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시편 0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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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  선지자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요셉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왜 유다를 언급하지 않고 요셉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 왕국, 즉 요셉의 가문이요, 후손들의 정부를 구분해서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특별한  선지자들을 보내주시고 회초리로 그들을 치신 이후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  '하나님이여 남은 자들을 주에게로 함께 모으소서'라는 간구를 드렸다는 것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는 그들이 자기들의 거짓된 경배를  신뢰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가리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라고 부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순전한 율법의 교훈에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고 있다. 자비의 보좌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증거로 이곳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가까이 하여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정해진 형식은 자기들 마음대로 뜻을  돌이킨 사람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보고자 기대한다면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훈계한다. 또한 이 귀절이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칭호는 인간들을 향하여 겸손하게 베풀어 주시는 놀라우신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에게  내려 오시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심과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이 땅  위에  보좌와 처소를 정하신 것을 말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앉으셨다고 말하거나,  하
늘들의 하늘에도 포함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어떤 장소에 감금되실 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왕상8:27). 그렇지만 사람의 이해의 유약성 때문에 하나님은 두  그룹(Cherubim) 사이에 계신 분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지 못하게 함이며, 따라서 하나님 가까이 나갈 때  의심이나 두려움으로 어쩔줄 몰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내가 앞에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한다고 말했던 사실, 즉 이 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한 법칙을 말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단과 벧엘 사이에 꾸며서 세운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서 돌이키도록 하고  있는 것과 모든 우상들을 배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참된 믿음의 빛으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 이 기도의 의미는 우리를 이전 상태로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앞절에서 하나님께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앞에서 주의 용력(勇力)을 내주시라고 기도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하사 자기들의 비참한 분산(分散)을 치료해 주시지 않는다면 이는 내쫓으시는 것과 같다고 타식을 터뜨린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돌이키시고"라는 말씀을 달리 해석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중생의 영을  부어 달라는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나 제한된 해석이다. 앞에서 본 대로 이 말씀은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기들을 의탁하여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다시 부어 달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좋다. 그들은 모든 환난들이 자기들 때문에 임했다는 것, 즉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자기들에게서 얼굴을 감추어 버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완전한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들이 말한  대로  한 번 주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치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틀림없이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의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로 섭리하셨기  때문에 자기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요, 모든 행사도 다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
        나이다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4-7).

80: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자기 백성들의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값없이 약속해 주시고, 또 매우 빈번하게 확증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귀절에서도 성도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에게 나아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분노하고 계신다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놀라움을  일으켜 주는 것으로 보여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도 하나님은 '노하시고 계시다'고  불평을 터뜨리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러한 종교적 예배를 배척하셨다고 한  말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면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사 65:24)라는  말씀에 기록된 약속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답변한다. 구원을 지연시킴으로써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하시는 귀머거리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자기들이 은혜의 보좌에 이르기까
지 당하는 견디기 힘든 장애물을 벗어 버리려는 생각이 합당치 못하다. 이 귀절은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믿음의 판단을 좇는 데 힘쓰도록 하여 그 판단이 심지어는 하늘에까지 이르러 그곳에 감추어져 있는 구원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다 효과적으로 그들의 마음의 짐을 풀어 주시기 위해서 그들이 겪고  있는 걱정, 근심, 괴로움, 두려움들을 자신에게 고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 이 귀절의 '하나님의 진노의 연기'라는 말씀 속에는 율법에 따라 제사드릴 때 사용되던  향불에 대한 함축적인 암시가 들어 있다. 향불의 연기는 공기를 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연기로 말미암아 하늘이 자욱해져서 자기들의 호소가  하나님께 다다를 수 없게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다.

80:5-7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 이러한 표현 양식들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들의 슬피이 막중함과 자기들의 환난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마치 '우리는 심히 슬픔으로 가득차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나이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그들은 다음 귀절에서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방법의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웃들과 더불어 다툼을 일으킨다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이웃들이 자기들과 싸워 이긴 후 승리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전리품을 서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투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처음 해석이 보다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백성들은 이웃들이 피차 선한 뜻으로 맺어져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수많은 원수를 이웃처럼 가졌다고 탄식한다. 6절에 나오는 "우리 원수들이 서 웃나이다"라는 말씀도 같은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다. 즉 그들이 자기들의 환난을 여담이나 조소거리로 삼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회개를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심판으로 돌린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가 그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선지자를 감동시켜  자기들이 가장 절망적인 처지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와 같은 형식의  기도를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소망과 담대함을 갖도록 해주며, 크나큰 우리의 죄책에 대한 의식에 짓눌려 기도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신다. 7절은 3절의 반복으로 이는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도적으로 사용하였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무 의미도 없이 공연하게 백성들에게 반복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서 바라고 계시는 것은 그의 백성들이 환난의 짐에 짓눌려 있을 때 용기를 얻도록  해주어서 담대히 일어나 무거운 짐이라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러한  돌보심의 근거는 종종 그들에게 나타났던 것인데, 이 시의 마지막 절에서 세 번째  반복되고 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8-13).

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 한 포도나무의 모습속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 후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셨던 단순한 은혜에 대한 찬송이 들어 있다. 또 여기엔 자기들이 들었던 구원의 소망에 대한 강력한 열망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기까지에는 하나님  앞에  아무도 감히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은총과 말씀으로 우리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들이고 있다. 지금 하나님 앞에 그의 관대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것들을 자신의 손으로 마치시기 전에는 떠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강하게  하리라는 것은 그의 말씀이 없이도 증명되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의  증거에  체험이 따를 때에는 우리에게 큰 용기가 된다. 이제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구속은 하나님의 언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이유는 비록 400년 전이라 할지언정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고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말씀의 요지는 들짐승들로 인해서 황무하게 되어진 포도나무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심히 조심스럽게 심어 가꾸시고 다시 고난을 당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불과 몇 날 또는 잠시 동안 계속되다가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택하셨을 때 그들이  영원토록  자기의 보호아래 두시기로 하셨다. "포도나무"라는 말씀은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갖는 지고한 생각으로 마치 포도나무가 다른 모든 소유물보다 뛰어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들을 자기 기업으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특별한 영예로 뛰어나게 하셨다는 의미가 있다. '땅' 또는 '대지(大地)를 깨끗게 하셨다'는  말씀은 앞에서 말한 것의 반복으로 택 다 백성이 있을 곳을 내주기  위하여  '이방인들이 내쫓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의미하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캐내 본다면 아마도 그들이 타락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정결하게 만들었다는  비유가  될 것이다. 즉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심으신 후에 그들을 향해 선한  남편과 같은 몫을 담당하사 모든 방법을 다해 어떻게 그들을 훈계, 보존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곧이어 계속되고 있는 '주께서 그 뿌리를 깊이 박히도록 하셨다'는 말씀은 처음부터 그렇게 심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 포도나무의 원산지에서 옮겨 심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라는 말이 따라 나오고 있다. 이것은 온 나라가 산에까지  사람들로  가득찰 정도로 그 백성의 수자가 증가되었다는 뜻이다. 이 포도나무의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과 비교되고 있다. 즉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백향목에 비교됨으로써 여전히 아브라
함의 씨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바다와 유브라데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거할 곳으로 약속해 주신 땅의 경계들이다.

80: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따게 하셨나이까 - 이 말씀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로 포도나무를 포기해 버리시어 들짐승들에게 뿌리가  뽑혀 버리도록 하는 것은 가장 모순으로 보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번번이 선지자들을 백성들에게 보내사 자기가 바라시는 것들을 말하며 경고하게 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토록 이상하고도 무서운 종류의 형벌을 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배은망덕함을 혐오스럽게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진실한 신자들이 하나님 편에 있는 분별된 자유로부터 용기를  얻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그들은 이처럼 뿌리가 뽑히는 가운데서도 최소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하신 일을 결코 속이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은혜로 자기들에게  축복을 베푸시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시 138:8). 백성들은 자신의 고칠 수 없는 고집 때문에 처참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수함이 없이 곧 자기의 포도나무를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소수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신다. 실로 이러한 용서를 비는 형식은 완전히 멸망받을 것으로 보이는 모든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진실로 겸손하게 낮추어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려는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소수만을 멸망 가운데서 구원하여 그들로부터 곧 새로운 포도나무가 싹이 트고 자라나도록 하신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교회가 당한 모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포도나무를 지키시는 분으로 보여주시는 경우와 한편으로 이 포도나무를  파괴하는 자들이 지나가는 모든 자들 뿐만 아니라 수풀의 돼지요  들짐승들로  묘사되는 경우에 대조되는 말에서 교회가 당한 모욕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내가  "상해하며"라
고 번역한 *        (키레셈)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채우자'라고  번역한다. 이러한 의미는 이 귀절이 말하려는 의미와 매우 잘 어울리고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의 일상적인 의미로는 주장되어질 수 없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4-19).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포도원과 주를 위해 힘있게 하신 가지 위에도
        방문하소서.

80:14-15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 이 말씀 속에는  설사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잠시 동안이나마 숨긴다 할지라도, 참으로 감각이나 이성의  눈으로 볼 때에 그가 우리에게서부터 멀어지시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시험에  넘어져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긍휼을 베풀어 주시리라는 소망의 확신을 갖게 하사 은혜에서 멀어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자들을 화목케  하시고 긍휼을 입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간주된 것은 특별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생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어떤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기 위한 논거로 삼아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자비롭게 대해 주심을 그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다. "하늘에서"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믿음을 가짐에 있어서 비록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떠나 멀리 계신다 할지라도 그곳에까지 믿음이 미치게 함에 있어 곤란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땅 위에서 구원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겠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15절 상반절에 나오는 *      라는 말에 대해서 나는 '한 장소를 준비했다'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동조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어  *     (기멜)이란 문자가 *    (카프)로 바뀐 것으로 보고, 이 말을 *        (가나), 즉 '한 동산'  또는 '포도원'이라고 번역하지만, 독자들 자신이 이것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 말은 앞의 것과 비슷한 비유가 분명한데, 자기 백성을 형통케 하여 그들을 보다 번성케 하는 하나님의 뛰어난 관대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손으로 심으신 포도나무 줄기도 역시 "주의 우편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

80;16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 백성들이 당한 환난들이 이제보다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주의 포도원이 들짐승에게 넘어져 황무하게 된 것보다 더  큰  환난은 그것이 불에 소실되고 뿌리가 뽑혀 완전히 멸망을 당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충(不忠)하게도 참된 종교를배반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교회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유쾌하지 못한 예를 통해서 우리의  배은망덕함에 대한 형벌과 특별히 이것이 오만과 결탁하여 하나님을 훼방하고 비방할 때에 대한 형벌이 얼마나 준엄한가 하는 경고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지엄하고 예리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서 은혜를 가져갈 수는 없다. 이러한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사방에서 빛나고, 그 놀라우신 방법으로 그의 교회를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품에 우리의 모든 슬픔을 내던져 버려야 한다는 것도 배우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자신의 긍휼하심이  우리에게  미침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신의 축복으로 점점 더  부요케  하여 우리의 사악함이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하는 많은 공격들에 분노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 자신이 일으켜 점점 더 멀고 넓고 확대되어 가는 불길을 끄시고 그중 어떤 사람 또는 교회의 남은 자를 구하신다고 하는 것은 특별하신 재 가운데서도 긍휼에 대한  증거이다.  좀더 적절히 말하면 자기 이름을 부르는 백성을 일으켜 주시는 것은 어디에 비길  바  없는 자비의 증거이다. 교회가 '망한 것'은 원수들의 세력과 무기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비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정당하게 채찍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서는 형벌을 면하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없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사 9:12)고 하신 말씀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에 대한 좋은  표적이었다.
 
80:17-19
 주의 우편에 있는 자.....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 여기에서 시인은 분명한 말로 자기가 포도원의 비유를 들어 표현했던 기도를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자기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를 보호하여 주시라고  한다. 이 말씀은 오직 왕만을 가리킨 것인지 또는 백성들도 포함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여로보암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는 하였지만 합법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다윗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으셨고 다윗의 대를  잇는 통치권과 세력권을 빼앗아 버렸다. 시편 78편 67절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왕위를 영원하신 작정에 따라 야곱의 예언에 분명히 밝혀져 있는 것처럼(창 49:10) 유다의 집에 주셨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백성들이 다윗의 집에 반기를 들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모시고 따른 것은 비열하고도  사악하게 육체를 갈라놓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경우에 이스라엘의 왕을  위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를 드렸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의 것들을 기억하도록 하자. 즉 그 나라가 비록 악한 출발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13장 11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분노하심으로 그들에게 왕을 주셨다 하더라도 그후에는 그 나라가 계속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이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은 백성들이 경솔하고도 악하게 저질렀던 폭동과 반역을  허락하셨음을 증명해 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왕이 이미 단절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고 세움을 입어 다윗의 후손들을  다스리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당시 배교성들의 갈라진  상태는  수습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완전히 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로보암의 주도 아래 열  지파가 갈라지도록 하신 것은 사실상 그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에 따라 세워진 기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교회의 지체를 포괄해서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주의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단수를 사용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택한 백성이 이 사람과 같이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의 자손'(갈 3:16)이라는 말을 크게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원하여 한곳에 모으셨을 때, 이스마엘과 에서와 다른  사람들은 흩어져 서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인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사 한 사람이 되도록 하신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하나됨은 머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이 귀절이 완전한 멸망 가운데 빠진 백성들의  대다수를
보호해 주시는 왕을 특별히 가리키고 있다는 견해를 쉽게 받아들인다. 여기에서도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자 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께서 이전에 자기들에게 부어 주셨던 은총들에게서만 그 논리와 신앙에 대한 근거를 찾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여 주께서 시작하신 것을 완성케 하시는 것은 주께 속해 있아오니 우리에게 주께서 주신 왕을 보호하여 주옵소서!'라는 뜻이다.
   18절에서 성도들은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닫고 크게 감사하여 찬송의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생활로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호 14:2)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에게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라는 말씀은 전 생활의 한결같고도 계속되는 과정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오 주여! 우리는 주께  계속 복종하오리니 우리가 생각하기에 소망이 없는 환경에 이를 때에도 할 것이요  갑작스러운 환난도 결코 우리를 주에게서 멀어지도록 하지 못할 것이니이다. 또 우리가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회복케 될 때에도 우리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마지막 절에서 세 번째로 반복되고 있는 말씀에 대해서 이젠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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