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 이 귀절을 예루살렘이 '성산(聖山)에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내가 보기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이유는 관계 대명사가 남성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학식이 높은 사람들은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예루살렘이 유다의 수도이기는 하지만, '백성'이라는 말이 보충
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 억지 해석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유대인 주석가들은 이 첫 서두가 이 시 자체를 가리킨다고
다소 타당성 있는 주장을 한다. 그들에 따르면 "기지"는 이 시의 주제, 또는 주안점
(主眼點)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시의 주제가 산위에 자리잡고
있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도 매
우 명백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히브리인들은
선행사 없는 관계사를 매우 잘 사용한다. 이러한 화법(話法)은 전혀 무리한 것이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조금 뒤에 언급된 것을 볼 때 우리는 어느 곳에
든지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거하고 계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산'은 두 갈래의 계곡으로 갈라져 있는 산봉우리인
모리아산과 시온산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나친 억지해석이다. 그 나라는 산
악지대이므로 우리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주위에 산맥을 이루는 여러 개의 인접한 산을
안중(眼中)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산들로 둘러싸여 있
었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시 125:2). 그러므로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의
미는 하나님께서 여러 산들 중에서 그의 성을 세우시기 위하여 성산을 택하셨다는 것
이다. 이 주제를 나타내기 위해서 곧이어 "지존자가 친히.....세우리라"는 귀절이 나
온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다른 성들도 세우셨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성에 관계하고
계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4).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으로 기초가 놓이고 세워지기는 하였지만 세상 정부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예루살렘은
그의 특별한 성소, 즉 그의 다스리는 보좌로 세우셨다는 차이가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
라"(사 14:32)라고 이사야도 비슷한 표현을 하고 있다. 온 유대 나라가 하나님께 바쳐
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성읍들은 버리시고 오직 이 성만을 자신이
직접 다스리시는 곳으로 택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땅에 속
한 정치가 아니라 영적인 통치이다. 순수한 종교,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배, 거룩함
과 교리는 그 당시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87;2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 여기서 우리는 거룩한 성
의 모든 탁월함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값없는 선택에 달려 있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
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시편 78편 60절과 6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실로와 에브라임 지
파와 요셉의 장막은 싫어서 버리시고 사랑하시는 시온에 거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왜 다른 모든 곳을 제치고 한 곳을 택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값
어치 때문이 아닌 자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곳을 택하셨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왜 그토록 고귀하게 예루살렘을 구별해 놓으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그
곳을 심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이 한 마디로 그 대답이 충분한 것이다. 이곳에 하
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것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선택하신 목적은 그곳
에 참된 종교가 유지되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성도들의 단합이 유지되고 그
리스도께서 강림하신 이후부터는 이곳에서 온 지구상에 이 참 종교가 전파되도록 하시
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왜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찬송하기로 하나님께서
그 주인이 되시고 설립자와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곳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
다고 하는가를 설명해 준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는 그곳이 다른 곳보다 우월한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으로 돌리고 있다. 예루살렘을 "시온"이
라 하고, 온 성의 경내를 "문"이라고 한 것은 이중 제유법을 사용한 것이다.
87:3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 이 말씀의 문자 그
대로의 의미는 '네 안에 들리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도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선지
자가 의도하는 것, 아니 그보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목적을 알아야 한다. 온 백성들의 천하고 멸시를 당하고 또 사면에서 그들에게 무거운
압제를 가하여 공격하는 수많은 원수들, 자기들의 길에 놓여 있는 장애물들을 극복할
만큼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 적은 수효, 날마다 일어나는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변화,
점점 부패 속에 빠져들어 마침내는 절망에 빠지는 위험스러운 생활상에서부터 거룩한
성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절망이 성도들의 마음을
전복시키고 그들을 실패시키는 원인이 되지 못하도록 그들앞에는 주님께서 특별히 교
회의 미래 형편에 관해서 말씀하신 위로와 보장이 있다. 그들의 관심을 현재 사물에
대한 것에서 장차 교회가 누리게 될 놀라운 영광에 대한 소망과 더불어 그들에게 주시
기로 했던 언약에로 향하도록 한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감각이나 이
성의 눈으로 보기에는 마음을 매우 기쁘게 해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
지자는 말하자면 망대에 서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이 성취될 것을 끈기 있게 기다
리라는 말로 그들을 격려했다. 이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받았던 권면은 첫째로 그들이
옛날의 예언을 기억하여 지키고, 특별히 이사야 40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에까지 나타나
는 자들에게 눈길을 돌이켰던 점과 둘째로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파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한 점이었다. 이 귀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의 표준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 교회의 축복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사
실을 알 수가 있다.
내가 라합과 바벧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4-6).
87;4
내가 라합과 바벧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 "라합"의 이름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애굽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 의미는 이 귀절에서도 아
주 잘 부합된다. 이 말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그때까지는 단지 소망에 불과했던 교
회의 광대하게 널리 퍼짐에 대한 묘사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앞에서 죽어야 마땅할
원수요, 전적으로 이방인이라고 말했던 자들이 장차 친한 친구가 될 뿐만 아니라, 한
몸에 접붙임을 받아서 예루살렘 시민으로 간주될 것을 말하고 있다. 상반절은 '내가
애굽과 바벧론을 내집 가문에 있다 말하리라'는 뜻이고, 하반절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과 수없이 다투어 오던 블레셋과 두로와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이제는 마치 유대
인으로 태어난 자들처럼 그들과 진정한 화목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교회를 멸
시하는 자들까지도 사면에서 모여들고, 교회를 완전히 갈라 파괴시켜 버리려던 자들이
교회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깨달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
은 이 얼마나 교회의 영광스러운 우월성을 보여주는가! 그들 모두가 전에는 자랑스럽
게 여겼던 자기 나라를 자진해서 포기할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곳이 팔레스타인이나
에디오피아나 두로나 그 어느 곳이었든지 그들은 자기들이 거룩한 성의 시인임을 고백
할 것이다. 히브리 학자들은 이 귀절의 의미를 다른 나라에서는 정신적 재질이나 도덕
적으로 뛰어난 자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자들이 매우
많이 일어날 것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두로, 애굽, 구스 사
람이나 기타 사람들 가운데서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자가 거의 나
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만일 그들 중에서 이러한 자들이 일어난다면 몇 손가락으
로 꼽을 수 있는 몇 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시온에서는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
서 날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서는 그러한 자들이 많으리라는 것이다. 기독교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이방인이
었고 피차 계속 원수로 지내오던 자들이 지금은 왜 예루살렘의 시민들로 여겨지고 있
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자들을 믿음으로 연합시
켜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해주시는 사역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태어나셨
으므로 각 지체들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
다. 히브리 학자들의 해석을 지나친 억지 해석으로 반박할 필요조차도 없다. 또 어리
석은 야망에 따라 행동하던 유대인들은 이 귀절을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기독
교 학자들의 해석은 언뜻 보기에는 그 정교함이 그럴 듯하지만 그 확실성이 부족하다.
이 말씀은 어떤 민족이 되었든지 기꺼이 자기 나라를 포기하는 자들은 백한 백성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질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도 거기서 났다"는 말씀은 그들이
본래는 그 나라의 태생이 아니었으므로 날 때부터 그 나라에 속한 자는 아니었음에도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을 의미하고 있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지존자가 친
히 시온을 세우시리라"는 말씀은 '시온에 명할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를 다스리실 때 특별히 그의 말씀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
하고 있다.
87:5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 앞절에서 새로운 백성
들이 세상 여러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교회로 모이게 될 것이라고 한 것과 똑같은 내용
이 여기서도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면서 부터 이방인이던 사람들이 거룩
한 백성으로 간주되어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과 똑같은 것처럼 여겨질 것을 말하는 또
하나의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는 갈대아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
어오고, 구스, 블레셋, 두로 사람들은 교회의 자녀들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 뒤에 지
금은 분명하게 밝히기를 새 후손의 수효가 심히 많아서 얼마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성에 그 반수가 새로운 백성으로 채워져 큰 무리를 이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
야 선지자는 마침내 이 귀절에서 약속된 내용을 "잉태치 못하며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
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
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
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
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1-3),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
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60:4)고 했다. 또 다른 곳(44:5)에서도
이와 거의 비슷하거나 매우 흡사한 말씀을 볼 수 있다.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
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났나니"라는 말씀도 역시
애굽과 갈대아 사람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가 되어질 것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온이 본래 그들의 출생지가 아니었고 택함을 받아 거룩한 백성들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교회에 들어감으로써 다시 나고있기 때문에
이 표현 양식은 매우 적합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신부로 맞아들이실 때 그
조건은 그들이 자기의 백성과 자기 조상들의 집에 대해서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시 45:10),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쇠하지 아니할 씨로 거듭남으로써 교회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시작해야 한다(갈 4:19). 교회의 사역만이 우
리가 거듭나서 하늘 나라의 생명을 얻는 유일한 수단임에 틀림없다. 어떻든 우리는 사
도가 이 땅의 예루살렘-그 자체가 여자 노예로서 매인 자녀를 생산하기 때문에 똑같은
노예 상태에 있는-과 복음이 그 도구가 되기 때문에 자유로운 자녀를 생산하는 하늘의
예루살렘 사이에 차이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반절에서는 시온의 견고하고 지속적인 특징이 묘사되고 있다. 그 성이 특출하게
높은 지위로 오르는 것이 신속함에 비해서 그 번영은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번영은 이처럼 썩어지거나 변질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존
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다른 성들이 흔들리고 대대로
변천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 이유는 다른 성들은 변화하면서
세상을 맴돌고 한 보호자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진
새 예루살렘은 천지가 멸망할지라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한 것은 매우 반대적
인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87:6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 이 말씀은 모든 사람
들이 온 열성을 다해 시온의 백성 가운데 들어가기를 바라게 될 정도로 시온이 명성을
떨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최고의 영광을 베풀어 주시기로 하신 자기
백성들의 인구 조사를 하실 때 그들은 시온에 속한 사람들로 등록하시고 바벧론이나
다른 어떤 성에 속한 자들로 기록하시지 않는다는 말씀 속에는 크게 영광스러운 모습
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시온에서 한 사람의 평민으로 있는 것이 다른 곳에서 가장 높
은 지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우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이방 사람들
이 갑작스럽게 높아져서 그토록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단과 죄악의 노예가 된 자들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늘 예루살
렘의 시민권을 결단코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하신 사역으
로 자신이 기쁘게 여기는 자들을 본질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모든 자들과 구별하시
어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신다. 이 귀절은 유효적 소명(有效的 召命)에 대해 말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가써 자기 자녀들의 이름을 생
명책에 기록해 놓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령으로 중생하여 양자가 됨으
로써 하나님의 표적을 받을 때에라야 그들을 성도들의 목록 속에 등록하신다.
노력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7).
이 귀절의 의미는 그 간결성과 단어의 애매성 때문에 명확하지가 않다. "근원"이라
는 말이 여기서 비유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은 모든 논란의 대상을 초월한 것이다. 그러
나 주석가들간에는 이 비유에 대한 해석에 서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소망'을
가리킨다고 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감정'을, 또 다른 사람들은 '생각'을 가리킨다
고 한다. 단어의 관용적인 용법이 허락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 말을 '멜로디' 또는 '노
래'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히브리어의 용법
에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나는 이것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으로 '보
는 것'이라는 견해를 택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어근은 '눈(眼)'을 의미하기 때문
이다. 만일 시인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나는 항상
네게 눈을 고정시켜 놓고 진지하게 바라보리라'는 뜻이 될 것이다.
이제 상반절의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실상 이 말씀
은 단축형으로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는데, 심히 큰 기쁨의 근거를 가지고
계속해서 시온에서 살아 있은 음성뿐만이 아니라 악기로도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에서 시온의 영광스러운 회복에 관해서 말씀한 것의 확증
이다. 왜냐하면 큰 기쁨과 여러겹으로 이룬 화음이나 멜로디의 찬송은 시온에 임하게
될 축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심히 자유로
우신 손으로 그의 교회 위에 내려 주신 모든 축복들에 대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찬송과 노래로 하나님의 은총들에 대한 기억을 증거하고 그것들
에 대한 감사하는 지식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이라
고 번역한 히브리어 * (홀렐림)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음악소리에
맞춰 춤추는 자들'이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이 말
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들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의 연주가 계속될 것이고, 성도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듣고 이에 화답할 것이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순전하신 사랑르 교회에 베푸사 모든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하나님의 열심과 보살피심을 자신의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이와 똑같은 열심은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 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자데 붙을지로다"(시 137:5)라는 말씀에서도 사랑이 교회에 머물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흩어지게 했던 헛되고 막연한 것들에서 떠나 세상의 영광, 기쁨, 부귀,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적인 영광에서 만족을 누리며 오직 그 안에만 머물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