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잠언 18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잠 18:1,2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
니라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란 말에 대한 부릿지스(Charles  Bridges)의  해석은
옳지 않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 수양과 기도를 위하여 복잡한 사회에서 떠나  한적
한 곳으로 찾아가는 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p.280).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서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는 자"(1절 하반)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유하며 기도하는  사람(1
절 상반)일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스스로 나뉘는 자"란 말의 히브리어(*     
  )가 자원하여 고집스러이 탈퇴하는 자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이  말씀은,
분리주의자가 단체에서 분리하여 지내기를 좋아함을 가리킨다. 그는 단체에서  갈리기
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소원을 고집하며 그것을 관철시키려고 진리를 버
린다.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란 말씀이 그 뜻이다. 이단(異端)  종
파를 만들어 내는 자들은 이런 자들이다. 그들은 고집스럽게도 스스로 지혜 있는 듯이
자처하나 실상은 미련하다(2절). 언제나 고집은 자기 자신과 사회에  해롭다.  그것은
진리 파수가 아니고 자아 주장(自我主張)이다. 성경에 이 죄악을 금하는 말씀이  종종
나온다(딛 1:7; 벧후 2:10).
선한 지도자들은 진리에 대하여는 어디까지나 순종하는 자들이다. 삼상 15:22에  순종
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진리 문제 아닌 일들에 대하여는  인화(人
和)를 위하여 잘 타협한다(고전 9:19-23).

 

  잠 18:3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 - 곧, 악인은 멸시와 능욕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착각하여  악을
행하는 것이 편리하고 쉬운 줄 알고 그 길로 간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들이 그것
때문에 멸시와 능욕을 당한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장면이다. 사람은 벌레나
짐승이 아닌고로 그런 멸시와 능욕 가운데서는 살 수 없다.
   인간은 무엇보다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는 양심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유교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가르쳐서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예의로써 백성을 제재하면 백성에게 부끄러워하는 심리가 배양되어 선해진
다"(制之以禮恥具格)라고 하였다(論語, 爲政 第二, 3). 이것은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정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보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 곧,  사람
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여준다. 이것은 영생의 길이다. 곧, 인간이
범죄한 후 즉시 받은 불행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었다(창 3:7-8). 그러나 하나님께
서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을  입혀주신다(롬  1:17,  3:23-24,  8:1,
13:14).

 

  잠 18:4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 여기 이른바 "명철한 사람"이란 말은 다른 데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
므로 그의 영감(靈感)을 받는 지도자를 가리킨다. 그런 지도자의 말은 계속적으로  하
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깊다는 뜻)이고, 생명이 있고 또 풍성하
다. "지혜의 샘"은 생명을 비유하고, "흐르는 내"와 같다고 함은 그 생명의  풍성함을
비유한다. 계속적으로 은혜 있고 생명 있는 설교자는 참으로 이런 복된 사람이다.  이
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요 7:38에 말씀하신 것 같이 된 자이다. 거기 말하기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샅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한다. 이렇게 신
자에게 생명의 말씀이 풍성해지는 원인은, 신자 자신의 재능에 있지 않고 그가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궁무궁진한 사실에 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의  행
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고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고 하였다(요 21:25). 예수님을 모신 자에게서는 생명의  말
씀이 샘 같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사야도 말하기를,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
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라고 하였다(사 50:4). 이  세상에
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업적으로만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자들이  많다.  그런
자들에게는 진리의 샘이 막힌다. 그들의 교훈이 교리적으로 옳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는 성령의 기름이 없고, 또 재료도 빈약하다.

 

  잠 18:5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잠 17:15, 26에도 나와 있다. 그 귀절의 해석들을 읽어 보아라.
사람들이 의인을 억울하게 재판할 실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나봇에게 대한  재
판(왕상 21:13), 바울에게 대한 처사(행 24:27), 예수님에게 대한 재판(막 15:15;  눅
23:24-25) 등으로 나타나 있다.
   공의로운 재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할 수 있다(삼하 23:3). 하나님은 공
의롭지 않은 재판을 극히 미워하신다. 출 23:3; 레 19:15; 신 1:17, 10:17, 16:19; 대
하 19:7; 시 82:2; 사 1:23; 렘 22:3; 겔 22:12; 암 5:12; 말 2:9 참조.

 

  잠 18:6-8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 여기서 잘못된 언사의  위험
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한다. (1)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킴(6절  상반).
어리석은 자는 남들로 하여금 화목하게 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이간을 붙인다. 그래서
그의 말의 결과는 다툼이다. 따라서 그 자신도 손해를 당한다(6절 하반). 남들이 평안
해야 나도 평안한 법이다. (2) 미련한 자의 입은 자기 자신을 망하게 함(7절). 부릿지
스(Charles Bridges)는 이 점에 대하여 말하기를, "미련한 자를 거꾸러지게 하려고 함
정을 팔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 자기의 함정을 파기 때문이다."라고 하
였다. (3) 말장이의 말은 별식과 같음(8절). 다시 말하면, 진실한 기독 신자들 이외의
사람들은 타락하여 남의 은밀한 허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한다. 그런  이야기는
그에게 맛있는 음식과 같이 섭취된다. 여기 "별식"이란 말(*             )은  "상처"
(맞은 상처)라고도 번역된다. 그렇다면 이 귀절은, 비평하는 말이 비평  받는  자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는 뜻이겠다.

 

  잠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 곧, 나태한 자와  탕자는
마찬가지란 말씀이다. 금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의 말대로 일하지 않은 고로  나중
에 그의 가졌던 한 달란트 마저 빼앗기고 말았다(마 25:26). 그리고 탕자는 그 부친에
게 받은 재산을 모두 없애버렸다(눅 15:16).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처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자를 많이 책망하신다. 그는 게으른 자를 악하다고 하신
다(마 25:26). 정통주의를 좋아하며 정통 노선에 속해 있는 교역자라  할지라도  정통
교리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는 게으른 자임을 면치 못한다. 입으로 "주여,  주여"하면
서 왜 주님의 말씀대로 믿어 순종하지는 않는가? 그런 자는 영적으로 파산을  당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
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다(마
7:21).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 믿는다는 말 자체가 우리
말로도 진실을 내포한 것이고, 헬라어(*            )도 역시 진실하다는 의미를 지녔
다. 사람이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
리의 어떤 행위의 공로(功勞)로 구원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
로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서만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이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반드
시 의로운 열매를 맺는다.

 

  잠 18;10,11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  "여호와의  이름"이란
말은 여호와의 성품과 권위를 말함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이름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
문에 이 사실을 아는 "의인"은 그 이름을 믿고 의지한다. 그가 여호와를 믿는  행동은
열성적이고 또 구체적이다. "그리로 달려간다"는 말씀이 그 뜻이다. 그의 신앙은 관념
론적(觀念論的)이 아니고 구체적이다. 그는 동적(動的)인 신앙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
의 이름을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 이름 앞에서는 그의 생명이 약동한다. 그와  반
면에 부자는, 자기를 보호하는 가장 강한 방편이 재물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수
전노(守錢奴)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인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자는 서로 대조적이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도는 만물을 내포하는 오묘이다. 선한 사람에게는 보배가
되고 악인에게는 보호가 된다"(道者萬物之奧也 善人之寶不善人之所保)라고  하였다(道
德經, 제62장). 노자의 이 말은, 의인과 악인이 심판 받는 일이 없이 양자(兩者)가 공
존 공영(共存共榮) 한다는 모순된 말이다. 이것은 "도"(道)가 모든 것(선인과 악인)의
원천이고 또 보호자란 유출설(流出設) 철학과 관념론(觀念論)이다. 그러나 여기  잠언
의 말씀에 하나님이 의인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관념론이 아니고  인격적  신(神)께서
그의 의지적(意志的) 행위에 의하여 의인을 보호하신다는 역사적 진술이다. 성경에 계
시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필연적으로 유출하신 이가 아니고, 모든 것을  의지적으로
창조하신 인격적 신이시다.

 

  잠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 신자들은 겸손
을 사수(死守)해야 된다. 겸손은 무엇인가? (1) 겸손이란, 사람이 자기의 존재의 자세
(姿勢)를 바로 가짐이다. 잠 15:33 참조. 사람은 자기의 피조물인 사실과 죄인인 사실
을 명심해야 되고, 따라서 창조주이시고 구속자이신 하나님만 믿어야 된다. 그것이 그
의 존재의 올바른 자세인 것이다. (2)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김이다(빌 2:3). 약
3:1에 말하기를,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준  자에게서  많이  찾으신다(눅  12:48).  미국의  초대  대통령   와싱톤(J.
Washington)은 그의 종이 인사할 때에 모자를 벗고 답례하였다고 한다. 그 때에  그를
방문 중이던 프랑스의 라파엣(Lafayette) 장군이 놀라서 그 이유를 물으니 그는  대답
하기를, "나는 그 사람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남을 높이는 자가 마침내 주님 앞에서 높아진다는 뜻이다. 참으로  그는
주님의 높여주심만을 바라본 성도였다.
   요한 번연(J. Bunyan)은 겸손의 덕을 골짜가(valley)로 비유하였다. 골짜기에 있는
것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또 나타내기를 좋아
한다. 그들은, 남들과 비교 의식을 가지고 곧잘 우월감을 가진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기를 나타내는 자는 자기를 몰락시키는 자이다. 약 4:6 참조.

 

  잠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는니라 -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과오를 범하기 쉽다. (1) 성급하게 말하므로 혈기를 내게
됨. 하나님의 말씀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하였다(약 1:19). 언제나 조급하게 하는 일에는 실수가 따른다. 잠 19:2 참조. (2) 오
해함. 변론 석상에서 누구든지 상대방을 오해하고 말하면 상대방이 설복되지  않는다.
(3) 교만함. 상대방의 사연을 들어보지도 않고 대답부터 하려고 하는 것은, 우선 상대
방을 무시하는 교만한 태도이다. 욥 12:2 참조. (4) 부끄러움을 당함. 남을  오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자기 단점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학자들 중에는, 애굽의 지혜문인 아멘 엠 오푸(Amen-em-ope)란 책에  이와  유사한
듯한 말이 있다고 하면서, 잠언이 애굽의 그 지혜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애굽 지
혜문이 이 점에 있어서 말한 것은, "그의 하는 일을 보기 전에 그와 대질하려고  뛰어
들지 말라"란 것이다(             . 22-      . 1). 그러나 이것이 잠 18:13과  같다
고 할 수 없다. 혹은 이 말이 어느 정도 유사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양자(兩者)의 관
련성을 증거할 이유는 전연 없다.  

 

  잠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 여기 이른바 "심령"이란 말(*      )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靈) 그 자체를
말함이다. 그 자체는 물질 세계를 초월하는 소질을 가진 것으로서 하나님을 모셨기 때
문에 질병도 이길 힘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만물의 정복
자로 세우셨다(창 1:28). 그런데 인류가 범죄했으므로 그 심령이 상하였고 또  무력하
여졌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체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게 되었다.
   여기 이른바 "상하였다"는 말(*        )은 낙심하다(dejected)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여기서 "심령이 상한다"는 것은 환란이나 질병이나 기타 난관 앞에서 낙심하거
무력해진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다. 그가 이제
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그 심령은 힘을 얻는다. 다윗이 환란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었고(삼상 30:6), 욥도 큰 재앙 중에서도 그런 힘을 얻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고(욥  1:21),  바울도  환란  가운데서  도리어  기뻐하였다(고후
12:10). 우리 본문은, 인간의 심령이 그 자율적 능력으로 환란과 곤란을 극복함에  대
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심령이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어서 정복력을 가짐에 대하여
말한다. 미국 사람들 중엔 요즈음 인간의 마음의 힘을 주장하는  참선(Zan)파  불교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보우웬(Croswell Bowen)은, 참선파 불교를 선전하려는 목
적으로 한 가지 예화를 그의 저술한 책(Zan Showed me the way)에 기록하였다. 그  내
용은 다음과 같다. 1923년에 동경 지역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때에 유럽에서 온 헤
리겔(Eugene Herrigel)이란 교수는 어느 호텔 5층에서 일본 사람과 같이 이야기  하던
중에 있었다. 지진으로 인하여 땅은 흔들흔들 하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현관으로
나와 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리겔 교수와 이야기하던 그 일본 사람은 도무지 당
황하는 기색도 없이 눈을 조금 감은 모습으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헤리겔 교수는  그
사람의 동요 없는 모습에 놀랐는데, 후에 알아 보니 그 사람은 참선(Zan)  불교도였었
다고 한다. 헤리겔 교수는 그 때부터 참선(Zan)에 흥미를 가지고 그 자신이 참선을 숭
상하게 되었다고 한다(Zan Showed me the Way, Bobbs-Merrill, 1960, p.14).  이  "참
선"은 하나님과는 관계 없이 사람의 심령 자체의 힘을 개발해 보려는 정신 집중의  기
술에 불과하다. 물론 사람이 그 정신을 집중하는 데 연단을 받으면  정신력이  강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이 정신력을 강하게 가짐으로 이 세상 생활에 있어서 어떤  편
리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그 사람의 구원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사람
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신앙함)이 구원 받는 방법이고, 구원은 하나님과 그리
스도에게만 있다. 이 구원은 받는 신자들에게는 저런 정신 집중 같은 것이 필요치  않
다.

 

  잠 18:15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  여기
"명철한 자"란 말은, "지혜로운 자"란 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말함
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제일되는 깨달음이다. 이 지혜가 있는 자는  지식(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더 얻어 장성하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1) 이 깨달음이 있는  자
는 겸손하게 되어 더욱 더 그와 같은 깨달음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
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하셨다(마  25:29).
(2)이 깨달음이 있는 자는 이 깨달음을 냉냉한 두뇌로 취급하지 않고 그의 마음(*    
) 곧, 심장으로 대표될 수 있는 애정의 기관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상반절의  "마음
'이란 말을 주목하여라. 사람이 마음, 곧 심장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행동이 거기에 따
른다. 심장은 뜨겁고 또 사랑의 불이 타는 기관이다. 그는 그의 실생활로 여호와를 경
외한다. 그는, 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니 금 다섯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주
인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장사한 결과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마 25:16)와 같다. 이 점
에 있어서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고 한 말씀도 중요하다. 이것도 순종의 의미를 가
진다. 성경에 사용된 바 듣는다는 말씀은 흔히 순종을 의미한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마음"과 "귀"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요하다. 롬  10:10에
말하기를, "사람이 마음(심장)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하였고, 또  롬  10:17에는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
였다. 마음으로 믿는다고 함은 관념으로만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인격의 동력이  되는
심장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것도  피상적으로  전도의
말소리를 들어보는 데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적(動的)인  청종(聽
從)에서 믿음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잠 18:16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
여기 "선물"이란 말의 히브리어(*      )는 뇌물이란 말(*      )과 아주 다르다.  부
릿지스(Charles Bridges)는, 이것이 단순히 존경의 예물(a tribute of respect)을  의
미한다고 하면서, 엘리에셀이 리브가의 가족에서 준 선물(창 24:53), 에서에게 준  야
곱의 예물(창 33:8-11), 다윗에게 준 아비가일의 예물(삼상 25:18-27) 등을 실례로 들
었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295).
   그러나 "선물"이란 말을 그렇게 해석함보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곧, 누가 남에게 선물을 주되 상대방에게서 아무런 보부도  기대하지  않고
순전히 존경의 동기, 혹은 사랑의 동기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존경하여 많이 대접한 결과로 후히 갚음을 받았고(왕하 4:8-13, 14-17), 겐그레아  교
회의 뵈뵈는 성도들을 사랑하여 많이 대접하엿는데 그것도 후에 그에게  크게  갚음이
되었다(롬 16:1-2).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자는 마침내 후하게 갚음을  받는다.  전
11:1에 말하기를,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
였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다(행
20:35).

 

  잠 18:17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 이 말씀은  다음
과 같이 개역되어야 한다. 곧, "먼저 나오는 사람이 그의 변호에 옳으나 다른  사람이
와서 그를 철저히 심사하느니라"라고 (Keil & Delitxsch). 이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옳은 것 같이 생각하나 후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면 그렇지 못한 것이 드러난다
는 것이다. 곧,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단점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사람에게
는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중요시 하는 편견이 있어서 그는 자기의 잘 한 것은 과대  평
가하고, 자기의 허물은 과소 평가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바로 처신해야 된다. (1) 신자는 억울함을 당한 경
우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직도 부족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의롭게 여기지 말 것. 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
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욥 9:2-3).  신자는
혹시 부득이한 경우에 필요한 자기 변명을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
거나 위주로 할 것은 아니다. 우리 본문의 "먼저 오는 사람"이란 말(*            )은
자기 변호를 위해서 선두에 서는 (그것을 위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가  실패하
리라는 의미의 말씀이 그 하반절에 나온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인정하심을 받
기 위하여 고요히 살아야 된다. (2) 신자는 자기의 인격이나 행위 문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냉정한 비판을 공평하게 다룰 것. 어떤 때에는 나 자신에 대한 남들의  비판
이 정당하다. 그들의 비평 때문에 나 자신이 겸손해지고, 또 고칠 것을 고친다면 도리
어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잠28:13). (3) 진리 문제에 대하여 피차 변론하는  마
당에서도 신자는 자기의 아는 것을 너무 성급하게 내세우지 말 것. 그 문제에  대하여
남들의 깨달은 것을 먼저 들어봄이 지혜롭다. 내가 그것을 들어봄으로 나의 무식을 고
치고, 또 이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이 내 마음 속에 새삼 생길  수도  있
다.


  잠 18:18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 -  잠  16:33
해석 참조. 제비 뽑는 행위는, 무슨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는 자들만이 취하는 것
이다. 여기 관설된 두 편은 강자(强者)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법정에 가서
그 문제를 다루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양측이 제비 뽑는 결과에 의하여 중심에
서부터 다툼을 종식(終熄) 시킨다. 그러므로 이들의 심령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합
당하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제비 뽑은 결과로  차지하게  될
분깃은 어떤 것(혹은 不利한 분깃)이라 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벌써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이 복된  마음이기  때문이
다. 그들은, "강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힘의 대결을 원치 않고 하나님의  뜻
을 원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순종하기를 원한다.  이같이 한 것은, 구약 시
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방법들 중 하나였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완전한 성경을 가졌으니 만큼, 그들은 무슨 일에나 성경  말
씀대로 기쁘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그 이유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 처사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니,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수 없다. 번연(John Bunyan)은, 성경의 한 귀절 말씀 어
기는 것을 많은 군대가 쳐 들어오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잠 18:19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
성 문빗장 같으니라 - 곧, 가깝던 사이가 어떤 충돌로 상처를 받으면  화해의  성립이
어렵다는 것이다.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실례를 들었
다. 곧, 영국 민족 안에 있어서 '욕'(York)이란 가벌(家閥)과  '랑카스터'(Lancaster)
란 가벌이 대립되어 오랫동안 투쟁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끼리 서로 다
투기 시작하면 그 사이가 오래 동안 멀어짐도 이와 같은 것이겠다.
   잠언 저자가 이와 같은 끈덕진 대립을 정당시 함이 아니고 그것을 탄식거리로 말하
는 것 뿐이다.  사람들이 가까운 사이에서 상처를 받았으면 서로 가깝던 관계를  기억
하고 화목을 힘써야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멀어지는 것은 역시  타락된
인류의 근성이다. 그들은 왜 한 때의 실수로 된 충돌을 영구히 기억하는가? 또한 그것
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보복 행동을 평생 취하는가? 이와 같은 행동은 신
앙을 해롭게 하는 악독한 행동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요셉을 본받아야 된다.  그는, 그의  형들에게서  죽이고자
하는 미움을 받았었고, 마침내 이스라엘 사람에게 팔리어 애굽땅에 가게 되었으며, 또
거기서 큰 고난을 당하였다(창 37:18-28, 39:1-20).  그러나 그 후에 그가 애굽의  총
리 대신이 되었을 때에 그는 그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였다(창
45:-8).

 

  잠 18:20,21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
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 이것은, 웅변술을 중요시 하는 의미로 하는  말씀이  아니
다. 성경은, 인간에게 어떤 기술을 장려하는 책이 아니고 참된 종교 윤리를 옳게 장려
하는 책이다. 이 귀절에서는 말의 형식보다 말의 내용이 중요시 된다. 곧, 말의  내용
이 진리라면 그것 때문에 그 말한 자에게 만족과 행복이 온다는 뜻이다. 특별히  복음
을 잘 가르치는 자는 그 말씀의 혜택으로 그 자신의 영육(靈肉)이 살게 된다(갈  6:6;
롬 1:11-12). 롬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
씀을 듣도록 그것을 전하는 자가 물질적 대접을 받음이 마땅하다(마 10:10).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그 자신이 자격자가 되어 가지고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자로서 삯을 받으려
는 동기로 일하면 그는 자격 없는 자이다.  그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마 10:8)을 순종하는 의미에서, 고난과 희생을 달게 받으며 하나님의  말
씀을 전파해야 된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돌
아올 것을 알고 전한다. 롬 1:14; 고전 9:16참조.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다렸나니." 이 말씀은 혀의 영향력이 큰 것을 지적한
다. 곧, 사람이 혀를 바로 사용하면 자타(自他)가 살게 되고, 그것을 잘못 쓰면  자타
가 망한다는 뜻이다. 혀를 바로 사용한 실례는 성경에 많이 있다. 특별히 화목케 하는
말은 아름다운 열매를 가져온다. 아비 가일이란 여자는 다윗의 격분한 마음을  안정시
켜 자기 집의 멸망을 면하였고(삼상 25:24-31), 바나바는 바울에게 대한 예루살렘  사
도들의 의혹을 풀어줌으로 위대한 사도(바울)를 도와서 복음을 세계에 전하도록  하였
다. 세속 역사상에 되어진 일은 여기서 참고로만 한 마디 하고 싶다. 그것은, 옛날 중
국의 열국 시대에 조(趙)나라 낙양 사람 소진(消盡)은 그 때에 여섯나라를 찾아  다니
며 연합하도록 설득시켜서 그 나라들이 진(秦) 나라의 침략을 면케 되었고, 자기 자신
은 여섯 나라의 재상(宰相)이 되었다. 혀는 이렇게 중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을 "세계"(世界)와 같이 큰 것으로 본다(약 3:6).
   그러므로 사람이 그 혀를 잘못 쓰면 죽기도 한다. 마12:36에 말하기를 "사람이  무
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엿다. 선지자  이
사야는 어느 다른 죄보다 입술의 불결을 중점적으로 회개하였고(사 6:5), 다윗은 말하
기를,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였다
(시 141:3).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혀를 지키기를 눈동자보다 더 잘 지켜야  한다
고 말하였다(Charles Bridges, 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 299).
   "혀를 쓰기 좋아한다"는 말씀(21절 하반)을,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뜻으
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Keil & Delitzsch). 그러나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고,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가 어떻게 그것을 쓰든지(선악 간)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말을 조심해야 된다.

 

  잠 18:22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 여기  "아내"란  말은
물론 좋은 아내를 의미한다(Keil    Delitzsch). 옛번역문들(LXX., Syr.,  Vulgate)은
"아내"란 말에 "좋은"이란 형용사를 붙여서 번역했다. 좋은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分福)이다. 분복은 사람마다 다르다. 마노아는 신앙이 자기보다  우수한  아내를
얻었으니, 그것이 그의 분복이다(삿 13:21-23). 그와 반면에 욥은 위대한  신앙가임에
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좋지 못하였다(욥 2:9-10).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사
람이 분복을 받는 여부도 그것을 받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며 힘써 구하는  여
부에 많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인생에게  복의  기관이다.
고기를 잡으려면 바다에 가야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그의  말씀을
지켜야 된다. 물론 그의 말씀을 지키게 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노력을 조장시킨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사람이 좋은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분복이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음(하반절)으로 성립된다고 말해야  된다.
이삭은 좋은 아내를 맞이하려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였다.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데
리고 돌아올 때에도 그는 들에서 기도하며 묵상하고 있었다(창 24:63-64).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좋은 아내를 맞이하려고 노력하는 자로서 먼저  명심
할 것은, 어떤 아내가 좋은 아내인지 아는 것이다. 좋은 아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이다(잠 31:29-30). 그렇다면 아내를 택하는 자는 신앙 표준으로 해야 될 것이다.  그
러므로 그는 불신자와 짝하지 말라는 말씀(고후 6:14)을 지켜서 믿음이  진실한  자를
택해야 된다. 창 6:1-3 참조. 우리 본문(18:22)에 있어서 부릿지스(Cgarles  Bridges)
는, 대하 18:1-2, 21:16에 근거하여, 세상 욕심을 따라 결혼한 집은 저주를  받는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현대의 기독 청년들도 아내를 택함에 있어서 여성의 육체미(肉體美)에만  치중하고
신앙과 덕의 어떠함에 대하여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이와  같은  풍조는
멸망을 초래하는 말세적 죄악인 것이다. 잠 31:10-31을 보면, 현숙한  여자의  미(美)
는,그의 노동미(勞動美)와(13-27), 신앙미(信仰美)인 것이다(30절 하반).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30절 하반).  그런데
도 불구하고 현대의 청년들은 육체미를 제일로 택한다. 이것은 거짓된 것과 헛된 것을
따르는 것이니, 허영주의자들의 행동이다.
   그런데 왜 좋은 아내는 복이 된다고 하는가? 그것은, (1) 그 여자가  평생토록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는 까닭이며(잠 31:12), (2) 가정에 있어서도  산업을  부흥시키는
까닭이며(잠 31:13-27), (3)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까닭이다(잠
31:30하반).

 

  잠 18:23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 사람이  가난
하면 겸손해지고, 또 필요한 것을 구함에 있어서 간절하여진다. 이것은 교만하고 냉혹
(冷酷)한 것보다 낫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 가깝다. 약 2:5에 말하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라
고 하였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마 11:5; 눅  4:18).  이것은,
그가 부자에게는 복음을 전하시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난한 자들이 인생의  기
갈(飢渴)을 느껴 간절히 문제 해결을 찾는 것인만큼 복음이 그들에게 잘 전파됨을  의
미한다. 가난한 것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잠 19:1에 말하기를,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고, 잠 28:6에는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하였고, 잠 16:8에는 "적은 소
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
류 사회에 가난한 자들이 있는 것이 반드시 모순된 일이라고 할 것은 아니다. 빈부(貧
富)가 섞여 사는 것도 하나님의 경륜이다(잠 22:2). 빈부의 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노
력한다는 공산주의는 유물주의(唯物主義)로 흘러가며 물질보다 귀한 인간의 자유를 말
살시킨다.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이것은, 가나한 자의 애걸(哀乞)에  대한  그의
냉혹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나사로의 요구에 대하여 눈떠보지 않은 교만한 부자의  태
도와 같은 것이다(눅 16:19-21). 많은 교육을 받아 보통으로는 예의가 고상한 듯한 자
도 가난한 자들의 요구에 대하여는 무례하고 무정하게 거절하는 일들이  세간에는  많
다. 그의 교양은,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위한  화장(化粧)에  불과한  것이다(Charles
Bridges, His good breeding is often only the polish of selfshness.- 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 p. 301). 부자가 저렇게 엄혹한 것은
실상 위험한 행위이다. 잠 14:31에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
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하였고, 잠 17:5에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
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하였고, 잠 21:13에는, "귀를 막아  가나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하였고,
잠 22:16에는, "이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
여질 뿐이니라"고 하였다.

 

  잠 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
친구를 많이 얻는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리한다.  사람이
자기 중심으로 친구를 많이 얻었을지라도 그런 친구들은 조만간 끊어질 때가 있다. 자
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실패하는 법이다. 누가 남의 개인적 유익을 위하여  끝
까지 친구로 남아 있으랴? 남을 친구로 사귀는 자는 그를 사랑하기  위하여  사귀어야
된다. 그것이 예수님의 정신이다. 그는 죄인을 친구로 삼으셨다(요 15:15). 이런 정신
으로 사귄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해질 수 있다. 공자가 친구 사귀는 일에 대하여  가르
친 일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 있는데, 손우(손해를 주는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한 것
이다. 그의 밀한 손우란 어떤 친구인가? 그는 말하기를, "세 가지 해로은 친구가 있는
데, 편벽된 친구, 아첨하면서 신의가 없는 친구, 말만 앞세우고 결실이  없는  친구이
다"(友便壁友善柔友便  )라고 했다(新譯四書 2, 論語, 玄岩社, 1970, p.207).  그러나
공자의 이 말은 이기주의(利己主義)의 우교(友交)를 장려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맹
자(孟子)도 말하기를,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상대방의 덕을 보고 사귐이다"(友也者友
基德也)라고 하였다(新譯四書 孟子, 현암사, 1970, p.199). 우교에 있어서 맹자의  교
훈도 내게 유익한 사람만 사귀라는 의미이다. 물론 공자나 맹자의 말이  우리의  현실
생활의 어떤 방면에 응용은 되지만 죄인을 친구로 삼는 위대하신 예수님의 도덕  수준
에는 미치지 못한다.
   죄인을 친구로 삼으시는 그리스도의 정신은 죄인들 중에서도 사실상 형제보다 친밀
한 친구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순교자 크랜머(Cranmer)는,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친구로 삼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였거니와 기독교 역사상에 그런 인물들이 많다.
원수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다(요 15:13-15; 롬 5:10). 이
도덕이 얼마나 고상한가? 혹시 사람들이 질문하기를, "신자로서 그  도덕의  수준대로 행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런데도 그런 고상한 도덕이 실제로 필요할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무식 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기독 신자들이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기를 힘쓰며, 또 그 노력의 열매도 거둔다. 또한 예수님의 표준대로 행하지 못한 자도 그가 진실한 신자라면, 적어도 그대로 실행하지 못함을 원통히 생각하는 죄감은 가진다. 그가 그런 죄감을 가짐도 기독교 윤리 실현의 위대한 열매이다. 그런 죄감 때문에 그가 겸손해지고, 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영적 태도를 취한다. 그의 이와 같은 인격은, 마음 속에서부터 남을 정죄하며 멸시하는 자에 비하여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다르다.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