적 사실이
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권위에는 미치지 못하는 도덕가들도 겸손을 강조하였다. 주
역(周易)의 겸괘(謙卦)는, 산이 땅 아래 묻혀 있음을 보여주는 괘산(卦象)인데, 곧 높
은 자이지만 낮은 데로 내려가 겸손할 때에 형통한다는 뜻이다. 이 괘의 형상은 땅을
의미하는 곤괘(坤卦)가 위에 있고 산을 의미하는 간괘(艮卦)가 아래에 있다. 산이 높
으면서도 낮은 땅 속에 있음은 겸손을 상징한다. 이 괘에 대한 공자의 주석에 말하기
를, "땅 속에 산이 있으니 겸손이다"(地中有山謙)라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철학
자 노자(老子)도 겸손을 강조하여 말하기를, "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계곡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강이나 바다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능히 모든 계
곡의 왕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백성의 위에 있고자 하면, 반드시 스스
로 백성의 아래로 내려간다. 성인이 백성보다 앞에 있고자 하면 반드시 자신을 백성의
뒤에 둔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들은 무거워하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들은 방해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천하 사람들이 즐겨 추대하고 싫어
하지 않는다. 그는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툴 수가 없다"라고 하였
다(老子道德經, 第66章).
겸손에 대한 공자와 노자의 말은 그들의 철학적 사상을 배경하고 나왔다. 공자는
생명 없는 음양(陰陽)의 원리로 말하였고, 노자는 은허(隱虛)의 사상으로 저렇게 가르
친 것 뿐이다. 이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독자의 겸손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를 두려워하며 또 즐거워하여 힘 있는 생명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잠 25:8-10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
찌 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 여기서는 다투는 사람들과 조심할 바를 가르쳐 준다. 곧, 부끄러움을 당
하게 될 다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한다. 첫째는, 사람이 성급하게 다투다가는 부끄
러움을 당한다는 것이고(8절), 둘째는, 다투는 중에 남의 비밀을 탄로시키는 그 자신
이 부끄러눔을 당한다는 것이다(9-10).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급하게 다툼에 참가할 때에 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그가
성급하게 출발한는 것만큼 벌써 혈기와 분노로 다투게 된다. 혈기와 분노는 인격의 위
신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성급하게 나온 것만큼 이길 만한
지식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말에 약점이 드러나게 된다.
(2) 다투다가 남의 비밀을 누설하면 왜 그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는가? 그 이유
는, 그 다툼의 문제점만 해결하기 위한 말만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문제점을 떠나서 상대방의 은밀한 단점을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인신 공격(人身攻擊)이
다. 언제든지 인신 공격은 진리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야비한 행동인 것이다.
상대방의 은밀한 일은 그의 사적(私的)인 문제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침범하
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는, 평생 그 말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상대방의
미워함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부득이하여 다투게 될 때에는 침착한 마
음으로 문제점에 대하여서만 증거해야 된다.
잠 25:11,12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 이 두 귀절은, 합당하게 충고하는 말이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12절은 그 윗절(11절)을 보충적으로 설명하는 것 뿐이다. 여기 이
른바 "경우"란 말의 히브리어(* )는 "바퀴"란 뜻을 가진다. 곧, 그 때 형편과
경우에 잘 조절하여 돌아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델리취(Delitzsch)는 이것을 환경이
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면 이것은, 충고하는 자가 상대방에게 말할 때에 여러가지를 고
려하여 잘 조절해야 될 것을 가르친다. (1) 충고하는 자 자신이 사랑과 화평을 지니고
있을 때에 말해야 되며, (2) 능욕하는 태도로 말하지 않아야 되며, (3) 성급하게 말하
지 않아야 되며, (4) 예의 없이 말하지 않아야 된다. 이랗게 말한 것을 상대방이 잘
받아 들일 때에 그(충고하는 자)에게 큰 대접이 된다.
"은쟁반에 금사과",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란 말들은 큰 더접을 의미한다. 의(義)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는 자(마 5:6)는, 친구의 충고를 큰 대접으로 여긴
다. 다윗은 말하기를,"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
하리로다"라고 하였다(시 141:5).
잠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
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 이것은, 주인을 위하여 심부름 하는 자가 그 사명을
완수하였을 때에 그 주인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바 "추수하는 날
에 얼음냉수 같아서"란 말의 히브리어(* )는,
"추수하는 날에 눈의 찬 것과 같으니라"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팔레스틴에서는 추수하
는 때가 가장 더운 때이다. 그 때에 눈의 찬 것은 사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다. 이렇
게 주인을 시원하게 한 사자(使者)들의 행적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
면,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데려온 엘리에셀(창 24장), 사도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데려온 사환들(행 10장), 데살로니가 교회에 갔다 와서 바울에게 위로가 된 디모데(살
전 3:4-10) 등이다(Ch. Bridges).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될 것이 있
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바로 할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
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충성할려고 힘써야 된다(갈
1:10).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종들의 발까지 아름답게 보신다(롬 10:15). 사 52:7 참
조. 바울은 충성된 하나님의 종을 가리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
다(고후 2:15).
잠 25: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
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거짓된 선물로 자랑하는 자는 구름과 바람이 비 없
음과 같으니라." 구름과 바람이 함께 움직일 때에는 고요하지 않고 요란하다. 그것은
당장 비를 쏟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런 경우를 가지고 말한다. 그와 같이, 교회의 거짓된 스승들은 당장
교회에 큰 유익을 줄 듯이 말을 많이 하며 자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해를 끼친다. 유 1:12-13이 이와 같은 거
짓 스승들에 대하여 알려준다. 거기 말하기를,"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
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하였다. 거짓
스승들의 이와 같은 행동 원리는 마귀를 원천(源泉)으로 한다. 마귀는 인류의 조상에
게 거짓말로 약속하기를,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된
다고 하였고(창 3:5), 그는 또한 예수님을 향하여 거짓되이 약속하기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마 4:9).
잠 25:15-17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
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 여기서는 극기(克己), 혹은 자기
견제(自己牽制)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관원과의 관계에 있어서 오래 참
을 것(15절), 둘째는, 꿀을 과식하지 말 것(16절), 세째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
것(17절) 등이다.
(1) 관원과의 관계에 있어서 오래 참을 것(15절). 여기 "관원"이란 말(* )은
재판관과 같은 고위층의 관리를 말함이다(Andr Barucq:* signifie plutot
"chef, prince" que "juge."-Le Livre des Proverbs, 1964, p.194).
불의한 재판관에게 어떤 옳은 판결을 청구하는 자는, 그 재판관의 태만한 것 때문
에 분개하기 쉽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온유한 태도를 지키면 그 재판관도 감동된다는
것이 우리 본문의 뜻이다. 이와 같은 일은 어떤 집권자에게든지 마찬가지이다. 다윗
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에게 대하여 끝까지 온유한 태도를 지켰다. 그는 엔게디 굴
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후에 온유한 말로 사울의
회개를 권면하였다. 그는 땅에 엎드려서 말하였으며(삼상 24:8), 사울더러 "나의 아버
지여"라고 하였고(삼상 24:11),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죽은 개나 벼룩같다로 하였다
(삼상 24:14). 그가 이렇게까지 온유하게 된 것은 그가 여호와를 재판장으로 믿었기
때문이다(삼상 24:15). 눅 18:2-5 참조.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이것은, 부드럽게 오래 참는 것이 굳은 것을 이겨
낸다는 뜻이다. 독일 격언에, "인내는 금강석보다 강하다."라고 한 것도 우리 본문을
설명해준다. 동양의 옛철학자 노자(老子)도 부드러운 것이 이긴다는 의미로 물을 비유
로 들었다. 그는 말하기를,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는 능히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나라의 온갖 상스럽지 않은 것
을 받아들여 참는 자를 천하의 왕자라고 한다"(天下莫柔弱於水而攻堅强者莫之能勝以其
無以易之 受國不祥是爲天下王)라고 하였다(道德經, 第78章). 노자가 단지 그의 은허
주의(隱虛主義) 처세 철학에 의하여서도 인내를 존중히 여겨 이런 말을 하였다면, 살
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얼마나 더욱 인내하여야 되겠는가? 잠 15:1 참조.
(2) 꿀을 과식하지 말 것(16절). 여기서 "꿀"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낙(가정
의 낙과 같은 것)을 비유한다. 우리가 이 세상의 낙(樂)을 사용할 수 있으나 그것에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된다. 이 세상 낙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진리에서 탈선함이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권면하기를,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자
와 같이 처신하라고 하였다(고전 7:29-31).
(3)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 것(17절). 이것은 인류의 약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
씀이다. 인류는 하나님과 달라서 무제한적으로 친절하지 못하다. 이웃집에 자주 다니
면, 그것이 그 집 가족의 사생활(私生活)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님 앞에 나아감에 있어서는 제한 없는 것이 도리어 좋다. 우리가 밤낮 그에게 나아가
부르짖을 때에 그는 더욱 기뻐하신다(눅 11:8). 약 1:5 참조. 그는 우리가 강청하는
것도 기뻐하신다(눅 11:8). 엡 3:12; 히 4:16, 10:19-20 참조.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
되 끝까지 사랑하시며(요 13:1;마 28:20), 또 영원토록 사랑하신다(히 13:8).
사람이 이웃집에 자주 다니면 그 집에서 그를 싫어하게 된다는 것은, 인류의 경험
으로도 잘알려진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감(靈感)되지 않은 세속 문학에도 말하기
를, "오래 머물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자주 오면 친분도 성기어진다. 단지 사흘
이나 닷새 사이도 서로 보는 것이 처음과는 같지 않음을 알겠더라"(久住令人賤頻來親
也疎 但看三五日相見不如初)고 하였다(明心寶鑑, 省心篇, 74).
잠 25:18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 여기 이
른바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한다는 말은, 거짓말로 남을 속이거나 혹은 비방함을
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거짓말로 남을 중상함이니, 그것은 거짓말하는 죄악인 동시
에, 남을 죽이는 죄악이다. 남의 인격을 중상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의 가치를 말살시
킴이니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런 억울함을 당한 자에게 하늘의 상급을 약속하셨다(마
5:11-12). 거짓말로 이웃을 훼방함이 그를 찔러 죽임과 같은 잔인한 행동이기 때문에,
그런 죄를 짓는 자를 무서운 살인 무기에 비유하였다. 곧, 그를 가리켜 "방망이",
"칼", "뾰족한 살"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악독한 거짓말로 훼방을 받은 자가 위로 받을 길도 있다. 그것은 다
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므로 말미암는 위로이다. (1) 까닭 없는 저주는 임하지 않는
다는 사실. 잠 26:2에 말하기를,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
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다. (2) 그렇게 거짓말로 훼방 받는것은 우
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 하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겸손해지
도록 하기 위하여 억울하게 훼방 받는 일도 허락하신다. 삼하 16:5-14을 보면,다윗이
시무이에게서 억울하게 저주를 받았다. 신자들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는 하나
님께 자기 자신을 부탁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3) 신자가 억울하게 명예 훼
손을 당하였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부족을 생각할 것. 그는 본의 아니
게 자기 잘못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일도 많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이름
이 불의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더럽혔다는 억울한 생각만 하지 말고, 과거에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로 말미암아 더럽힘이 된 사실을 더듬어 회개해야 된다.
잠 25:19
환란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 사
람이 부러진 이로 음식물을 씹으려면 아프기만 하고 성과가 없다. 그리고 그가 위골된
발을 가지고 걸어보는 경우에 역시 아프기만 하고 일은 될 수 없다. 우리가 환란 때에
거짓된 자를 의뢰하는 것이 그와 같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런 어려운 때에 거짓된 도
움을 바라본다면 일은 되지 아니하고 고통만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거짓된 자는 반
드시 배신하기 때문이다.
우리 본문은 신령한 뜻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환란 많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믿
지 말고 하나님만 믿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모
두 다 거짓되기 때문이다(렘 17:9). 롬 3:4에 말하기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
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신자더러 환란 때에 하
나님만 믿으라고 한다. 시 9:9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환란 때의 산성"이라고 하였고,
시 50:15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라고 하셨다. 시 77:2, 81:7, 86:7, 91:15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전쟁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함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상한
갈대 지팡이"를 의지함과 같다고 하셨다(왕하 18:21).
잠 25:20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 사람이 상심한 자에게 대하여는 그의 비애(悲哀)를 체휼함으로 위로를 주
게 된다. 그러므로 롬 12:15에 말하기를,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하였다. 그런데
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상심한 자에게 기쁜 노래를 불러준다면, 그것은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고 도리어 슬픔을 더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추운 날에 옷을 벗음"과
같다. 그가 추운 날에 옷을 벗는다면 그 추위로 인하여 괴로움이 더할 것이다.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상심자에게 기쁜 노래를 불러주는 것은 그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우리 본문은 역시 신령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
할 때에도 때를 맞추어 행해야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좋은 일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행하는 데 있어서 적당한 시기를 맞추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 3:2-8을 보면 스믈
여덞 가지 때를 말하였는데, 그것은 사람의 행위도 시기를 맞추어야 된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예수님은 그 모든 행동에 있어서 때를 맞추어 행하셨다. 요 7:6 참조. 여기서
두어가지 실례를 들면, 우리가 친구에게 충고하는 경우에 있어서 충고 그 자체는 귀하
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적당한 때에 신중하게 해야 된다.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때가 있으나, 그들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피차간 마음이 평
안할 때를 기다려 할 말을 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의 많은 충돌과 다툼은 때를 모르고
덤비는 데서 일어난다.
잠 25:21,22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
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 원
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이 부분의 교훈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인데,
신자들은 그를 본받아 그렇게 행해야 된다. 마 5:43-48 참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의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로 더불어 화목케 하셨
다(롬 5:10). 이런 고상한 덕은 오직 기독교 성경에만 있다. 동양의 공자(孔子)는,
"곧은 것(直)으로 원한을 갚고, 덕(德)으로 덕을 갚으라"(以直報怨德報德)고 하였다
(論語, 朝鮮圖書株式會社 發行, p.21). 여기 이른바 "곧은 것으로 원한을 갚으라"는
것은 정의(正義)로 원한을 갚으라는 말과 같으니,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여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老子)는 어떻게 가르쳤는가? 그는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성인은 고정한 마음이 없다. 백성들의 마음을
마음으로 한다. 착한 사람을 나는 선의(善意)로 대한다. 착하지 않은 사람도 또한 선
의로 대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 다 선인이 된다. 믿음성 있는 자를 나는 믿는다. 그러
나 믿음성 없는 자도 나는 또한 믿는다. 그렇게 하면 모두 믿음성 있는 사람이 된다"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得善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
之 得信)라고 하였다(道德經, 第49章). 노자의 이 교훈은 피상적(皮相的)으로 볼 때에
매우 좋은 듯하다. 그러나 그가 근본 문제에 있어서 너무 쉽게 해결하고 만다. 예를
들면, "착하지 않은 사람도 나는 또한 선의(善意)로 대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선인
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죄악 문제의 구체적 해결 없이 상상적으로 쉽게 나온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악인이 의인에게서 선한 대우를
받았다로 해서 그 악인의 인격이 반드시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배은망덕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악인들의 문제를 노자처럼 그렇게 상상적으로 해결하지
않으셨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시되 자기가 친히 그들의 죄짐을 담당하시고 그들의 문
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주신 것이다. 그는, 인류의 죄악 문제를 어려운 십자가의
고난으로 해결하셨다. 기독교 성경이 말한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위
대한 속죄(贖罪)의 사랑을 근거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노자의 교훈은 상상적(想像的) 또는 이상적(理想的)인 것으로서 참된 실
현을 가져오지 못하는 반면에, 성경의 교훈은 구체적인 속죄의 사실에 입각하여 그 성
취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고상한 도덕이 진정한 의미
에서는 기독교 성경에만 있다고 믿는다.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곧, 따뜻한 사랑을 받은 원수가 양
심에 가책을 받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말함이다. 롬 12:20 참조.
잠 25:23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 팔레
스타인에는 북풍으로 비가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난제(難題)가 있다. 그러
므로 여기 말한 "북풍"(* )이란 것은 단순한 북풍이 아니고 서북풍(西北風)을 가
리킨다고 하는 해석도 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여자적(여자적)으로 북풍으로 보고 해
석하기를, 팔레스틴에는 북풍이 지나간 후에 비를 오게 하는 좋은 바람이 일어난다고
한다.
"참소하는 혀"(* )란 말은 "은밀한 혀"란 뜻인데, 남을 해롭게 하며
자기를 유익하게 하려고 아첨하는 자의 말을 가리킨다. 그런 말을 듣는 자가 "얼굴에
분을 일으키는"것은 정의감(正義感)에서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아첨하는 자의 말을
그대로 듣고 좋아하는 것은 의리(義理)를 버리는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아첨
하는 자를 자기 앞에 용납하지 않는다. 다윗은, 그의 원수인 사울왕을 죽였다고 보고
한 자에 대하여 도리어 노하였고,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삼하 1:1-16). 그리
고, 그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이고 와서 보고하는 레갑과 바아나를 역시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셨다(삼하 4:5-12). 다윗의 이와 같은 처사는 영구히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서 의리를 가르친다.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사건에 대한 기록들을 자세히 읽고 또
가르쳐야 된다.
잠 25:24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
이 말씀에 대하여는 앞에 있는 21:9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같은 말이 중복되는 목적
은, 그 교훈을 특별히 역설(力說)하려는 데 있다. 사실상 가정이 불안하면 모든 일이
잘못 된다. 그러므로 동양 격언에도 말하기를, "집안이 화목해야 만사가 성취된다"(家
和萬事成)라고 하였다. 이것은 역시 인류가 일반 은총으로 깨달은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의 옳은 경험으로 실현된다.
잠 25:25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 여기 "좋은 기별"
(좋은 소식)이란 말은 중요하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목말랐을 때에 사마리아 여인
더러 물을 좀 달라고 하신 일과, 또는 그 여자에게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신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복음은 멸망 자리에 있는 인류에게 찾아온 천국의 기쁜 소식이다. 복
음은 영혼에게 참 만족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것을 물로써 비유하였다. 요
4:14, 7:37-39; 계 22:17; 사 55:1 참조.
이 귀절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기다림의 요소이다. 예를 들면, 가족
을 떠나 멀리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멀리 고국에서 오는 자기 가족의 편지를 갈망한
다. 그 편지가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만족을 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간절히 기
다리며 사모하다가 그 소식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기다
리며 사모하는 심령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므로 은혜를 받기도 하
고, 또 은혜로 만족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씀이 많이
나와 있다(창 49:18; 시25:3, 5, 21, 33:20, 37:9, 39:7, 40:1, 59:9, 62:1, 69:6,
104:27, 123:1-2, 130:5, 145:15; 사 8:17, 25:9, 26:8, 30:18, 33:2, 49:23; 렘
14:22; 미 7:7). 시 27:14, 37:34, 62:5; 잠 20:22; 습 3:8 참조. 위의 귀절들 가운데
기다린다(바라본다)는 말이 앙망한다는 말로 번역된 것이 있다. 그 두 가지는 결국 마
찬가지이다.
잠 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 "의
인"은 많은 사람의 사표(師表)요 소망이다. 그의 교훈은 하나님의 대언(代言)인 만큼,
그들에게 생명의 샘과 같다(잠 10:11). 그런데 그가 악인의 박해 때문에 굴복하게 되
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게 되다. 이는 마치 많은 사람들이 길어 먹던 그 우물과 샘물
이 더러워짐과 같다. 부릿지스(Ch. Bridges)는 이 말씀에 대하여 성경에서 몇 가지 실례를 들었으니, 곧, 아브라함이 이방의 임금 앞에서 책망 받은 일들(창 12:18-20, 20:9-10, 26:10), 베드로가 여종의 질문 앞에 굴복한 것(마 26:69-72) 등이다.
잠 25:27,28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 여기서는 "꿀"이란 것으로 "영예"를 비유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한 가지 비유를 가지고 어떤 때에는 이것을 가르치고, 어떤 때에는 저것을 가르친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사자(獅子)란 말로 메시야를 비유했고(창 49:9; 계 5:5), 또한 마귀를 가리키기도 하였다(벧전 5:8). 잠언에서 "꿀"로 지혜를 비유하고(잠 24:13-14), 또 영예를 비유하기도 했다(잠 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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