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 다윗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깊은 신앙을 증진시키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인 하나님의 교회에 나
아가는 자유를 빼앗긴 것을 탄식한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장막"이란 말씀을 하늘 나
라라고 풀이하면서 마치 다윗이 이 땅에서 순례자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탄식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들은 다윗이 그 당시에 당하고 있었던 괴로운 형편, 성소에 들
어가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한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다윗은 하
나님께서 거룩한 회중들을 헛되이 택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거룩한 자들은 이 세상에
서 살고 있는 한 그러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윗은 또 자신의 부
족함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고, 자신이 천사들의 완전에 도달하기에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기가 그러한 방편들, 즉 모든 진
실한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유익한 것을 빼앗기고 말았음을 탄식하는 데는 충분한 이
유가 있었다. 분명히 그의 관심은 외부적인 의식들이 지향하는 그 참된 목적을 향하고
있다 .다윗의 성품은 빈번히 성대한 의식을 곁들여 성회를 모으고 하나님을 섬기기에
열렬한 열심을 불태우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상은 겉치레에 불과한 거룩한 행실로
다만 하나님께 자기들이 해야 할 의무를 다 수행했다는 평판을 받은 데에만 관심을 두
고 있는 위선자들이 성품과 다르다. 다윗의 마음은 이러한 야비한 생각들이 고안해 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윗이 진심으로 바라던 목표는 자유롭게 성소에 나아가 진실
한 마음, 즉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말들은 감탄의 형
식으로 열렬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감정의 상태는 2절에서도 매우 충만하게
계속된다. 우리는 여기서 마치 도움을 받지 않은 자기들의 노력을 통해서 하늘에 오를
수 있는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께 제도적인 예배드리는 일을 고의적으로 게을리하는
사람들은 가엾게도 머리가 모자라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2절이 평상시 바라던 소망,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처음에 나오는 동
사 * (카사프)는 '열렬하게 바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다윗은 이 말에
만족하지 않고 덧붙이기를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 졌다고 말하
는데, 이 말은 우리가 극도의 정신적 감정에 빠져서 정신이 없을 때 탄식함으로 세월
을 보내는 것과 같은 뜻이다. 다윗은 단지 성전의 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제사장이 아니었으므로 바깥 뜰에서 더 둘어가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이
다. 우리가 잘아는 것같이 성소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된 것은 제사장들 뿐이었다. 또
2절 마지막에서 다윗은 이러한 갈망이 자신의 몽에까지 미쳤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입의 말과 눈의 이완과 손의 행위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그토록 간
절하게 성소에 나아가고자 했던 이유는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고자"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법궤의 장막처럼 심히 좁은 곳에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오히
려 자기에게 하늘까지 오를 층계가 없음을 깨닫고, 보이는 성소를 사다리로 사용해야
될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경건한 자들의 마음은 바로 이 성소를 통해서 하늘의 성소
까지 인도되기 때문이다. 우리 육체의 나태함이 하나님의 위엄이 있는 지극히 높은 곳
에 올라가려는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바라볼 때, 만일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내려
오시지 않거나 최소한 중재의 수단으로 그의 손을 뻗쳐 우리를 들어 올리시지 않는다
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부르신 것은 분명히 헛된 일일 것이다.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재비도
새끼 들..... -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하나의 계속되는 문장으로 보고, 제단 근처
에서 새들이 깃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쉿의 처지가 어렵
고 괴로운 상황이었는가를 보다 분명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바로
앞에 있는 "제단"이란 희브리어가 흔히 목적격과 함께 사용되는 전치사 * (엣)
을 가지는 상황으로 볼 때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전치사
는 때때로 감탄문에서 사용되기도 하므로 나는 선지자가 자기의 말 가운데서 하나님의
제단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부르짖는다고
확신하나.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더욱 가중시키려는 생각에서 자신을
참새와 제비에다 비유하여 미물의 새도 이곳 또는 다른 건물에 둥지를 트는데 아브라
함의 자녀들이 자기들에게 약속된 유업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하
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때때로 편안한 대접을 받기도 했으며, 불신자들 사이에
서도 어느 정도의 영광과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소에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이 온 세상에서 추방을 받은 모습처럼 보였다. 분
명히 우리의 삶에서 가져야 할 올바른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신을 섬길 때 요구하시는 방법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지혜롭게 제정해 놓으신 외부의 도움을 사용하는 것도 우리
에게는 역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갑자가 '만군의 여호와여 주
의 제단이여'라고 감탄을 터뜨린 이유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던 이 세상의 많은 처소를 가지고 있었던 그 당시 형편을 가리켜 말한 것이
라고 한다. 즉 다윗을 자기들의 지붕 아래에 손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기쁘게 여기는 많
은 사람들이 있으므로 다윗은 그토록 그심한 환난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에 대하여 다윗은 거룩한 성소에서 제외된 상태로 계속하는 것보다 차라리 온 세상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제단자들 떠나서는 아무곳에서도 기쁨
을 느낄 수 없었다. 요컨대 다윗에게는 거룩한 지경의 경계를 벗어나서 살 만한 곳이
없었다. 이것을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함으로써 암시하고
있다. 이 말씀을 의역하면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열심으로 내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고 나를 환대한다 할지라도 내가 거룩한 땅의 경계에서 제외된다고 하면, 주
는 나의 왕이시온데 세상에 사는 것이 나에게 무슨 기쁨이 되겠나이까? 또한 주는 나
의 하나님이시온데 내가 주를 위해 가져야 할 무슨 목적이 있나이까? 이제 주께서 나
를 쫓아내신다면 내 육체에 열락과 기쁨이 된다 할지라도 내게 제공되는 모든 피난처
와 환대를 멸시하지 않을 수 있으리이까?'라는 말이다.
84;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 여기서 시인은 성소의 정당하고 합법
적인 이용을 보다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을 부지런히 외부적인 의식에만
관심을 집중할 뿐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위선자들과 구분하고 있
다. 더우기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자들은 결코 믿음과 분리될 수 없는 찬
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 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
함으로써 영적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않고는 결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찬송을 하나님
께 드릴 수 없는 것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
이다(5-7).
저희가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것으로 샘이 되게 하며 비도 또한
저수지를 덮으리로다.
84:5
주께 힘을 얻고.....자는 복이 있나이다 -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하나님의 성소에
자유롭게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그곳에 나타남으로써 자기의 눈에 만
족을 누리고자 함이 아니라, 믿음의 장성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모든 마음을 다해 하
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특별한 유익을 얻는 것이요, 또 이것은 자기의 모든 교만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참으로 겸손하게 갖는 자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찾는 이 길을 자신에게 밝힘에 있어서 다윗이 목적하
는 것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힘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빌어 오고자 함
이다. 하반절의 "그 마음에.....대로가 있는 자"라고 한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하나
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을 걷는 사람은 복있는 자들이다. 이는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해가 되는 일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사 30:21)고 하신 말씀은 율법에 대해서 정확
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비록 잠간 동안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
나면 틀림없이 곁길로 나아가 오만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이 귀절의 내용을
제한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생활의 인도자로 삼고자 하는 것을 최고의 소망으로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자들은 복된 자라고 하는 사실을 이 귀절이 말한
다고 보는 것은 더욱 적절한 해석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단지 외면
적인 의식만으로는 만족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신의 장막에 부르
신 모든 자들을 직접 자신의 주관하에 다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의지하
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모든 소원과 재능을 다해서
전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서두를 것이다.
84: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 시인이 의도하는 것은 어떤 방
해물도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서부터 성소를 바라는 마음을
금지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표현을 통해 자기가 앞에서 말했던 것, 즉 날마
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어떠한 난관도 거룩한 자들의 열렬한 기대를 중단시킬 수 없으며, 그
들이 서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진실로 자기들의 나아가는
길에 메마르고 황무한 광야가 있을지라도 서로 모여 거룩한 모임을 갖고야 만다. 히브
리어 * (하바카)란 단어가 어미에 * (헤)라는 문자를 가지면 '눈물들'이
라는 의미가 되고, * (알렙)이라는 문자를 가지면 '뽕나무'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
을 어떤 사람들은 '눈물 골짜기'라고 번역하고, 다른 사람들은 '뽕나무 골짜기'라고
번역한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전자를 취하나, 나는 후자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곳이 거칠고 황무한 광야라서 그곳을 지나 여행할 때에는 많은
어려움, 특히 물이 부족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이 귀절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행할 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마실 수 있는 물이다. 다윗
은 이 귀절에서 여행자들이 여행을 계속하는 경우 자주 낙심을 시키는 물의 부족을 말
함으로써 비록 자기들의 길이 모래밭 길이요, 거친 골짜기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열심을 방해받지 않는 경건한 자들의 한결같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말씀 가운데는 하
나님을 섬김으로 얻는 유익을 구하려고 하는 수고하지 않는 자들의 나태한 행위에 대
한 책망이 들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안일함과 쾌락에 빠져 이러한 일에 전혀 관여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런 노력이나 희생을 하지 않고 손쉽게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조상들의 기업을 누릴 수 없다. 즉 가장 적은 희생도 드릴
수 없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듣는 자유와 성례에 참여하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이 나태한 심령은 나날의 생활을 통해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자기의 울타리 속에 갇혀
너무 뚱뚱해져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안락과 유익한 것들을 아무것도 누릴 수 없다. 심
지어 우리는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함께 모여 공적인 기도를 드리고 구원의 교리를 듣
거나 거룩한 신비에 동참해야 하는 자리에서도 어떤 자들은 꾸벅꾸벅 졸아 버리고, 어
떤 자들은 돈벌이만을 생각하며 세상의 일들에 관한 생각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가
하면 자기들의 쾌락에만 열중하는 자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먼 거리에 살고 있음
을 핑계로 이러한 종교적인 예배, 즉 구원의 방편에 참여하지않고, 자신의 세상적인
물질에 약간의 희생도 보지 않으려고 집에 남아 빈드\가거리는 자가 있다고 해도 이상
할 것이 없다. 외부적인 번영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자만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
고 하는 자, 참 마음의 종교를 가진 자,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그 길이 평탄
하고 즐거우며 기쁨의 그늘을 지날 때 뿐만 아니라 거칠고 황무한 광야를 지나가야만
하는 경우에도 자기들의 발걸음을 하나님의 성소를 향해 옮긴다고 다윗은 말한다. 이
러한 자들은 물이 없는 것으로 인해서 갈 길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끝없이 노력하
여 물탱크를 만드는 쪽을 택할 것이다.
84;7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 이 귀절에서도 같은 감정이 되풀이 되고
있다. 시온산은 이곳으로 언약궤가 옮겨진 이후에 율법의 명령을 따라 거룩한 모임을
갖는 장소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많은 무리가 시온에 올라와서 서로를 자극하
여 이러한 선한 일을 하게 되리라는 말이다. * (하일)이란 단어는 어떤 때는
'군대' 또는 '사람의 무리'라는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능력' 또는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이 보통 사용되는 경우와 가장 일치하는 번역은 "저
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라고 한 것으로서 성도들은 시온산에 올라갈 새로운
힘을 계속해서 간구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바라는 곳, 즉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곳에 다달을 때까지 성도들은 계속 지치거나 피곤해 하지 않고 자기들의 길을 걸어간
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만일 '군대'라는 의미로 본다면 그 의미는 다만 소수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무리들이 나아간다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옛날에
성전에서 자기 종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던 방법에 대해서는 다른 곳, 특히 시편 27편
4절과 5절에서 말한 바 있다. 하나님의 볼 수 있는 형상이 성전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
지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이었다. 순전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던 자들
은 경험을 통해서 이 방편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
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8-12).
84:8-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 다윗은 어리석고 무익하게 자
신의 욕망을 채움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번민을 겪는 세속적인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고 간구하는 것들을 매우 현명하게 하나님께로 향한다. 이 귀절에서 분명
해지는 것은 마치 겉으로는 놀라운 열심을 나타내 보이면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으
로 볼 때에는 한없는 마음이 차갑기만 한 수많은 위선자들의 경우처럼 오만한 자리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윗은 먼저 하나니께 자기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일반적
인 간구를 하고, 다음으로는 당시의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자신에게 매우 일어나기 쉬
운 시험을 예상하고 자신을 모든 참된 신자들과 더불어 교제하는 자로 간주하여 하나
님의 보호 아래 머물게 함으로써 그것을 물리친다. 다윗은 이것을 높은 특권을 표현하
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손을 통하여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왕으로 기름 부으신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삼상 16:12).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
을 살펴보옵소서"라는 말씀은 아주 강조형으로 사용되었는데, 많은 주석가들은 매우
하찮게 지나쳐 버리고 있다.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
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자 하는 소망에 용기를 얻고자 한
다. 다윗은 자기의 나라가 단지 보다더 훌륭한 나라의 그림자요, 모형이라는 것을 깨
닫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이 말씀 속에서 자기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그 모형으로
보여주는 중보자의 중재(中裁)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었다는 점이 분명
해진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개인적으로 볼 때에 나는
주께서 회복시켜 주시기에 무가치한 자이오나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유일하신 구
원자의 모형이 되게 하셨으므로 내게 이 축복을 베풀어 주소서'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임재하시
면 우리의 모든 죄악의 구름들을 흩으시고 제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는 것이
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 다윗은 여기에서 인
간이 왜 사는지도 모르는 채 단순히 자기 생명만이 연장되기를 바라는 자들과는 달리
자기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는 참된
종교가 밀려나는 사회 속의 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는 단 하루를 더 귀하게 여긴다고 증거한다. 성전의 성소나 지성소에 들어가
는 것이 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가 그
입구에까지 가는 것은 허락받았다고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그는 이 낮은 상태에 만족하
고 있다. 히브리어의 * (싸프)는 '문지방' 또는 '집의 들보'를 가리킨다. 다윗
이 성소에 부여하는 고귀함은 '악인의 장막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성전의 문
지기로 있는 것을 택하겠다'고 한 비교에 의해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말씀의 분
명한 의미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지위에 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평민의 평범한 자리에 내쫓기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겠다는 뜻이다. 진실로
이 얼마나 보기드문 신앙심 깊은 실례인가! 교회에서도 지위를 차지하려고 애를 쓰는
자는 많지만 야망이 인간의 마음 위에 군림하는 세력이란 이와 같은 것이어서 정말 평
범하고 특출하지 못한 지위에 있는 것으로 계속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
의 모든 사람들은 특출하게 되고자 하는 환상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자들
은 어떤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 한 결코 평안한 생각을 갖지 못한다.
84:11-12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 해에다 비유하여 나타내고자 하려는 개념은
태양이 그 빛으로 세상에 생기를 주고 자라게 하며 기쁨을 주는 것서첨, 하나님의 인
자하신 얼굴이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차게 함으로써 은혜의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그들은 살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방패"란 말씀은 생각지 못
했던 위험들로 인해서 위태하게 될 수 있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완
전한 안전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
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수많은 위험에 처했을 때에 자신의 능력을 개입시켜 우리를
보호해 주는 방패가 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위급한 형편에 적절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곧이어서 계속되고 있는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란 말씀은 이 세
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별된 사람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
으로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은혜와 영화의 차이점에 대해
서 너무 지나친 해석을 내릴까 조심하고 있다.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
께서 한 번 성도들을 자기의 은혜로 끌어들이신 이후에는 그들을 높은 영화에 이르게
하시고 그들에게 자기의 축복들로 부요케 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해석하
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해석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결코 다함도 없고 중단되
는 일도 없이 흘러나온다고 가르쳐주는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한 말씀으로 확증되어진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이든 하
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만이 우리에게서 뛰어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
다. 동시에 이 말씀은 하나님을 순전하게 섬기는 자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지는 특
별한 표적, 곧 그들의 생활은 엄격한 순결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고 다스려진다는 사
실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이 이 시를 끝맺으면서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한 말씀은 그
가 쫓겨나 있던 때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앞에서 주의 궁정에 거하는
자의 축복을 말했으므로 이제는 비록 자기가 잠간 동안 그 특권을 빼앗겼다 할지라도
전혀 비참한 처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멀리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봄으로써 생기는 위로 중의 가장 좋은 위로로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별히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좋은 본보기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들을 빼앗겼다면 마땅히 마음에 탄식과 슬픔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환난에 대한 감정이 결코 우리를 전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라도 믿음과 인내를 발휘하기만 하면 계속 행복을 유지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