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20:1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
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 "포
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싸우게 하는 것이라 이것에게 속하는 자는 누구든
지 지혜가 없느니라." 이것은 술에 취한 자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한다. 술에 취한 자
의 교만하게 됨과 싸우게 됨은 악한 것이다. 그렇게 됨은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은 것
이다(고전 6:10). 그러므로 술에 취하는 자는 그것에게 속임이 된 자이다. 그로므로
구약 시대에 제사장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었다(레 10:9). 신약은 모든 신
자들이 술에 취하지 말도록 금지하였다(엡 5:18). 하나님의 말씀에서 술 취함을 금한
이유는, (1) 사람이 취한 정신으로는 거룩한 진리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까닭이며,
(2) 그가 취함으로 인하여 많은 술의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까더이다
(딤후 3:4). 삶들이 술에 취하는 쾌락에 끌려서 이 세상에서도 패망한 것은, 인류 역
사의 상고 시대부터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중국 상고 시대 하(夏)나라의 중강(仲康)
이란 임금이 희화(羲和)란 지방 장관을 징벌하였는데, 그 이유는 희화가 술에 빠져서
정사를 문란케 하였기 때문이었다(書經, 夏書, 胤征, 2章-惟時義和顚覆厥德沈亂于酒).
그 나라의 걸(桀)임금도 술 취하는 쾌락을 누리다가 결국 나라를 망쳤다. 그 이후에도
동양 사상에 이런 예가 많다. 잠 31:4-5 참조. 현대에도 술에 취하므로 평생 패가 망
신하는 자들이 많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말에도 실수를 많이 한다. 이 세상의 지혜를
어느 정도 가르친 명심보감에도 말하기를,"말이 많아 말에 실수함은 술 때문이다"(言
多語先皆因酒)라고 하였다(明心寶鑑, 省心篇, 3). 뒤에 있는 23:29-35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여라.
잠 20:2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 여기 진술된 "왕"은 폭군(暴君)을 가르키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말씀이
19:12에도 있는데, 그 왕의 노 (怒)는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으면서도 백성에게 은혜를
많이 끼치는 자이다. 그렇다면. 그의 노는 폭군의 노가 아니고 공의(公義)를 나타내는
무서운 노이다. 롬 13:2-4의 말씀이 이 해석을 지지한다. 거기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
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
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고 하였다.
통치자의 행정적 위엄(行政的威嚴)이 공의면(公義面)에 있어서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아야 된다. 사자의 부르짖음은, 그 짐승이 거처하는 산중에 어디든지 들린다. 그와
같이, 통치자의 행정 능력은 그 나라의 악인들을 어디서든지 두렵게 해야 한다. 잠
14:34에 말하기를,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하였
다. 잠 20:8, 29:4 참조. "그를 노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들 중에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고 함이, 신자들에게 대한
그의 명령이다. 그런 두려움은 비겁한 심리가 아니고 주님을 위하여 평안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준법정신(遵法精神)이다. 벧전 2:13-17 참조. 그것은 만일 신자가 어떤 불만
으로 국가나 교회의 질서를 존중시하지 않고 스스로 잘난 줄 생각하여 윗사람들을 거
스린다면, 그는 하나님의 법과 제도를 위반하는 자이다. 이렇게 행하는 자도 건전한
하나님의 은혜는 못 받는다. 그는 그런 과오 때문에 위태한 지경에 떨어질 위험성도
있다.
동양 철학의 원천(源泉)이라고 할 수 있는 주역의 이괘(履卦)는 재하자(在下者)가
위에 있는 강자를 뒤따르는 괘상(卦象)이다. 그러므로 여기 해당되는 처세는, "범의
꼬리를 밟는 것 같은 마음으로, 잘못을 범하지나 않을까 하고 스스로 두려워해야 된
다"(履虎尾소소終吉)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경험만 기준한 처세
철학인만큼 처세의 동기 뿐으로써, "하나님을 위한다"는 목적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
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는 동기는 전연 없이 그저 자기 위에 있는 집권자를 두려워
하기만 한다면, 그의 마음에는 평안과 만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대로 위에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한 것은, 신본주의에 속한다. 그것은 "주를
위하여" 두려워하라는 것이니(벧전 2:13; 롬 13:5), 그 두려워함의 심리 속에는 주님
을 사랑하는 평강이 잠재해 있다.
잠 20: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다툼을 멈추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
이건만 미련한 자마다 거기에 간참하느니라." "다툼을 멈추는 것"은 어느 한 편이 양
보할 때에 성립된다. 우리 본문의 말씀은, 그 양보하는 편에 영광이 돌아간다는 뜻이
다. 사람이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남에게 받아서(칭송을 받음,대접을 받음,상금
을 받음 등) 높아짐이다. 그런데 다투는 마당에서 상대 편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그 양
보자 자신이 축소(縮小)됨이 아닐까? 그것은, 결과적을 승리의 영광을 거두지 못하고
후퇴로 빼앗기움이 아닐까? 얼핏 보면 이 귀절의 말씀은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것 같
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잠 19:11)에 순종할 때에 문제는 해결된다. 곧, 잠
19:11에 말하기르리 사람이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하였
다. 남에게서 억울함을 당한 자로서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로 더불어 싸워서 승리해야
통쾌할 것 같고, 또 그것이 영광이 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
에게 인정 받는 것을 원해야 할 신자에게는 양보하고 지는 것이 영광이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의 것을 남에게 주는 사랑(남을 용서해 주는 사랑)을 실행하므로 하나님을
모시게 되기 때문이다(요일 4:12). 그는 온유한 자가 도리어 땅을 차지한다는 진리를
믿는다(마 5:5). 아브라함은 재산 문제로 자기 조카 롯과의 다툼을 방지하기 위하여
양보하며 말하기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하였다(창 13:9). 그는 롯에게 어디까지나 양보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커진 자(영광을 받은 자)는 아브라함
자신이다. 그리고 이삭은 자기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양보하였으므로
마침내 그 자신의 소유는 광대해졌다(창 26:17-22). 그렇게 된 것이 그에게 영광이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미련한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
잠 20:4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게으른 자는 추위 때문
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
에는 "게으른 자"의 옳지 못한 심리가 묘사되어 있다. 그가 밭 갈지 않는 핑계를 가지
고 있으나 그것이 정당화 될 수 없다. 그가 자기의 일하기 싫어하는 악한 근성을 솔직
히 고백하지 않고 도리어 기후에다 책임을 돌린다. 그는, 만물(주위 환경)을 정복하라
는 하나님의 말씀(창 1:28)과는 반대로 자기가 만물(주위 환경,예컨대 추위)에게 정복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마
귀의 미혹에 빠진 것이다. 그것은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고 하는 미
혹(잠 26:13)과 마찬가지이다.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심은대로 거두게 하신다. 만일 그들이 심지 않고도 거
두게 된다면 그들은 허황(虛荒)해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에는 아무런 질서
도 없고 공의도 없어질 것이다.
영적 생활(靈的生活)에 있어서도 우리는 심은대로 거둔다. 갈 6:7-9에 말하기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
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
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들
도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많은 핑계로써 노력과 희생을 회피한다. 그들 중에도 추위 때
문에 심지 못하겠다는 자와 같은 자들이 많으며,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
다"라고 말하는 자와 같은 자들도 많다.
부지런함을 높은 덕으로 칭송하고 게으름을 죄악시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천
단한 인본주의(人本主義) 도덕에서도 강조한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말하기를, "스
스로 부지런함은 값 없는 보배라"(動爲無價之寶)고 하였다.여기 값 없는 보배란 뜻은,
너무 값이 많아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게으름은 열 가지 도적질 가운데 한
가지라는 의미로도 말하였다(明心寶鑑, 立敎篇, 12).
잠 20:5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
어내느니라 - 자연적 인간(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지 못한 인간)은 남의 마음의 깊
은 속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옛글에도 말하기를, "범을 그리되 가죽은 그려도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을 알되 얼굴은 알지만 그 마음은 알 수 없다"(畵虎畵皮難畵骨知
人知面不知心)라고 하였다. 또한 "얼굴을 대하여 말은 서로 주고 받지만 그러나 마음
으로는 천산이 막혀 있는 것이다"(對面共話心隔千山)라고 하였다(明心寶鑑, 省心篇,
20).
그러나 우리 본문(잠 20:5)은 사람의 마음 속의 깊은 모략도 알아내는 이가 있다고
하다. 그것은 명심보감의 말과 다른 점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가? 그는 "명철한 자"이니, 곧,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거듭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지
혜(성경 말씀)를 받은 자이다. 그는 성경 말씀과 및 성령의 조명(照明)에 의하여 사람
의 깊은 속을 알아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솔로몬왕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았던 고로
어떤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원고와 피고의 마음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재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나의 해산한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
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
들이 죽으니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
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
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
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
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
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
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
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머니라 하
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라고 하였다(왕상 3:16-28). 하나님의 지혜
를 받은 자의 식견(識見)은 이렇게 탁월하다. 신약 시대에 사람으로서 가질수 있는 탁
월한 지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고 또 전파함이다. 그것은 주님의 성령을 받은 자만
이 할 수 있다(고전 12:3). 고전 2:16에 말하기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
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하였다. 고전 2:11-15 참
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벌써 하나님의 지혜(성령을 받으므로 받는 신령한
지혜)를 받은 자이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 전파하는 말
씀(신약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알게 되어 그를 구주님으로 영접하였다. 우리
는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며 또 이것으로 자랑한다(잠 1:7; 렘 9:24; 고후
10:17). 고전 3:19-21 참조.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
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
라"고 하였다(고전 2:2).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이 지혜는
깊은 것이기 때문에 "오묘"(혹은 비밀)라는 명칭을 가진다(딤전 3:16).
잠 20:6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改譯)하면 다음과 같다. 곧,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인자
함을 선전하지만 진실한 사람을 누가 발견할 수 있으랴." 이 말씀의 의미는, 많은 사
람들이 자기들의 허물은 감추고 자기들의 선(善)만 선전하는데 그들이 진실하지는 못
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선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다음
과 같은 질문들 중 어느 것에든지 해당될 것이다. (1) 네게 큰 허물은 없다 하더라도
작은 허물들은 많지 않은가? 많은 작은 허물들은 합하여 인격을 크게 파상시킨다. 작
은 병균도 많이 퍼지면 사람이 죽는다. (2) 네가 외부적인 율법은 지키지만 율법의 근
본 정신인 사랑을 얼마나 행하는가? 사람이 그 심령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며 형제
를 사랑함이 없이 어느 정도의 율법 지킨 것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과 다를
것이 없다. 그의 그 외부적인 행실은 죽은 나무에 조화(造花)를 걸어놓은 것과 같다.
(3) 네가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령(禁令)은 어느 정도 지킨다 할지라도 행하라는 그
의 명령은 얼마나 지키는가? 하나님의 명령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마 22:39). (4) 네가 너의 행한 선을 내세우지만 그 소위 "선"에도 너의 약점이 포함
되지 않았는가? 사람이 자기의 잘 한 한가지 덕(德)을 가지고 지나치게 자랑하는 경향
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는 여러가지 덕이 서로 관련되어 조화(調和)
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무엇에 있어서나 청백(淸白)해야 된다. 그런데 그
가 청백을 지키노라고 남들과 융통하는 사랑의 교제를 버리면 안된다. 그는 그 자신이
청백을 지키면서도 남들의 행동 원리가 죄가 아닌 한에 있어서는 이해도 하고 협력도
해야 된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독선주의로 떨어지며 고립 상태에 빠진다.
옛글에도 말하기를,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살피면 그
를 따르는 사람이 없다"(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라고 하였다(明心寶鑑, 省心篇,
60). 이것은 인류의 경험에 의한 말이니 참고할 만하다. 물론 명심보감의 도덕 표준은
인본주의니만큼 그 근본 정신이 성경의 신본주의와 다르다는것은, 우리가 명심해야 된
다. 어쨌든 우리는 덕행을 강조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가지 덕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다른 역을 희생시키면 안된다. 전 7:16에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
자도 되지 말라"고 한 말씀이 역시 이런 폐단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최대 한
도의 의로운 행실을 제재함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행한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
며 남의 다른 장점들을 무시함에 대한 경고이다.
"진실한 사람을 누가 발견할 수 있으랴." 사람이 진실한 자가 되려면 그는 자기가
철두철미 죄인인줄 알고 겸손해야 되며, 따라서 그는 자기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만 믿
어야 된다. 사실과 진리를 바로 알고 순종하는 자는 겸손해진다. 그러므로 겸손은 사
실주의 (事實主義)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교만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앎이니(갈
6:3), 거짓에게 미혹된 행동이다.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 이 귀절의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의인은 순전히 행하나니 그의 후에 그의 자손들이 매우
복되리라" 여기 이른바 "순전히(* )란 말은 "단순히"(* )를 의미하는데, 여기
서는 내부적으로 온전함을 가리킨다(E. Dhorme, A Commentary on the Book of Job,
1967, E.J. Brill, Leiden. p.2). 이와 같은 의미로 크루제(J.H. Kroeze)도 말하기를,
"이것은, 경건의 '내부적 상태'(innerlijke eigenschap of toestand)를 말함인데, '온
전하여 갈려지거나 복잡해지지 않은 경건'(ten volle, met onverdeelde)을 가리킨다."
라고 하였고(Commentaar Op Het Oude Testament, Het Boek Job, 1961, J. H. Kok, 46,
47), 포레르(Georg Fohrer)는, 이 말이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온전한 관계를 가리키는
데, 사람들에게 대한 온전한 윤리도 거기서 발생된다고 하였다(K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as Buch Hiob, 1963, Gut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p.73). 이 해
석도 7절 말씀이 경건(敬虔)의 내부적 방면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의 해석가들의 말을 보아서 여기 "완전히"(순전히)란 말은, 신앙 생활(혹은 경건)에
있어서 그 내부적 동기가 온전하여 순수 무잡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행하는 자는 외식
하지 않으며 변절하지도 않는다. 그는, 순전하여 던순히 하나님만 섬기고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자이며(마 6:24),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자이다(눅 9:62). 이
렇게 순전히 행한 표본은 욥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욥 1:1). 그는 하나님을 공경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하는 동기 밖에 다른 잡념이 없었다. 사단의 참소하는 말(욥
1:9-11, 2:4-5)은 그에게 전연 해당되지 않았다. 그의 경건의 내부적 동기로써 그는
하나님 중심주의를 가진 것 뿐이었다(욥 1:21, 2:9-10).
우리 본문(잠 20:7)에 의하면, "순전히 행하는" 의인의 자손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순전히 행한 욥의 아들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갑자기 환란을 만나서
모두 다 죽지 않았는가?(욥 1:18-19). 이 점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곧, 욥의 자녀들이 돌연한 환란을 만나서 죽게 된 사건은 반드시 불행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욥 자신의 말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
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욥 1:21) 하지 않았는가? 설혹 그 사건이 어떤
의미에서 불행한 듯하더라도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욥은 뜻밖에 환란을 만났으나,
하나님께서는 후에 그에게 다시 열 자녀를 허락하셨다(욥 42:13-15). 아브라함도 하나
님 앞에 순전히("완전히"란 말의 뜻) 행한 의인인데(창 17:1),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
의 복될 것을 약속하셨다(창 12:2-3, 22:16-18).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의 후손들이
모두 다 복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자손들 중
에 복 받는 계통이 있다는 것만을 알면 된다. 복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공경하
게 되는 영적 축복인바, 위의 하나님의 약속은 이 복에 참가한 자들이 그 자손들 중에
많이 있으리라는 내용이다. 중점적으로 말하면, 그의 후손들 중 복된 이들은 모세와
다윗과 선지자들과 구약 시대의 모든 참된 성도들이며,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신약 시
대에는 그의 모든 영적 후손들(롬 4:16)을 들 수 있다.
잠 20:7
우리 본문의 "그의 후에 그의 자손들"이란 말은 중요하다. 그것은 의인이 자기 당
대에 복을 받음 보다는 그의 후대에 그 자손이 복을 받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인이 자
기의 시대에는 수고하며 심고 그의 후대 자손들은 거둔다는 사상이 여개 나타나 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를 순전한 동기로 진실히 믿는 신자는 의인이니, 그는 자기 당대에
신앙으로 의(義)를 심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한평생이 지나간 뒤에 그의
수손들 중에는 영적 축복을 받을 자들이 많을 것이다.
잠 20:8,9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내가 내 마음을 정
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 여기 이른바 "왕"은 이상적인
임금으로서 다윗(삼하 8:15; 왕상 15:5; 시 101:1-8)이나 솔로몬(왕상 3:28, 10:9) 같
은 이들이다. 그들은, 그 나라에 죄악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재판할 때에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공의롭게 하였다. 그런데 다윗은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형이었고(겔
37:24-25; 눅 1:32-33) 솔로몬도 그러하였다(삼하 7:12-13).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
절들(잠 20:8-9)을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
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명심해야 된다.
(1)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악을 처분하시는 왕이시다. 말 3:1-3에 말하기를, "또 너
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담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
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은 것이라 그가 은을 연
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
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하였다. 계 1:13-18 참
조. 인류의 죄악을 처분하시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성취하셨다.
(2) 인류는 자기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 인류의 죄악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
생으로만 처분되는데 누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죄를 떠났다고 할 수 있는가?(9절). 누
구든지 사람의 힘으로는 죄를 구속(救贖)하지 못한다(시 49:7-8).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서 그를 전적으로 의뢰하는 길 밖에 구원의 방도가 없다(행
4:12). 롬 3:20-22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
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
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3) 그리스도의 속죄하여 주시는 은혜는 예언 성취로 된 사실이니, 확실하다. 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속죄의 죽음을 죽어주셨으므로 내가 하나님 앞에 사
죄를 받는 진리는,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마찬가지의 진리이다. 구약 시대에는
그 진리가 생축(양이나 소)의 제물(피 흘려 죽임이 된 것)로 예표(장차 오실 그리스도
를 예표함) 되었고,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
었다. 그러므로 히 9:22에 말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그의 피로 그의 백성(교회)을 사시고(렘 20:28) 지금
은 그들의 왕이시며(계 17:14), 그 불꽃 같으신 눈(계 5:6에서 그의 눈은 성령을 비유
함)으로 세상 죄를 책망하신다(요 16:8-9). 그의 이와 같은 사역에 의하여 죄책을 느
끼는 자들은 그를 믿고 사죄를 받아 영생하게 된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때에 베
드로가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지고 설교한 뒤에(행 2:14-36), 청중 3천명이 죄책을 느
껴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행 2:37-41).
(5) 신자가 받은 속죄의 구원은 영원히 동요되지 않는다. 인간이 종교적 의미에서
죄인인 것은 궁극적으로 참된 입법자(立法者)이신 하나님 앞에서 성립된 사실이다(시
51:4; 요일 3:40). 우리를 참으로 정죄하실 이는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 따라서 우리
를 정죄에서 참으로 풀어주실 권세도 입법자이신 그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과연 그의 독생자를 속죄자로 세우시고 그를 믿는 자들을 사죄하여 주신다(롬 8:1).
그가 만왕의 왕이신 권세를 가지시고 그의 독생자의 피를 믿는 자의 모든 죄를 대속하
셨으니, 누가 그를(믿는 자를) 다시 정죄할 수 있으랴? 롬 8:31-39 참조. 요 10:29 참
조.
(6) 속죄의 은혜를 받을 자의 심령의 태도는 어떠한가? 속죄의 은혜는, 자기는 할
수 없는 죄인인 줄 아는 자만이 받고(눅 18:13-14),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잠 20:9)고 하는 자는 그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불꽃 눈 앞에서는 의로운 자가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롬 3:10; 왕상
8:46; 욥 4:17-19; 시 51:5, 130:3; 전 7:20), 그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하기 때문이
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
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였다(요 9:41). 마 9:12-13 참조.
잠 20:10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라 - 레 19:35-36; 신
25:13-15; 잠 11:1, 16:11, 20:23 참조. 이 말씀은, 사람들이 상업 행위에 있어서 정
직해야 될 것을 강조한다. 물건을 파는 자로서 물건의 품질이나 중량이나 분량을 속이
는 것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일이다. 성경은 신령한 일만 아니라 이렇게 육신의 사업
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가르친다. 천국 운동은 자연 은총 분야도 성화(聖火)시킨다. 신
자들이 육신 사업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에, 그의 축복으로 형통
하게 된다.
불신자들 중에도 정직한 자들은 육신 사업에 물질적 축복을 받는다. 그러나 정직하
지 않은 자들은 처음에는 좋은 상품을 선전하여 팔고, 그 다음에는 저질(低質)의 것을
내어놓으니 신용을 잃고 만다. 그것은 사업에 있어서 자멸 행위이다.
진실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영계(靈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신자
들이 신령한 일에 진실과 정직을 지키는가? 다시 말하면 믿음을 진실히 지키는가? 기
도를 진실하게 하는가? 회개를 진실히 하는가? 교회 안에서 자기의 책임을 진실하게
이행하는가?
잠 20:11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
이것은, 아이에게도 도덕 교육의 바탕(청결과 정직을 나타낼 수 있는 바탕)이 갖추어
져 있기 때문에, 그를 바로 가르치면 종교 윤리적(宗敎倫理的)으로 합당한 인격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잠 22:6에 말하기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
들이 아이들을 성의 있게 가르치지 아니하므로 그들의 장래가 우려된다. 동양의 유교
(儒敎)도 옳은 교양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주력하여 왔다. 옛날 아성(亞聖)이라고
하는 맹자(孟子)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가 하루는 동네에서 돼지 잡는 것을 보
고 그 어머니에게 묻기를, "돼지를 왜 잡습니까? 하였더니 그 어머니는 무심코 대답하
기를, "너를 먹이려고 그것을 잡는단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한 맹자의 어머니는 자
기의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 돼지고기를 사다가 아이에게 먹였다고 한다.
이것은 모친으로서 가정 교육에 주력한 하나의 실례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신실
한 여성도들이 가정 교육에 충실하였던 실례들이 많다. 곧, 주일 저녁마다 자기 아이
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곤 한 스펄죤(Spurgeon)의 어머니, 매일 자기 아이들을 위하여
한 시간씩 기도하면서 열 일곱 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꾸준히 가르친 웨슬레(Wesley)의
어머니, 눈물의 기도를 계속하여 아들을 회개시킨 어거스틴(Augustine)의 어머니 모니
카와 같은 이들은, 믿음으로 자녀 교육에 힘쓴 위대한 어머니들이었다.
우리의 자녀들 중 어떤 아이들은 불량하여 취급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부모들은
이와 같은 아이를 그 어렸을 때에 선한 방법으로 꾸준히 징계하며(잠 22:15), 그를 위
하여 진심으로 기도해야 된다. 부릿지스(Ch.Bridges)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은 혹시 지연되지만 반드시 실현된다. 우리는 그의
신실을 의심하지 않아야 된다."라고 하였다.
잠 20:12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 여기 이른바 "듣는 귀와 보는
눈"이란 말씀은, 영적 이목(靈的耳目)이 열려서 하나님을 알며 그를 두려워하게 됨을
가리킨다. 육안으로 소경이었던 자도 주님의 은혜로 보게 되었을 때에 그는 주님을 확
신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로를 죄인으로 단정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담대히 말하
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
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요 9:25).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안만 아니라 영
안을 열어주기도 하신다(왕하 6:17). 우리는 영적으로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는 것
이상으로 확신하는 체험을 가져야 한다. 신자가 체험은 없이 신앙 이론만 주장하다가
는 자신도 살지 못하지만 남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없다.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듣게 하시며 보게 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는, 오직 그가 창조자이시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 나아가기만 하면 그는 들어주시고 우리에게 은
혜를 주신다. 시 94:9에 말하기를,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 응답을 받을 때에 영계에 확
신을 가진다.
잠 20:13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
면 양식에 족하리라 - 잠 6:6-11, 15:19, 19:15, 24, 21:25, 22:13, 24:30-34,
26:13-16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여라. 여기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하였는
데, 이것은 "잠자기를 사랑하지(* ) 말라"는 의미이다. 게으른 자는 정당한 일
은 하지 않고 방탕과 기타 죄악에 빠져서 정력을 소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잠자
기를 사랑한다. 잠언에 게으름을 경계하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오는 데, 그 이유는,
게으름이 보다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 주님께서 심판 때에 회
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말씀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신다(마
25:26). (2)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으
니(살후 3:10), 이것은 게으름을 큰 죄악으로 생각한 말씀이다. (3) 예레미야는 말하
기를,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다(렘 48:10).
게으름은 무엇보다도 큰 죄악이다.
잠 20:14
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
여기 말씀한 대로 물건을 사는 자가 그것을 살 때에는 좋지 않다고 하다가도 일단 사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는 자랑하니, 그것은, 자기 표준대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의 심
리이다. 왜 같은 물건인데도 그가 자기 입으로 좋지 못하다고 하던 것을 좋다고도 하
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 표준하고 하는 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표준으로 말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모순(矛盾)이란 말의 유래를 생각할 때에 그
것이 역시 이 사실을 밝혀준다. 곧, 옛날에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한
번은 창을 들고 광고하기를, "이것으로써는 그 어떠한 방패도 다 뚫을 수 있읍니다."
라고 선전하였다. 그 다음에는 그가 방패를 들고 광고하기를, "이것으로는 그 어떠한
창도 다 막을 수 있읍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선전은 자가당착(自家撞着)
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모(矛=창을 의미함) 순(盾)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자
기 표준은 언제나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이 모순에 빠져서 자기 열중, 자의심(自義心), 자긍심(自矜心), 자신심(自信
心), 자기를 기쁘게 함, 자기 고집, 자기 변호, 자포자기 등으로 광분(狂奔)한다. 신
자들이 비록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도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전히
자기 표준에서 사는 죄악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잠 20:15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 여기
"지혜로운 입술"이란 말은 "지혜로운 말"이란 뜻과 같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
나님을 알고 또 경외함(신앙함)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그것을 금이나 진주보다 낫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제일 좋은 것이라고 하는 그것도 버리고 하
나님을 모시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 보물을 구하려고 얼마나 애쓰는가? 그
들은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최대 한도의 노력을 지불한다. 욥기 28장이 이 사실을 잘
보여주었으니, 곧 그들이 은금 보화를 얻기 위하여 땅에 구멍을 깊이 뚫고 내려간다고
하며(3-4), 산을 뿌리까지 무너뜨린다고 하며, 둘 가운데 도랑을 판다고 하며, 시냇물
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한다고 한다(9-11). 그들이 이렇게 노력과 희생을 지불하면서 은
금 보화를 더듬는다. 그렇다면 은금 보화보다 더 귀한 하나님을 모시려고 할 때에 간
절히 구하지 않고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찾아 모시려는 자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간절히 그를 찾아야 된다. 욥 22:24-25에 말하기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
리니"라고 하였다.
잠 20:16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
잡힐지니라 - 이 귀절도 또 다시 사람들의 보증 행위에 있을 수 있는 실수를 경고한
다. 잠 6:1-5, 11:15, 17:18, 27:13에도 이런 경고의 말씀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특
별히 6:1-5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여라. 이것은, 모든 보증 행위를 다 금하는 것이 아니고 경제적 부담의 실력이 없는 자의 모험적 보증 행위를 금하는 것이다. 부채를 갚을 힘도 없으면서 남의 돈을 많이 빌려서 큰 사업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보증행위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런 거액을 빌려올 때에 그것을 갚을 능력이 있는 것으로 장담하며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경제적 모험이다. 사람들이(특별히 신자들이) 경제적 모험을 하면 실패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런 모험은 내일 일을 인간의 힘으로 주장할 듯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무시함이다(약 4:13-17). 사실상 많은 신자들이 경제적 모험을 하다가 실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하나님께서는 옳지 않게 경영하는 사업에 축복하시지 않는다.
잠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
여기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함은, 그 취하였던 식물이 복이 되지 못하고
화(禍)가 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남을 속여서라도 수고하지 않고 갑자기 횡재(橫
財)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잠 21:6에 말하기
를,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고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칠 때에 실패하였는데, 그 원인은
아간의 도둑 행위 때문이었다(수 7:1). 아간의 그 악행은 그 자신과 온 이스라엘에 화
가 되었다(수 7:21-24). 게하시도 엘리사를 속이고 나아만에게서 예물을 취하였는데
그것이 그에게 큰 화근이 되었다(왕하 5:2027). 동양 옛글에도 말하기를, "아무 까닭
없이 천금을 얻으면 큰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큰 화가 있으리라"(無故而得千
金 不有大福 必有大禍)고 하였다(明心寶鑑, 省心篇, 71). 이것은, 인류의 경험에서 나
온 말로써 잠언과 같이 권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일반 은총에 의하여 경험으로 깨달은 옳은 말이다.
잠 20:18
무릇 경영은 의론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 잠 11:14,
15:22, 24:6 참조. 이 말씀은, 인류가 전쟁을 하려면 신중히 해야 된다는 것이다. 지
모(智謀)가 없이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다. 눅 14:31-32
참조. 인류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양식(良識)에 의하여서도 어느 정도 이런 지혜를 가
진다. 옛날부터 유명한 동양의 손 무자(孫武子)의 병법(兵法)에도 말하기를, "전쟁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다. 국민의 생사(生死)와 국가의 존망(存亡)의 문제가 달려있다.
신중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兵者國之大事 死生之地存亡之道不可不察也)라고 하였
고(始計篇, 1), 또 말하기를, "그러므로 최상의 전쟁 방법은 적의 계획을 분쇄하는 것
이다"(故上兵伐謀)라고 하였다(始計篇, 2). 손 무자의 이와 같은 말은, 물론 전쟁에는
계략(計略)이 첫째라는 뜻이다.
우리 본문의 말씀은, 이 세상 국가들의 전쟁보다 특별히 영전(靈戰)에 대하여 말한
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일종의 전쟁이다. 그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
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다(엡 6:10-18). 이 싸움은 잠시도 휴전(休戰)이 없다. 이 전쟁
에 있어서 모사(謀士)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사 9:6). 그가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시는 계획은, 우리로 하여금 전신 갑주를 입도록 하신 것이다. 엡 6:14-17에 대한
나의 주석(바울 서신 주석)을 참조하여라.
잠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
니라 - 딤전 5:13 참조. 여개 이른바 "한담하는 자"란 말은, 남의 말을 옮겨 전하는
자를 가리킨다. 물론 그 전하는 말은 자타에게 유익이 없는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간붙이며, 헐뜯으며, 또 사람들의 은밀한 계획을 사전에 탄로시켜 실패케 하는 등
여러가지로 남을 해롭게 함이다. 이렇게 말에 조심하지 않는 그를 가리켜 "입술을 벌
린 자"(* )라고 하였다. 그것은 "입술을 늘 열어 놓고 있는 자"란 뜻
이니, 곧 말이 많은 자를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말에 부주의하기 때문에 말을 사실대
로(진리대로)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말에는 과장, 거짓, 일방적 표현
(一方的表現)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은 그런 사람을 "사귀지 말라"고 한다.
잘못 전하는 말이 위태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경험으로도 잘 아는 사실이다. 영적
감동으로 된 성경의 잠언의 권위에는 미치지 못하나 동양의 옛 글에도 말하기를, "입
과 혀는 화(禍)와 근심의 근본이며, 몸을 망치는 도끼와 같은 것이니 말을 삼가야 한
다"(口舌者禍患之門滅身之斧也)라고 하였고(明心寶鑑, 信語篇, 3). 또 말하기를, "사
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시와 같다"(傷人之語利始荊棘)라고 하였다(明心寶鑑, 信語
篇, 4).
잠 20:20,21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 이 두 귀절 말씀은, 불량자가 재
산 문제로 그 부모를 거스려 거역함에 대하여 말한다. 불량자들은 주로 금전 문제로
가정에서 분쟁을 일으킨다. 그들은 책임 이행은 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권리만 강요하
며, 순종하려 하지는 않고 덮어놓고 자유를 행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모와 충돌하
며, 심지어 악담과 저주도 사용한다. 그것은 사랑(부모의 사랑)을 미움으로 갚는 가슴
아픈 일이며, 배은망덕의 절통한 죄악이다. 하나님은, 이런 죄악을 극도로 미워하시기
때문에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구약 시대 이스라엘)에는 저런 불량자를 극형(極
刑)에 처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출 21:15). 신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만 교회
를 다스리시는 것인만큼 불량자들에 대한 취급이 달라졌다. 그러나 불효의 죄는 전과
다름 없이 하나님 앞에 극히 가증하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불량자
들은 멸망하게 된다.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는 말씀이 그 뜻이다. "유암"은 어
두움을 가리키는데, 빛나지 못하고 어두운 폐허와 같음을 의미한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곧, 불량자가 부모를
거역하고 일찌기 유산(遺産)을 강요하여 받으나 그것으로써 복되게 살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 있어서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반역 행위로 일시 나라를 빼앗았던
압살롬과 아도니야를 실례로 들었다(왕상 1:5-9, 2:25; 삼하 15:10, 18:9-17). 그들은
마침내 죽임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탕자의 비유를 들 수도 있다(눅 15:11-16). 그
런데 이런 반역자도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눅
15:17-32).
잠 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 이것
은 복수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벌써 내 편에서 해를 받은 경우에는 보복하지 말아야
된다. 그 이유는, (1)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할 바가 아
니기 때문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더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마 5:43-48; 롬
6:27-28). (2) 원수를 갚아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임(롬 12:19-21). (3) 우리
가 억울한 것을 보복하려다가 과도한 폐단을 연출하기 때문임. 우리는 공정하게 보복
할 수 있는 의롭고 능한 재판장이 아니다. (4)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이 악을 방지시키
는 귀한 방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임. (5) 원수를 갚지 아니하므로 그 원수를
내 친구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임. 잠 16:7 참조. (6) 보복하는 행동을 하는 자는 하
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기 때문임. 매튜 헨리(Mathew Henry)는 말하기를, "원수의 모
욕을 유순으로 받으면, 마치 던져진 돌이 솜 무더기에 떨어짐과 같이 된다."라고 하였
다. 그런 경우에 그 원수가 감화를 받거나 혹은 권태를 느껴서 그 악행을 그만두는 적
도 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직함으로 원망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을지니라"(以直報
怨 以德報德)라고 하였는데(論語, 朝鮮株式會社發行, p.21), 그것은 원수를 공의(公
義)로 갚으라는 의미이다. 그는, 참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사람이 사람
을 대하는 관계가 일대일(一對一)의 수준을 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
독교 성경은 하나님 중심한 윤리를 가르친다. 곧,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한다(창 1:26). 그러므로 신자는 그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고차원(高次
元)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례 19:18; 마 5:43-48; 롬 12:17-20 참조.
잠 20:23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
이니라 - 앞에 있는 10 절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이 말씀이 여기에 다시 나오
는 목적은 그것을 역설(力說)하려는 것이다.
잠 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
여기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主權)과 인간의 의존성(依存性)을 말해준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재자(主宰者)인 듯이 행할 수 없다. 그의 목적대로 일
들이 모두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경영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과 다
르게 그 사람의 걸음을 귀결시키시는 때도 있다. 부릿지스(Ch. Bridges)는 이 점에 있
어서 몇 가지 실례를 들었다. 곧, (1) 리브가는 물을 길러 나갔었으나, 하나님은 그
기회를 이용하시어 아브라함의 종을 만나게 하셨음(창 24:15-27). (2) 바로의 딸은 목
욕하기 위하여 나일강에 나왔었으나, 하나님은 그 때를 어린 모세의 구출되는 기회로
사용하였음(출 2:1-5). (3) 바벧탑을 쌓던 자들은 자기들의 분산(分散)을 막기 위하여
그것을 쌓았으나, 하나님은 그 기회에 그들을 흩어지도록 역사하셨다(창 11:4-9)(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358).
초대 교회의 원수들이 기독교를 말살시키려고 신자들을 핍박하였으나(행 6:8-8:3),
하나님은 그 핍박을 통하여 신자들을 각국으로 흩어지게 하여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는
기회로 삼으셨다(행 8:4). 그러므로 신자는 무슨 일을 경영하든지 하나님의 인도를 간
절히 구하며 신중히 시작해야 된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그 일을 이루어가면서도 자기
의 업적을 자랑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결론적 성취를 바라보아야 한다. 욥
23:14-15; 시 23:1-6, 37:23-24; 잠 16:1, 2-4, 9, 20, 20:24 참조.
잠 20:25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 곧, 사람이 일단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선언한 뒤에 그 서원을 실행하지 않고
다시 자기가 그것을 회수하려고 탐구하면, 그는 화(禍)를 받는다는 뜻이다. 여기 이른
바 "살핀다"는 말(* )은 탐구한다는 뜻이다. 전도서에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고 하였고(전 5:2), 또 말하기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
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다(전 5:5). 신자들은 신앙 생활에 있
어서 무슨 결정을 하든지 진실하게 지켜야 한다. 시 15:4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라고 하였다. 야곱은 벧엘에서 서원하기를, 자기가 밧단
아람에 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벧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였
다. 그런데 후에 그가 그 서원대로 실행하지 않았으므로 화(禍)를 받았다(창 34장).
신자들은 기도할 때에도 함부로 말하는 나쁜 습성이 있다. 오늘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구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언행이 일치하게 그것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
들이 구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그 순간 뿐이도, 다른 때에는 그 기도의 내용과 아주 배
치(背馳)되는 행동을 기탄없이 행한다. 그것도 하나님을 농락하는 죄악이다(갈 6:7).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함에 있어서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야 되며, 또 그런 간
절한 기원을 일상 생활로도 나타내야 된다. 미국의 유명한 기도의 사람 하이드(Hyde)
는 기도할 때에 극히 주의하는 의미에서 말을 서서히 하였다. 쵭맨(Chapman)박사의 증
언에 의하면, 한 번은 그로 더불어 기도하려고 함께 꿇어 앉았는데 그는 약 5분 동안
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오! 하나님!"하고 부르짖은 후 다시 5분쯤 지난 다음에야 기도
를 계속하였는데, 그 기도가 그의 중심에서부터 흘러나왔다고 한다.
잠 20:26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 - "악인을 키
질한다" 함은 그들을 의인들 사이에서 갈라낸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의인인체 하고 무
죄한 자들 가운데 잘 숨는다. 하나님을 아는 왕(지혜로운 왕)은, 초인간적(超人間的)
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그 나라 사회에서 악인들을 명확
히 찾아낸다. 이런 왕은 메시야의 예표가 될 만큼 이상적 통치다(다윗과 솔로몬)이다.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 이것은, 그가 그 악인들을 처치한다는 뜻이다. 이런
왕은 다윗과 솔로몬 같은 왕으로서 메시야의 예표이다. 이런 심판은 메시야(그리스도)
역사에서 완전한 성취를 본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죽정이는 꺼지지 않
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였다(마 3:12).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인류의 죄악을 처분
하시는 것이다. 그가 속죄의 희생으로 그들의 죄악을 처분하실 뿐(요 1:29) 아니라 심
판주로서 죄악을 멸절시키신다(계 19:19-21). 오직 그가 세상과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신 승리자이시다(요 16:32; 골 2:13-15; 계 1:18, 17:14).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으로 그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있으므로 그의 승리에 참여한다(계 7:14).
잠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 빌데브얼
(Wildeboer)은 말하기를, "영혼이란 말(* )은 생기를 의미한다(창 2:7). 하나
님께서 친히 그것을 인간에게 넣어 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이 일반 다른 동물들의
호흡과는 다르다. 델리취(Delitzsch)는 그것을 가리켜 자아 의식의 능력이라고 하였
다."-의역(Das Tier hat auch eine * Gen. 7:22, aber nicht so direkt von
Jahwe der Mensch. Darumist sie beim Menschen mehr als ein animalisches
Lebensprincip, "Macht des Selbstbew usstseins")라고 하였다(K. Marti,
Hand-Commentar, V. Die Spr che, 1897, s. 60). 이것은 결국 영혼(* )과 같은
것이다.
"등불"이란 사람의 거듭난 영혼이 하나님을 앎으로 말미암아(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앎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바로 알게 되고, 또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
할 수 있게 됨을 가리킨다. 여기 기록된 "영혼"은 거듭나지 못한 자로 간주될 수 없
다. 그 이유는, 거듭나지 못한 자는 성경에서 어두움으로 비유되었기 때문이다(요
1:5).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신자들의 생활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의 어두움을 밝혀주고
자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이 빛이라"라고 하셨다.
(마 5:14). 그런데 우리가 이 빛을 그 목적대로 발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되 주님 한 분만을 참으로 사랑함이다. 곧, 우리 영혼의 눈이 밝아지
려면 우리가 하나님 제일주의의 단순한 신앙으로 살아야 된다. 마 6:21-24에 말하기
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
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
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시지 못할 것
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
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잠 20: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
이 말씀도 이상적(理想的) 임금에 대하여 말한다. 이상적 임금은 인자와 진리로 그 정
권을 유지한다고 한다. "인다"(긍휼)만 있고 "진리"(약속을 지키는 진실성 곧 공의)가
없으면 배성이 문란하게 되고, 진리만 있고 인자가 없으면 너무 강경하여 백성이 감화
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양자(인자와 진리)는 정권 유지에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참으로 소유할 수 있는 왕은 사실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실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토록 우리를 인도하시며 거느리시고, 심지어 우
리들로 하여금 그와 함께 생명으로 왕 노릇하게 하신다(롬 5:17). 그는 만왕의 왕이시
고 만주의 주님이시다(계 19:16).
잠 20:29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 "젊은 자"는
무슨 일이나 힘있게 할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다. 그와 반면에 "늙은 자"는 오
래 동안 경험을 쌓은 것이 장점이다. "백발"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외부적인 센 머리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숙한 경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인류 사회에 있어
서 노소(老少)가 서로 합하여 일을 해야만 완전한 열매를 가져온다.
잠 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 이것
은 구타(毆打)를 말함보다 벌이나 징계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벌이나 징계는 결단코
난폭한 것으로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고 그 규율성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벌이나 징계를 시행함에 있어서 혈기나 악독은 금물인 것이다. 혈기나 악독은 규율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본문의 말하는 내용은, 악한 자에게 대하여 언제나 벌만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물론 필요한 벌을 그에게 실시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순종하지 않는 아이를 다스림에 있어서 벌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그를 사랑하여 주지는 않고 언제나 벌만 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벌은 그 아이로 하여금 반발을 일으키게 할 뿐이다. 잠 19:18의 주석을 참조하여라. 교회에서 시행하는 권징에 있어서도 사랑이 그 방법이요 그 목적이다(딤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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